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62화
“흐음…….”
한나는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유디트를 요모조모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옷장으로 달려가 어떤 드레스 한 벌을 가져왔다.
“너는 눈이 금색이고 머리카락이 분홍색이니까 자칫하다가는 너무 화려해 보일 수도 있어. 우선 이거 입어 봐.”
유디트는 얼떨결에 한나가 건넨 옷을 받아 들었다. 아름다운 상아색 옷감으로 만들어진 간결한 디자인의 드레스.
기장도 길지 않아 딱 이런 가벼운 파티에 입고 나가면 좋을 만한 차림이었다.
잠시 눈을 끔벅거리며 그것을 바라보던 유디트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입어 보라니……?”
두 사람이 같은 옷을 공유하기엔 우선 체격부터가 맞지 않았다. 한나는 유디트보다 키가 훨씬 작았기 때문이다.
자칫하다간 치맛단이 무릎 위까지 올라올지도 몰랐기에 유디트가 미심쩍은 눈으로 한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왠지 쑥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너한테 그거 맞을걸? 한번 펼쳐 봐.”
한나는 큼, 하고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그 드레스 내 게 아니라 네 거야. 너를 위해 산 거거든.”
“뭐……?”
유디트는 드레스를 든 채로 돌처럼 몸을 굳혔다. 동공이 사정없이 떨리는 그녀를 향해, 한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맨날 너한테 얻어먹기만 했잖아. 나도 뭔가 선물을 주고 싶어서 말이야.”
“…….”
그제야 유디트는 그녀가 갑자기 옷 선물을 해 온 이유에 대해 납득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페델리안 부인에게 넉넉한 생활비를 지원받아 사정이 여유롭던 유디트였다.
그런 그녀가 회계학 보충반 수업을 진행하며 여유 자금이 더 늘어나게 되자, 남는 돈으로 비싸고 맛있는 디저트를 사 와서 한나와 종종 나누어 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한나가 티를 내지 않아서 몰랐는데 그게 마음에 걸렸었구나.
드레스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간식값보다는 비쌀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사양의 의미로 손을 내저었다.
“이런 비싼 드레스를 받을 수는 없어.”
“별로 비싸지도 않아. 게다가 어차피 지금은 환불 가능한 기간도 지나서 환불도 안 되는걸?”
“음, 그렇다면 차라리 네가 입으면-.”
“에이, 너랑 나랑 키 차이가 얼만데 그런 말을 해. 내가 입었다간 바닥에 질질 끌려서 우스꽝스럽기만 할 거야. 그러니까 네가 예쁘게 입어 줘.”
한나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유디트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한나에게 꼭 보답을 해 줘야지.
그렇게 속으로 다짐했다.
잠시 뒤, 유디트가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오자 한나가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예상은 했다지만, 정말 잘 어울려.”
“……그래?”
“응, 너무 예뻐!”
몸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이 간지러웠다. 유디트는 어색한 기분에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한나가 불쑥 유디트의 머리 쪽으로 팔을 뻗었다.
“머리를 풀지 말고 하나로 땋아서 낮게 말면 더 예쁠 것 같아.”
그렇게 말한 한나가 이내 솜씨 좋게 그녀의 머리를 틀어 올렸다. 결과물을 확인한 그녀가 두 눈을 반짝거리며 빛냈다.
“역시!”
한나는 손뼉까지 쳐 가면서 있는 힘껏 호들갑을 떨었다.
“너는 피부가 하얗고 목이 가느니까 쇄골을 드러내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머리를 틀어 올리니까 정말 잘 어울린다.”
유디트는 평소에 머리카락을 풀고 다닌 터라, 훤히 드러난 목덜미가 휑하게 느껴져 몹시 어색했다.
반면 한나는 자신이 선물한 옷이 무척 뿌듯했는지 유디트를 향해 끊임없이 칭찬 세례를 쏟아부었다.
“그리고 네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치마 밑단이 살랑거리니까 더 예뻐 보인다! 역시 키가 좀 크니까 이런 우아한 디자인이 잘 어울리는구나.”
“…….”
“이러다 나 체이스한테 혼나는 거 아니야? 약혼녀가 이렇게 이쁘면 다들 눈독 들일까 봐 엄청 긴장될 텐데.”
그치지 않는 칭찬에 자꾸 얼굴에 열이 몰렸다. 과한 칭찬을 듣는 것도 나름대로 고역이구나.
유디트의 두 눈이 생기를 잃었을 때쯤, 한나가 드디어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혹시 저번에 페델리안 부인에게 받았다던 그 진주 목걸이 어디 있어? 여기에 하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지친 유디트는 별말 없이 서랍 안에서 진주 목걸이를 꺼내 왔다.
그 목걸이까지 목에 차고서야 비로소 기나긴 치장의 막을 내릴 수 있었다.
* * *
여자 기숙사 밖은 자신의 파트너를 에스코트하러 온 남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정신없고 혼란스러운 와중, 한나가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기 있다!”
“저분이 네 파트너야?”
“응, 저번에 말한 적 있지? 우리랑 동급생이야.
한나의 파트너 쪽에서도 그녀를 발견하였는지 반갑게 팔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 소년은 재빨리 다가오더니 한나를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유디트는 그들을 보며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에스코트를 받던 한나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유디트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음, 유디트. 그런데 네 파트너는 어디 있어?”
파트너.
흐뭇했던 마음이 빠르게 식는 느낌이었다. 파티의 파트너로 아셀을 대동해야 한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라서였다.
만약 한나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놀랄까. 당연히 체이스와 함께 파티에 참석하는 줄로만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지금 한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유디트는 괜히 한나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글쎄.”
그러자 한나가 못 살겠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혹시, 체이스가 오늘 같은 날에도 늦는 건 아니겠지? 걘 수업도 맨날 땡땡이치더니 이런 중요한 때마저도 지각이라니, 파트너로서의 예의가 완전히 엉망이잖아.”
“…….”
“유디트! 그렇게 우울해하지 마. 내가 체이스를 만나면 꼭 뭐라고 해 줄게!”
상황을 곧이곧대로 설명할 수 없는 유디트는 어색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저 멀리 어떤 인물이 보였다.
인파들 속에 있지만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인물, 바로 아셀이었다.
그는 유디트를 발견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이 그를 흘끔흘끔 바라보다 이내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앞길을 비켜 주었다.
“고마워.”
그는 학생들을 향해 우아하게 감사를 표하곤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아셀의 차림새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머리를 뒤로 넘겨 단정한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곧게 뻗은 눈썹이 보이자 한층 더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돋보였다
“으응? 어쩐지 우리 쪽으로 오는 것 같다? 너에게 인사하려는 건가?”
한나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옆에서 속닥거렸지만, 유디트는 아셀을 본 순간부터 굳어 버렸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주책없이 뛰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통제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고장이 난 것인지도 몰랐다.
마침내 아셀이 유디트의 앞에 당도했다. 평소 풍기던 비누 향기가 아니라 조금 더 진한 향수 향기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아셀이 웃으면서 유디트의 앞으로 한쪽 팔을 내밀었다.
“유디트, 많이 기다렸지? 사람들이 다소 붐비는 바람에. 괜찮다면 이제 출발하자.”
“……엥?”
그의 말에 반응한 것은 유디트가 아니라 한나였다.
한나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마치 눈으로 ‘체이스는 어디 가고 아셀이 네 파트너가 된 거야?’라고 묻는 듯했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그런지 당장 묻기가 망설여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웃고 있는 아셀에게 잠시 시선을 주더니, 이내 표정을 굳히며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리고는 의아한 얼굴로 자신과 아셀을 번갈아 응시하고 있는 제 파트너를 데리고 서둘러 사라졌다.
아무리 친구라고는 해도 버젓이 약혼자를 놔두고 다른 남자와 파티에 참석하다니.
지금 이 상황을 한나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무리 고민해도 좋은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유디트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다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셀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 낸 그가 원망스러웠기 때문일까, 괜히 시비조로 말을 건네고 말았다.
“옷은 왜 그렇게 입었어?”
“안 어울려?”
평소 교복을 제외하면 늘 소탈하게 입고 다니던 아셀이었는데, 오늘은 모처럼 밝은 회색 정장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이 청회색 눈동자를 가진 그와 무척 잘 어울렸다.
솔직히 무척 근사했지만, 떨리는 심정을 감추기 위해 부러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별로야.”
그러자 아셀이 안타까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오랜만에 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 나름 신경 써 본 건데 아쉽네.”
“…….”
“그래도 넌 오늘 몰라보게 예쁘다.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려.”
일부러 비비 꼬인 말을 내뱉은 자신과는 다르게 그는 순수한 칭찬만을 건네 왔다. 얼굴이 또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미 한나에게 질리도록 들은 칭찬이었건만, 상대가 바뀌니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유디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어 나갔다. 어서 빨리 시끄러운 파티 홀에 도착하고 싶었다.
그래야지만 눈치 없이 쿵쿵 뛰는 제 심장 소리가 소란에 감춰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