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69화 (69/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69화

어쨌거나 성공적으로 수업을 마친 후, 식사 시간이 되자 다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이렇게 다 같이 밥을 먹는 거 상당히 오랜만인 것 같다?”

르데샤가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살펴보더니 그렇게 내뱉었다. 유디트도 르데샤의 말에 속으로 공감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이 식사 자리에는 유디트, 르데샤, 르데인, 체이스 네 명이 한꺼번에 앉아 있었다.

르데인은 저번의 오답 노트 사건 이후 서먹해져 한동안 함께 식사하지 않았었다.

또 체이스와의 사이가 어색해지면서부터는 르데샤와 단둘이서만 식사를 해 오곤 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이네.

유디트가 생경한 눈으로 르데인과 체이스를 살펴볼 때였다.

평소와 같이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체이스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주저 없이 물었다.

“왜, 이거 먹고 싶어?”

그러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스테이크를 마저 썰어 곧 유디트의 앞에 놓아주었다.

유디트는 어느새 제 앞에 불어나 있는 음식들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정신을 차렸다.

옛날에는 체이스가 이러는 게 그저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건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런 것조차 날 계속 신경 써 줬던 거였구나.

그걸 깨닫고 나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내 유디트가 포크를 들어 고기 조각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맛있다.”

“그래?”

“응, 네가 썰어 줘서 그런가 더 맛있네.”

체이스가 음식을 오물오물 씹는 그녀의 모습을 귀여운 듯 내려다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더 줄까?”

“됐어, 너도 먹어야지.”

바로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르데샤가 곧 소름이 돋는다는 듯이 제 팔을 쓸어내렸다.

“뭐야, 두 사람. 갑자기 왜 이렇게 다정해진 건데?”

네 사람이 함께하고 있는데 어째 저 둘만 동떨어져 있는 듯한 분위이지 않은가.

르데샤의 기억상 두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체이스가 치대고, 유디트는 밀어내곤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둘이 약혼한 사이라 해도 지금처럼 낯뜨거운 상황은 연출될 일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게 무슨 변화일까. 혹시 지난번 여름 파티 때 둘이 만나서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나.

르데샤가 고심하는 걸 지켜본 체이스가 이내 한쪽 입술만 비뚜름히 올리며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

“약혼한 사인데 이게 당연한 거지. 뭘 그리 놀라?”

평소 같았으면 르데샤는 그런 자신만만한 태도의 체이스를 어이없다는 듯 쏘아봐 주었겠지만, 옆에서 유디트가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통에 그럴 수도 없었다.

“맞아, 졸업하면 곧 결혼도 하게 될 텐데. 친하게 지낼수록 좋잖아.”

“쿨럭!”

그 말에 멍하니 음식을 씹던 르데인이 곧 기침을 터뜨렸다. 사레가 들린 건지 그가 연이어 입을 가린 채 캑캑거렸다.

그러더니 한참 후 좀 진정되었는지 그가 불만 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졸업 후 바로 결혼을 한다구요? 그건 너무 이르지 않아요?”

어딘지 모르게 울분을 토하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이에 공감한 르데샤는 눈치채지 못하고 황급히 맞장구치기 바빴다.

“맞아, 아무리 약혼을 했다지만 그러면 식까지 일 년도 안 남았다는 건데 너무 빠르잖아!”

솔직히 이번 학기에 유디트와 관계를 쌓아 제법 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한 참인데.

그런 유디트가 머잖아 결혼을 할 거란 사실이 르데샤는 믿겨지지 않았다.

“난 둘이 결혼하더래도 좀 나중이 될 줄 알았는데……. 결혼하면 별로 놀지도 못 할 거 아냐.”

르데샤가 서운해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유디트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한쪽 손으로 그녀의 손을 조용히 맞잡아 왔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당연히 알고 있는 줄만 알고.”

“이렇게 급하게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거야?”

“음, 애초에 그렇게 하기로 하고 약혼을 한 거라…….”

유디트가 그 말을 하더니 체이스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그리고 어차피 체이스가 이번 년도에 졸업을 못 하면 미뤄질 수도 있어서, 아직 확실하진 않아.”

“……!”

이번엔 체이스가 놀란 눈으로 유디트를 바라봤다.

이내 그가 억울하다는 얼굴이 되어 입술을 뻐끔거렸지만, 할 말이 없었는지 반박은 나오지 않았다.

곧 맞은편에서 르데인이 이해한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아,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있겠네요.”

대화를 지켜보던 르데샤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래? 체이스의 성적이 안 좋단 말은 들었지만…… 그럴 정도야?”

이 자리에서 그녀만 보충반에 참석하고 있지 않았기에 정확한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곧 대화 주제는 체이스의 처참한 성적과 관련한 내용으로 옮겨 갔다.

일행 중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수재에 가까웠기에, 체이스로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참을 그들이 체이스의 미래에 대해 의논하며 떠들고 있을 때,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에 르데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무슨 일인지 확인했다.

학생회 회의를 마친 건지 아셀 페델리안이 여러 친구들과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라, 학생회장이네.”

유디트도 소란이 일자마자 바로 시선을 주었기에 이미 그의 존재에 대해서는 의식하고 있었다.

곧 아셀과 그 옆의 친구들이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듯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유디트는 빠르게 고개를 떨구며 속으로 생각했다.

당당하게 굴어야 해. 이제 난 더는 아셀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거야.

그때였다.

양 무릎에 올려놓았던 손 위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놀란 유디트가 시선을 들자 체이스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제 손등을 감싸 오며,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모습에 홀린 듯 유디트가 한쪽 손을 그에게 내주자, 곧 그가 단단히 맞잡은 두 손을 보란 듯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어느새 아셀의 기척이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유디트가 고개를 드니, 아니나 다를까 그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에 유디트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마주 바라봤다. 곧 아셀의 시선이 유디트와 체이스가 굳게 맞잡고 있는 손으로 향했다.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두 사람이 손을 맞잡은 모습을 본 아셀의 표정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때, 그런 아셀의 뒤로 다른 일행이 다가와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셀, 저쪽에 앉자.”

“…….”

“아셀?”

“……아, 응.”

아셀이 이내 등을 돌리고 멀어져 갔다. 그리고 잠시 후, 유디트 일행과는 먼 곳에 학생회 무리가 자리를 잡는 것이 보였다.

이에 안심한 유디트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셀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유디트의 심장은 몹시 쿵쾅거렸다.

* * *

식사를 끝내고 함께 걸어 나오며 유디트가 체이스를 향해 말했다.

“아깐 고마웠어, 체이스.”

“뭘?”

“그냥, 아까 내 손잡아 줬던 거.”

“……별거 아닌데 뭐.”

“아냐, 옛날부터 많이 도와줬잖아. 제대로 말은 못 했지만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

그러자 체이스가 유디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집요한 시선에 유디트가 고개를 갸웃하는 찰나, 체이스가 말했다.

“그렇게 고마우면, 내 부탁 들어줄래?”

“……응? 뭔데?”

유디트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체이스가 빨개진 얼굴로 목을 가다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흠흠, 오늘 바쁘지 않으면 나랑 놀러 가는 거 어때?”

그 말에 유디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그녀라도 이게 데이트 신청이란 것은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유디트는 이내 오후에는 별다른 일정이 없다는 걸 상기해 냈다.

……그동안 체이스에게 신세 진 것도 많은데, 이 정도 부탁쯤이야.

고민을 마친 유디트가 이내 시원스레 대꾸했다.

“좋아.”

그녀의 수락에 체이스의 얼굴이 뛸 듯이 밝아졌다.

어디를 가야 할까.

고민하는 유디트와 달리, 체이스는 아카데미를 나온 순간부터 망설임 없이 어디론가 걸어갔다.

마치 데이트 장소를 미리 생각하고 온 것만 같은 추진력이었다.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데이트 약속은 방금 막 잡은 거니까.

어쨌든 체이스를 따라 좁은 골목길에 들어가자 한구석에는 작은 카페가 있었다. 체이스는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갈래?”

유디트는 허름한 외관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페인트칠은 다 벗겨져 나간 데다, 기울어 있는 간판과 뿌옇게 먼지가 쌓인 유리창.

낡아 보이는 가게는 조금 미심쩍었지만, 골목길 안으로 들어온 이상 구경할 만한 데라곤 여기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유디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가게 안으로 발을 디뎠다.

딸랑-.

“……우와.”

안으로 들어온 유디트는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조금 전의 허름한 외관과는 다르게 가게의 내부는 몹시 따뜻해 보였다.

아직 켜놓진 않았지만 들어가자마자 한쪽 벽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눈에 들어왔고, 바닥에는 양털로 된 러그가, 그 위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고풍스러운 테이블과 의자가 늘어서 있었다.

더욱이 벽난로 옆에는 근사한 그림들이 액자에 내걸려 있었는데, 가게 한쪽 구석에 놓인 이젤들을 보니 화실도 함께 운영하는 곳인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