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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다정하지 마세요-70화 (70/110)

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70화

유디트는 신이 나서 화실을 향해 달려갔다.

“체이스, 이쪽으로 와 봐. 여기서 그림도 그릴 수 있어.”

“그러게, 신기하다.”

체이스는 유디트의 말에 적절하게 맞장구치며 그녀의 곁에 섰다. 하지만 그때, 유디트는 미심쩍음을 느꼈다.

왜냐하면 말로는 신기하다고 했지만, 얼굴에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 카페에 있던 화실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던 사람 같잖아.

그렇지 않아도 체이스가 번화가 쪽이 아니라 인기척 없던 골목길 쪽으로 들어갔을 때부터 의아함을 느꼈던 유디트였다.

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좁히고 추궁했다.

“너, 이미 알고 있었지?”

“……응?”

“여기 카페의 존재 말이야.”

잠시 말이 없던 그가 큼, 헛기침을 했다.

“맞아, 알고 있었어.”

그의 순순한 대답에 유디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래? 그럼 너도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거야?”

체이스와 겹치는 취미는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공통점을 발견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아닌데, 너랑 함께 오고 싶어서 미리 알아봤어. 지난번에 보니까 네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게 뭐야…….”

예상치 못한 대답에 유디트는 어쩔 줄 모르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검을 잡는 사람들은 조금씩 거친 면이 있기 마련인데, 설마 체이스에게서 이런 섬세한 면모를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번에는 자신이 그를 즐겁게 해 주고 싶었는데 어쩐지 또 고마운 일이 늘어나 버리고 말았다.

자꾸만 몸집을 불려 오는 고마움에 대체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몰라 조금 막막할 지경이었다.

이걸 어떻게 보답한담.

그러던 중, 새 그림을 선물했을 때 그가 기뻐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체이스의 얼굴을 그려 선물해 줄까?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결론을 내린 유디트는 카운터로 다가갔다.

마침 안에서 쉬고 있던 주인이 그녀가 다가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겼다.

“주문하시겠어요?”

“네, 음료는…… 체이스, 넌 뭐 마실래?”

“네가 먼저 골라. 내가 데려왔으니 내가 살게.”

“무슨 소리야. 지난번에도 나한테 비싼 디저트 선물해 줬잖아. 오늘은 그냥 내가 사 주는 대로 먹어.”

잠시 티격태격 실랑이를 벌이다가, 체이스에게서 승리한 유디트가 다시 가게 주인을 향해 돌아섰다.

“음료는 이거 두 개로 주시고요. 그리고 혹시…… 저 안에 있는 화구 사용 가능할까요?”

“네, 캔버스 비용만 내시면 돼요.”

주인이 얼굴 가득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을 마치자마자 유디트는 체이스의 소맷자락을 잡고 화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한순간에 이젤 앞에 앉은 체이스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유디트가 들뜬 표정으로 제안했다.

“우리 서로를 그려 주기로 하자.”

“뭐? 나보고 너를 그리라고?”

체이스가 당황한 듯이 눈을 크게 떴지만, 유디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응, 서로 그려서 선물해 주는 거야.”

“…….”

체이스는 굳어진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함께 그림을 그리자는 유디트의 제안이 그에게는 다소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유디트는 꿋꿋이 의자 옆에 놓여 있던 붓을 들어 그에게 쥐여 주었다. 화들짝 놀란 체이스가 그제야 굳어졌던 몸을 풀었다.

“유디트, 너 정말 진심이야? 나 그림 같은 거 그려 본 적 없는데.”

“그러면 더 잘된 일이네. 이 기회에 한번 경험해 봐.”

체이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물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얼핏 본 체이스의 낯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뭔가 얼굴 한가득 미처 해결하지 못한 근심 걱정들이 가득한 양.

왜 저렇게 수심이 깊어 보일까. 혹시 그림에 자신이 많이 없어서 그런가?

속으로 추측하던 유디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때, 체이스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기껏 네가 돈까지 냈는데 캔버스를 망치면 어떡하지?”

“뭐야, 그것 때문에 그렇게 고민했던 거였어?”

유디트는 계속해서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체이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게 몇 번 반복되자 그도 결심이 섰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한번 그려 볼게.”

체이스가 결연한 얼굴로 붓을 감싸쥐었다.

쓱싹쓱싹-.

이윽고 화실 안은 붓이 스치는 소리로 가득 들어찼다.

* * *

몇 시간 뒤.

유디트는 충격을 받아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이게 나라고?”

그녀는 체이스가 그린 그림을 보곤 믿을 수 없어서 눈만 끔벅거렸다.

분명 서로를 그려 주기로 했던 것 같은데, 왜 체이스의 그림에는 괴생명체가 그려져 있을까?

그의 그림은 마치 다리가 여덟 개 달린 분홍색 문어 괴물 같았다. 체이스는 사색이 된 유디트의 눈치를 힐끔거리며 살폈다.

“내가 말했잖아, 나 그림 못 그린다고.”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체이스의 문어 괴물 그림을 쥔 유디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설마 체이스의 눈에는 내가 이렇게 보이는 걸까? 순식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유디트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그러는 와중, 체이스는 유디트가 그린 그림 쪽으로 다가가더니 감탄을 내뱉었다.

“와, 유디트.”

그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림 잘 그린단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 이거 완전 나랑 똑같잖아?”

그 말에 유디트는 체이스의 그림에서 시선을 떼곤 자신이 그린 그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 종이 안에는 검술을 연습하고 있는 체이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신기한 듯 한참 동안 그림을 내려다보던 그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입술을 뗐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왜 하필이면 이 모습을 그린 거야?”

“응? 하필이면이라니?”

그가 검을 잡은 모습을 그린 것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체이스하면 검, 검 하면 체이스가 떠오를 정도로 그와 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굳이 그가 검술을 훈련하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또한 유디트가 생각할 때 그 순간의 모습이 가장 멋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올려다본 체이스는 왠지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야 난 요즘 보충반에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고…… 여하간 좀 더 정적인 모습을 그렸어도 될 텐데.”

“음…… 그건 맞지만, 그래도 검술을 하는 네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

“왜?”

“그냥, 뭐 이유가 중요한가?”

솔직하게 대답하기 조금 창피했던 유디트는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런데 체이스는 유디트의 답변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미간을 좁히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너는 지적인 남자를 선호하지 않아? 우등생인 데다가 성적도 좋은.”

지적인 남자? 우등생?

유디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유디트는 이내 그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알아채고 말았다.

설마, 아셀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건가?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유디트가 내뱉으려는 찰나, 체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됐어. 네 이상형이 뭐든, 내가 알아서 잘하면 되는 문제겠지. 신경 쓰지 마.”

“…….”

“아무튼 다음에 또 여기 와서 그림 그리자. 그땐 좀 더 널 예쁘게 그려 줄게.”

“……체이스, 너 은근슬쩍 또 데이트 신청을 하는 거구나?”

“큼.”

체이스는 딱 걸리고 말았다는 듯이 짧게 헛기침을 했다.

유디트는 그런 그를 핀잔주듯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품 안에 소중히 문어 괴물 그림을 넣었다.

* * *

꽤 평화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머지않아 닥칠 시험만 잘 치러낸다면, 체이스의 졸업도 확정될 테고 그럼 아셀과 더 엮이는 일도 없어질 테니.

하지만 그것이 폭풍 전야였을 줄은, 유디트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불길함의 시작은 한나를 통해서였다. 체이스와 그림 데이트를 마친 후, 기숙사로 돌아온 유디트를 한나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맞이했다.

“한나? 혹시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평소의 한나답지 않은 심각하고 우울한 표정에, 유디트가 놀라서 황급히 다가갔다.

그러자 유디트를 바라본 한나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나직이 물었다.

“유디트……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꼴깍. 원인 모를 긴장감에 유디트는 침을 삼켰다.

하지만 한나에게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뭔가 망설여진다는 듯, 한참 뜸을 들이던 그녀가 이내 간신히 말을 이었다.

“너, 혹시 아셀이랑 사귀니?”

“……뭐?”

너무 놀라면 피가 싸늘하게 식는다고 하던데, 유디트는 그 말을 비로소 실감했다.

방금 한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되새김질했다.

그런 유디트의 반응을 어떻게 판단한 것인지, 한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후유,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아니지? 하, 보나 마나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괜한 걸 물었네.”

“…….”

“아까 내가 한 질문은 그냥 잊어버려, 유디트. 신경 쓰지 마.”

“하지만 신경을 쓰지 말라고는 해도…….”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필 아카데미에 떠도는 소문은 귀신같이 수집하던 한나가 한 말이기에 쉬이 넘길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한 거야? 아무 이유 없이 물었을 리는 없을 테고.”

“그건…….”

“솔직하게 말해 줘, 한나.”

“유디트, 너무 놀라지 마.”

하지만 한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어진 말을 들은 유디트는 놀라서 헛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카데미에서 네가 암암리에 아셀과 키스하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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