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82화
유디트가 조바심에 차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곧 르데샤가 내기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자 언제 잡담을 떨었냐는 듯 모두가 일제히 밤을 줍기 시작했다. 유디트도 재빨리 친구들을 뒤따라 떨어진 밤알을 찾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손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곧 주변 일대가 마치 태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텅텅 비어 버리고 말았다.
‘이래서야 내가 주울 건 하나도 없잖아…….’
어쩔 수 없이 유디트는 일행이 사라진 반대편으로 가 보기로 결심했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갔음에도 나무 간격이 그리 빽빽하지 않아서인지 숲 내부는 꽤 밝았다.
하지만 정작 밤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나뭇잎과 뒤섞여 있어 잘 눈에 띄지도 않았고, 겨우 발견하면 이미 다람쥐가 왔다 간 듯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한참을 줍다 보니 허리가 무척 아팠다. 자루를 내려다보니 생각보다 꽤 묵직해져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꼴찌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나름 많이 주운 것 같다며 유디트는 속으로 합리화를 했다.
조금 지쳐서 바위 위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 부스럭 소리가 들리더니 수풀 속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바로 르데인이었다.
“유디트 선배님?”
르데인은 성큼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이렇게 여유롭게 쉬고 계신 걸 보면 밤도 많이 주우신 모양이죠?”
“음,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줍긴 했어. 그러는 너는?”
르데인은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자루를 보란 듯이 흔들었다. 마대 자루는 밤으로 가득 차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체이스 선배님과 다르게 전 밤 줍기 좋은 구역들을 잘 알고 있거든요. 발길이 닿기 쉬운 곳부터 한 바퀴 싹 돌고 온 참이에요.”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유디트의 곁에 앉았다. 다행히 단둘이 있음에도 분위기가 어색해지진 않았다.
물론 예전에 르데인이 고백했던 것 때문에 살짝 불편해졌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이젠 시간이 꽤 흘러 편안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유디트가 그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어쩔 줄 몰라 할 때면, 바로 지금처럼 르데인이 번번히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주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자신보다 나이는 어려도 제법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는 친구였다.
“혹시 밤을 별로 줍지 못하셨으면 제가 몇 개 드릴까요? 꼴찌는 피하시는 게 좋잖아요.”
유디트는 깜짝 놀라 두 팔을 내저었다.
“아냐, 그럴 순 없지. 내기는 정정당당해야 하니까. 그리고 너도 내기에서 1등하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그건 그렇죠. 그런데 선배님에게 몇 개 드린다고 해도 1등은 충분할 것 같아서요.”
르데인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아무리 체이스 선배님이더라도 이곳 지리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저보다 많이 주우시기야 하겠어요.”
확실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르데인만큼 마대 자루를 꽉 채울 순 없으리라.
유디트가 발을 흔들며 잠시 기분 좋게 숲의 공기를 들이마시는데, 곁에 있던 르데인이 주저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선배님.”
“응?”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주홍빛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 행복하신 건가요? 체이스 선배님과?”
자신의 사정을 아는 르데인이라면 응당 해 올 법한 질문이었건만, 유디트는 그 말에 잠시 얼어붙었다.
그녀는 눈썹을 찡그린 채 천천히 머리를 굴렸다.
“음…….”
그런가. 체이스와 함께하기로 결심한 이후로부터, 그간 고민하던 문제들도 싹 사라지고 최근엔 날아갈 것 같은 하루하루가 지속되고 있었다.
특히 오늘처럼 맘 편히 보낸 하루도 굉장히 간만이었다.
이내 유디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응, 그런 것 같아.”
말을 마친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짓자,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르데인도 잠시 후 조용히 따라 웃었다.
“그렇다면 저도 안심이에요.”
그들이 수다를 떠는 동안 어느새 하늘 높이 떠 있던 해가 떨어졌고, 밤을 줍기로 약속한 시간도 끝났다.
“이제 약속 장소로 가죠, 유디트 선배님.”
“그래.”
곁에 르데인이 있어 다행이었다. 생각보다 숲에 깊이 들어와 있었는지, 돌아가는 길이 제법 길었다.
르데인은 어둠이 깔려 감에도 제법 능숙하게 유디트를 숲의 입구로 안내했다.
자리에 도착했을 즈음엔 이미 르데샤와 체이스가 마차 근처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다.
체이스는 발소리에 이쪽을 돌아보자마자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둘이 같이 와?”
유디트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르데인이 먼저 말을 받았다.
“중간에 마주쳐서 여기까지 안내해 드린 것뿐이에요.”
르데인은 ‘그러니까 괜히 화내지 마시죠.’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자, 무사히 다 모였으니 일단 별장으로 돌아가자.”
어느새 인원이 다 모인 걸 확인한 르데샤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차로 돌아오는 길은 금방이었다. 저택 앞의 마당에 내려서자마자 르데샤는 곧장 짐칸으로 다가갔다.
“안에 들어가기 전에 누가 가장 밤을 많이 주웠는지 확인해 보자!”
그렇게 말한 그녀가 자신의 마대 자루를 질질 끌고 왔다.
꿀꺽, 유디트는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제발 꼴찌만은 면해야 할 텐데…….
유디트가 속으로 기도를 하는 동안 한 명씩 자신의 마대 자루를 가져와 가운데 쏟아 놓기 시작했다.
우르르르.
제일 먼저 쏟아진 르데샤의 자루는 언뜻 봐도 유디트가 주운 것의 두 배 이상은 되어 보였다.
유디트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는 사이, 르데인 역시 팽팽해진 마대 자루를 옆에 쏟아부었다.
아까 봤을 때 예상했던 대로 어마어마해 보이는 양이었다.
제발 체이스만은…….
마지막 한 가닥 기대를 걸어 체이스를 바라본 순간, 유디트는 곧 모든 기대를 접어야 했다.
그는 자루 하나를 꽉 채운 것도 모자라 걸치고 온 망토의 모자와 주머니에서도 밤알을 털어 냈다.
“아, 따거. 들고 오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와, 체이스. 어떻게 이렇게 많이 가져온 거야? 그럼 유디트는 얼마나…….”
르데샤가 기대감이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유디트는 마지못해 자신의 자그마한 자루를 내려놓았다.
얼핏 봐도 확연한 크기의 차이에 르데샤가 당황한 투로 말했다.
“이런, 유디트가 꼴찌네.”
“…….”
유디트는 창피함에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래도 30개 이상을 모아 꽤 주운 줄 알았더니만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 유디트가 실망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자, 이거 받아.”
“……응?”
곧 그녀의 앞에 체이스가 주워 온 마대 자루가 놓였다. 유디트가 어안이 벙벙해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때 체이스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이러면 유디트가 1등이야. 불만 없지?”
“뭐어?”
그의 말을 들은 르데샤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허리춤에 손을 얹곤 쏘아붙였다.
“너 처음부터 이럴 심산으로 내기에 참여한 거였어? 유디트 우승시켜 주려고?”
에이, 그건 아니겠지.
아마 체이스는 속상해하는 자신을 보곤 충동적으로 밤 주머니를 건네줬던 것일 거다.
그러나 뜻밖에도 체이스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래.”
유디트는 깜짝 놀란 얼굴로 체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밤을 모두 내주고 나면 네가 꼴등인데? 꼴등인 사람이 1등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거 기억하지? 그러니까 네가 유디트의 소원을 들어줘야 해.”
이 밤 줍기 내기의 꼴찌는 명백히 유디트였다. 그런데 실질적 1등인 체이스에게 소원을 들어 달라고 할 만큼 낯짝이 두껍진 않았다.
아무래도 이 마대 자루는 체이스에게 다시 돌려줘야겠어. 마음만이라도 고맙다고 말해야겠다.
그런데 체이스는 유디트가 건네주는 밤 주머니를 받지 않았다. 그저 다시 유디트의 품에 꼭 안겨 주더니 내뱉었다.
“어차피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유디트의 소원이라면 굳이 내기가 아니라도 들어줄 수 있으니까.”
“…….”
질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르데샤와 르데인은 곧 배가 고프다며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체이스는 그들이 사라지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으며, 유디트 쪽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말했다.
“유디트, 오늘 고생 많았어. 너도 배고플 테니 이만 들어갈까?”
“……응, 그러자.”
유디트는 밤 주머니를 손에 꼭 쥔 채 그렇게 답했다.
* * *
저녁이 되자 날이 더욱 쌀쌀해졌다. 그런데 별장의 하인들이 식사하라며 안내한 장소는 테라스였다.
유디트가 가져간 숄을 여미며 밖으로 나온 순간, 예상 외의 훈기에 당황했다.
화로대에 피워진 불 때문인지 야외임에도 조금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불 주위에 다 같이 오순도순 모여 있으니 꽤 분위기가 낭만적이었다.
장작불 정중앙에서 무엇인지 모를 고기도 노릇노릇하게 익어 가고 있었다. 저녁 바람을 타고 솔솔 풍겨 오는 맛있는 냄새에 식욕이 돋았다.
타닥타닥.
붉게 타들어 가는 장작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문득 르데샤가 입을 열었다.
“뭔가 무서운 이야기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