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정하지 마세요 83화
그 말에 바베큐를 빤히 주시하고 있던 체이스가 르데샤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서운 이야기?”
“응, 좋잖아. 딱 이런 으스스한 날에도 어울리고. 한 명씩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보자.”
고기가 익어 갈 동안 좋은 시간 때우기라고 생각했는지, 르데인과 체이스도 이내 순순히 수긍했다.
한편 간담이 작은 유디트는 살짝 긴장했다. 한낮이라면 몰라도 지금처럼 서늘한 날씨에, 날도 어둑어둑한 와중에 무서운 얘기를 하겠다니.
그녀가 속으로 잔뜩 긴장하는 동안 르데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에서 떠도는 짧은 괴담에 관한 얘기였다. 별 내용은 없었지만 그의 실감 나는 이야기 솜씨 덕분인지 꽤나 흥미진진했다.
“……그래서 그 유령은 아직까지도 기회만 있으면 학생들을 잡아간다고 하더라고요. 제 얘긴 여기서 끝이에요.”
이어서 체이스의 차례가 돌아오자, 그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연금술 실험실에 나온다는 귀신 이야기를 꺼냈다.
하기야 직접 그곳에서 벌 청소까지 한 몸이니 이야기를 하는 데 그만한 적임자는 없으리라.
그는 청소를 하기 전 교수에게 들었던 몇 가지 짧은 일화를 말해 주었다.
비록 이야기에 긴장감은 없었지만 내용 자체는 제법 흥미롭게 들렸다.
르데샤도 마찬가지였는지 얘기를 듣자마자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둘이 거기서 청소했을 땐 별일 없었어?”
그 말에 유디트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내가 들어갔을 때 체이스가 귀신인 줄 알고 깜짝 놀라긴 하더라.”
“뭐? 아하하, 체이스 생각보다 겁쟁이였네.”
로지에나 남매가 얘기를 듣고 피식 웃자, 체이스가 억울한지 얼굴을 붉히며 씨근덕거렸다.
“그땐 사람이 나 말고 없는 줄 알았단 말야.”
한차례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새 유디트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녀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 어느 역사서에서 보았던 미치광이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체이스가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보충반 선생님이라 그런가, 설명을 잘하네.”
“그러게요. 저도 그 얘기 들은 적 있는데 선배님께서 해 주시는 얘기가 더 짧고 재밌는 것 같아요.”
체이스와 르데인의 칭찬에 유디트가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그렇게 공치사해도 아무것도 안 나와.”
벌써 세 명이나 이야기를 풀 동안, 고기가 제법 먹음직스럽게 익어 가고 있었다.
르데샤가 그쪽을 힐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나만 남은 건가? 얘기 마치고 바로 식사하면 되겠다.”
“어디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를 하실지 기대해 볼게요, 누나.”
르데인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손에 턱을 괴며 르데샤를 바라봤다. 유디트와 체이스도 곧 이어질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글쎄, 내가 할 얘기는 너무 짧아서 별로 안 무서울지도 모르겠다. 너네 기억나지? 학생회장이 여름 파티 열리기 직전에 샹들리에에 깔려 죽을 뻔했던 거.”
갑자기 흘러나오는 아셀의 이야기에 유디트가 흠칫하며 숨을 들이켰다.
“근데?”
곁에서 체이스가 불퉁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나중에 조사를 마치고 나서 알게 된 건데, 누군가 일부러 마법으로 샹들리에 연결부에 손상을 준 것 같은 흔적이 있었다지 뭐야. 즉 사고가 아니라, 학생회장을 노리는 누군가의 소행이었다는 거지.”
“……말도 안 돼.”
얘기를 듣던 유디트가 인상을 쓰며 딴지를 걸었다.
“정말 누군가 학생회장을 노린 게 맞다면 학교 측에서 벌써 조사를 시작했겠지. 하지만 이렇게나 잠잠한걸.”
“그게, 조사하려고 하는 걸 학생회장이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라고 막았다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유디트, 넌 여기에 대해서 뭐 들은 거 없어? 둘이 친하잖아.”
르데샤가 궁금해 죽겠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이제야 그녀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아셀의 지인인 유디트를 통해 정확한 사정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사이는 멀어질 대로 멀어진 상황이라 그녀에게 대답해 줄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미안, 난 들은 게 없어서 잘 몰라. 이 얘기 자체도 오늘 처음 들은 거고.”
딱 잘라 대답하자 르데샤가 살짝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그때, 곁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르데인이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입술을 뗐다.
“그 얘길 들으니 떠오르는 건데, 사실 그때 사고가 벌어졌을 때 우연히 저도 현장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는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아셀 선배님이 떨어지는 샹들리에를 먼저 발견하시고도 피하지도 않고 그냥 서 계시더라고요.”
“그건 너무 놀라서 굳어 버린 게 아닐까?”
“하긴 그렇겠죠. 아무튼 곁에 세드릭 선배님이 빠르게 마법으로 조처하신 덕분에 인명 피해는 없어서 다행이에요.”
로지에나 남매의 대화를 들은 유디트는 잠시 멈칫했다. 얘기에서 뭔가 미심쩍음이 느껴졌던 것이다.
아셀이 떨어지는 샹들리에를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니?
유디트가 알기로 그는 귀한 가문의 후계자였기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수준급의 호신술을 배운 몸이었다.
위기 상황에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그렇게나 훈련을 받아 놓고도,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걸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니.
‘게다가 누군가 일부러 마법으로 샹들리에에 손상을 줬다는 것도 걸려…….’
하필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세드릭은 아카데미에서 마법 능력이 출중하기로 소문이 나 있지 않은가.
미심쩍음이 사라지지 않자 유디트는 사고 직후 벌어졌던 일들을 차례로 머릿속에 떠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셀과 자신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다며 호언장담하던 세드릭이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꿔 자신을 병문안에 초대했던 것 하며.
막상 찾아간 자리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던 아셀이 멀쩡히 깨어나 제게 말을 걸고, 여름 파티에 함께 갈 것을 간절하게 애원해 왔던 것까지.
아셀의 이런 태도는 사실 익숙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에게 부탁할 일이 생기면 곧잘 이런 식으로 불쌍한 척을 하곤 했었으니까.
그가 그 아름다운 청회색 눈동자에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하면, 누구든 들어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의 자신만 보더라도 아셀의 안쓰러운 몰골에 마지못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이 모든 게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아셀이 세드릭과 짜고 샹들리에 사고를 계획한 것일까.
아니, 자신이 너무 과하게 앞서 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모두 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어차피 다음 주말에 페델리안 저택에 들러 아셀과 삼자대면을 마친다면, 이제 그 집안과 더 엮일 일은 없을 테니까.
유디트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은 뒤, 애써 웃어 보이며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를 마쳤다.
* * *
다음 날, 유디트는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와 함께 일찍부터 눈을 떴다.
전날 늦게까지 놀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셀에 대한 생각에 밤새 시달렸기 때문인지.
일찍 일어나는 게 몹시 고역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피곤하다고 이 근방의 명물이라는 호수 구경을 놓칠 순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르데샤가 그곳에서 뱃놀이를 하면 무척 재미있을 거라며 호언장담을 한 덕에, 유디트의 마음도 새롭게 설레었다.
그래, 어제 일은 이만 잊어버리자. 어차피 더 문제 될 일도 없을 테고.
뱃놀이를 마치고 다시 아카데미까지 돌아갈 일이 까마득하긴 했지만 네 사람은 약속한 시간에 칼같이 모여 호수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저기 봐, 바로 저 호수야!”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나무들 사이로 커다란 은빛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수의 표면은 빛을 받아 보석 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심지어 어찌나 물이 맑은지 호수 속에 사는 물고기들이 훤히 내다보일 지경이었다.
“예쁘다.”
유디트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르데샤가 호수에 꼭 와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가 있었구나.
분명 호숫가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눈꺼풀에 돌덩이를 달아 놓은 것처럼 졸렸는데, 호수를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피로가 싹 사라졌다.
어느새 마차에서 내린 네 사람이 호숫가로 달려갔다.
한쪽에 마련된 작은 정박지에는 작은 나무배들이 여럿 묶여 있었다. 르데샤가 그중 하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이게 우리가 탈 배야!”
그런데 실제로 본 배는 상상과는 다르게 무척 조그마했다.
나무를 파내 만든 길쭉한 배는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지는 귀여운 모양새였으나, 성인 네 명이 탑승하기엔 턱없이 작아 보였던 것이다.
체이스 또한 유디트와 같은 의문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우리가 탈 배라고? 우리가 다 같이 타기에는 배가 너무 작은 거 아니야?”
“으음…… 그러네. 어떻게 하지?”
르데샤는 곤란한 듯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르데인과 내가 어릴 때 타고 놀던 배라서 크게 느껴졌었나 봐. 네 말대로 네 명이 함께 타지는 못할 것 같네. 배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말이야.”
“할 수 없네. 두 명씩 나눠 타자.”
간단히 답한 체이스가 자연스럽게 유디트의 곁에 와서 섰다.
“나랑 유디트가 같이 타고, 너희가 또 같이 타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