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화
세인트 존 칼리지.
대륙에서 손꼽히는 명문 아카데미답게 이곳 도서관엔 찾기 어려운 고서부터 유명 소설 초판본까지 구비돼 있었다.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유명한 책은 통행이 편한 A구역에, 인기 없는 책은 E구역에 놓였다. 그러다 보니 E구역의 책 대부분은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새 책에 가까웠다.
빽빽한 E구역 책장을 샅샅이 살폈으나 찾는 책이 없던 건지, 덥수룩한 연갈색 머리카락에 두꺼운 안경을 쓴 남학생이 비어 있는 한 칸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없어.’
오늘도 <군사론>과 <군주론> 사이에 있어야 할 <군주의 책임감>이 없었다. 통치학 과제를 하려면 그 책이 필요한데, 일주일이 넘도록 대출 중이니 미칠 노릇이었다.
같은 책을 네다섯 권 정도 마련하는 A구역과 다르게 E구역은 전부 한 권밖에 없었다. 당장 이틀 뒤가 과제 제출일인데, 이러다 백지를 내게 생겼다.
자신의 귓가에 오데인 교수가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여태 다른 장학생들은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만……. 에드워드 학생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요…….’라고 말하는 게 울렸다.
결국, 그는 지난 일주일간 미룬 일을 시행해야 했다.
“후우.”
에드워드는 깊게 심호흡한 후, 뻣뻣한 몸짓으로 도서관 사서를 찾았다.
사서는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듯, 그녀는 시선 하나 주지 않고는 일에 몰두했다.
자신감을 잃은 에드워드는 사서가 자신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길 바라며 오도카니 서 있었다. 종이 펄럭이는 소리만이 적막을 채웠다.
“에드너드, 너 지금 사서한테 작업 거냐?”
침묵을 깬 건 옆을 지나던 찰스였다.
그게 신호였는지 찰스를 따르던 남학생들이 휘파람을 불며 이상한 추임새를 넣었다. 그 유치한 행동이 재미있기라도 한 듯, 찰스 콜린스와 그의 무리는 킥킥거리며 에드워드를 비웃었다.
찰스 콜린스는 아본리아 제국 백작의 차남이었다. 그의 큰 덩치만큼이나 콜린스 가문이 제국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이름이 에드너드(Ednerd)가 아니라 에드워드고, 사서 프란시스 부인의 남편 프란시스 씨가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걸 알려 줘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찰스가 더 신이 나 골려 댈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달싹이던 입을 꾹 다물었다.
“오, 찰스. 사서님 의견도 물어봐야지. 지금 프란시스 부인이 평민과 말 섞기 싫어서 애써 무시하고 계셨는데, 이젠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잖아.”
크리스토퍼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비슷한 조롱을 몇 년째 듣는 건지, 이젠 아무 생각도 안 든다.
“프란시스 부인, 죄송합니다. 저희가 눈치 없이 저 자식과 대화를 나눠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버렸—.”
“도서관에선 조용히 하세요. 미안해요, 학생. 무슨 일인가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프란시스 부인이 험악한 표정으로 찰스 무리를 조용하게 만든 뒤, 에드워드에게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식간에 돌변하는 태도를 신기하게 생각하며 에드워드는 입을 열었다.
“아이흘러의 <군주의 책임감>을 누가 빌렸는지 알 수 있을까요? E구역 책입니다.”
지난 며칠간 수없이 외운 문장이기에 말은 속사포처럼 나왔다.
“음……. 3학년의 제네비브 달링 학생이 3주 전에 빌려 갔네요.”
프란시스 부인이 서류를 몇 번 훑고는 에드워드가 원하는 답을 내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3학년, 제네비브 달링.
에드워드는 이름을 머릿속에 몇 번 되새겼다.
이후, 에드워드는 무작정 한 강의실 앞으로 갔다. 그가 3학년들이 이 시간이면 이곳에서 문학 수업을 받는다는 걸 기억한 덕분이었다.
호기롭게 도착하긴 했는데, 뒤늦게 이름만 아는 것으로 ‘제네비브 달링’을 찾을 순 없다는 걸 깨달았다. 생김새를 알지 못하니까.
그때, 교실 문이 열리며 3학년생들이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몇몇 학생은 낯선 2학년에게 시선을 줬다. 시선을 받으니 반사적으로 위축이 됐다.
에드워드는 여학생을 한 명씩 붙잡아 ‘당신 이름이 제네비브인가요?’라고 물어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기적처럼 제네비브가 다가와 책을 건네줬으면 하는 게 지금 그에겐 일생일대의 소원이었다.
“여기엔 무슨 일이니?”
신이 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준 걸까? 3학년 학생 한 명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주었다.
다른 때라면 고마움을 느꼈겠지만, 지금 에드워드에겐 과제가 우선이었기에 고마워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제네비브 선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제네비브? 제네비브 달링? 문학 수업은 안 듣는데……. 지금쯤이면 학생 휴게실에 있을 거야.”
“네, 감사합니다.”
에드워드는 짧게 인사하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1층 휴게실엔 학생들이 적당히 있었다.
아무 상관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민망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에드워드는 책상을 천천히 관찰했다.
일 년에 고급 별장 한 채 값을 하는 학비와 어울리게 학생 휴게실은 고급스러웠다. 얼핏 보면 학교 휴게실이 아닌, 황실의 한 공간처럼 보일 만큼.
에드워드는 휴게실을 거닐며 주인이 있는 책상을 유심히 살폈다. 다섯 번째 테이블에 도달해서야 그는 지난 일주일간 간절하게 찾던 <군주의 책임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 책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제네비브 달링인 듯한 사람이 책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대충 묶은 머리카락은 흘러내리기 직전이었고, 만년필을 든 오른손은 종이 위를 빠르게 오갔다.
“……달링, 선배.”
단 두 단어를 발음한 것뿐인데도 목 근처가 간지러웠다. 온몸이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기실 에드워드는 사람과 대화를 시도할 때마다 이런 기분이 들곤 했지만,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게다가 노력이 무색하게도 상대는 반응도 없으니 귓가가 화끈거렸다.
“…….”
조금 전, 도서관에서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제네비브는 과제에 온 정신을 쏟느라 제 앞에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고, 이런 상황이 낯선 에드워드로서는 그녀의 주의를 자신에게 옮기는 방법을 몰랐다.
찰스 무리가 이곳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시감 때문에 에드워드는 마음이 급해졌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에드너드!’라며 저를 조롱할 것 같았다.
“……큼, 제네비브 선배.”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던 에드워드가 헛기침을 했다.
성을 말하려고 했는데, 그만 이름이 튀어나왔다. 에드워드는 제네비브가 제발 그 소리를 못 들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소망과 달리, 책 속에 빨려 들어갈 기세였던 제네비브가 고개를 치켜들어 에드워드를 보았다. 연두색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제네비브 달링 선배, 맞으시죠.”
에드워드는 뒤늦게나마 당신의 이름이 아닌 풀네임으로 부르려고 했다는 걸 열심히 담아냈다.
“…….”
이 거리에서 못 들었을 리 없는데. 그녀는 녹색 눈동자로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대답하긴커녕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무언가 잘못 말한 걸까?
에드워드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떠올렸다. 무례하거나 이상한 건 없었다. 하지만 제네비브의 녹색 눈은 여전히 관찰하듯 에드워드를 보았다.
“내가 제네비브야. 무슨 일이니?”
정신을 차린 그녀가 뒤늦게 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님께서 빌리신 <군주의 책임감>이 필요한데, 과제 제출일이 수요일까지여서요.”
“아……. 그래? 근데, 이거 어떡하지? 내가 빌린 책은 맞는데 나만 보는 책이 아니어서…….”
에드워드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친구가 빌리려고 했던 책인데, 걔는 대출 권수를 다 써서 내가 대리로 대출했어. 빌리는 김에 같이 보는 중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제네비브가 난감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대리 대출은 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세인트 존 칼리지는 학교 명성에 걸맞은 살인적인 과제량으로도 유명했다.
그러니만큼 학교에서 지정한 도서관 대출 한도로는 필요한 책을 전부 빌리지 못했다. 에드워드는 (친구가 없어서) 해 본 적 없지만, 멀리서 대리 대출 거래가 성사되는 걸 종종 목격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에드워드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과제를 처음부터 갈아엎어야 했다.
주제를 듣자마자 <군주의 책임감>을 떠올린 만큼 책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쉬웠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쓰는 책을 빼앗을 정도로 에드워드는 뻔뻔하지 못했다.
‘아이흘러가 쓴 다른 책을 찾아야겠어.’
잠이야 이틀 정도 지새우면 된다.
“저기, 잠깐만.”
뒤돌아서는 그를 제네비브가 붙잡았다.
“통치학 오데인 교수님이야?”
“아…… 네.”
에드워드는 그녀가 어떻게 알아맞혔는지 신기해하며 대답했다.
“오데인 교수님께선 아이흘러를 좋아하시니까 좋은 선택이야. 제출 기한이 수요일이면 얼마 남지도 않았네! 같이 봐도 괜찮아.”
그 순간, 에드워드의 눈엔 제네비브가 흡사 대신전의 성녀처럼 보였다. 이틀보다 일주일 동안 구상한 과제의 완성도가 더 좋은 건 당연했다.
“아, 물론 너만 좋다면! 불편하면 거절해도 돼. 이름이…….”
“……에드워드예요.”
“에드워드구나. 그래서, 어때?”
“빌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별 걸로. 나는 지금 다른 과제 하는 중이라 당장 안 봐도 괜찮아. 편한 자리에 앉아.”
그녀가 책상 위에 길게 늘어트린 제 물건들을 정리했다.
“잉크는 내 거 써도 돼. 종이 필요하면 얘기하고.”
“네, 감사합니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시점인지라 ‘같이 앉기엔 껄끄러우니 다 쓰면 주세요’라고 말할 여유 따윈 없었다.
에드워드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펜 움직이는 소리가 둘 사이를 가득 메웠다. 착실하게 과제를 작성하는 에드워드와 반대로 제네비브는 퍽 전투적으로 임했다. 새로운 곳에서 하는 공부는 생각 이상으로 집중이 잘됐다.
“친구분은요?”
본론을 반 정도 작성했을 무렵, 에드워드가 물었다.
“친구……? 아, 오웬 얘기구나. 걘 괜찮아.”
그녀는 실없는 웃음으로 문장 끝을 장식했다. 정신없었던 아까와 다르게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왜…….”
“제네비브! 과제는 다 했어? 앞에 앉은 친구는 누구야?”
그때였다. 에드워드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한 남학생이 다가와, 한 팔로 제네비브의 어깨를 친근하게 둘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