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08화
「마이언.」
훌리에타는 렐타어로 말을 보강했다. 발음이 ‘마이언’보단 ‘마욘’에 가까워, 제네비브는 그 단어의 의미를 조금 늦게 알아챘다.
“네, 그런 적이 있었죠.”
제네비브가 대답했다.
마이언에서 보낸 첫 번째 저녁. 제네비브 덕에 에드워드와 훌리에타는 대화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대화를 나눴다.
에드워드는 훌리에타가 하는 말을 제국어로 통역해 알려 주고, 제국어로 온 답을 다시 렐타어로 해석했다. 에드워드가 자발적으로 말한 적은 한 번을 제외하면 없었다.
그때 에드워드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안 알려 줘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훌리에타가 다시 꺼낼 줄 몰랐다. 그때 에드워드가 한 말을 알려 주려는 건가?
제네비브는 훌리에타의 대답을 기다리며 오늘따라 마이언에 있었던 일을 자주 회상한다는 걸 깨달았다. 시온의 본모습을 떠올리게 된 조정 경기 때 일이나, 잊고 있었던 에드워드가 한 말이나.
“당신 칭찬을 했어. 나쁜 말, 아니야.”
뒤이어 훌리에타는 무어라 더 말했지만, 제네비브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아채곤 자신감을 잃어 갔다.
「——.」
매끄럽게 말하지 못한 스스로가 답답했는지, 훌리에타가 뜻 모를 렐타어를 유창하게 쏟아 냈다.
“……오해하지 마.”
훌리에타는 짧은 한숨을 쉰 뒤, 다시금 제국어로 말했다. 그녀는 제네비브가 에드워드가 한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네. 오해, 안 할게요.”
에드워드가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으니, 어떻게 본다면 당연한 바람이었다.
“너. 폴로. 잘해.”
이어서 훌리에타는 단순한 단어를 뱉었다. 세 단어뿐이었지만, 제네비브는 그게 에드워드가 훌리에타에게 비밀스럽게 한 말임을 알았다.
제네비브가 학교 대표로 활동한 시절은 훌리에타가 렐타 사관 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고, 설령 그 전에 봤더라도 타 학교 선수를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신이 폴로 클럽에서 활동했다는 걸 기억한 에드워드가 띄워 준 것 같았다.
‘이게 그렇게까지 숨길 일이었나?’
아무리 물어봐도 알려 주지 않아, 내심 엄청난 비밀일 거라고 생각했기에 제네비브는 얕은 허무함을 느꼈다.
‘그때 에드워드가 낯을 많이 가리긴 했지.’
제네비브는 그 모습이 귀엽다거나 그때 반응이 재미있었다는 사실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사실만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존하가 당신을 직접 봐써. 작년에.”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다소 의외였다.
“……에드워드 전하가 작년에 저를 봤다고요?”
제네비브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응.」
제네비브의 표정과 어조로 그녀가 한 말을 대강 이해한 훌리에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네비브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이전에 에드워드와 첫 만남을 가졌던 것 같다.
제네비브는 더 질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훌리에타는 딱 할 말만 준비해 온 건지 그녀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했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훌리에타 양.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요.”
제네비브는 그녀가 난처하지 않도록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소통할 방법이 없었던 둘은 구태여 서로를 붙잡지 않았다. 훌리에타는 단순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후, 야외 테라스로 나온 제네비브는 어두워진 하늘을 보았다. 저녁 바람이 불어왔지만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나를 알고 있었다고.’
먼저 알고 있었다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본인만 하더라도 존재는 알지만, 정작 말 한 번 섞어 본 적 없는 사람이 한가득이니 말이다.
하지만 궁금한 게 많았다. 과연, 그에게 자신의 첫인상은 어땠을까.
“물어보는 건 어렵겠지…….”
테라스로 오는 순간까지도 에드워드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들 앞에서 에드워드에게 ‘내 첫인상이 어땠어?’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 커튼이 열려 있어서, 선배?”
난간에 기댄 채 황실 후원을 구경하던 중, 누군가가 익숙한 호칭을 부르며 야외 테라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에드워드? 연회는 어쩌고?”
제네비브는 걱정스레 물었다. 연회의 주인공은 빠지면 티가 나는 법이다.
“피곤해져서요…… 그리고,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춤을 추고 계셔서 티는 안 날 거예요.”
“많이 바빠 보이긴 하더라. 그럼, 조금 쉬다 가.”
“네.”
제가 자리를 피해 주겠다는 의미였는데, 에드워드는 같이 휴식을 취하자는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커튼을 쳤다. 붉은색 커튼이 내려가자 야외 테라스를 밝혔던 연회장의 빛과 소음은 곧바로 차단되었다.
에드워드는 자연스럽게 제네비브의 옆에 섰다. 제네비브는 이를 의식하지 않으려 하며 자연스럽게 그를 상대했다.
“훌리에타 양을 만났어. 기억하지? 그때 마이언에서 만난 렐타 학생 있잖아.”
“네, 기억하고 있어요.”
이걸 물어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제네비브는 잠깐 고민했다.
“어쩌다 보니까, 그분이 네가 얘기한 걸 나한테 알려 줬거든.”
“…….”
“너, 언제부터 나를 알고 있었어?”
제네비브는 그냥 던져 보기로 했다.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던 에드워드는 그녀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알아챘다.
“가르시아 씨의 말대로예요. 제가 여름 대회에 가 봤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때, 선배를 봤어요.”
에드워드가 말을 이어 갔다.
“당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무작정 돌아다녔는데, 그렇게 걷다 보니까 폴로 경기장이었어요.”
옛 기억을 회상하는지 연갈색 눈이 빛났다.
“규칙은 몰라서 말만 보고만 있었는데, 분위기가 아주 안 좋아졌어요.”
“…….”
“제네비브 선배가 말에서 떨어졌거든요.”
그 경기를 에드워드가 봤을 줄 몰랐다. 에드워드는 제네비브와 눈을 맞추며 말을 이어 갔다.
“……지금 생각하면 일반화긴 한데, 저는 그간 제가 봐 온 사람들처럼 선배가 소리를 지르거나 누군가를 꾸짖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러지 않아서 조금 신기했어요.”
“…….”
“선배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게 새로웠고, 조금은 좋았어요.”
에드워드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조금 민망하네. 고꾸라진 걸 본 건 아니지?”
제네비브는 그가 말을 더 이을까 싶어 어색하게 주제를 바꿨다.
“음…… 그리고 선물은 생각해 봤어?”
“조금 생각해 봤는데요.”
“뭔데?”
바로 원하는 걸 말할 줄 알았는데, 에드워드는 잠깐 머뭇거렸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부탁하려는 건 아니겠지?”
조금 진지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한 말이었지만, 농담한 게 무색하게 무거운 분위기는 유지되었다.
“제가…… 선배를, 이름으로만 불러도 될까요.”
“…….”
이름으로만.
에드워드는 제네비브를 종종 이름으로 불렀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했다. 사적으로는 선배, 공적으로는 제네비브 달링. 선배라는 호칭은 둘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며 선을 그어 주곤 했다.
제네비브에겐 이보다 좋으면서도 싫은 질문도 없을 거다. 공적인 곳에서 이름 좀 불렸다고 심장이 제멋대로 뛰는데, 사적인 곳에서도 이름만으로 불린다니. 승낙했다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그, 그러니까 칼리지를 같이 다니는데…… 선배라고 부르면 이상하잖아요.”
아무런 대답이 없는 그녀를 보며 거절하리라고 생각했는지 에드워드가 빠르게 변명 같은 설명을 이야기했다. 논리적인 설명은 사적인 감정이 조금도 없음을 말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점이 사적인 감정이 있음을 증명했다.
“……그래서,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
에드워드는 긴장한 것 같았다.
“……나도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아.”
제네비브는 그런 그를 보며 약간의 사심을 담아 말했다.
“제네비브.”
에드워드가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는, 마법 같은 음성이었다.
* * *
제네비브는 남은 연회를 참가하지 않았다. 첫 번째 연회 이후로 생각할 거리가 많아졌던 그녀는 대신, 부모님이 그런 것처럼 일주일 동안 밀린 일정을 따라갔다.
세인트 존 칼리지에 보낸 유급 신청이 제대로 되었는지 편지를 보내고, 블라이스 형제들과 함께 타운하우스에서 시간을 무료하게 보냈다.
귀족파는 연회의 첫 번째 날과 마지막을 제외하면 서서히 참가하지 않으며 반대 의사를 보이는 게 제국의 전통 아닌 전통이었다.
에드워드를 보면 좋은 점만 자꾸 보이는 것 같았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라는 말을 따라 제네비브는 타운하우스에 처박혀 외출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제네비브는 제 사촌들과 체스를 두거나 카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에드워드한텐 악감정이 없지만~ 어차피 황제파 연회라 가면 우리들만 손해야.”
“얘 말이 맞아. 게다가, 황제파는 머릿수도 많아서 연회장 채우는 건 걱정 안 해도 돼.”
휴고와 오웬이 제네비브와 카드 게임을 하며 설명했다.
“근데 제네비브, 너는 외출 안 해? 보아하니 초대장도 많이 오는 것 같은데.”
휴고가 응접실 한쪽에 쌓인 편지들을 보며 물었다. 연회 첫날 이후부터 각종 가문에선 그녀에게 차 한 잔을 권유하는 초대장을 보내왔다.
“가 봤자 무슨 말을 할지 아니까 그렇지.”
“…….”
“황태자와 언제부터 친해졌냐— 를 시작으로 재판 얘기는 당연하고, 그때 일도 물을 거 아니야. 그러면 소문도 다시 커지잖아.”
동정 받는 황태자는 존재해선 안 되었다. 책봉식과 연회를 벌인 만큼 안타까운 사건에서 온 이미지를 쇄신해야 하는데, 만약 자신이 설치고 다니면 에드워드가 연회 동안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는 일이다.
“목적이 분명한 초대는 거절하는 게 맞지. 그리고 오웬, 지금 이 카드 못 내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가져가.”
“아~ 안 걸릴 줄 알았는데.”
“8을 3인 척 두는 그 뻔뻔함이 부럽다. 내가 이겼네.”
카드 게임은 아쉽게도 제네비브가 아닌, 휴고의 승리였다.
두 사람과 이젠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 생각하던 제네비브에게 벤자민이 다가왔다.
“아가씨, 세인트 존 칼리지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늙은 블라이스 저택의 집사가 제네비브에게 편지를 건넸다. 곧장 봉투를 뜯은 제네비브는 내용물을 읽었다.
“뭐라고 쓰여 있어?”
“별거 없고, 9월에 오라고 쓰여 있네.”
유급이 확정되었으니, 9월부터 보자는 안내문이었다.
‘정말 원작이 시작되겠구나.’
제네비브는 편지를 읽으며 생각했다.
이제 두 달 뒤면 제네비브는 정말 원작에 돌입한다.
제네비브는 흐릿한 원작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애석하게도 결말을 제외하면 중요한 사건은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인 이상, 제네비브는 가지고 있는 정보를 활용해야만 했다.
‘걸리는 거라면…….’
밀포드였다.
원작에서 한 번 등장한 적 없는, 미지의 남자.
그가 군부 출신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제네비브도 밀포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제네비브는 소름 끼칠 정도로 안광이 없는 그의 눈과 이상한 새 머리 장식이 달린 지팡이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본리아에 온 뒤로 그를 본 적이 없었다.
‘원작에서 정말 아무런 영향도 안 줬을까?’
끈질길 정도로 여자 주인공의 시점으로 진행되었던 소설에선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더라도 정작 에드워드에겐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역시 밀포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겠지.’
제네비브는 잠깐 미뤄 뒀던 조사를 이제 끝내기로 했다. 그간 끝없이 이어졌던 사건들로 원치 않게 뒷전이 된 조사였다.
그녀가 먼저 할 것은 선대 황제였던 라몬 황제의 군대 시절을 파 보는 것이었다. 기실 가장 편한 방법은 에드워드에게 묻는 것이었지만, 조금 꺼려졌다.
‘에드워드에게 좋은 추억도…… 아닐 것 같고.’
밀포드를 보자마자 굳은 그를 떠올리면 당연히 드는 생각이었다.
그다음으로 좋은 방법은 당시 군인이었던 사람을 찾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제네비브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외조부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고 검이 아닌 총으로 결투하는 걸 비신사적이라고 여기는 요즘 기조에선 선뜻 찾기도 어려웠다.
‘도와줄 만한 사람이…….’
발이 넓은 사람이 제 주변에 있나.
“내가 좀 잘생겼지?”
“뭐래.”
오웬의 인맥은 넓었지만, 그는 적임자가 아니다. 라몬 황제를 알아 가는 게 밀포드를 위한 초석임을 알면 곧바로 발을 뺄 테니까.
오웬과 비슷하게 발이 넓은 사람. 그리고, 라몬 황제의 군부 시절을 잘 알 법한 사람.
제네비브의 머릿속엔 곧바로 한 사람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