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드남의 흑화를 막아 보겠습니다 127화
가을이 찾아들자, 아침 공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서늘해졌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았고, 미미한 여명만이 동쪽 하늘 끝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용케 오셨군요.”
시온이 제가 건넨 기차표를 확인하는 제네비브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침이더라도 기숙사엔 눈이 많았을 텐데.”
그는 정말 궁금한 건지, 흥미로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려 주면 사귀자는 얘기 그만해야 해.”
“실은 그렇게 안 궁금했어요.”
시온은 딱 잘라 거절했고, 어차피 그가 거절하리라는 걸 예상한 제네비브는 설득하는 대신 그대로 받아들였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기 위해 원숭이처럼 기숙사 외벽을 탔다는 말은 절대로 삼가고 싶었다. 특히, 시온에게는 더.
“사람이 없긴 하군요.”
시온이 텅 빈 기차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출발 시간을 일찍 정한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기차역은 폐쇄되었다고 해도 믿길 정도로 사람이 없었고, 덕분에 제네비브는 걱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제네비브와 시온을 제외하면 리스톨행 기차를 탄 승객은 서넛밖에 없었다.
표 검사는 빠르게 끝났고, 기차가 출발했다. 창에 기대어 달라지는 풍경을 보던 제네비브는 문득 그런 의문이 피어났다.
‘위험한 곳이 낮에도 운영을 하던가?’
너무 이른 시간인 터라, 제네비브는 혹여 외박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낮에도 여는 곳일지 알 길 없었지만, 시온이 일곱 시에 나오라는 제 말을 순순히 들었던 걸 생각하면 괜찮을 수도 있었다.
“위험한 곳에 간다고 했잖아.”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제네비브는 시온에게 말을 걸었다.
“그랬죠.”
“그런 곳은 보통 밤에 열리지 않아?”
“범죄가 시간을 가리던가요?”
시온이 예리하게 되물었다.
“그래도 범죄의 경중이 다르잖아. 그러니까, 통계적으로는.”
“뭐, 달링 양의 질문에 답을 드리자면…… 열립니다.”
시온이 대답했다.
제네비브가 온갖 범죄가 도사리는 퇴폐적인 음지를 상상한 걸 읽기라도 하듯, 시온은 뒤늦게 “당신이 어떤 공간을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운영합니다.”라고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시온은 제네비브의 상상에 힘을 싣는 듯한 행동을 계속 취했다. 그는 제네비브의 금발이 튄다며, 리스톨에 내리자마자 로브를 건네 가리게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억양으로 국적을 알 수 있다며 제네비브에게 잘하지도 못하는 아본리아 억양으로 말하게끔 했다.
이러니 제네비브는 당연히 더 걱정이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위험한 곳으로 가려는 거기에. 제네비브는 안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며 시온을 따라갔다.
“이곳입니다.”
“여기는…….”
제네비브는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걱정한 게 무색해질 만큼 평범한 장소였다.
“약국이잖아.”
제네비브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약국을 보며 말했다.
위험한 장소라고 신신당부하고, 억양까지 바꾸게 만든 것치고는 지나치게 평범한 장소였다. 마을에 흔히 있는 약국답게 부근에는 주민이 돌아다녔고, 주변에는 공원과 다른 가게들도 있었다.
제네비브는 생각보다 멀쩡한 곳에 도착했다는 데 안도해야 할지, 울컥해야 할지 심하게 고민했다.
그때, 시온이 약국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가게 안으로 들어간 제네비브는 가게에 이상한 부분이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약국의 탈을 쓴 범죄 장소일 수도 있다.
“…….”
하지만, 가게 내부 역시 너무나 평범한 약국의 모습이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와 진한 약초 냄새가 가게 안을 메웠다. 벽에는 약을 제작할 때 이용되는 듯한 여러 기구가 즐비했고, 찬장은 제조가 끝난 약으로 가득했다.
……여기가 위험하다고? 제네비브는 의문을 품으며 시온을 보았다.
“감기약 하나 주세요.”
시온이 약사에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주문을 했다.
그는 감기에 걸렸다기엔 리스톨까지 오며 기침 소리 한번 낸 적 없었고, 고작 감기약 하나를 타기 위해 수도까지 올라올 리는 더더욱 없었다.
학교에서 처방 안 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감기약은 칼리지 병동에서 달라고 하면 주는 흔한 약 중 하나였으니까.
‘왜 여기로 온 거지?’
제네비브는 의심의 눈초리로 시온을 보았다. 수도에서도 사귀자는 염불을 이어 갈 속셈인가.
그녀가 그러든 말든, 시온은 약사에게서 약을 처방 받고 있었다.
“이거 말고, 다른 건 없나요? 약효가 더 좋은 게 있다고 친구한테 들었는데.”
약사가 건넨 약을 확인한 시온이 그 약을 돌려보냈다. 시간이 많은 듯 감기약을 천천히 고르는 그를 보며 제네비브는 재촉하고 싶었으나, 일단 참기로 했다.
“이게 맞을까요?”
약사가 물었다.
시온의 등에 가려져 무슨 약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으나, 찾던 약인지 시온은 밝은 목소리로 맞노라 대답했다.
“더 좋은 약효를 얻고 싶으면 7번가 뒷골목에 회색 지붕 건물이 있습니다. 그 건물 3층으로 가면 되세요. 여기서 산 거라고 꼭 말해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약사가 결제를 진행하며 이상한 말을 덧붙였다.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해졌군요.”
시온은 약사에게 미소 띤 얼굴로 수고하라는 말까지 남겼다.
“볼 일 다 봤어요. 이제 갑시다.”
그는 기분이 좋은 듯, 감기약을 허공에 던졌다가 손으로 휙 낚아챘다.
“……이게 다야?”
제네비브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벌써 돌아가다니.’
그녀는 시온이 가지고 노는 감기약을 보았다. 고작 저 감기약을 얻기 위해 교칙까지 위반하고, 카르디르로 돌아갈 위험까지 감수하며 여기까지 왔다니…….
“칼리지 병동에 가도 구할 수 있는 걸 여기까지 와서 구한 거야……? 이제 돌아가는 거고……?”
제네비브는 한숨까지 쉬어 가며 시온을 원망했다. 그에게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이런 곳에서까지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제네비브를 보며 시온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칼리지로 돌아간다고 했나요? 그리고, 정말 이 약이 학교에서 주는 흔한 감기약 같습니까? 자세히 살펴보세요.”
시온은 제네비브에게 가지고 놀던 약병을 건넸다.
그가 건넨 투명색 병은 칼리지 병동에서 처방하는 것과 다른 회사의 로고가 인쇄돼 있었다. 거대한 ‘W’가 새겨진 포장에 시선을 두던 제네비브는 이내 유리병 안쪽을 보았다.
끈적한 감기약에 익숙했던 제네비브는 빠르게 다른 점을 찾아냈다.
낮은 점도와 다른 색깔. 본래 감기약이라면 끈적한 갈색이 곧 법칙 아니었던가. 하지만, 시온이 받은 감기약은 옅은 노란빛을 띠었다.
“……다른 것 같기도 하네. 점성이 약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감기약 아니야?”
“감기약 맞습니다. 싸고 저렴해서 평민들이 자주 찾는다고 합니다.”
“그렇구나.”
제네비브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도 고작 이걸 받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차라리 시온이 다녀와서 제게 보여 주면 모를까.
“그리고 이건, 다른 용도로도 사용됩니다. 조금 가공하면 각성제가 되거든요.”
“…….”
“좋게 표현하면 각성제고, 나쁘게 말하면 마약이죠.”
시온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공급원은, 이쪽입니다.”
시온은 약병에 그려진 알파벳을 가리켰다.
[W]
알파벳을 뚫어져라 보던 제네비브는 곧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다.
“……윌리엄 밀포드.”
제네비브는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밀포드가 마약상이라니. 약통에 제 이니셜을 박을 정도면 그 마약 산업을 소유한다고 해도 무방했다.
이제야 왜 오웬이 밀포드가 누군지 알려 주기를 극도로 꺼렸는지 이해가 된다. 상황을 바꿔서 오웬이 카르디르의 마약상에 흥미를 품었어도 제네비브는 똑같은 반응을 내보였을 거다.
“네가 이걸 어떻게 알아?”
“말했잖아요. 황실이 헤이븐 가문을 싫어한다고.”
“…….”
“그래서 위험 요소는 미리 알아 두는 편입니다. 황실에서 위협하는 방법이 한두 개가 아니거든요. 덕분에 헤이븐 영지에서 이 약은 사용이 금지되었습니다.”
한순간에 들어오는 정보에 제네비브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았다.
한낱 마약상을 귀족들이 알 정도로 유명한가, 라는 작은 의문부터 그럼 에드워드가 어째서 마약상의 아래에서 자라났는가, 하는 거대한 질문까지.
파인트리 서클 이사 자리를 범죄자가 차지해도 되는 건가? 학교가 그렇게까지 부패했나?
“근데 어떻게…… 그 사람이 파인트리 서클 이사장까지 된 거야? 정말 평범한 제약 사업을 하는 걸 수도 있잖아. 그럴 가능성도 없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현실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빈번히 일어난다고 한다. 제네비브는 그 말을 몸소 증명하듯, 저도 모르게 밀포드를 변호하는 듯한 말을 꺼냈다.
“작은 가능성이 있고 없고는 약사가 알려 준 7번가로 가 보면 알겠죠. 여기가 5번가니까, 한 오 분쯤 더 걸어가면 되겠군요.”
“그럼 우리 지금…… 마약 만들러 가는 거야?”
제네비브는 벙찐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달링 양은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아닌 이상, 제가 하는 말은 전부 안 믿을 것 같은데.”
“…….”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의심하는 것보단 확실하게 아는 게 낫죠.”
시온은 넓은 보폭으로 걸었다.
어느새 둘은 7번가에 도착했고, 약사가 말한 회색 지붕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
가장 낡고, 볼품없는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머리 잘 가리고, 억양 관리 잘하세요.”
제네비브가 말릴 새도 없이 시온이 건물을 올라가 낡은 문을 쿵쿵 두들겼다.
제네비브는 열리는 문을 보았다.
“…….”
녹슨 소리는 고막을 할퀴었고, 밖으로 깡마른 남자가 나왔다.
그는 ‘평범함’의 범주를 안 좋은 쪽으로 벗어났다. 왜인지 코는 비정상적으로 내려앉아 돼지를 연상시켰다. 두 눈 아래는 퀭했고, 며칠 잠을 못 잔 사람 같았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는 얇은 상의만 입고 있었다. 문을 연 팔은 뼈만 보일 만큼 가늘었고, 팔과 목 부근에는 긁은 듯한 선명한 손톱자국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