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2장. 실전 돌입 전 필수 예제 (3)
* * *
타티아나는 늦잠을 자 본 역사가 없다.
물론 그녀도 피곤할 때가 있고, 운동을 하기 싫을 때도 많다. 하지만 오랜 시간 쌓아 온 생활 리듬은 지키는 것보다 깨는 쪽이 더 어렵다.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고요를 깨고, 평소와 다른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어엇.”
자고 있던 게 아니었나? 아까 그건 분명히 수면 호흡이었는데.
사실 여기까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을 덥석 잡자, 타티아나의 운동신경은 사고 회로보다 빠르게 반응했다.
그대로 몸을 틀어 주먹을 날려 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훅이었다.
다행히 기드언도 검술가였다.
그는 어깨를 틀어 라이트 훅을 피했으나,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만큼은 생생하게 느끼고야 말았다.
‘맞으면 진짜 기절하겠는데?’
그는 본인이 주먹을 날려 놓고도 얼떨떨한 상태로 굳어 있는 타티아나에게 나직이 말했다.
“폭력은 쓰지 말자고 분명히 말했는데.”
자칫 잘못하면 발터 왕실사 최초로 매 맞는 남편이 한 명 나올지도 모르겠다.
늘 긴장하며 살아야겠군?
기드언이 피식피식 웃자 타티아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전하,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글쎄요. 그러기엔 너무 정타 아니었습니까?”
“진짜 아니라니까. 근데…… 주무시고 계시지 않았어요?”
타티아나는 자는 사람과 자는 척하는 사람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런 건 원래 숨 쉬는 소리만 들어봐도 아는 거다.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 검술에도 호흡이 중요한 거라서 이건 검술가라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의 생각과 달리, 기드언은 훨씬 전부터 깨어 있었다.
말했지 않나.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 검술에도 호흡이 중요한 거라고.
그는 진짜 자는 사람처럼 본인의 호흡을 얼마든지 꾸며 낼 수 있었다.
이것도 결국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물론 기드언도 처음부터 이딴 연기를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아침마다 텅 빈 침대를 마주하다 보니 서서히 궁금해졌을 뿐이었다.
몇 시쯤에, 대체 어떻게 나가길래 날 깨우지 않을 수 있는 건지.
그는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지만, 아내가 마음먹고 기척을 감추니 수면 중에는 알아챌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자는 척 지켜보자니, 타티아나는 이 방면에선 이미 인간 영역을 뛰어넘은 거나 다름없었다.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릴 때마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미려한 고양이.
‘자기 보법이 있구나. 전문 살수보다 나은데.’
만약 왕자비가 어둠의 세계로 전향한다면, 어떤 의뢰를 맡겨도 실패가 없으리라.
그게 살수가 됐든지 대도가 됐든지 간에 틀림없이 대성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어둠의 무법자는 남편에게 몸을 실은 펀치를 날려 놓고, 몹시도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순진무구하기까지 하다.
기드언은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침대에 눕혔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겁니까.”
“이 시간 되면 자동으로 눈이 떠져요. 운동하려고 했죠.”
“동은 좀 트고 합시다.”
“…….”
“너무 부지런하면 아랫사람들이 힘들어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기드언은 속으로 그 사람들이야 힘들든지, 말든지 하고 생각했으니까.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그는 타티아나의 앞머리를 괜히 건드리며, ‘이 알량한 근육에도 깰 시간을 줘야지’ 중얼거렸다.
타티아나는 ‘그러라고 새벽부터 움직이는 건데요…….’ 하다가 미간을 좁혔다.
근데 지금 알량하다고 했어요? 말 다 했나?
“폭력 쓰지 말자니까.”
“…….”
“우리 둘이 힘으로 싸우면 방 몇 개는 해 먹을 겁니다. 그럼 치우는 사람들이 힘들잖아.”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건 나 때문이 아닐 걸? 생각하며 말했다.
“전 구조물은 부수기보단 활용하자는 쪽이에요. 전하는 잘 모르겠지만, 신체 조건이 열세인 사람들은 원래 지형을 활용하는 방법부터 찾게 돼 있어요.”
“그럼 너랑 싸울 땐 일단 가구부터 다 부숴야겠네.”
기드언은 좋은 걸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렇게 하면 아랫사람들 힘들다면서요.”
“내가 그걸 진짜 불쌍해할 것 같아요?”
동도 터 오기 전의 새벽이라 두 사람 다 잠이 덜 깬 걸까? 기드언과 타티아나는 평소보다 훨씬 편한 어투로 시시덕거렸다.
그때 대화 중 몇 번이나 언급된 아랫사람이 문밖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 왔다.
“비전하, 혹시 깨어 계십니까.”
수석 시녀 이자벨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왕자가 잠들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소리를 낮추었으나, 대답은 타티아나가 아니라 기드언 쪽에서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냐.”
“……잠시 안에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이자벨이 문을 열고 침실 안으로 발을 들이자, 기드언은 아직 가운을 걸쳐 입지 않은 타티아나에게 이불을 둘러 주었다.
그도 비의 시녀 앞에선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본능적으로 손이 먼저 움직였다.
정작 본인은 상체를 다 드러낸 채, 막 자다 일어난 사람처럼 머리마저 부스스했으면서.
그걸 보며 이자벨은 생각했다.
‘비전하를 남한테 보여 주는 게 싫으시구나.’
그렇다면 이자벨이 들고 온 건 왕자에게 더욱 좋지 못한 소식이 될 것이다.
이걸 어떡해야 하나.
새벽부터 비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
“왕후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비전하와 오붓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싶으시답니다.”
“나랑? 설마 둘만?”
“……예.”
“지금?”
“……예.”
타티아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밖은 아직도 어둑어둑했다.
본인도 늘 이때 일어나긴 했으나, 지금은 발터에서 가장 부지런하다는 농부들도 일어나지 않을 시각이었다.
뭐, 식사 정도야 상관없지만…….
타티아나는 픽 웃으며 괜한 농담을 주워섬겼다.
“난 공복 운동을 선호하는데.”
하지만 긴장감 없이 웃는 타티아나와 달리 기드언은 몹시 짜증스러운 기색이었다.
주변 공기가 무거워지고 살기마저 은은히 흘러나왔다.
이제 보니 이 살기는 본인 심기가 불편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습관이었나 보다.
“조용하다 싶더니, 노인네, 심술이군.”
기드언은 이 상황을 그렇게 요약했다.
하지만 성의 여인들이 어떤 식으로 기 싸움을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이자벨은 조심스레 또 다른 가능성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오늘을 빌미로 계속 아침 문안을 요구해 오지 않겠습니까.”
“……아침 문안이라. 100년도 더 된 얘기가 아닌가.”
이제는 고릿적 문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예법에 기드언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왕후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지 몰랐다.
아침마다 웃어른께 문안 인사를 올리며 식사를 함께하는 오래된 왕실 예법.
좋게 봐 주면 미풍양속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는 숨겨진 비화와 부작용이 몇 가지 있었다.
가장 단순한 문제점부터 짚고 넘어가자면, 어마어마한 성의 면적이었다.
왕후와 기드언의 거처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당연할 만큼 멀었다.
매일 아침 오가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이 예법은 상당히 치졸한 방향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서로의 관계가 안 좋을 때, 기강을 잡는답시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몇 시간이고 밖에 세워 놓는 건 예사였다.
식사 때마다 온갖 트집과 꼬투리를 잡아 대면, 신경줄이 쇠심줄이 아닌 사람들은 소화불량에 걸리기 딱 좋았다.
“꼭 권위가 없는 사람들이 나이를 권위로 착각한단 말이지.”
기드언은 얼마 전 자신의 품에 들어온 보라색 고양이를 늙은 여우에게 던져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나 지금 소환당한 거지? 이렇게 시집살이가 시작되는 건가?’ 생각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식사 정도는 괜찮아요.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실수할 일도 없겠죠.”
그러자 기드언은 아무 죄 없는 타티아나를 노려보았다.
“관둬요. 나도 안 하는 걸 비한테 강요할 생각 없습니다.”
그는 곧바로 이자벨에게 명했다.
“내 비께서 어지럼증이 있어 아침엔 유독 힘들어하신다고 전해라.”
그러자 내내 태연하던 타티아나는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어지럼증? 당신, 우리 아빠가 누군지 몰라요?
십인장에서 천인장…… 왕실 주관 무투 대회 3연속…… 발터에서 가장 강한…… 에잇, 길어.
“전하, 저는 블룸인데요. 제가 빈혈이 있다고 하면 그걸 누가 믿어요?”
아아, 그게 문제였어? 바로 해결해 줄게.
기드언은 이죽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명했다.
“그럼 나한테 있다고 하든가. 곧 죽는다고 해라.”
“…….”
타티아나는 그의 단단한 어깨와 어제부터 감탄을 금치 못했던 전완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블룸의 딸이라면 기드언은 블룸이 살아생전 가장 아낀 제자였다.
심지어 몸까지 이런데 그걸 누가 믿겠냐 싶다.
사실 사람들은 이쪽을 더 안 믿을지도 몰랐다.
타티아나는 이건 상식적으로 통하지 않을 핑계라고 생각했지만, 기드언은 믿든지 말든지 그것까진 내 알 바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어차피 이것은 왕후궁에서 한번 부려 보는 심술이었고, 괜히 어울려 주었다간 앞으로도 쭉 끌려가게 된다.
그때 두 사람의 말싸움 아닌 말싸움을 지켜보던 이자벨이 간언을 올렸다.
“오찬은 어떻겠냐고 여쭈시지요. 전하께서 오전 일정을 다 마무리 지으신 뒤, 그 자리에 함께하고 싶어 하신다고,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어, 상당히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이자벨.”
내심 혼자 가는 게 부담스러웠던 타티아나는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드언은 타티아나를 곁눈으로 흘겨보다가 마지못해 수긍했다.
평소였다면 왕후가 어떤 말을 하든 무시로 일관했을 것이나, 저녁에는 파티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왕후가 왕자비를 염려하는 척 건강 상태를 운운하면 자신은 그 입을 막아 버리고 싶을 테지.
혹시 예법 이야기로 화제를 끌고 가며 타티아나가 경우 없다는 인상을 주입하려 들면 그건 더 짜증이 날 게 분명했다.
블룸은 평민 출신의 신생 가문이었고, 이는 귀족 사회에서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으니까.
이자벨이 고개를 조아린 채 방을 나서자, 기드언과 타티아나는 서로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분명 아까까진 평온한 아침이었는데.
그가 앞머리를 넘겨 줄 땐 간지러우면서도 꽤 다정하게 느껴져서, 타티아나는 이대로 수련을 거르고 잠들어 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그런데 그 아늑했던 분위기는 어디로 가 버렸나.
이래서 부부가 결혼을 하면, 잠재적 위험 요소로 양가 어른들을 빼놓을 수가 없나 보다.
한데 왜 나보다 당신이 더 저기압일까?
타티아나는 멀뚱멀뚱 기드언을 바라보다가 어떻게 하면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일단, 아무 때나 살기를 쫙 까는 그 습관을 고쳐 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할까.
그거 일반 사람들에겐 상당히 무서워 보일 것 같은데.
그때 도무지 입을 열 것 같지 않던 기드언이 갑자기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일단 사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