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7)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는데 말입니다.”
“예? 예, 전하. 말씀하십시오.”
“경은 친위대 대장이지 않습니까.”
“예에.”
“그렇다면 경은…… 내 비에게 검으로 이길 수 있을까?”
급작스러운 질문에 얼떨떨해하던 뮐러 공작은 이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거기서 답은 이미 나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타티아나는 황당해하며 기드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애들 싸움 붙이는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유치한 짓이란 말인가.
“무슨 질문이 그래요?”
“갑자기 궁금해져서.”
타티아나는 하지 말라는 듯 테이블 밑에서 그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그러자 기드언은 입 모양으로 언제부턴가 그들 사이에 자리 잡은 원칙을 말해 주었다.
‘폭력 금지.’
그는 근육을 갑옷처럼 허벅지에 두르고 있어, 살집이 잘 잡히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폭력이야, 생각하면서도 타티아나는 손가락에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뒤늦게 분위기를 수습한답시고 이렇게 말했다.
“양부께선 이제 현장에서 뛰실 나이가 아녜요.”
기사들의 전성기는 몹시 짧다. 뮐러 경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단 수장은 대체로 연장자가 맡게 되어 있었고, 그의 임무는 대장전을 벌여서 적장의 목을 베는 게 아니었다.
부하들을 잘 관리하고 적시에 적절한 전략을 세우는 일이었다.
물론 일선에 나가 대장전까지 뛸 수 있는 실력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신체적 전성기와 연장자의 지혜를 동시에 누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타티아나는 희끗희끗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양부에게 검을 겨누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친부는 어릴 때부터 그녀에게 가르쳤다.
‘타냐. 운동했다고 아무나 패고 다니면 안 된다. 특히 노약자와 어린이는 건드리면 안 돼. 그건 사내답지 못한 행동이야.’
‘난 사내가 아닌데?’
‘……아아, 그랬지, 참.’
당시만 해도 성에서 여기사를 찾아보기 힘들 때라, 블룸 경은 교관처럼 엄하게 말하다가도 한 번씩 이런 혼란에 빠지곤 했다.
그는 본인의 실수에 난감해하다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는 딸에게 이렇게 얘기해 줬다.
‘어, 음……. 그건 여장부, 요즘 애들 말로 상여자답지 못한 행동이란다.’
‘응, 난 상여자가 될 거야.’
‘우리 타냐, 기특하기도 하지.’
블룸 경은 진짜 예뻐 죽겠다는 듯, 타티아나의 말랑한 볼을 쭈웁, 쭈웁 빨다가 이렇게 속삭였다.
‘이길 게 뻔한 상대를 이겨 놓고, 거기에 도취하지 말거라. 고작 그런 걸로 채우는 인정 욕구는 정신이 나약하다는 증거야.’
‘…….’
‘약한 사람에게 베푸는 아량이야말로 네가 진짜 강하다는 증명이란다. 몸과 정신 모두 다.’
‘…….’
‘타냐, 아빠 말 이해했니?’
‘몰라. 아빤 왜 갑자기 이렇게 어렵게 말해? 그냥 약한 사람 괴롭히지 말라는 거잖아.’
‘세상에. 내 딸 똑똑하기까지 해. 머리는 엄마 닮아서 다행이야.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진심입니다.’
블룸 경의 조기교육이 성공한 걸까. 타티아나가 본래 잔혹한 성품이 아니어서일까.
그녀는 아무한테나 무작정 검을 겨누는 천방지축으로는 자라지 않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본인의 실력 향상이 최우선인 사람은 자기보다 약한 상대에게는 관심이 없다.
강한 상대와 한 번쯤 붙어 보고 싶은 호승심, 뭔가를 배우고자 하는 욕심을 채우기도 바빠서.
약자를 짓밟고 희열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기사가 아니라 동네 깡패다.
그러나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말을 듣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어야만 했다.
그녀는 지금 말 한 마디로 뮐러 경에게 물을 먹인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뛸 나이가 아니라는 건, 결국 그녀가 이긴다는 뜻이었다.
얼핏 들으면 배려해 주는 것 같았지만, 상대는 은퇴를 앞둔 나이라고 뼈아픈 현실을 알려 준 것이다.
실전도 치르지 않고 승자와 패자가 가려졌으니, 기드언도 이제 그만 해야 할 텐데…….
“그럼 전성기 때 기준으로 하면…….”
“아잇, 그런 쓸데없는 가정을 왜 해요.”
타티아나는 진짜 왜 이러냐는 듯 그의 허벅지를 다시금 꼬집었다.
기드언은 귓속말로 이유를 알려 주었다.
“난 개구리가 싫어요.”
“개구리? 개구리가 왜요.”
“징그러워.”
“…….”
타티아나는 ‘아아, 전하께서 양서류 공포증이 있으셨구나……?’ 하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일전에 기드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개구리가 맘대로 뛰게 내버려 두라고,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기드언은 지금 본인의 양서류 공포증을 고백한 게 아니었다.
뮐러 공작이 너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게 듣기 싫어서, 약간 짜증이 나 버렸다는 걸 솔직하게 얘기해 준 거였다.
타티아나는 다 알아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말라는 듯 기드언의 허벅지를 살살 어루만졌다.
두 사람을 싸움 붙이고 그녀가 이긴다 한들 그가 얻을 게 뭔가 싶다.
양부와 전력을 다해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이렇게 나오리란 걸 충분히 예상했다.
성격대로 하자면 더 비아냥대면서 분위기를 아주 뭐같이 만들어야 했는데, 그는 그냥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타티아나가 허벅지를 만지고 있는 게 꽤 마음에 들어서.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도 아니라서.
그는 한동안 손끝으로 식탁 위를 톡, 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 행위는 사실 본인의 생각을 정리하려는 목적보단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오기 위함이다. 그리고 뮐러 공작이 자신을 응시하자, 기드언은 입을 열었다. 그에게 오늘은 사실 이 말을 하기 위한 자리였다.
“앞으로는 친위대가 해야 할 일이 많을 겁니다.”
“…….”
뮐러 공작의 눈에는 의아함이 깃들었고, 동시에 혹시, 하는 기대 또한 피어났다.
기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블룸 경 사후,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친위대도 서운한 점이 있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국무는 국무이니, 앞으로도 왕실을 도와 계속 활약해 주길 바랍니다.”
기드언은 결국 귀족들의 예상대로 움직였다. 왕실 친위대에게 다시금 손을 내민 것이다.
왕실을 도와 달라고는 했지만, 저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 이면에 내포된 뜻은 2왕자가 아니라 나를 도우라는 거였다.
뮐러 공작은 기드언의 말을 무거운 표정으로 듣고 있더니 답했다.
“전혀 서운하지 않습니다. 친위대원 아홉이 사망한 전례 없는 사건이 아니었습니까. 전하께서도 상심과 실망이 크셨을 줄 압니다. 친위대 대장으로서 다시 한번 송구하단 말씀을 올립니다.”
당시 현장에서 직접 임무를 수행하지는 않았으나, 이는 친위대장으로서 올려야 할 당연한 사죄였다.
그러나 기드언은 그 사죄의 말을 듣고도 정확성을 기하고 싶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망자는 여덟입니다. 그 외 한 명의 실종자가 더 있는 거고.”
“……물론 그렇기는 하오나, 전하.”
공작은 말을 잇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안다.
재난과 사고 상황에서 실종자란 유해를 찾지 못한 사망자나 다름없는 의미라는 걸.
“전하께서는…… 혹시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너무나 희박한 가정이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그건 벌써 3년 전의 과거가 되어 버렸다.
기적적으로 생존했다면 왕실은 아니더라도 가족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을까.
기드언도 그 사실을 익히 아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기를 바란 적도 있으나…… 이젠 죽었다고 봐야겠죠.”
“전하께서 아직도 그 일을 맘에 담아 두고 계신지는 몰랐습니다.”
기드언은 더 없이 책임을 느낀다는 듯 고개를 떨구는 뮐러 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타티아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단어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 가며 내뱉듯이.
“늘 그날을 되새기며 과거 속에서 산 것은 아니나…….”
“…….”
“그래도 잊지는 않았습니다.”
“…….”
“내가 비께 약조드린 게 하나 있어서.”
친부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심란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던 타티아나는 그 말에 홀린 듯이 기드언을 바라보았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빛을 품고 정신없이 흔들린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고개를 숙여 버렸다.
* * *
잠시 과거로 돌아가서.
훈장을 수여할 목적으로 블룸 가를 처음 방문했던 기드언은 그 뒤로도 타티아나의 집에 여러 번 발 도장을 찍었다.
수백 번까지는 아니었으나 족히 백 번은 채웠던 것 같다.
기드언도 그걸 일일이 셈할 만큼 한가하지는 않아 횟수는 정확하지 않다.
블룸 경은 가족과의 저녁 식사를 중시하는 사람이라 늘 정시 퇴근을 고수했다.
그러나 왕자가 방문하면 별수 있나.
기드언은 늦은 밤, 블룸 가에 마련된 수련장에서 검을 배우곤 했다.
블룸 경은 억울했겠지만, 왕자를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블룸 경과 달리 그의 아내는 남편과의 저녁 식사를 그리 중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끔은 남편의 귀가 시간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왕자가 그 귀한 걸음을 해도 서재에 틀어박혀 밖을 내다보지 않을 때도 많았다.
상당히 무례한 일이었으나, 마법사들이란 또 그런 무례가 용납되는 특수 직군이었다.
대신 그 예쁜 저택에는 왕자를 손꼽아 기다리는 꼬마 아이가 한 명 있었다.
그때는 타티아나도 국방색과 검은색에 대한 선호가 형성되기 전이었다.
지금처럼 본인의 발소리나 존재감도 능숙하게 감추지 못했다.
기드언은 나무 뒤에 잠복해 있는 타티아나를 어렵지 않게 눈치채곤 했다.
그때 기드언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되게 거슬리게 하네.’
뭐 이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착각을 할 때가 있고, 살다 보면 지우고 싶은 과거가 한두 개 정도는 생기기 마련이다.
기드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착각을 한 적이 있다는 거다.
기드언은 그때 타티아나가 자신을 좋아해서 저러는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