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6)화 (33/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8)

그렇다고 타티아나를 바라보는 그의 온도가 한순간에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관심과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이는 많았지만 추앙하는 이들은 더 많았다.

누가 자신을 좋아한다 해서, 그 감정을 소중히 여기기란 어려웠다.

기드언은 그저 좀 성가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기드언은 대련을 마치고 블룸 경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창밖을 바라보았을 때, 타티아나는 방금 전까지 그가 머물렀던 수련장에서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기드언은 알게 됐다.

‘내 검술을…… 복제하고 있었군?’

타티아나는 기드언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기드언의 검술에 관심이 있는 거였다.

제 아비에게 따로 가르침을 받는 기드언을 부러워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린 마음에 좀 미워했을 수도 있지.

그렇게 이제껏 당연하게 여기며 품어 온 착각이 깨진 순간, 기드언은 좀 허탈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약간 불쾌했던 것 같기도 하다.

대체 왜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

기드언도 그때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의 블룸 가 방문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타티아나의 훔쳐보기도 여지없이 계속됐는데, 언제부터인가는 그녀도 이 염탐이 들통났다는 걸 아는 듯했다.

그럼 보통은 부끄러워하면서 그만두지 않을까?

체면과 수치심을 모를 나이가 아닌데. 또래 남자아이들을 한참 의식할 때인데.

타티아나도 자신의 행동이 민망하고 창피하기는 했다. 다만 순간의 창피함보다는 검술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거다.

그래서 기드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체면 따위는 살포시 뒷전으로 던져둔 거였다.

그 정도로 기드언 개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기드언은 그때도 딱 그 정도로 생각했었다.

어어, 네가 언제까지 숨어서 그 짓을 계속할 수 있나 한번 두고 볼게, 이런 심보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먼저 나가떨어진 건 의외로 그였다.

날씨가 늘 화창하고 좋은 건 아니라서. 어떤 날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차갑게 비가 와서.

기드언은 나무 기둥 뒤에서 비를 쫄딱 맞고 있는 타티아나가 신경이 쓰여 평소보다 일찍 백작 저를 나섰다.

하지만 며칠 뒤, 블룸 경은 한숨을 쉬며 기드언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 왔다.

‘전하, 여자아이는 참 어렵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사춘기가 오긴 왔나, 이젠 아비가 집을 나서는데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배웅은 벌써 끝인가 봅니다. 제가 서운한 내색을 하면 안 되겠지요?’

‘……그냥 어디 아픈 거 아닙니까. 감기라든가.’

‘감기요? 우리 타냐가요?’

내 딸은 고기를 세 접시씩 먹는데?

블룸 경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기드언은 그때 아버지뻘인 스승에게 한 소리 했다.

‘딸 정말 사랑하는 거 맞습니까?’

‘……예?’

‘눈에도 넣어도 안 아플 경의 딸, ……지금 아프다고.’

‘그걸 전하가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

타티아나는 정말로 고기를 세 접시씩 먹을 때라서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지만 친부의 판단도 옳았던 건가.

그녀는 기드언의 수련을 엿보는 행동을 그만두었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그를 본체만체하거나 사춘기가 온 새침데기처럼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

기드언은 좀 억울해졌다.

어깨를 붙잡고 너 정말 뭐냐고 물어보고 싶을 때도 많았다.

사람을 그렇게 선망하는 눈으로 바라봐서 오해하게 만들어 놓고. 혼자 경쟁의식을 불태우다가 제풀에 지쳐 미워하고.

내가 뭘 어쨌다고.

‘이제 나한테 흥미가 떨어졌어? 더 훔쳐봐도…… 얻을 게 없어서 그래?’

하지만 기드언도 그 무렵부터는 몹시 바빠졌다.

성인식을 치른 뒤 그는 왕자로서의 공무를 소화하기 시작했고 자연히 검술에는 소홀해졌다.

사실 그는 타티아나와는 달리, 검으로 끝을 보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게 애초부터 없었다.

기사들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안목 정도는 필요하겠다 여겼을 뿐이다.

그래서 겸사겸사 운동 삼아 시작했는데 웬걸, 알고 보니 천재였더라, 하는 케이스였다.

블룸 경은 그런 제자를 보며 몹시도 아쉬워하곤 했다.

왕자의 갈 길은 일반 검사와 다를 수밖에 없지만, 소질 있는 재목을 보면 욕심이 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스승의 마음이라서.

‘전하는 제가 이제껏 봐 온 그 어떤 젊은이보다 습득이 빠릅니다. 하지만 그 좋은 머리가 검술을 배울 때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평민 출신이라는 건 이렇게 한 번씩 티가 나기 마련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담백한 성정인가.

블룸 백작은 기드언에게 너무 솔직한 나머지 때로는 뼈아픈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기드언은 그게 흥미로웠다.

왕족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스승은 어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뛰어난 관찰력과 그걸 곧바로 응용할 수 있는 능력도 재능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진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시간을 더 투자해야 합니다.’

‘…….’

‘전하, 위기 상황에 반사적으로 나오는 건 머리로 외운 게 아니라 몸에 익을 대로 익은 습관입니다.’

‘…….’

‘여러 번 실패해야 여러 번 반복하는 법인데, 전하는 늘 너무 쉽게 성공해 버립니다.’

기드언은 실제로 머리가 좋아서 백작의 조언마저도 바로 이해했다. 단지 그 조언을 따를 의사가 부족했을 뿐이다.

발터에서 가장 좋은 수저를 물고 태어난 왕족도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건 평등했다.

기드언은 자신의 시간을 검술에만 투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경과 같은 훌륭한 기사를 곁에 두는 거 아닌가요. ……경의 딸도 나중에 경처럼 뛰어난 검사가 될 것 같더군요.’

아끼는 제자에게 따끔하고도 애정 어린 충고를 하고 있던 블룸 경의 입꼬리는 씰룩였다.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의 표정이었다.

‘전하,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딸 얘기를 좀 해도…….’

‘그게 실례라면 경은 이제껏 나에게 늘 실례를 해 왔습니다.’

‘…….’

‘하세요, 딸 자랑.’

찰나였지만, 그때 블룸 백작은 기드언을 보며 픽 웃고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속내를 감추기 위해 꾀를 부리고 있는 어린아이를 지켜보는 어른의 표정이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 미소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으나, 기드언은 자신이 간파당했음을 감지했다.

그러나 그를 두고 지금 잘못 짚었다든가, 불손하다 책하지는 못했다.

타티아나의 근황이 궁금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전하,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제 딸은 천재가 확실합니다.’

‘……경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예, 전하. 끈기 있는 천재를 당해 낼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제 딸은 언젠가 반드시 저를 뛰어넘을 겁니다.’

‘좋은 일이네요. 훗날 발터에 큰 보탬이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전 제 딸이 위험한 일을 하는 건 싫습니다.’

블룸 경은 참 고민이라는 듯 수심 어린 얼굴로 한숨을 쉬었고, 기드언은 어이가 없었다.

그가 봤을 땐 늦어도 한참 늦은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위험한 일을 하는 게 싫었으면, 진작에 검을 뺏었어야죠. 경은 늘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까.’

수제자를 대하듯 양팔 걷고 엄격하게 가르친 적도 없었지만, 동시에 양팔 걷고 뜯어말린 적도 없다.

블룸 경은 늘 타티아나를 지켜보다가 그녀가 헤맬 때 약간의 방향만 제시해 주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대해 이렇게 변명했다.

‘딸이 좋아하는 걸 아비 된 자가 어떻게 뺏습니까. 부모라도 그리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저도 그걸 모르겠습니다, 전하. 여자아이를 키우는 건 너무 어렵습니다.’

‘……타티아나 양은 아이가 아니잖아, 이제.’

백작과 기드언은 그날,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고 많이 웃기도 했다.

사무적이기보단 온기가 느껴지는 대화.

그건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눈 사담이 되고 말았다.

기드언은 발터의 왕자로서 첫 지시를 내렸다.

그 상징적이고 영광스러운 임무를 수행할 사람으로 그가 지목한 건 친위대 부대장인 블룸 경이었다.

그리고 블룸 경은 그 임무를 수행하다 기사들과 함께 북부의 차가운 땅에서 숨을 거뒀다.

범인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고.

전쟁 영웅이 이런 식으로 숨을 거둘 거라고 어느 누가 예상했을까?

기드언은 이 허망하고 어이없는 죽음을 끝끝내 납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죽음을 누구보다 슬퍼한 이는 따로 있었을 것이다.

남은 가족. 이제는 열여덟이 된 타티아나.

하지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타티아나는 한없이 꼿꼿했다.

많은 이가 슬퍼하는 가운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가문의 상징인 푸른 장미를 헌화할 뿐이었다.

이게 상주로서 내가 해야 할 의무라는 듯, 마지막까지 사람들 앞에서 지켜야 할 블룸의 명예라는 듯.

엄숙한 장례 절차를 끝마치고 타티아나는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

기드언은 수행원들도 다 물린 채 그런 그녀를 쫓아갔다.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 돌려세우고, 초록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블룸 경이 살아생전 칭찬해 마지않았던 두뇌는 정신없이 굴러갔다.

머릿속과 입안에는 허울 좋은 말들이 수도 없이 맴돌았다.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알았더라면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을 거야. 정말이야.

그런데 타티아나. 잘 생각해 봐. 이건 무의미한 가정이잖아.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어. 나도.

기드언은 그중에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했다.

이건 아버지를 잃은 딸 앞에서 늘어놓기에는 너무 간악한 자기합리화였다.

한데 타티아나는 기드언이나 왕실을 원망하는 눈이 아니었다. 도리어 네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이렇게 물었으니까.

‘여긴 왜 오셨어요.’

‘왜라니.’

‘……올 이유가 없잖아요. 이제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