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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7)화 (34/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9)

기드언은 그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매번 검술을 사사하기 위해 백작 저를 방문해 왔다. 타티아나가 지적하고 있는 건 그 부분이었다.

이제 아버지가 없으니, 당신이 여기 올 일도 없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우리 둘 사이에는 정말로…… 그게 다인가?

기드언은 그 순간 깨닫고 말았다.

자신은 지금껏 검을 배우기 위해 백작 저를 드나든 게 아니었다.

그저 타티아나가 궁금해서, 그녀가 보고 싶어서 검을 명분으로 삼았던 것뿐이었다.

그 허울 좋은 핑계가 사라진 순간.

둘 사이에서 블룸 경의 존재를 제하고 나자 그는 본인의 마음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타티아나에게 자신이 여기에 와 있는 진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사실은 네가 좋아서였는데, 뒤늦게 그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상황이 다 망가져 버린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그런 그를 기운 없는 표정으로 쫓아내려 들었다.

‘……그만 가세요.’

기드언은 그녀를 차마 혼자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럴싸한 변명이나 내세울 수 있는 핑계를 찾지 못해 선 자리에서 입술만 짓씹을 뿐이었다.

그리고 계속 기드언을 밀어내던 타티아나의 눈에는 서서히 원망과 설움이 들어찼다.

아. 나를 미워하나. 당연하겠지. 이제 꼴 보기도 싫겠지.

어떠한 변명과 보상도 그녀에게 위로가 될 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 원망의 화살을 왕실과 기드언에게 겨누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저택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던 이유는 단지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꼭 무너질 것 같아서였다.

안 되는데. 사람들 앞에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데.

의연하고 어른스럽게, 기사로 죽은 우리 아빠 가는 길에 내가 꼿꼿이 서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봐 온 익숙한 얼굴 앞에서 그 마음가짐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가라고, 흑, 했잖아.’

‘……타티아나.’

‘이런 거 보여 주기 싫단 말이야……!’

타티아나는 얼굴을 가린 채 흐느꼈고 기드언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망설이다가 그녀를 따라 잔디 위에 앉았다.

그리고 들썩이는 어깨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내가 잡을게.’

‘…….’

‘네 아버지 그렇게 만든 사람, 네 눈앞에 꿇려 앉혀 놓겠다고.’

‘…….’

‘약속할 테니까…… 울지 마.’

아니야, 그냥 울어.

나는 마력이 없단 사실에 실망해서 매일같이 훌쩍이던 널 알아.

내 재능을 훔쳐보며 부러워하고 때로는 주눅 들던 네 모습을 다 아는 사람이야.

그런데 네가 이런 상황에서까지 내 앞에서 블룸으로 서 있을 필요는 없잖아.

타티아나는 그의 품 안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 내어 울었다.

며칠 사이 벌어진 일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버거웠겠지.

타티아나는 한참을 울다가 꼭 혼절한 사람처럼 잠이 들었다.

그런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손수 덮어 준 후에야 기드언은 저택을 나섰다.

그가 타티아나에게 한 약속.

그걸 그녀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어쩌면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기드언은 생각했다.

범인 색출, 일벌백계.

그딴 건 순직자의 가족에게 왕실이 으레 하곤 하는 말이니까.

가증스럽고 알맹이 없는 허언처럼 들렸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기드언은 비단 왕자로서 타티아나에게 얘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때 그냥 한 명의 남자였다.

좋아하는 여자의 눈물 앞에서는 그 약속의 실현 가능성을 따지고 셈할 수 없는 남자.

눈물을 거두기 위해서라면 어떤 말이라도 다 주워섬길 수 있는…… 그냥 보통의 남자.

기드언은 땅거미가 진 하늘 아래 서서 타티아나가 있는 백작 저를 아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 * *

뮐러 부부와 식사를 마친 뒤, 기드언과 타티아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밖을 거닐었다.

두 사람은 지금 같은 날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그를 힐끔 곁눈질했지만 기드언은 갑자기 그 입을 봉해 놓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결국 먼저 말을 꺼낸 쪽은 그녀였다.

“못 잡았죠?”

기드언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몹시도 고요한 목소리로 물었다.

“실망했습니까.”

“……아니요.”

입맛이 씁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버렸다.

잡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기에 큰 실망도 없다.

도리어 타티아나는 다른 게 좀 놀라웠다.

“그걸 아직도 맘에 담아 두고 계신 줄은 몰랐네요.”

“그런가요. 당연한 건데요. 난 오히려 티티가 다 잊어버린 줄 알았습니다.”

“…….”

큰일을 겪었고 중간에 정신까지 잃었다지만 설마 그 짧은 대화도 기억 못 할까.

그러나 타티아나는 그날 일을 잊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냥 묻어 두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칼춤을 추었던 건 어려서 그랬다고, 그렇게 귀엽게 넘어갈 수라도 있지.

이건 들춰 봐야 어느 누구에게도 유쾌하지 못한 기억이었다.

당연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날 너무나 감정적이었다.

걱정이 되어 따라온 사람에게 냉랭하게 굴었고, 나중에는 울다가 좀 퍼붓기도 한 것 같다.

사실은 기드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몇 번 퍽퍽 치기도 했는데, 그에게서 폭력 금지라는 말이 종종 나오는 걸 보면 그때 많이 아팠나 싶어진다.

타티아나는 머쓱한 얼굴로 기드언의 시선을 피하며 딴 곳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 얘기 그만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기드언은 다 알아들었으면서도 그녀의 눈을 마주하며 물어왔다.

“혹시…… 날 원망합니까.”

타티아나는 그 말에 탄식하듯 한숨을 쉬었다.

이 질문은 예, 아니오로 대답하기에는 좀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일단은 고개를 저었고 그 뒤에는 그에게 되물었다.

“전하는 제가 전하를 필요로 할 때요. 저에게 오시다 교각이 무너지면 그게 제 탓이라고 하실 건가요?”

그런 건 사고다.

타티아나의 탓도 기드언의 부주의도 아니라는 거다.

아버지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기드언은 자신의 기사에게 지시를 내린 거고 아버지는 그걸 수행하려 했을 뿐이다.

물론 그녀도 처음부터 이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족을 잃으면 모든 게 다 원망스럽고 꼴도 보기 싫어서, 그녀는 한때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유 없이 미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신한테 잘못을 돌리면…….

‘우리 아빠는 잘못된 명령을 수행하다 죽은 사람이 되는 거잖아. 난 아빠의 행동이 그렇게 기억되는 건 싫어.’

게다가 타티아나는 알고 있었다.

기드언은 아버지의 실력과 큰 그릇을 인정해 준 사람이었다.

전쟁 영웅이지만 평민 출신이라는 딱지 때문에 백작 위에 머물러 있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더 높은 자리를 주고자 했었다.

아버지도 기드언을 그렇게 대했다.

그는 아버지가 아낀 제자였고, 동시에 아버지가 택한 주군이었다.

그러니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이제 그날 일에 너무 얽매이지 않았으면 했다.

늘 과거 속에서 산 것은 아니나 잊지는 않았다는 그의 말이 그녀까지 속상하게 만들어서.

혹시라도 책임과 죄책감을 느낀다면 조금은 덜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말주변을 다 끌어모아 교각을 예시로 든 것인데……. 질문형으로 말한 것이 문제였나?

그는 거기에 또 굳이 대답을 해야겠는 모양이었다.

“아뇨. 그건 티티의 탓이 아니죠. 그러니 일단 교각을 만든 사람을 찾아서 참수하라 명하고…… 티티한테는 헤엄쳐서 가겠습니다.”

“……그냥 예시예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요. 너무 그렇게 진짜처럼 대답하지 말아요.”

타티아나는 한 번씩 왜 이러냐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드언은 그걸 보며 피식피식 웃었으나 얘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너무나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듣고 있으려니, 남의 속을 다 뒤집어 놓는 소리였다.

“그리고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나 조만간 공국에 갈 겁니다.”

“……어디요?”

“북부요.”

“……세상에. 당당한 것 좀 봐.”

타티아나는 너무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애써 좋게 좋게 생각하고 말해 줬더니, 그는 그녀가 정말로 모든 걸 다 극복한 줄 아는 걸까?

지난 일을 들추어내 사람을 심란하게 만들어 놓고, 본인도 북부에 가겠다고 말하면 아내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냐는 거다.

이런 건 좀 야속했다. 잔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금 저한테 너무하시는 거 아닌가요?”

“뭐가요.”

“솔직히 말해서 성격이 가끔 못되신 것 같아요.”

타티아나는 눈을 흘겼지만 ‘못되신 것 같아요!’ 주장하는 목소리가 너무 낭랑해 기드언은 또 조금 웃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가 못됐다는 걸 설마 오늘에서야 안 걸까? 만약 그렇다면…….

‘넌 결혼까지 해 놓고도 여전히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거네.’

기드언은 계속 피식거렸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이런 상황에서 웃으면 상대의 눈에는 얄미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의 눈매와 목소리는 점점 뾰족해졌다.

“거길 전하가 왜 가는데요?”

“북부 시찰은 때 되면 왕실이 정기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간은 상황이 좋지 않아서 미뤄 둔 거죠.”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전하가 직접 가냐고요.”

그러자 기드언의 머릿속에는 고약한 질문들이 떠올랐다.

그럼 이번에는 어떤 기사를 보낼까. 네 친부에 이어 양부를 보낼까?

근데 그렇게 해도…… 넌 괜찮겠어?

그는 그런 말을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 놓지는 않았다.

이 말을 하면 타티아나가 아플 테니까.

대신 그는 만만치 않게 고약한 농담을 내뱉었다.

“그럼 부왕께 가라고 할까요?”

“…….”

“비의 시아버지는 당장 내일 돌아가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건강 상태…….”

“아잇! 말 좀…….”

엿듣는 사람도 없는데 타티아나는 하지 말라는 듯 그의 어깨를 밀쳤다.

기드언은 반보 정도 뒷걸음질 쳐 주는 것 같더니, 다시금 다가왔다. 그리고 타티아나의 허리를 휘감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자 타티아나는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이내 그녀는 그의 가슴팍에 양손을 올려놓았지만, 초록 눈동자와 양 볼에는 부루퉁한 기색이 여전했다.

기드언은 그걸 미소 지으며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가지 말까요?”

가지 말라고 한들 그러겠노라 수용할 생각인 건 아니다.

이 시찰엔 상징성이 있었고, 그에게는 이제 자신을 대신하여 그 임무를 맡기고픈 기사가 없다.

아우에게 이 기회를 양보하여 발판 삼게 놔둘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도 이 하나 마나 한 질문을 구태여 던지는 이유는…….

글쎄. 그냥 타티아나가 뭐라고 대답할지 알고 싶어서일 것이다.

‘난 결혼까지 해 놓고도 네가 계속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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