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10)
그러나 타티아나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그녀는 이런 류의 질문이 좀 별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들어 본 적은 적잖이 있다.
블룸 경은 먼 길을 떠나야 할 때 가족의 눈치를 보며 ‘그냥 가지 말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종종 했으니까.
그때마다 타티아나의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알아서 하고. 이제 그만 물어보면 안 돼? 솔직히 나 좀 지겨워.’
‘……그랬어?’
‘어. 올 때 선물이나 사 와.’
시원시원하다 못해 추위가 느껴지는 반응이었지만 집을 나서야 하는 사람의 마음은 한결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어머니는 어머니의 방식대로 아버지를 배려한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타티아나는 어머니처럼 깊은 속내를 갖고 행동할 자신은 없었다.
이렇게 대답해도, 저렇게 대답해도 개운하지 않은 마음은 그녀 안에 계속 남아 언젠가는 티를 낼 것 같다.
‘가세요’ 한다면 걱정스럽고 야속한 마음 때문에 그가 없는 내내 울적하겠지.
‘안 돼요, 가지 마세요’ 한다면 이 사람이 나 때문에 할 일을 못 하는구나, 내가 어른스럽지 못했구나, 죄책감으로 마음이 불편하겠지.
결국 무엇을 선택해도 그녀는 만족스럽지 못하리라는 거다.
그런데 지금 본인 마음 좀 편해지겠다고, 나한테 이딴 질문과 보기를 가져오는 거야?
왜, 내가 나중에 투정하면 ‘네가 가라며’ 하시게?
내가 나중에 미안해하면 ‘네가 가지 말라며, 왜 이제 와서 그러는 건데’ 할 거야?
다 나 때문이었다고 할 거냐고.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이런 상황을 끌고 온 것 자체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 이와 비슷한 상황은 계속 온다. 아주 끊임없이 온다.
매번 주제만 조금씩 바뀔 뿐이지.
그때마다 이렇게 뾰로통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으니 타티아나도 자신만의 방법을 한 번쯤은 연구해 보는 게 생산적일 것이다.
상대에게도 자신만의 꿈과 인생이 있다는 걸 잊지 않고 존중하되, 나의 감정에도 솔직하게.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다가 서운함을 쌓아 두면 언젠가는 상대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무작정 배려만 하다 피해 의식에 젖는 것도 싫었고, 남편을 영문 모를 가해자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타티아나는 오랜 시간 고심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기드언을 틈틈이 노려봐 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녀는 일단 북부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당신이 지금 내 어떤 것을 건드렸는지부터 설명해 주기로 했다.
그래야 그녀가 까칠하게 반응해도 덜 쪼잔해 보일 게 아닌가?
이런 밑밥은 원래 필요하다.
“전하. 기사들 상당수는 자신만의 징크스를 가지고 있대요. 전하도 알죠?”
기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에 나갈 때는 꼭 오른발부터 내디뎌야 하는 사람, 면도날에 뺨을 베이면 그날 운동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쉬는 사람.
기사들의 징크스는 종류가 다양했고, 가끔은 창의적이기까지 했다.
타티아나는 한때 어리고 철없는 마음에 그들의 징크스가 멋져 보였던 적이 있다.
괜히 있어 보이고, 기사들이라면 으레 다 가지고 있는 영광스러운 흉터, 훈장처럼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리고 세월이 지나 그녀는 어른이 되었고, 그들처럼 듣기만 해도 꺼려지고 되도록 피하고 싶은 게 생겨 버렸다.
“저한테는 북부가 그래요. 이름만 들어도 불길하고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고요.”
“…….”
그곳은 그녀에게 죽음의 땅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살아생전 그녀에게 징크스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그런 미신에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냐고.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시간에 뛰쳐나가 한 놈이라도 더 해치워야 한다는 얘기였다.
본인도 얼결에 말하곤 깜짝 놀라 얼버무렸지만, 타티아나는 그때 다 들었다.
이러니 애 앞에서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애들은 다 알아듣고 기억한다.
그러나 어쩌면 블룸 경은 잘 말한 것인지도 모르지.
타티아나는 그날 이후, 아빠는 확실히 뭔가 다르구나. 징크스라는 건 없는 편이 낫구나,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만에 하나 본인이 손쓸 수 없는 사이 징크스가 생겨 버렸다면 그딴 건 극복하는 게 좋겠다고.
타티아나는 기드언의 가슴팍에 올려놓은 손을 꼼지락대다가 괜히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래도 기왕 가기로 결정하셨으면 원하시는 결과를 들고 오세요. 한 군데도 다치지 마시고요.”
“…….”
“전하가 무사히 돌아오셔야 제 징크스가 깨지거든요.”
타티아나를 바라보는 기드언의 입가에는 서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우거진 숲을 닮은 타티아나의 녹색 눈동자. 하나같이 예쁘고 귀여운 말만 내뱉는 사랑스러운 입술.
예나 지금이나 무엇이든 맹세하고 싶어지는 얼굴이다.
들어주고 싶고, 들어줘야 했고, 들어줄 수 있는 바람이었다.
기드언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촉, 맞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요. 내가 깨 줄게요.”
기드언은 타티아나가 정말로 좋았다.
* * *
기드언이 외부 일정을 떠난 뒤, 타티아나는 전과 다름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것도 아주 알차게 보냈다.
혼자 있을 때 외롭지 않아야 결혼을 해도 외롭지 않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상대는 24시간 나만 바라보며 일거수일투족을 보살펴 줄 수 없다.
배우자는 애초에 그러라고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의 전부를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원래 없다.
심지어 엄마도 자기 아기한테 그 정도로 해 줄 수는 없는 거다.
그런데 다 커서 배우자한테 외롭다고 칭얼거릴 건가?
아기는 그래도 귀엽기라도 하지?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는 양쪽 다 병들게 만들 뿐이다.
배우자도 사람이다.
한쪽이 너무 기대면 당연히 쓰러진다. 그리고 둘이 한꺼번에 넘어지면 그때는 일어나는 게 더욱 힘들다.
이 험난한 세상, 나란히 바닥에 누워서 맞이할 텐가?
그러니 어지간하면 짝다리 짚고 어디 기댈 생각하지 말고, 튼튼한 두 다리로 굳건히 서 있자.
결혼은 상대에게 기댈 수 있어 안 외로운 게 아니라, 나란히 함께 서 있을 수 있어서 덜 외로운 거니까.
다행히 타티아나는 근래 들어 할 일이 참 많았다.
하루 종일 검만 휘둘러도 시간이 금방 가는데, 선대 왕자비들이 내탕금과 예산을 어떻게 사용해 왔는지도 알아봐야 했다.
내친 김에 짬을 내서 친구들도 만날 생각이었다.
원래 세상에서 제일 바쁜 게 백수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여기에 더해 취미 생활까지 알차게 즐기고 있었다.
그녀의 취미는 바로 마법서 정독이었다.
하지만 이 은밀한 독서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본인의 취미를 남에게 보이기는 다소 부끄럽다고 생각하며 숨겨 왔기 때문이다.
타티아나는 여전히 마력이 없었다.
그건 사실상 10살 무렵에 이미 끝난 얘기였다.
비록 그녀가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6, 7년 정도가 더 걸렸으나, 그녀도 이제는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력서만큼은 손에서 놓지 못했다는 걸 누가 알면…….
‘나 상당히 구질구질해 보이겠다, 그치?’
어쩌면 집착과 미련이 너무 심한 나머지 음습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타티아나가 이걸 아무리 혼자만의 영역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 한들, 하녀들과 시녀들의 눈까지 피할 수 있었을까?
가능했다. 이 책들은 발터어로 쓰인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건 타티아나의 모친이 새롭게 만든 문자였다.
어쩌다 이런 위대한 짓까지 저지르셨냐고?
마력이 없어서 훌쩍훌쩍 우는 딸아이를 달래려다 얼결에 만들었다.
육아는 본래 힘들고, 천재는 항상 그 스케일이 남다르다.
‘타냐, 울지 마렴. 마력이 없어도 마법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아.’
‘……어떻게?’
‘엄마처럼 책을 쓸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이론을 가르칠 수도 있잖니?’
만약 그때 타티아나가 몇 살만 더 나이가 많았더라면 이런 예시를 들어 가며 모친의 말을 반박했을 것이다.
‘엄마, 물에 뜨지도 못하는 사람이 남들한테 수영을 가르칠 수 있나요?’
가부를 떠나서 배우는 사람들이 선생을 신뢰하겠냐는 거다. 학생이 모집되겠냐고.
하지만 그때는 타티아나도 어려서 깊게 파고들기보단 떼를 쓰고 투정부터 부렸다.
‘싫어! 그건 주인공이 아니잖아! 누구 가르치는 거 말고, 난 내가 하고 싶단 말이야.’
타티아나는 최고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저택에 드나드는 마법사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고 싶었다.
기대감, 의구심, 회의감, 갖가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타티아나의 어머니는 딸아이의 말에 한숨을 쉬더니 몹시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감추기 어려웠는지 어린 딸을 잠시 등지고 앉기까지 했다.
‘타냐, 남들에게 박수받고 우쭐한 건 잠깐이란다.’
‘…….’
‘그 잠깐을 즐기겠다고 네 평생을 바칠 거니?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 건 어른한테도 힘든 거야.’
‘…….’
‘그런 마음가짐으로 할 거면 시작도 하지 말거라.’
그건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10살 남짓한 아이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다.
솔직히 말해서 타티아나는 성인이 된 지금도 어머니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다만 엄마가 자기에게 실망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너무 서럽고 무섭기까지 해서 그날 밤엔 베개를 눈물 콧물로 흠뻑 적셔 놓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타티아나의 어머니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딸에게 사과했다.
밤을 꼬박 새웠는지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가 들고 온 건 난생처음 보는 문자와 해독법이었다.
‘이건 아빠도 모르는 거야. 타냐랑 엄마만 읽을 수 있는 암호니까 아무한테도 알려 주면 안 돼. 알았지?’
‘정말? 응, 나, 아무한테도 안 알려 줄게.’
본인과 어머니만이 읽을 수 있다는 글자는 어린 타티아나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학습 욕구가 한껏 고취된 딸을 보며 블룸 부인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제는 엄마가 미안해. 엄마도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해서 그래.’
‘…….’
‘화낸 거 사과할게. 엄마 용서해 줄래?’
그때 그냥 ‘응, 사랑해’라고 대답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이미 정신을 딴 데 빼앗긴 타티아나는 고개만 건성으로 두어 번 끄덕끄덕했던 것 같다.
그만큼 그녀에게는 매력적인 선물이었던 것이다.
한데 타티아나의 부모는 늘 그랬다.
보통의 부모라면 토라진 딸을 위해 사탕이나 인형 정도를 사다 주었을 텐데.
타티아나의 부친은 무투 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해 왔고, 타티아나의 모친은 하룻밤 만에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어릴 때는 그게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했는데, 이제는 다 컸는지 타티아나도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어머니, 아버지. 조금만 덜 멋지게 살다 가지 그러셨어요……. 아니, 남들은 태어난 김에 그냥 산다고 하던데…….’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이런 말도 못 들어 보셨나요?
두 분께서 너무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신 덕에 딸은 매번 기가 죽습니다.
이 세상을 살기가 힘들다고요.
그렇다고 절대 원망하는 것은 아녜요?
예, 자랑스럽긴 한데요, 정말 아무나 누리기 힘든 학습 환경이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다 크고 보니 제가 부족해서 잘 받아먹지 못했더군요.
뭐, 아무튼 딸의 입장은 이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