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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9)화 (36/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11)

타티아나는 한동안 키득거리며 블룸 부인의 필체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미 수백 번도 더 읽은 마법서를 또 한 번 한 자 한 자 음미하며 탐독했다.

그녀가 책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방을 나섰을 때,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몽글몽글하고 평화로웠다.

모친께서 펼친 마법 세계가 참으로 주옥같고 아름다웠던 탓이다.

타티아나는 어릴 때 그 경이로운 마법 세계를 눈앞에서 생생히 목격한 적도 많다.

환영 마법으로 만든 나비들은 팔랑팔랑, 백작 저를 날아다녔고, 어머니가 기분이 좋은 날엔 겨울에도 꽃이 피었다.

아빠를 놀라게 해 주자며 저택을 과자 집으로 바꿔 놓은 적도 있다.

물론 아주 가끔, 정말 가끔은 사고도 있었다.

불 속성 마법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던 블룸 부인이 집을 홀라당 태워 먹을 뻔한 적이 두어 번 정도 있기는 했지만…….

원래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것만 기억하는 거다. 아름다운 것만.

타티아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응접실을 돌아다니다가 소파에 앉았다.

왕자비가 밖으로 나오자 시녀들이 일제히 일어서려 했으나, 타티아나는 우리 같이 앉자며 손짓했다.

그 와중에도 골반 틀어지니 다리는 절대 꼬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타티아나는 ‘에이, 모르겠다’ 하더니 팔을 베고 소파 위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그건 남들 눈에는 몹시 팔자 좋고 한가로워 보이는 자세였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말했지 않은가. 세상에서 가장 바쁜 건 백수라고.

타티아나는 지금 본인의 또 다른 취미 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두 명의 뛰어난 기사가 서로를 노려보며 씩씩대고 있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시작될 기세다.

한 명은 타티아나, 나머지 한 명은…….

음, 생각나는 이름이 딱히 없으니 기드언이라고 하자. 기드언 좋네.

기드언은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보법을 구사하더니 그녀에게 다가온다.

그는 무거운 검을 용맹하게 휘두르지만, 유연성이 뛰어난 타티아나!

허리를 꺾어 그 검을 피한다.

그녀는 마치 한 명의 무희처럼 그대로 빙글 돌아 바로 선다.

그리고 지금껏 갈고닦아 온 필살기를…….

‘아아, 기드언 선수, 그걸 피하네요.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타티아나의 또 다른 취미는 가상의 대진 상대를 머릿속으로 소환해 대결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녀는 뮐러 가에서 지낼 때도 검을 잡지 않을 땐 늘 이렇게 시간을 보냈다.

마냥 논 게 아니라는 거다.

실제로 검술가에게 이미지 트레이닝은 아주 효과적인 훈련 방식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녀가 훈련 중이라는 걸 주변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남들이 봤을 땐 그냥 눈 뜨고 자는 사람 같았다.

수시로 손을 움찔움찔하며 인상을 쓰는 게 꼭 가위에 눌린 것 같기도 했다.

마주 앉아 있던 시녀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비전하가 또 왜 저러실까?’

‘몰라. 가만 보면 참 독특해. 평범한데 뭔가 하나씩 이상해.’

시녀들은 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들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왕자비가 기왕 자리를 깔고 누운 김에 피부에 좋은 거나 듬뿍듬뿍 발라 줄 생각이었다.

타티아나는 여느 귀부인들과는 달리 햇빛을 보는 일이 무척 잦았다.

젊음이 최고의 무기라고, 아직은 티가 나지 않는다지만 시녀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바로 관리를 시작해야 할 때라는 걸.

타고난 것만 믿고 방치를 하다가는 한 방에 훅 가는 거다.

그녀들은 왕자비의 고운 피부를 영원히 지켜 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오, 안 열려. 네가 해 봐.”

코니는 낑낑거리며 병뚜껑을 열려다 어어? 이거 쉽지 않네? 하며 동기에게 병을 떠넘겼다.

“안 되지?”

“어. 별것도 아닌 게 사람 성질 뻗치게 하네.”

시녀들이 쑥덕거리며 부산을 떨자 이자벨은 눈을 흘겼다.

아무리 떨어지는 낙엽에도 하하호호 할 나이라지만 이곳은 왕자궁이었다. 좀 정숙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소란스럽게 굴지 말거라.”

한 차례 주의를 준 이자벨은 머리를 쓰지 못하는 젊은 친구들이 안타까워졌다. 그래서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숟가락으로 틈을 벌리거나, 거친 천으로…….”

하지만 세상에는 머리를 쓰는 것보다 힘을 쓰는 게 편한 사람도 존재한다.

타티아나가 그랬다.

그녀는 머릿속 대진 상대에게 이제 막 회심의 펀치를 날리려던 차였다.

하지만 주변 소음 때문에 계속 공격 타이밍이 뒤로 밀리자 한숨을 쉬어야만 했다.

타티아나는 시녀들에게 일단 그거 이리 갖고 와 보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별로 큰 힘도 들이지 않는 것 같더니 톡, 하고 뚜껑을 땄다.

그녀는 시녀들에게 다시금 병을 건네며 가서 일들 보라는 듯 훠이, 훠이 손을 휘저었다.

대충 주변 상황을 정리했으니, 이제 다시 싸움을 시작할 차례였다.

타티아나는 방금 전 날리려다 접어 둔 주먹을 머릿속 상대에게 힘껏 휘둘렀다.

그런데…….

‘아, 어림없는 공격.’

기드언 선수, 타티아나 선수의 왼손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양손잡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요?

이래서 본인의 비기는 함부로 노출하면 안 되는 거지 말입니다.

타티아나는 고뇌 어린 표정으로 이마를 턱 짚었으나, 시녀들은 ‘호오’ 하며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있었다.

그녀들은 왕자비가 손수 따 준 유리병을 사이에 두고 반짝이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건 좀 멋있었다, 그치.”

“무심하게 따서 건네주고 이쪽은 쳐다보지 않는 게 포인트.”

“그렇지. 멋있는데 멋있는 걸 모르는 게 포인트.”

시녀들은 키득거렸고 쓰라린 패배감에 젖어 있던 타티아나는 눈을 흘겼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들 신이 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타티아나의 눈매가 더욱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그녀는 문가를 빤히 바라보며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구 온다.”

허겁지겁 달려오는 발소리.

보폭이 아이보단 넓고 성인 남성보단 좁다.

“여자 한 명.”

“…….”

“그 뒤에 따라오는 건 우리 쪽 경비병이야.”

“……아, 예에.”

시녀들은 왕자비를 모신 이래 이 같은 경험을 벌써 몇 번째 하는 중이었다.

어떨 땐 성별만 예측하는 게 아니라 누구 발소리인지까지 정확하게 알아맞히곤 했다.

개가 아닌 인간의 청력으로도 사람의 발소리를 구분하는 게 가능하다는 걸 시녀들은 처음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들의 귓가에도 도, 도, 돗 하며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문가로 다가갔는데 그 손님은 이번에는 갑자기 쾅, 쾅, 부서져라, 나무 문을 두드려 댔다.

아아, 이거 갈아 끼운 지 얼마 안 된 문인데…….

하지만 시녀들의 눈은 곧 휘둥그레졌다.

“오, 올케! 나, 나 좀 숨겨 줘!”

이 다급한 목소리의 주인은 스칼렛 공주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 타티아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눈짓했고, 이자벨은 허둥지둥 잠금장치를 풀기 시작했다.

타티아나는 검을 들고 와 날을 세우며 다른 시녀들에게 말했다.

“나머지는 문에서 떨어져.”

뒤따라오는 사람은 경비병 한 명뿐이었지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살그머니 열린 문틈으로 스칼렛은 마치 다람쥐처럼 잽싸게 자신의 몸을 날렸다.

“허억, 허어…….”

“스칼렛 전하?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요?”

타티아나는 허리를 숙여 공주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그리고 공주가 헐떡거리느라 답을 하지 못하자, 이자벨에게 물을 한 잔 가져오게 했다.

꼴깍꼴깍 유리컵을 비워 낸 스칼렛은 여전히 숨이 찼는지 몹시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겨우 대답했다.

“헉, 허억, 로버트가 여기로 날 찾아올지 몰라.”

“브라우닝 경이요?”

“응, 나 없다고 해 주면 안 될까?”

브라우닝 경이라면 공주의 남편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쫓아오는 게 이다지도 겁에 질릴 일인가?

공주는 문가를 힐긋힐긋 바라보며 아직도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타티아나의 머릿속엔 이러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 혹시 그 인간, 가정폭력범인가?’

파티에선 점잖아 보였는데. 생긴 것만 봐선 모른다더니.

“올케, 그래 줄 수 있지?”

스칼렛 공주는 도움을 요청할 곳은 여기뿐이라는 듯 타티아나의 팔을 덥석 잡았다.

타티아나는 상황이 심각한 것을 느끼고 공주를 방 한구석으로 이끌었다.

시녀들 없는 곳에서 둘이서만 조용히 얘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나만 믿으라는 듯, 신뢰를 주기 위해 노력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 전하,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으니, 저한테는 모든 걸 솔직히 말해 주세요.”

“…….”

“이 일이 거론되는 걸 원치 않으시면, 결단을 내리실 때까지 비밀도 지켜 드리겠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기드언에게 의논하는 것이겠지만, 타티아나는 브라우닝 경을 남몰래 처리해 버릴 자신도 있었다.

한동안 시끄럽긴 하겠지만 혹시 들킨다 해도 기드언이 세 명까진 봐준다고 했으니 수습해 주겠지.

물론 진짜 그런 짓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내 일처럼 도와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스칼렛 공주는 어딘가 겸연쩍어하는 표정이었다. 뭔가를 몹시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타티아나가 괜찮다는 듯 손을 꽉 잡아 주었지만, 공주는 계속 망설이기만 했다. 그리고 ‘비밀 지켜 줄 거지?’ 물으며 연신 확답을 받고 싶어 했다.

타티아나가 안심하라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여 준 후에야 공주는 비로소 사건을 털어놓았다.

“내가 말이야. 어젯밤부터 속이 좋지 않았거든?”

“……네? ……아, 네.”

“근데 자고 일어났는데도 계속 더부룩하더라고.”

“…….”

“아침에 로버트랑 같이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타티아나의 표정은 오묘하게 변했다.

이게 뭐람. 내가 생각했던 그 상황이 아니었나 보네?

근데 나 이다음이 뭔지 알 것 같아. 그만 들을래.

그녀는 귀를 막아야 하나, 자리를 떠야 하나 고민했지만, 스칼렛은 갑자기 또 뭐에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소리가 났어.”

“…….”

“응? 절대 나선 안 될 소리가 내 몸에서 나 버렸어. 로버트가 있는데!”

“…….”

“뭐야, 올케. 다 들어 준다면서 왜 갑자기 일어나는 거야! 소리가 나 버렸다고!”

저기요, 공주님? 그럼 제가 아이고, 이거 비상사태군……! 할 줄 알았나요?

타티아나는 검을 제자리에 가져다 두려다 말고 공주에게 눈을 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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