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13)
타티아나는 저걸 알려 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말기로 했다.
그녀는 솔직히 의심스러웠다.
저 정도면 처음부터 은신할 의지가 없었던 게 아닐까?
창밖으로 뛰어내리려는 결의 정도는 보여 줘야 이쪽도 성심성의껏 도와줄 마음이 생기지 않겠냐는 거다.
그러나 이곳은 4층이었다.
일반인들은 그런 위험한 짓을 함부로 안 한다는 걸 타티아나는 아주 가끔씩 망각하곤 했다.
그녀는 앙증맞은 발을 보며 피식피식 웃다가 문가로 향했다.
시녀들이 방문을 열었을 때, 브라우닝 경은 수행원 하나 없이 복도에 홀로 서 있었다.
그는 몹시도 머쓱한 표정이었다.
자기 아내를 찾기 위해 남의 아내 처소까지 쫓아온 남자치고는 참 수더분한 인상이었다.
“비전하. 기별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오랜만에 뵈니 좋은 걸요.”
그러나 화답하는 타티아나도 머쓱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인척 관계가 되었다지만 두 사람이 친해질 겨를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사이에는 조금 더 복잡 미묘한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로버트 브라우닝 경은 풀만 왕국 외무부 관료의 장남이었다. 그리고 타티아나의 친부는 전쟁 당시 풀만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가문의 역사를 짚고 넘어가자면 상당히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이 자리에서 한 수 접어 주거나 물렁물렁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군 간부는 남의 나라 수뇌부에게 절대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물론 타티아나는 간부가 아니라 그 딸일 뿐이었지만.
‘당신 아버지도 당시엔 강경 노선을 걸으셨다지?’
타티아나는 아주 기백이 넘치는 얼굴로 로버트에게 맞서려 했다.
그리하여 이 순간, 자신이 블룸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당당히 보여 주려고 했으나…… 그러기엔 역시 상대가 너무 푸근한 인상이었다.
‘아이, 참. 사람이 왜 이렇게 곰처럼 생겼지?’
타티아나는 에이, 모르겠다, 하고는 그냥 빨리 들어오라는 듯 손짓을 하며 그를 내부로 안내했다.
그러나 로버트는 안에 발을 들이고도 한참을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도 왕자비에게 내 아내가 여기에 있냐고 선뜻 물어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타티아나는 그때까지는 공주에게 의리를 지키며 모르는 체했다.
하지만 아내를 찾기 위해 나 홀로 성을 헤매는 남편의 마음을, 그 절절한 구애의 마음을 어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머뭇거리기만 하는 로버트에게 눈 딱 감고 고개를 끄덕끄덕해 주었다.
이걸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길 바라며.
그러나 여기에는 또 복병이 있었다.
로버트는 이 휑한 방 안에서 자기 아내의 깜찍한 발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저걸 못 알아채지? 눈이 심하게 나쁘신가?’
저 정도면 공주는 날 좀 찾아내 달라고 애원하는 중 아닐까?
물론 아니었지만, 타티아나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빨리 만나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부부를 위하는 길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애먼 사람 끼워 넣지 말고 부부의 문제는 둘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의도이기도 했다.
아니, 사실은 둘이 뭐라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려나 궁금해서 그랬다.
타티아나는 빠른 해결을 위해 검을 들고 커튼 앞까지 유유히 걸어갔다.
“성에 웬 파리가…….”
그녀가 휙, 휙 팔을 두어 번 휘두르자 커튼은 천장부에서부터 뚝 하고 떨어졌다.
웅크리고 앉아 있던 스칼렛은 상황 파악이 바로 되지 않는지 응? 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한참 뒤, 딴청을 피우고 있는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타티아나. 우리 방금…… 친구가 되기로 했었는데?”
타티아나는 멋진 기사처럼 절도 있게 답했다.
“예. 공주 전하와 저는 친구입니다. 그리고 저는 방금 파리를 잡았습니다.”
“……어머? 말하는 것 좀 봐.”
“…….”
“올케, 기드언 부인이 맞구나? 내가 속았어.”
아니요, 파리는 정말로 있었습니다. 저는 검 앞에서 진실해요.
타티아나는 두 동강 난 파리 시체를 검 끝으로 가리켰다.
원래 남의 부부 사이에는 함부로 끼는 게 아니고, 피치 못하게 꼈을 때는 꼭 이렇게 명분을 만들어 놔야 하는 법이다. 안 그러면 나중에 독박 쓰기 십상이다.
하나 타티아나가 파리까지 잡아 가며 명분을 쌓았음에도 스칼렛은 배신감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만큼 해 주었으면 이제 나머지는 남편의 몫이었다.
로버트는 얼른 자기 부인에게 다가갔다.
스칼렛은 화들짝 놀라며 그를 피하려고 했으나 두툼한 팔 안에 갇히고 말았고, 그 안에서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다.
“저리 가!”
“스칼렛, 왜 아침부터 술래잡기를 하고 그래.”
“창피하단 말이야!”
“그게 뭐가 창피…….”
딱히 구체적으로 상황을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스칼렛은 충분히 괴로운 것 같았다.
귀를 막고 악! 아악! 외치며 비명으로써 남편의 입을 막으려 했다.
그러자 로버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스칼렛을 꼭 부둥켜안았다.
아내를 바라보는 곰 같은 사내의 두 눈에서 달콤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너무 사랑스러웠어. 카나리아가 지저귀는 줄 알았는데 날아가 버렸지 뭐야.”
“정말?”
듣고 있던 타티아나는 생각했다.
‘아, 소리가 목에서 난 거야? 별게 다 수치스럽네.’
앞으로는 이런 사소한 일로 찾아와서 하소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편 앞에서 눈물 콧물 다 쏟으면서 칼춤까지 춰 본 사람 눈에는 가소로우니까.
그러나 스칼렛은 곧 뭔가가 의아했는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근데 그게 왜 카나리아지?”
“음, 그럼 뭐가 있을까…….”
“…….”
“아. 너무 깜찍한 스컹크 같았어.”
타티아나는 탄식했다.
그럼 그렇지. 그런데 이렇게 구체적으로 알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타티아나는 로버트에게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가 자기 아내를 너무나 능숙하게 어르며 기분을 풀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게 바로 외무부 고위 관료의 장남다운 처세술인가? 역시 핏줄은 어떻게든 티가 나기 마련인가 보다.
타티아나는 그가 서글서글한 인상을 하고 있다 해서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닭살이 돋아 웨에에엑, 해 주고 싶었는데 애써 딴생각한 거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사랑의 속삭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 이제 방으로 갈까? 한숨 더 자야지. 스칼렛은 잠꾸러기잖아.”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었다. 공주는 잠깐 일어나서 단장을 한 뒤 다시 자는 거였다.
잠꾸러기가 아니라 민낯 사수에 대한 의지가 남다른 사람일 뿐이란 말이다.
그러나 로버트는 스칼렛이 이러든 저러든 귀엽다고 생각하며 하하 웃어넘길 것 같았다.
눈에 저렇게 사랑이 막 흘러넘치는데 뭔들 안 예뻐 보일까 싶다.
주변을 한참 소란스럽게 만든 5년 차 부부는 팔짱을 끼더니 드디어 갈 채비를 했다.
“비전하, 실례가 많았습니다.”
“예에……. 아, 아닙니다.”
타티아나는 정말 큰 실례였다는 듯 긍정했다가 서둘러 말을 고쳤다.
실수한 게 아니라 장난친 거였다.
그걸 잘 아는지 로버트는 기드언 전하가 돌아오면 함께 식사라도 하자며 씨익, 웃었다.
아내를 찾고 나서 마음의 여유도 함께 찾은 모양이었다. 아까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미소가 그를 호남형으로 보이게 했다.
공주는 남편과 함께 걸어 나가다가 잠시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타티아나에게 윙크를 보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우리 다음에 또 놀자.’
같은 여자가 보내는 윙크에 유부녀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흔들려도 되는 것일까?
타티아나는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주억거렸다.
다음에 또 만나 소꿉장난을 하자며, 손가락 걸고 약속하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타티아나는 두 사람을 보내 놓고 비시시 웃었는데, 그녀 외에도 유독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수석 시녀 이자벨이었다.
공주가 방을 완전히 나서기 전, 이자벨에게도 손을 흔드는 것을 본 타티아나는 물었다.
“스칼렛 전하랑 가까운 사이인가 봐.”
“예, 비전하를 모시기 전에는 공주 전하를 모셨으니까요. 제가 유모였답니다. 비전하.”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각별한 사이였다.
타티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이자벨은 ‘모르셨습니까?’ 물으며 본인이 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내 남편은 이런 중요한 사실을 미리 안 알려 주고 뭐했을까?’
타티아나는 시녀들 앞에서는 말을 더욱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모란 정서적으로는 친모만큼이나 가까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가끔은 친모보다 더.
그리고 엄마와 딸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들을 미주알고주알 나누곤 한다.
행여 기드언과 부부 싸움이라도 해서 그게 시누의 귀에 들어가면 얼마나 민망하고 당황스러운 상황이란 말인가.
그러나 왜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냐고 꼬장꼬장 따져 물을 상대는 지금 여기 없다.
기드언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방금 전까지 너무 사이 좋은 부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타티아나는 괜히 마음 한쪽이 허전해졌다.
결혼한 지 뭐 얼마나 됐다고 이런 기분이 드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녀는 그가 없을 때도 잘 살았고, 그 시간은 결혼 기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긴데 말이다.
……혹시 이러다 어느 순간, 남편이 있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 버리면 어쩌나. 그가 없는 인생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 바보가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하나.
타티아나는 혼자 공상하다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괜한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지만 기드언이 염려되고 보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