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42)화 (39/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3장. 그때를 조심하라 (14)

* * *

기드언은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았다.

추운 땅은 그만의 운치가 있다.

아직 눈이 내리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창가에 서려 있는 김은 이곳이 북부라는 걸 알게 했다.

기드언의 공국 입성은 수월했다. 그들에게는 발터의 1왕자를 제지할 명분이 없다.

자치권이 보장되고 무수한 민란의 역사가 있다고는 하나, 공국이 발터의 영토라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늦었지만 혼인 축하드립니다, 기드언 전하.”

기드언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손가락으로 훑다 리고르 대공을 응시했다.

북부를 닮은 은발의 사내는 기드언과 비슷한 연배였고, 3년 전 대공 위를 승계했다.

“그보다 더 늦은 인사가 있지. 그대의 대공 즉위를 축하해.”

이 인사가 제때 전해지지 못한 까닭은 왕자의 전령들이 이 땅에서 귀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드언은 비딱한 미소를 입에 걸었으나, 젊은 대공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침착했다.

“북부에서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다시 한번 유감을 표합니다, 기드언 전하.”

“아, 유감? 그래, 그래야지.”

하지만 유감이란 몹시도 정치적인 언어다.

안타까움은 있으나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사과에는 사후 책임이 따르니까.

기드언은 그걸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대공의 말에 더욱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럼 이제 책임 유무도 한번 따져 볼까.”

“왕자 전하, 공국은 그 일에 관련이 없습니다. 이미 그렇게 마무리되지 않았습니까. 하지도 않은 일을 저희가 어찌 증명해야 합니까?”

이미 같은 문제로 오랜 시간 시달린 리고르 대공은 이런 주제가 피곤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기드언은 대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약간의 동요라도 내비친다면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왕자의 기사들이 목숨을 잃은 날, 북부에는 눈이 내렸다. 시신을 찾는 데만 해도 며칠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 눈은 비단 시신들만 사람들의 시야에서 가리운 게 아니었다.

왕실은 사건 현장에서 어떠한 결정적인 증거도 찾지 못했다.

대공 또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한참이나 대공을 바라보던 기드언은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북부 사람들이 언 손을 녹여 가며 벽돌을 나르고 있었다. 마물이 영지 안으로 들이닥칠 것을 대비하여 담을 쌓는 것이다.

그러나 기드언은 북부인들에게는 암담하게 느껴질 결론을 내렸다.

“이미 알겠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말해 주지.”

“…….”

“북부는 이번 겨울을 버티기 힘들 거다.”

기드언의 간자들이 목숨을 걸고 마물의 서식지에서 얻어 온 정보, 북부의 전투 가용 인원, 예년보다 가혹한 기후.

이 모든 내용들은 한 가지 결말을 암시하고 있었다.

리고르 대공도 익히 아는 듯 무거운 표정이었다.

기드언은 그에게 몸을 가까이하며 말했다.

“사실 난 기다리기만 하면 돼.”

“…….”

“지금은 왕실에 숙이고 들어가느냐, 자존심을 지키느냐 정도의 문제겠지만 겨울이 오면 너희도 달라지겠지. 그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될 테니까.”

다급하고 절박한 상대와의 협상만큼 쉬운 것은 없다.

그때가 되면 왕실은 궁지에 몰린 북부에 더 과중한 부담금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드언은 북부가 완전히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망가지기 전에 이 자리에 왔다.

승계가 확정되지 않아 불안정한 정국 속,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고.

“성으로 돌아가면 난 그때부터 북부에 군사를 파견하자고 주장할 거야.”

“…….”

“수도 없이 왕실에 반기를 들고, 전시에 풀만 왕국과 쥐새끼처럼 내통했다는 그 북부에 말이야. 당연히 귀족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겠지? 대공의 생각은 어때.”

“……전하.”

“그럼 나도 그 대가로 얻는 게 있어야 할 것 같지 않아?”

기드언은 얼음장 같은 눈동자에 새파란 불꽃을 태웠다. 그리고 대공에게 종용했다.

“결정해라, 리고르.”

어서.

네가 내 예상과 다른 결론을 내린다면 나는 또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하거든. 지체할 시간이 없어.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네가 이 협상에서 내 우위에 설 일은 없다는 듯, 기드언의 미소는 한없이 여유롭고 오만하기만 했다.

* * *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보류하라던 친구들과의 만남을 추진했다.

아마 그도 농담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관계 하나하나까지 통제하려 들고, 사람을 피 말리게 하는 남자는 아니지 않을까.

남편에 대한 평가는 뚜렷한 근거도 없이 우상향 중이었다.

결혼 초기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초장부터 자신의 결혼이 실책이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버릇은 답도 없는 비관주의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올 때도 많다.

우리가 그 기조를 꾸준히 유지할 수만 있다면.

타티아나는 그새 여행을 떠났다는 친구를 제외하고 나머지 둘을 초대했다.

다 쟁쟁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어린 아가씨들에게 성이란 흥미로운 곳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마치 아이처럼 반짝였다.

“비전하 덕에 왕자궁에 다 와 보네요. 저희가 친구를 잘 사귀었나 봐요.”

“그러니까.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말을 걸고 싶더라니.”

둘은 재잘거리며 떠들다가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기드언 전하는 성에 안 계세요?”

“어디 좀 멀리 가셨어.”

“아아, 정말?”

“응, 근데 너흰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전하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그러자 친구들은 괜히 서로의 팔을 치더니 웃으며 말했다.

“에이, 비전하도 참.”

“당연히 기드언 전하지.”

타티아나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잔웃음을 터뜨렸다.

기드언이 살기를 아무리 흘려 봐야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할 수는 없었다.

잘생긴 외모는 그리 쉽게 감춰지지 않는 거다.

게다가 희한하게도 기드언은 미혼일 때보다 결혼을 한 후, 여성들의 입에 더욱 자주 오르내리곤 했다.

한결같이 냉정하던 왕자가 자기 아내에게만 상냥히 미소 짓는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몹시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가끔은 비 앞에서 인격을 갈아 끼우는 것 같아 무섭기는 했지만, 아내에게 잘하는 남자는 원래 그 자체로 매력이 있다.

타티아나는 요즘 귀부인들 사이에서 기드언에 대한 호평이 늘었다는 이야기를 시녀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녀는 이걸 꽤 달가운 현상이라 생각하며 반겼다.

왕자라 할지라도, 제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드는 몇몇 사람하고만 국무를 논의할 수는 없는 일이다.

1왕자를 추종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그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결코 해가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타티아나의 친구들은 요즘따라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기드언의 행방 말고도 궁금한 게 또 있는 모양이었다.

“비전하, 신혼 생활은 어때요?”

“으음.”

“그래도 장단점이 있을 거 아닌가요.”

결혼 해, 말아? 하지 마?

타티아나는 오늘로써 이 질문을 마흔한 번째 들었다. 굳이 세고 있는 이유는 나중에 엄마처럼 저술 활동을 하는 날이 오면, 본인의 결혼 생활을 회고하며 서술해 보기 위해서이다.

이 횟수는 그 저서의 앞부분, 신혼 편을 집필할 때 참고 자료로 쓰려 한다.

“단점은 솔직히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 얼마 안 됐잖아. 벌써부터 그런 게 느껴지면 망한 거 아닐까?”

“그런가요? 그러면 장점은?”

타티아나는 그래도 친구들이 물었다고 평상시와 다른 반응이었다.

인상까지 써 가며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꽤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그냥 뭐랄까. 내 일상에 패턴이 하나 더 추가된 기분이야.”

“패턴?”

“응. 전하는 일을 마치면 늦게라도 꼬박꼬박 방에 오시거든.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어.”

그때마다 그들은 오늘 별일 없었냐고 간간이 얘기를 나누었다.

특별한 사건 같은 건 없었다는 걸 잘 알면서 언제나 그랬다.

“그리고 아침엔 거의 내가 먼저 일어나거든? 전하가 자고 있으면 그걸 가만히 보고 있게 돼. 그러다 아, 잘 자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운동을 하러 나가.”

“…….”

“뭐, 그렇다고.”

“……뭐야. 설마 끝이야?”

친구들은 허무하다는 듯 물었고 타티아나는 ‘어. 끝인데?’ 짧게 답하더니 말을 이었다.

“근데 있잖아. 이게 별 게 아닌 것 같으면서도 희한하게…… 편안한 기분이야.”

타티아나는 지금 안정감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기혼자들이 종종 얘기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시간과 공간을 꾸준히 공유하다 보면 상대의 존재가 일정한 무게를 가지고 일상 속에 자리 잡게 된다. 거기에 이질감을 느낄 땐 서로 예민해지고 싸움이 일어난다.

반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굉장히 안락하고 이불을 덮기라도 한 것처럼 포근하다. 그러다 상대가 없을 땐 많이 허전하다.

꼭 누가 줬던 이불을 빼앗아 가 버린 것처럼.

타티아나는 이걸 본인만의 관점에서 표현하기 시작했다. 항상성과 규칙성으로.

“난 아침에 늘 하던 운동을 거르면 굉장히 찝찝해. 운동기구랑 검이 제자리에 없어도 그래. 그게 내 하루 패턴이라는 거지.”

“무슨 얘기야, 타티…… 비전하.”

“지금 내 하루에 뭔가가 빠져 있다고. 그래서 약간 신경이 쓰이면서도 허전하다고.”

매일 밤 방에 찾아들던 사람이 며칠째 코끝도 비추지 않으니 일과의 마무리가 잘 안 되는 기분이었다.

한 번씩 기드언 생각이 나고, 어떤 날엔 그를 기다리게 된다.

아무래도 스칼렛 부부가 준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나 보다.

이럴 때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열심히 몸을 움직이거나 더 바빠지는 거였다.

타티아나는 친구들을 보낸 뒤엔 또 뭘 해야 하나 고심했다.

그녀는 양부를 만날 겸 오랜만에 병영에 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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