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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5)화 (77/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장. 너의 검이 되어 (8)

* * *

바이칼 왕자는 왕후궁을 나와 터덜터덜 걸었다.

오후 내내 히스테리 가득한 어머니의 말을 들어 주느라 진이 빠진 상태였다.

발터 사교계의 귀족들은 왕후가 한없이 도도하고 빈틈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왕후는 공식 석상에서만큼은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어떤 일이 닥쳐도 특유의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귀족들은 그 미소에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가끔은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그렇다면 자연인으로서의 왕후, 율리아 로셀 아인슬러는 어떤 사람일까?

공식 석상에서의 가면을 벗은 뒤의 모습 말이다.

왕후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시녀들과 친아들은 사실 그녀가 상당한 감정 기복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왕후는 가끔 신경질적으로 비명을 지르거나, 정신없이 본인의 방을 오가며 주변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국왕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할 무렵, 기드언이 타티아나에게 청혼했던 날, 그 두 사람의 결혼식, 뮐러 공작의 자진 소식이 성을 휩쓸고 지나간 시기가 대표적이었다.

왕후는 오늘도 방 안을 빙빙 돌며 히스테릭한 혼잣말을 주워섬겼다.

사실은 며칠 내내 그러했다.

얼마 전 파티에서 벌어진 일이 그녀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음이 분명했다.

‘뮐러 공작이 그렇게 쉽게 목숨을 끊을 줄이야. 아니지, 기드언, 그 자식이 손을 쓴 게 분명해.’

‘……어머니.’

‘친위대까지 장악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 고약한 놈이 일을 꾸민 게지.’

‘그만하십시오, 제발!’

‘뭘 그만하란 말이니? 여기서 어떻게 그만하란 말이니!’

왕후는 바이칼을 보며 답답해하다가 매달리며 호소했다.

‘왕자. 기드언이 이 어미에게 하는 것을 좀 보십시오. 왕자도 더 모질고 강해지셔야죠!’

‘…….’

‘왕자는 왜 그놈처럼 하질 못합니까!’

씁쓸한 눈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던 바이칼은 천천히 내뱉었다.

가슴속에 메마른 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

‘저는 왜 형님처럼 하지 못할까요.’

왕후는 마치 비명처럼 ‘왕자!’ 외치며 그의 옷깃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바이칼은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등을 돌렸다.

그 뒤로 한참이나 성안을 배회했으나 울렁거리는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가슴속에 이는 삭풍도 그대로였다.

그만 본인의 궁으로 돌아갈까도 싶었지만, 그에게는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일정이 남아 있었다.

아침 일찍 형수에게 접견 요청을 넣어 두었던 것이다.

바이칼은 사실 엊그제에도 타티아나를 만나러 가려고 했다.

하나 그 약속은 이행되지 못했다.

왕후의 간섭과 불안 증세 때문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약속을 미룬다면 대단히 무례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애초부터 마법 공부가 아쉬운 건 그였지, 형수가 아니었다.

바이칼은 기드언의 궁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었다.

경비병이 미처 고하기도 전에 타티아나는 접견장 문을 활짝 열고 바이칼을 맞이했다.

그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리고 그를 오매불망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왜 이제 오셨어요?”

“제가 많이 늦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타티아나는 바이칼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며칠 전 약속이 취소되었을 때는 너무 아쉬워한 나머지 기드언이 찝찝하게 여길 정도였다.

사실은 그녀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마력석 목걸이는 그날 이후, 더는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눈앞에서 마법을 부린다면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이번에는 그녀도 마력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타티아나는 본인 쪽에서 먼저 바이칼을 찾아갈까도 고민해 보았다.

그렇지만 역시 왕후가 마음에 걸렸다.

절대로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위장이 튼튼했지만, 지난 파티에서와 같은 상황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타티아나도 바이칼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를 찾아오는 건 나름대로는 용기였다.

그도 뭔가를 감수한 채 이곳에 오는 것이다.

“전하, 그날은 잘 들어가셨어요?”

“예?”

“파티 날 말이에요.”

그러자 바이칼은 겸연쩍은 듯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다 알면서 뭘 물어보냐는 것 같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흠, 하며 속삭였다.

“왕후 폐하는 전하가 여기 오는 거 싫어하시죠? 저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하지만 바이칼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 면전이라고 예의상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가 싫어하는 건 기드언이지, 타티아나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왕후는…….

“어머니는 형수님이 진짜로 미워서 그러시는 건 아닙니다. 형수님을 제 결혼 상대로 점찍어 두신 적도 있는걸요.”

왕후가 욕심낸 건 전쟁 영웅의 딸이란 수식어였다. 친위대장을 사돈으로 둘 수 있다는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장자인 기드언과 왕위 싸움을 벌이려면 군사적 기반이 꼭 필요했으니까.

그러나 이는 타티아나와 바이칼의 의사를 눈곱만큼도 고려하지 않은 계획이었다.

이미 무위로 돌아간 지 오래였지만, 바이칼은 혹시라도 타티아나가 오해할까 봐 정색하며 말했다.

“저는 맹세코 형수님을 그런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당혹스러워하던 타티아나의 표정은 서서히 떨떠름해졌다.

이게 저렇게 정색하며 맹세까지 할 일인가 싶어서였다.

“죄송한데요,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일단 너는 미성년자잖아.

나라고 뭐, 널 그런 눈으로 본 적이 있을 것 같아?

갑자기 기분이 좀 그렇네?

타티아나는 자신의 검을 적어도 열 수 이상은 받아칠 수 있는 남자가 이상형이었다.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한다 해도 다섯 수 밑으로는 양보가 안 되었다.

사실 이건 이상형도 아니고 예선에 지나지 않았다.

일단은 그녀가 인정할 수 있는 검술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후보군에라도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예선을 통과했다면 그다음엔 본선이 기다리고 있다.

종목이 뭐냐고? 얼마나 멋진 전완근을 가졌느냐다.

물론 이건 농담이지만…… 그래도 있으면 사양할 생각은 없다.

도리어 고마울 것 같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성격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한번 얘기해 볼까?

누구나 그러하듯 타티아나도 너무 이기적인 사람은 싫어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네, 네’만 하는 사람에게도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어느 정도의 자기 주관과 자아가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데, 매일 나누는 대화가 흥미로워야 할 것 아닌가.

때로는 그 서로 다른 자아 때문에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본인이 거기에서 뭔가를 느끼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딱 한 가지만 더 욕심을 부리자면…… 그녀의 자잘한 것들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그녀가 갖고 놀던 마력석을 오랜 시간 간직하고, 건포도에 대한 호불호까지도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

그녀의 변화를 금세 눈치채는 세심함.

타티아나는 지금 실제로 그런 남자와 살고 있었다. 기드언이었다.

그 외 다른 남자는 눈에도 안 들어왔고, 사실은 그럴 여력조차 없다.

그녀의 남편은 존재감이 너무 과도할 정도로 커서 그녀는 가끔 머리가 터져 나갈 지경이었으니까.

현재 그녀의 상태가 이러한데, 누군가가 타티아나와 바이칼을 이상한 쪽으로 엮는다면 그녀도 억울한 건 마찬가지였다.

사실은 너무나 기가 막혀 같이 정색하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굳이 입 아프게 반박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왜 어린 시동생한테 나도 너 남자로 안 본다는 걸 증명해야 하나 싶어서였다.

구구절절 떠들어 봐야 결국엔 남편 자랑이 될 뿐이었다.

타티아나는 에이, 관두련다, 생각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바이칼에게 함께 밖으로 나가자고 제의한 것이다.

“그 얘기는 이제 됐고, 저 좀 잠깐 따라와 봐요.”

“어딜 말씀이십니까?”

그녀는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접견장 문을 열고 앞장을 섰다.

그리고 바이칼을 왕자궁 한쪽에 자리 잡은 정원으로 인도했다.

하나 이곳은 이름만 정원일 뿐, 타티아나의 개인 운동장이 된 지 오래였다.

기사들은 요즘도 종종 대련 요청을 해 왔다.

실내에서 칼부림을 하기엔 뭐하고, 그렇다고 기드언의 연무장으로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곳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칼은 이 정원이 상당히 충격적으로 느껴졌는지 한동안 침묵을 고수했다.

물론 이 정도 운동 기구들은 그에게도 익숙했다.

지금은 폐쇄되었지만, 비의 막사에서도 비슷한 장비들이 굴러다니는 걸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단 그것뿐인가? 그때는 온갖 종류의 덫들과 구덩이마저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격파한 게 분명한 벽돌 조각까지 굴러다니지는 않았었다.

바이칼은 이 돌덩이들을 산산조각 낸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확인하려 들면 안 될 것 같았지만, 그는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거…… 형수님이 하신 겁니까?”

“네. 왜요?”

“맨손으로요?”

그럼 이마로 깼겠나?

의아해하던 타티아나는 아, 그 얘기가 아닌가? 생각하며 말했다.

“저도 격파할 때 장갑 정도는 끼는데요. 손에 생채기 나니까.”

“…….”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바이칼은 고개를 저었지만,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형수는 검술만 잘하는 게 아니었구나. 힘도 세신 거구나.

‘벽돌도 저렇게 만들어 버리는데 사람은…….’

앞으로 절대 화나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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