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장. 너의 검이 되어 (9)
타티아나는 바이칼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공손해진 것 같다고 느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녀는 일단 그를 장작더미 앞으로 이끌었다.
막사 앞에 패 놓았던 것을 고스란히 옮겨 온 것이다.
며칠 내내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타티아나는 두 손을 모으고 바이칼에게 요청했다.
“전하. 저 그거 한 번만 다시 보여 주세요.”
“뭘 말입니까.”
“지난번에 보여 주셨던 마법이요. 불 피우는 거.”
그러자 바이칼은 약간 난처한 눈치였다.
이미 밑천이 다 드러난 실력이다. 부끄러울 것은 없었으나, 타티아나의 의도를 가늠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가 망설이자 타티아나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허. 스승이 말하면 잠자코 따를 것. 지금 스승이 물에 못 뜬다고 무시하는 것인가?
배움의 기본자세가 안 되어 있군!
“설마 싫으세요?”
바이칼은 절대 아니라는 듯,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타티아나를 정말로 스승으로 생각하며 존중했다.
그녀는 그의 질문에 늘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그가 겪고 있는 고민과 어려움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 고마움을 품게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가끔은 저 박학다식함에 새록새록 존경심마저 자라날 때도 있었다.
사실은 이런 걸 다 떠나서, 정원에 나뒹구는 벽돌 잔해들을 본 순간, 바이칼은 그녀의 말이라면 그냥 다 따르고 싶어졌다.
“나 세상 앞에 간구하나니, 존재여, 그 쓰임을 다하라. 불이여, 타올라라, 사람들에게 빛과 온기를 허락하라. 나의 마법은…….”
바이칼이 주문을 외기 시작하자, 오묘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타티아나는 곧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지난번 타티아나의 조언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지금 그가 차용하고 있는 건 꽤 유명한 마법사가 고안한 주문이었으니까.
타티아나는 저 마법사의 생애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다. 어머니의 서재에서 전기를 읽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이는 백작가 차남으로서, 당대의 아주 유명한 망나니였다.
가문 중심의 발터 사회에서 호적이 파이기까지 했다는 걸 보면 정말 답이 안 나오는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한데 그는 마법을 깨친 이후로는 인격적으로 크게 변모했다.
나머지 삶은 거의 성인군자나 위인처럼 살다 갔다.
그가 만든 마법 등불들은 아직도 마탑의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결말은 사실 촌극에 가깝다.
‘그 사람은 마탑이 아니라 우범지대나 가난한 마을에 설치해 달라고 만든 건데.’
이게 다 마법구라면 인간성도, 인류애도 상실하는 탐욕스러운 마탑 놈들…… 아니, 마법사분들 때문이었다.
어쩌면 바이칼도 그 마법사의 일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바이칼은 지적 호기심이 높았고, 마법만큼이나 그 뒤에 얽힌 서사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원래 사람이 하던 일이 잘 안 풀리고 진척이 없으면, 자꾸만 옆길로 새게 되어 있다.
바이칼은 그 마법사의 어떤 점에 흥미를 가졌을까.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가슴을 떨리게 했을까.
그 마법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마법이 앞으로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런데 당신은 지금도 그 탕아랑은 결이 너무 다른데.’
바이칼은 예의도 바르고 상당히 반듯한 사람이었다.
그를 둘러싼 제반 환경에서는 이렇게 자라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사람은 주변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동물이라, 옆에서 자꾸만 다그치고 윽박지르면 사고가 왜곡된다.
타티아나도 뮐러 가에 있을 땐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내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바이칼을 도와주고 싶어진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바이칼은 역시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는 학생이었다.
물에 뜨지도 못하는 선생이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감이 있었다.
본래 이런 학생은 경력이 풍부하고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선생이 전담해야 하는 법인데.
타티아나는 푸시시, 꺼져 가는 불씨를 안타까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마력석 목걸이를 꽉 쥐며 말했다.
“한 번만 더 해 보세요.”
“또요?”
“네.”
“……알겠습니다.”
물에 뜨지 못하는 스승과 물에 떴다가도 금방 가라앉는 제자.
두 사람은 마법에 있어서는 아주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지만, 장점도 몇 가지 갖고 있었다.
바이칼은 착실한 성품이었고, 본인의 스승을 무한대로 신뢰했다.
그리고 타티아나는 뭔가에 한 번 꽂히면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스승과 제자 둘 다 마법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역시 열정과 순수함만으로 헤쳐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바이칼은 몇 번이나 주문을 반복했고, 또 몇 번이나 거듭하여 실패했다.
그때마다 타티아나는 한 마리의 앵무새를 자처하며 말했다.
“한 번만 더요, 딱 한 번만 더.”
“…….”
성격 나쁜 사람 같았으면 대체 언제까지 하라는 거냐고, 성질을 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물론 발터의 2왕자는 너무나 상냥하고 온화한 성품이라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몹시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형수님.”
“네?”
“정말 면구한 소리입니다만…… 제가 곧 쓰러지지 싶습니다.”
“……아아.”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졸도하기 일보 직전의 얼굴이었다.
입술까지 새파래진 상태였다.
마력을 운용하는 데에는 엄청난 체력과 정신력이 소모되니까.
마법사들은 그에 대비하여 주문을 외우기 전에 폭식에 가까운 양의 음식을 섭취하기도 한다.
앞뒤 안 가리고 계속 밀어붙이던 타티아나는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면서도 아쉬운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바이칼은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 얼굴을 보며 소리 없이 웃더니, 다시금 장작더미를 마주하고 섰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시도해 보자고 결심한 듯했다.
“불이여, 타올라라, 나의 마법은 언제나 소임을 다 할지니, 나는 내가 원하는 자리에서 타오르리라. 빛과 온기가 되겠노니.”
“…….”
그리고 그때였다.
장작 끝에 자그마한 불꽃이 동그랗게 피어올랐다.
비록 그 불씨는 앞선 시도와 같이 금세 사그라들었으나, 타티아나는 보았다.
손안에 움켜쥔 마력석이 은은한 광채를 내뿜는 것을.
그 빛은 마력석 테두리를 빙그르르 한 바퀴 돌고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그녀의 눈시울은 서서히 젖어 들어갔다.
타티아나는 여전히 마법을 쓸 수 없었다.
마력을 물에 비유한다면, 그녀의 몸은 아직도 황무지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희미하게나마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바이칼의 몸 안에서 찰랑거리는 잔물결이 보이는 듯했다.
마력석이 반응하듯, 그녀의 마음도 이 상황에 감응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력이 조만간 깨어날 거라는 희망적 증거였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본 마력은…….
‘세상에. 원래 이렇게 따뜻한 거였나?’
타티아나는 뭉클하면서도 울컥하여 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너무나 염원하던 상황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
떨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만약 이 상황이 타티아나가 10살 무렵일 때 벌어졌다면, 마법사들이 시도 때도 없이 블룸 가에 드나들던 그 시절에 펼쳐졌다면, 그녀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빨리 마법을 깨쳐서 저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고.
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자들 앞에서 본때를 보여 주고, 반드시 박수를 받고야 말겠노라고.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게 없다.
이건 그녀가 예전보다는 성숙해서일까, 너무 여러 번 낙담한 뒤에 찾아온 기회가 그저 소중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검술을 연마하며 사람들의 환호나 조롱이 본인의 실력에 어떠한 자양분도 되지 못했다는 걸 체감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이 상황에 감사하면서도 내가 굳이 남들에게 뭔가를 보여 주어야 하나 싶을 뿐이다.
본인이 뭔가를 좋아할 자격이 된다는 걸 굳이 증명해야 하나?
내 마음이 이 정도라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야 하냐는 거다.
‘그거 받아서 어디에다 쓸 건데.’
물론 남들이 와아아, 하고 박수 쳐 주면 좀 덜 외로울 수는 있겠지.
정진, 오로지 정진만을 외치며 살다 보면 인생이 삭막할 때가 있으니까.
타티아나는 피시시 웃으며 얼굴을 매만졌다.
그리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을 제멋대로 추측했다.
나는 처음 검을 잡았을 때도 분명히 이랬을 거라고.
복잡한 사정 따지지 않고, 아주 작은 가능성에도 순수하게 감탄하며 기뻐했을 거라고.
그러나 타티아나가 울컥한 표정을 짓고 있자, 바이칼은 오해가 생긴 듯했다.
그는 그녀가 지금 실망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창백한 얼굴을 한 채로 사과의 뜻을 표했다.
“죄송합니다. 형수님.”
“뭐가요?”
“실패해서요.”
타티아나는 그 말에 몹시도 당황했다.
이걸 실패라고 규정짓지도 않았지만, 만약 실패라 할지라도 그가 사과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일단 바이칼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풀밭 위에 앉혔다.
그가 혹시라도 진짜 쓰러질까 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였을까. 바이칼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타티아나의 머릿속에는 갑자기 뮐러 공작의 말이 떠올랐다.
‘바이칼 전하는 왕후 폐하의 뜻을 어디까지 꺾을 수 있을까? 네 눈에는 누구의 의지가 더 강해 보이는데?’
이 아비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바이칼 전하의 인생은 이미 개인의 것이 아니란다…….
참 어렵고도 복잡한 문제다.
만약 그의 마력이 특출하게 강했더라면 상황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마법사들은 분명 그를 다른 온도로 대했을 테고, 왕후 또한 이 패를 승계 전쟁에서 활용할 방법은 없나 고심했을 테지.
타티아나도 이 상황이 남편에게 위협적이진 않을까, 경각심을 가졌을 것 같다.
그러나 마력이 강하든, 미약하든 한 명의 마법사는 자신의 세계를 펼치기 위해 온 인생을 고스란히 갖다 바쳐야 한다.
그는 정말로 그러한 삶을 살고 싶은 건가?
이제는 타티아나도 소리 내어 묻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하는 이걸로 뭘 하고 싶으신 거예요? 마법이요.”
“그냥…… 불을 피워 보고 싶은 겁니다. 다른 목적이 더 필요한가요.”
물론 그렇겠지.
그녀도 그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너에게 이걸 그만두라고 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엄청나게 많을걸?’
안 될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네가 가야 할 길은 여기가 아니라고.
너는 그들을 다 설득하다가 시작도 하기 전에 지쳐 버릴지 몰라.
그러다 나처럼 내가 왜 모두를 설득해야 하나, 저들의 인정이 꼭 필요한가?
이런 생각에 다다르면 좀 억울해지기도 하고 의아해지기도 하는 거지.
타티아나는 그가 과연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살아갈는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왕후의 뜻을 꺾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잘…… 안 든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꼭 인정해 주고 싶은 게 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물에 띄우면 곧잘 헤엄을 친다지.
그 능력은 사용하지 않으면 커 감에 따라 자연스레 쇠퇴하고.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의 마력. 아주 미약한 가능성.
그걸 지금까지 놓지 않고 끌어와 손톱만 한 불씨를 만들어 낸 건 순전히 그의 노력이었다.
그러니 그는 이 정도 긍정의 언어는 들을 자격이 된다.
“할 수 있어요.”
“…….”
“전하는 모닥불, 피울 수 있다고.”
바이칼은 타티아나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눈가가 왜 이리 빨개져 있는지도.
그렇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말해 주어 고맙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