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장. 너의 검이 되어 (11)
* * *
오늘은 빈민 학교의 준공식이 예정된 날이었다.
이 설립안의 최초 기획자이자 자금줄인 타티아나는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
가서 특별히 할 일은 없다지만, 교문 앞 리본만큼은 직접 자르며 기념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외출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혼이 쏙 빠질 것 같은 오전 시간을 보냈다.
사실 그 준비는 아직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 준공식은 타티아나가 왕자비가 된 이래, 처음으로 성 밖에서 치르는 외부 행사였다.
시녀들은 그 중요도가 남다르다고 생각했는지 드레스를 수십 차례나 갈아입혔다.
머리도 몇 번이나 묶었다 풀어헤쳐야만 했다.
결혼식을 제외하고는 그녀 인생에서 가장 공을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이 전쟁 같은 상황을 잠시 중단한 채, 공주궁으로 향했다.
며칠 전, 행사 불참을 선언한 스칼렛을 마지막으로 설득해 보기 위해서였다.
“전하, 진짜 안 가실 거예요?”
“그렇다니까. 기드언이랑 오붓하게 다녀와.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들이 가는 셈 치면 되잖아.”
어느 철없는 왕족들이 빈민가로 나들이를 가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귓가를 맴돈 건 그보다 앞선 말이었다.
“오붓…….”
타티아나는 스칼렛의 표현을 곱씹다가 말끝을 흐렸다.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스칼렛은 고작 그 정도에도 평소와는 다른 기운을 감지한 듯했다.
원래 사교계 여왕이란 건 미세한 표정 변화, 남이 무심코 흘린 말 한 마디도 지나치지 않아야만 등극할 수 있는 자리였다.
“뭐야. 너희 혹시 싸웠니?”
타티아나는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하며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하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면 이것보다는 훨씬 완벽한 부정문이 등장했을 것이다.
스칼렛은 ‘싸웠네, 싸웠어’ 하며 키득거렸다.
그 명랑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던 타티아나의 머릿속에는 갑자기 이런 말이 스쳐 지나갔다.
때리는 누구누구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던가?
미안하지만 그 말은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스칼렛은 남의 싸움을 말리거나 중재해 줄 사람이 아니었다. 도리어…….
“지금 너무 즐거워하시는 것 같은데요.”
“웃기잖아. 난 기드언이 올케한테 꼼짝 못 하는 걸 보면 왜 이렇게 재밌지?”
“……대체 어딜 봐서 전하가 저한테 꼼짝을 못 한다는 건가요.”
꼼짝했으면 아주 큰일이 났겠네?
그런데 기드언과 타티아나는 정말로 싸운 것은 아니었다.
서로 약간 예민하게 굴었다는 것 정도는 인정하지만 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제 오후, 케이를 사이에 두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꽤 화기애애했다.
문제가 발생한 건 그 이후였다.
타티아나가 케이와 대련을 시작하자, 기드언은 너른 바위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관전했다.
하지만 그는 이전과는 약간 다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련이 격해질라치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거나, 중간중간 깊은 한숨을 쉬었던 것이다.
딱히 제재를 가하진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주변 사람들을 눈치 보게 만들었다.
그가 어찌나 인상을 심하게 찌푸리는지 케이는 이걸 계속해도 되나 고민스러운 기색이었다.
대련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애석한 일이지만, 타티아나가 딱 하나 못 참는 게 바로 그거였다.
운동할 때 누가 방해하는 거.
그녀는 식단 조절에 돌입하면 밀가루나 단 음식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간혹 그로 인해 극심한 감정 기복을 느낄지라도, 그 포악한 자아를 타인에게 뽐내지 않았다.
충분히 다스릴 수 있었고, 그래야만 하는 문제였다.
그렇지만 운동할 때 자꾸만 옆에서 거슬리게 하면 그때는 얘기가 달라졌다.
그녀도 짜증을 느끼며 까칠해진다는 것이다.
타티아나는 대련을 하다 말고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성큼성큼 기드언에게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자신만큼이나 예민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편 앞에서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집무실 창가였다.
기드언은 그녀의 뜻을 정확히 이해한 듯했다.
어쩌면 기시감을 느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새침하게 솟아 있는 손가락을 지그시 접으며 이렇게 중얼거렸으니까.
‘남편 쫓아내는 게 습관이 됐네.’
‘그러니까 왜 방해를 해요.’
‘……방해?’
영리하고 눈치가 너무 좋은 것도 이럴 때는 곤란했다.
단어 하나하나에서도 의도를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하니까.
기드언은 유독 거기에 특화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왕후나 적들을 상대할 때는 그 속내를 능숙히 감춘다고는 하나, 타티아나는 자기 남편이 꽤 예민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기억력이 좋아 가끔은 뒤끝마저 있었다.
……하지만 이게 방해가 아니라면 뭐람?
그도 옆에서 봤으면 그녀가 이 대련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 알 게 아닌가.
머릿속으로 이미 삼천 번 정도의 가상 대결을 벌이고 나온 후라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그 뒤로 두 사람은 한참이나 까칠한 신경전을 벌였다.
회의 일정이 있는 기드언은 얘길 하다 말고 중간에 사라졌지만, 타티아나는 대련을 재개하지 못했다.
이미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타티아나는 확실히 부부 싸움도 습관이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갓 결혼을 했을 때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일인데, 내가 왜 그렇게 과민하게 굴었지?
조금은 후회가 된다는 거다.
어쩌면 그들은 이제 서로가 약간은 편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본인의 감정을 표출하는 데 스스럼이 없어지고, 솔직해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별것도 아닌 일로 싸우는 게 습관이 되면 곤란한데…….
물론 지난 싸움이 그들에게 부정적인 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교훈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한 가지 깨달음도 주었다.
기드언과 타티아나는 어제 냉랭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한 채로도 한방에서 잤다.
지난 경험을 통해, 우리 부부에게는 각방이 위험하다는 걸 자각한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싸움이 장기화될 수도 있고, 다시 방을 합칠 땐 괜한 용기마저 필요하니까.
거기까지는 안 가서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 타티아나는 다시 한번 시누이를 꼬드겼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전하랑 저랑 함께 준비한 거잖아요.”
“음.”
“아니, 왜 갑자기 바쁜 척하고 그러세요. 늘 심심해하시면서.”
솔직히 말하면 타티아나는 이런 생각도 좀 있다.
스칼렛이 옆에 있으면 어어어? 하다가 자연스럽게 기드언과 분위기가 풀릴 것 같다고.
원래 누가 곁에서 정신없이 떠들어 주면, 한 마디씩 거들게 되는 법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다 같이 웃고 있다.
물론 스칼렛도 남의 부부 싸움을 바로 옆자리에서 관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콧대 높은 남동생이 고전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기로 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타티아나.”
“네?”
“이번 행사는 타티아나가 왕가에 온 뒤,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행사야. 한동안 사람들이 이 얘기만 할 테고, 사관들도 기록할 걸?”
저렇게 말하니 갑자기 부담감이 느껴지려 했다.
그럴까 봐 그냥 리본이나 자르고 오겠다며 가볍게 생각하려 한 것인데.
스칼렛은 부담을 줄 생각은 아니라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타티아나만 주목을 받아야 해.”
“…….”
“나랑 공을 나누어 가지면 안 된다는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니?”
너를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빠지겠다는 뜻이었다.
타티아나는 스칼렛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해 한동안 침묵했다.
괜히 숙연해지기도 했는데, 뭉클하며 피어나는 건 역시 고마움이었다.
마음 씀씀이가 참 각별하고 따뜻하지 않은가.
“제가요.”
“응.”
“나중에 스칼렛 전하를 도울 일이 있으면…….”
“…….”
“정말로 진심을 다할게요.”
스칼렛은 ‘진짜?’ 좋아라, 하면서도 타티아나를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올케는 이미 한 번 배신한 전적이 있지 않냐는 거였다.
숨어 있는 날 로버트한테 팔아넘기지 않았냐고.
타티아나는 ‘아이, 그건 장난이었죠’ 해명하다가 그게 대체 언제 적 일인가 싶어졌다.
남매가 둘 다 왜 이렇게 기억력이 좋은지 모를 일이었다.
* * *
타티아나는 기드언보다 먼저 와서는 마차 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호화스러운 행사용 마차 대신, 보호 마법이 걸려 있는 군용 마차를 택했다.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빈민가에 가면서 화려함을 과시하는 건 취지에 맞지 않아서였다.
타티아나는 딱딱한 의자를 눌러보다가 투박한 마차 내부를 구경했다. 눈빛에 감탄과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드언이 예고도 없이 마차 문을 열자 그녀는 병사들처럼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러고는 기드언을 스윽, 한 번 바라보고는 무심한 척 창가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 떨떠름하고도 미적지근한 반응에 기드언은 입매를 비틀며 물었다.
“나, 도로 나가요?”
“…….”
“학교 가지 말까?”
그러자 그를 본체만체하던 타티아나에게서는 즉각적인 반응이 튀어나왔다.
“어딜 나가요!”
“…….”
“전하가 갑자기 안 가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뭐, 둘이 싸웠다고 생각하겠죠.”
내 말이!
“내 행사 망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따라와요.”
잔말 말고 옆에 딱 붙어서 친한 척 하란 말이야.
타티아나는 눈을 부릅떴고,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기드언은 얼굴을 가리며 웃고 말았다.
저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들이 제일 처음 파티에 함께 참석할 때, 사이가 좋아 보여야 한다고 말했던 게 문제였나?
그런데 사이가 좋은 척할 필요 없이, 그냥 사이좋게 지내면 되는 일 아닌가.
안 싸운 척하지 말고 정말로 안 싸우면 끝나는 일이었다.
기드언은 아무튼 한 번씩 웃긴다고 생각하며, 마차 위에 올라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