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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9)화 (81/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6장. 너의 검이 되어 (12)

타티아나는 그 뒤로도 계속 창가를 바라보았다.

군용 마차라 창문이 아주 조그마해 별반 보이는 것도 없을 텐데 말이다.

기드언은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는지 한번 두고 보자는 심경이 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제 자신이 좀 과민하게 반응하고, 그녀를 짜증 나게 한 건 맞다고 인정했다.

주인의 통제마저 벗어난 무기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면 누구나 간담이 오그라든다.

심지어 그 칼날은 그녀의 눈가를 스치고 지나가기까지 했다.

사실은 트라우마가 생기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한데 그 트라우마가 왜 타티아나한테 안 생기고 그에게 왔는지는 참 모를 일이었다.

기드언은 어제 오후, 탄식과 안도의 한숨을 몇 번이나 내뱉었다.

대련을 중단시키고 싶은 마음은 억눌렀지만, 검 끝이 과격해질 때마다 벌떡 일어나게 되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그도 검사들이 대련할 때, 이런 식으로 주의를 끌면 안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시선이 분산되면 부상의 위험도 당연히 높아진다.

그런데 어제는 그 순간순간의 초조함이 본인의 의지대로 잘 통제되지 않았다.

방해를 할 의도는 결코 없었는데 말이다.

한참 동안 어제 일을 되돌아보던 기드언은 난데없이 위인의 발자취를 더듬고 싶어졌다.

새삼 장인어른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마 그 속이 새카맣게 문드러졌을 테지.

‘전 제 딸이 위험한 일을 하는 건 싫습니다. 그런데 딸이 좋아하는 걸 아비 된 자가 어떻게 뺏습니까?’

가끔은 냉정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애정이 너무 지나치면 상대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부모든 남편이든 그녀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으니까.

때로는 거리를 유지하며 그저 잘 해내기만을 응원하는 자세가 필요했다.

간섭보다는 그 조용한 응원이 더 넓은 사랑이었다.

한데…… 그게 매번 가능할까?

사랑하는데 어떻게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 사람이 다치는 걸 어떻게 참냐는 거다.

블룸 경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을 보며 남몰래 얼마나 번민했을까.

위험한 길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을 텐데 말이다.

저렇게 소중한데, 생채기 하나만 나도 가슴이 아렸을 텐데.

딸의 엄청난 재능을 보며 마냥 행복해할 수 없는 그의 마음은 얼마나 복잡했을까.

기드언은 여러 가지 심경이 담겨 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의 무게감이 고스란히 느껴진 것일까? 타티아나는 창가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움칠거렸다.

사실 그녀는 아까부터 기드언의 시선을 계속 의식하고 있었다.

어찌나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지 무안한 건 둘째 치고, 한쪽 뺨과 뒤통수가 뚫리는 것 같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한숨 쉬지 말고 그냥 속 시원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만 좀 쳐다봐요.”

“…….”

“어제부터 왜 자꾸 그런 눈으로 보는 거예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타티아나가 항의하자 그저 위인의 발자취를 더듬었을 뿐인 기드언은 비딱한 표정을 지었다.

장인어른이 얼마나 마음을 끓였는지 얘가 과연 알까, 싶기도 했고…… 좀 쳐다보면 어떠냐는 생각도 들었다.

“보면 안 돼요?”

“…….”

“자기는 어릴 때 매일같이 나 쳐다봤으면서…….”

아직 덜 자란 몸을 덤불 속에 숨긴 채 눈만 댕그랗게 뜨고 있는 게 참 앙큼하면서도 귀여웠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그때도 고양이 같았다.

혼자 승부욕을 불태우다가 기드언이 자리를 피하면 슬그머니 나오는 것도, 검술을 곧바로 따라 해 보는 것도, 그러다 시무룩해하는 것까지 전부 다 귀여웠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기드언의 말에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뭔가에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시선을 딴 곳으로 피했다.

그리고 잠시 후, 기드언은 아주 진기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의 얼굴이 전에 없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던 것이다.

결코 들추고 싶지 않은 과거를 들켜 버린 사람처럼.

기드언은 그녀가 낯을 붉히는 게 생경하고 신기해서 유심히 바라보다가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타티아나는 다소 발끈하며 눈을 흘겼다.

“전하도 저 쳐다봤잖아요!”

“내가 언제?”

“아니, 내가 보는 거 다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비 오는 날 그냥 집에 간 거잖아요…….”

가만히 듣고 있던 기드언은 그 말에 서서히 미소 지었다.

그녀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는 게 그에게는 좀 남다르게 다가와서였다.

어쩌면 그날이 그녀한테도 특별하게 느껴졌나 보지.

기드언은 그 무렵 타티아나가 자신을 훔쳐보는 걸 다 알고도 모른 체했다.

그는 그때도 성격이 살짝 꼬여 있어서, 언제까지 하나 보자, 이런 식의 마음을 품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가 나무 뒤에 숨어 비를 홀딱 맞고 있는 순간, 기드언은 너무 이상하고도 낯선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저렇게 놔두면 안 될 것 같았고,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었으며…… 얼른 따뜻한 곳으로 데리고 들어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도 어려서 그게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고, 그녀에게 다정한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냥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게 어디에서 비롯된 마음이었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티티가 비 맞는 게 싫었어요.”

“…….”

“좋아해서 그랬나 봅니다. 티티를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타티아나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붉게 물들었다.

지나간 과거사는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이 상황도 민망해서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드언은 아직도 궁금한 게 있어서 익을 대로 익어 터지기 일보 직전인 그녀의 볼을 톡 건드리며 물었다.

“근데 왜 그 뒤로는 나 안 쳐다봤어요?”

“…….”

“다 낫고 난 다음에도 밖에 안 나왔잖아.”

그뿐인가. 나중에는 막 피해 다니며 사람을 괜히 흘겨보기도 했다.

기드언은 거기에 상처를 받진 않았으나 약간은 억울했으며, 또 조금은 서운함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타티아나는 그의 질문에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냥 좀 창피해서.”

타티아나도 기드언이 자신의 염탐을 눈치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애초에 못 알아챌 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없다.

검술에 대해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에이, 나도 모르겠다, 우리 집인데 뭐 어때?’ 뻔뻔하게 굴었을 뿐이지.

한데 그가 비 오는 날, 조용히 자리를 피해 주자, 그녀는 자신이 무언의 배려를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고맙긴 했는데, 사실은 좀 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혼자 경쟁심을 열심히 불태우던 상대가 따뜻한 태도를 보여 주었을 때.

그때는 불현듯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는 법이었다.

상대가 좀 달리 보이기도 했고, 그를 예전과는 다른 쪽으로 의식하게 되었던 것 같다.

타티아나가 입술만 열심히 오물거리며 무안해하자 기드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내가 티티한테 시시해졌나 했어요.”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는 예나 지금이나 절대 시시해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정말로 시시한 사람이라 생각했다면 결혼도 안 했다.

그녀가 강하게 부인했지만, 기드언은 이걸로는 부족했는지 굳이 뭔가를 확인하려 들었다.

“솔직히 그때 나 조금은 좋아했죠?”

“……뭐라는 거람.”

미안하지만 그때 타티아나는 기드언보다도 더 어려서, 그런 감정에 대해 잘 모를 때였다.

그러나 기드언은 포기하지 않았다.

“관심은 있었잖아. 그건 맞잖아요.”

“그렇긴 한데…….”

타티아나는 말끝을 흐리다가 그를 힐끔 보며 되물었다.

“전하한테 그 정도 관심 없는 사람이 발터에 있을까요?”

“그 사람들이야 그러든 말든. 넌 어땠냐고.”

타티아나는 여기에서 꼭 긍정의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남편의 의지를 읽었다.

결국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기드언은 그녀의 손을 끌어와 꽉 잡았다.

가늘게 접힌 눈이 너무나 예뻤다.

기분이 좋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표정을 보며 그녀의 기분도 좋아졌다.

그리고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보랏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행사 마치면 장인어른 뵙고 옵시다.”

“아빠요? 묘소에 갈 거예요?”

“네, 곧 기일이잖아요.”

“……알고 계셨어요?”

타티아나는 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기드언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럼 설마 그런 것도 잊어버리겠냐, 하는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타티아나는 여전히 얼떨떨해하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에 기드언을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별말씀을.”

“…….”

“결혼 전에 같이 갔어야 하는데, 이제야 말 꺼내서 미안하네요.”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불과 몇 시간 전, 공주와 대화하며 기억력이 좋은 남자는 뒤끝도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이참에 그 생각을 완전히 고쳐먹기로 했다.

기억력이 좋고 세심한 남자와 사는 건 참 괜찮은 일이었다.

그녀의 과거를 소중히 생각해 주는 사람과 사는 건 더 근사했다.

심지어 그 과거는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지나온 것이었다.

너무 고맙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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