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127)화 (116/130)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9장. 남편과 사이가 좋을 때 (4)

타티아나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공주에게 붙잡혀 있었다.

그러나 먼저 나간 남편이 신경 쓰여서 처음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대화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스칼렛은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다가, 더 이상 방해꾼이 되기 싫다며 미련 없이 손을 흔들었다.

타티아나가 한발 늦게 침실로 달려갔을 때, 기드언은 모로 누워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세 척추에 안 좋대도 그러네.’

그녀는 얼굴을 받치고 있는 손목을 탁, 쳐 내고 싶은 장난스러운 욕망을 내리눌렀다.

대신 검지를 펴서 그의 척추를 스윽, 하고 길게 훑었다.

‘진짜로 등이 예민하구나.’

잠자리에서 늘 여유만만하여 파악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으나, 기드언은 여길 만질 때마다 눈에 띄게 움찔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등 뒤를 돌아보았다.

약간 가소롭다는 눈빛이라, 타티아나는 발끈할 뻔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기드언은 자신의 등 부근을 맴돌고 있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순식간에 메치기를 시도했다.

눈 깜짝할 사이 침대에 눕게 된 타티아나는 몸을 비틀었으나, 기드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결박이라도 하듯 타티아나의 손목을 침대 위에 내리눌렀고, 그녀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 기술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필승 전략은 무엇일까. 어디를 공략해야 하나. 빈틈은 없나.

타티아나는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어? 힘 쓴다? 와, 지금 진짜 별로. 아내한테 힘 쓰는 남자, 완전 별로.”

그녀의 남편은 등이 예민하다.

하나 진짜 약점은 따로 있었다.

그는 아내한테 비난받는 상황을 싫어했다. 늘 잘 보이고 싶어 하니까.

어떨 때는 그녀가 무심코 흘린 말을 귀담아듣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뼈에 새기는 눈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기드언은 멈칫했고, 그 사이 타티아나는 재빨리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녀가 손에 날을 세워 그의 목젖을 후려치려는 순간이었다.

기드언은 방어 자세를 취하다 말고 헛웃음을 흘렸다. 어처구니가 없는 듯했다.

“그러는 너는 남편 급소를 그렇게 막…….”

그들은 베개 싸움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부부였다.

그러다 진심이 되면 말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많지 않았다.

더욱이 이곳은 왕자궁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여 남의 집 세간살이를 박살 내는 것은 곤란했다.

장난일지언정 우리 모든 싸움은 대화로 하자며,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무언의 합의에 이르렀다.

그들은 얌전히 침대에 누웠고,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풍성한 머리칼을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누이 어리광 다 받아 주지 말아요. 네가 피곤하잖아.”

“……그냥 같이 노는 건데. 나도 재밌어서.”

“그럼 다행이고.”

그 방대한 양의 수다를 다 듣고 있으려면 정신이 하나도 없을 텐데. 대체 뭐가 재미있다는 걸까.

기드언은 약간 공감하기 어려웠지만, 아내가 그렇다고 하니 더 이상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그는 어렵게 되찾아 온 자신의 아내와 밤 시간을 즐겁게 보낼 방법은 없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래도 누이보다는 남편이랑 노는 게 더 재미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혼을 했더니, 남편이란 놈은 그저 그런데 시누이랑 너무 잘 맞아서 좋더라는 감상은 듣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남의 성에 와서 놀거리를 찾는 것도 마땅치가 않아서.

“요기할 거라도 좀 먹을래요?”

뜻밖의 제안에 타티아나는 되물었다.

“웬일로?”

“그냥. 민가의 부부들은 밤에 종종 그런다고들 해서.”

꼭 민가의 부부들만 그런 시간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귀족들도 부부간에 사이가 좋으면 화롯불에 구운 간식거리를 까먹으며 담소를 나누곤 했다. 겨울밤은 기니까.

그렇지만 기드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상당히 소박하고도 괴리감이 느껴지는 풍경이라 타티아나는 물었다.

“전하는 그런 거 어디서 들었어요?”

“누이한테.”

타티아나는 알 만하다는 듯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참 미안한 일이지만, 타티아나는 다른 건 몰라도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이제는 건포도도 먹고 가리는 음식 하나 없었지만, 본인 나름대로는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이다.

물론 야식 한 번 먹는다고 근육이 지방에 뒤덮이거나 몸이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거, 그녀도 아주 잘 안다.

타티아나가 진짜로 경계하는 건 그 한 번이 다음으로 이어져, 마침내 습관으로 자리 잡는 것이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너무나 쉬우니까.

그러나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방법을 고민해 주었는데, 거기에 대해 요만큼이라도 부정적인 의견을 보태기가 싫었던 거다.

그 마음 자체로 충분히 고마워서.

그렇다고 또 억지로 맞춰 주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라면 전부 다 경험해 보고 싶었다.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의사를 확인하고는 방 밖으로 나섰다.

다시 안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들고 온 바구니 안에는 초콜릿과 쿠키가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타티아나는 흠, 하고 웃다가 그중에서 가장 앙증맞게 생긴 초콜릿을 골라 들었다.

그러고는 손수 포장을 벗겨 기드언의 입술 앞에 내밀었다.

기드언은 눈 끝을 접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먹여 주고 받아먹는 게 낯간지럽다고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좋으면 좋다고 그냥 말하지. 가만 보면 내숭이 있단 말이야.’

타티아나는 재촉하듯 그의 눈앞에서 초콜릿을 흔들었다.

그가 입을 벌렸을 때, 손을 뒤로 슬쩍 빼며 장난을 치고 싶었는데, 그러면 다시는 안 받아먹을까 봐 일단 한 번은 참았다.

상호 간의 신뢰를 쌓는 게 우선이었다.

기드언이 초콜릿을 입안에 넣자 그녀는 또다시 포장지를 열심히 까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입을 열었으나, 그녀는 넣어 줄 듯하다가 이번에는 얼른 손을 뒤로 빼 버렸다.

이렇게 하면 뭐 하는 짓이냐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는데.

기드언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지그시 웃었다.

타티아나는 그 미소에서 어쩐지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초콜릿을 한입에 집어삼켜 버렸다. 손가락째로.

“으, 뭐예요!”

혀끝의 감촉이 너무나 간지러웠다.

춥, 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리는 게 부끄러웠다.

타티아나는 뒤늦게 손가락을 빼 보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민망해할수록 더욱 노골적인 소리를 냈다.

뜨거운 체온에 녹아내리기 시작한 초콜릿을 남김없이, 아주 샅샅이 핥은 후에야 그는 그녀의 손을 풀어 주었다.

그러고는 입가를 닦으며 속삭였다.

“티티, 함부로 장난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에잇, 더럽게.”

“뭐가. 내 입이? 침이?”

그럼 나랑 키스는 어떻게 하냐며, 이제껏 참고 했냐며 기드언은 피식 웃었다.

타티아나는 으이, 하며 외쳤다.

“아니이, 내 손이!”

“아. 그럼 다시 제대로 깨끗하게 해 줘야죠.”

타티아나는 질겁하며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어떻게 깨끗하게 해 주겠다는 건지 대충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입으로는 ‘동작 그만’, ‘폭력 금지’ 따위의 말들이 흘러나왔다.

기드언은 그 말에 연신 큭큭대면서도 기어이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 손을 입가로 가져가는 대신, 옷자락으로 닦아 주었다.

마디 하나하나 지문 사이사이까지 꼼꼼하게.

“미안. 지금은 손수건이 없어.”

뻘쭘해진 타티아나는 말했다.

“……이따 씻으면 돼요. 아니, 닦아 줄 거였으면 그렇게 말을 하지.”

“했잖아요. 깨끗하게 해 준다고.”

“아깐 이런 뉘앙스가 아니었어요.”

이렇게 담백하지 않았다고. 날 음습하게 바라봤잖아!

타티아나는 눈을 흘기다가 결국에는 웃어 버렸다.

남편을 놀리고 싶어서 무심코 시작한 장난이 이렇게까지 낯 뜨겁고 유치한 방향으로 흐를 줄은 예상치 못했다.

어깨를 으쓱하던 기드언은 바구니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방금 전 타티아나가 한 것처럼 포장을 벗겨 초콜릿을 입에 쏙, 하고 넣어 주었다.

그녀가 오물거리는 모습을 확인한 그는 바구니를 또다시 뒤적거리다가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이 중에 어떤 게 마음에 드냐고, 이번에는 직접 골라 보라고 얘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다소 모호한 표정을 짓더니 눈 내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 애매한 미소에서 그는 뭔가를 눈치채고 말았다.

“지금 이거 안 먹고 싶죠?”

“……어떻게 알았어요?”

“별로 안 내키는 얼굴이잖아.”

타티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늦게 자백했다.

“응. 사실 나 밤에 군것질 잘 안 해요.”

“그럼 진작에 얘기를 했어야지.”

“재밌잖아요. 전하랑 이런 것도 해 봤다는 데에 의의가 있는 거예요.”

기드언은 바구니를 한쪽에 치워 놓으며 웃음을 흘렸다.

공감의 미소였다.

사실 군것질은 기드언도 즐겨하지 않았다.

그도 타티아나와 이런 것도 해 보았다는 데 의미를 두었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기분이었다.

그는 타티아나 쪽으로 바짝 다가가 앉으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눈이 소복이 쌓인 북부의 풍경을 함께 감상했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설원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보다 더 비현실적인 건 그들이 오늘 함께 보낸 하루인지도 모르겠다.

낮에는 무시무시한 마물과 대적하고, 밤에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속살거린다.

밖에서는 오돌오돌 떨다가도 서로의 체온에 녹아내린다.

달콤하고도 살벌한 일상이었다. 초콜릿 같은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