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9장. 남편과 사이가 좋을 때 (5)
* * *
밤사이 그쳤던 눈은 아침이 되자 또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타티아나는 새삼 북부 지방이 사람이 살기에는 참 힘든 곳이구나, 생각했다.
여기서 더 쌓이면 외부와 고립될 것 같았다.
기드언이 발터 중심부에 심어 놓은 살수들은 다행히 그 전에 수도 소식을 들고 왔다.
사실 어떠한 자연재해가 닥쳐도 뚫고 올 사람들이긴 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온 소식은 회의 분위기를 일순간에 무겁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국왕 폐하가 승하하신 것 같습니다.”
기드언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날카롭게 추궁했다.
“확실해?”
“며칠 전 성 분위기가 묘하게 소란스러웠고, 의사 두 명이 국왕 폐하 침소로 불려 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자택에서 피살된 채 발견됐습니다.”
“두 명 다?”
“예. 아직 공식 발표는 없습니다.”
의사들이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건, 입막음을 해야 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국왕의 안위와 관련이 있을 게 분명했다.
왕이 승하했다는 것도, 정황상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었다.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기드언 남매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 애틋한 관계가 아니라는 건 다들 알지만, 어찌 됐든 국왕과 그들은 혈육이 아닌가.
스칼렛은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내리깐 채 짧게 묵념했다.
살수의 말을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러나 다시금 눈을 떴을 때, 그녀의 표정은 비교적 담담했다.
다소 씁쓸한 기색이 어려 있긴 하나, 슬픔과 비탄을 찾아보기란 어려웠다.
기드언은 그런 누이보다도 더 냉정했다.
아직도 확인해야 할 사안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다는 듯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대관식을 강행한다는 얘기는 없어?”
“그런 기미는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기드언이 왕성에 있을 당시, 국왕의 목숨이 다했더라면 그건 기드언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은 그 순간 이미 끝나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성을 떠나오자마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만에 하나 왕후가 대관식을 강행한다면, 그리하여 아우가 잠시나마 왕관을 쓴다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추후 대관식 자체가 무효라는 걸 증명하면 될 일이나, 여러모로 번거로운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기드언 없는 그들만의 대관식이 성사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바이칼이 끝끝내 왕관을 거부할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왕성을 떠나오던 그날 밤, 그녀는 바이칼에게서 일종의 의지를 느꼈다.
평소의 온화한 기운과는 뭔가가 분명히 달랐다.
하나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었고, 수도 상황은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듯했다.
공식 발표가 없었으니 아직은 현왕 치세다.
온건파 귀족들은 무엇이 진정한 왕실의 뜻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반면 기드언파 귀족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이미 사병을 이끌고 와 북부군에 합류한 이들도 있었다.
현명한 처세였다.
기드언이 이 싸움의 승리자가 되지 못하면, 그들은 어차피 목숨을 구명할 수 없다.
그럴 바엔 재빨리 이쪽에 줄을 대고 전공이나 세우는 게 앞날에 도움이 되는 선택이었다.
공국의 군대와 북부군, 유력 귀족 가의 사병, 그리고 풀만에서 보내올 동맹군.
기드언은 지금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수의 군사를 확보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중앙군 대장한테 협조 요청한 건 어떻게 됐어?”
기드언은 상황이 더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서부군과 남부군은 이 일에서 배제할 생각이었다.
그들은 국경이나 열심히 지키고 있는 게 도와주는 거였다.
그러나 중앙군은 달랐다.
병사들이 수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지키고 있는 길목 길목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기드언은 중앙군 대장에게 선택을 종용했다.
왕후의 방패가 될 것이냐, 나의 검이 될 것이냐.
왕후의 방패가 되는 순간, 너는 필시 내 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히리라.
“전하의 뜻은 전했으나, 다소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었습니다.”
“또 왜?”
“왕후 측에서도 전하와 비슷한 내용의 공문을 보낸 모양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왕실의 인장이 찍혀 있다고 합니다.”
그 말 한마디로 중앙군 대장이 무엇을 혼란스러워하는지가 설명됐다.
양측에서 내 편에 서라,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데, 둘 모두의 서신에 똑같은 국새가 찍혀 있는 것이다.
헷갈릴 만했다.
“그새 위조했군.”
이쪽이 진품을 가지고 있으니 저쪽이 가지고 있는 건 당연히 모조품이었다.
그런데 그걸 지금 같은 상황에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가서, 중앙군 대장 면전에 대고 직접 보여 주기라도 해야 하나.
기드언은 비식거렸고, 이때 갑자기 나선 건 의전의 전문가인 스칼렛 공주였다.
“일을 좀 더 크게 벌여 봐. 귀족들과 군부 대장들 참관하에 국새를 검증하자고 해. 이런 건 마탑이 주관하는 게 좋을 거야.”
가만히 듣고 있던 타티아나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에도 선례를 깰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하다.
이건 마탑뿐만이 아니라 왕실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들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정치에 난입하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기드언에게도 큰 부담이 되고 말 것이다.
추후, 왕실의 안정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위조품을 갖고 있는 왕후는 검증 절차를 거부할 게 뻔했다.
그리고 그건 마탑과 중도적 성향의 귀족들이 1왕자를 지지할 수 있는 명분이 되어 줄 것이다.
타티아나는 그 외 마탑에 추가적으로 요청할 일은 없나, 고심했다.
이참에 마법사들 몇 명을 북부에 파견하여 마물 사태 해결을 도우라 말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어차피 그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지 않나.
그때 이 그럴듯한 제안을 생각해 낸 스칼렛이 속삭였다.
“그 사람들 이런 거 좋아하지?”
“뭘요?”
“마법사들 말이야. 조용하고 고고한 척하면서, 또 완전히 소외되는 건 싫어하잖아. 속으로는 관심받는 걸 좋아하는 거야. 음침하게.”
“……상당히 비슷해요.”
타티아나는 얼떨떨하게 대답하면서도 ‘어떻게 알았지?’ 생각했다.
국가적으로 큰 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마법사들과 교류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을 텐데.
그마저도 깊은 대화를 나눠 본 건 최근에 머문 사흘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공주에게 그 정도면 너무나 충분한 시간이었다.
공주는 그 사흘 사이 마법사들의 성향 파악을 완벽히 끝낸 듯했다.
“혹시 다들 이중인격자들이니? 난 나보다 기복이 심한 사람들 처음 봤잖아.”
“…….”
“소심하고, 예민하고, 이기적이고. 아주 그냥 다들 무슨 어린애들처럼…….”
“아니, 그렇게까지 성격이 모난 사람들은…….”
타티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두둔하듯 끼어들었으나,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니라는 말이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였다. 성격이 어딘가 약간 이상한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사실은 사실이지. 아주 유구하지. 이건 하늘이 두 쪽 나도 부인할 수가 없지.’
그런데 왜 내 기분이…….
타티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드언을 바라보았다.
“왜 지금 제가 욕을 먹는 것 같을까요?”
기드언은 웃음을 삼키며 딴청을 피웠다.
왜긴 왜겠어. 너도 마법사니까 그렇지.
그러나 아내는 성격이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꼬이지 않았다.
사고 과정이나 행동 방식이 상당히 명쾌했다.
굳이 성향을 분류하자면 마법사들보다는 기사들 쪽이었다. 아니, 요즘 보면 살수들과 제일 잘 맞는 것 같았다.
하나 스칼렛은 고작 사흘간 뭐 그리도 쌓인 게 많았는지 아주 적나라한 감상평을 쉬지 않고 늘어놓았다.
타티아나도 그때마다 쉬지 않고 매번 움찔움찔했다.
기드언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있는 듯한 아내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보다 현실적인 조언을 해 주었다.
저거, 금방은 안 멈추니까 그냥 누이 말에 신경 끄라고.
* * *
오후 무렵, 기드언과 타티아나는 수색대를 꾸려 성 밖으로 나갔다.
며칠간 마법으로 마물들을 열심히 지져 놓았으니, 이제 본거지를 쳐야 할 때였다.
오늘 수색은 그를 위한 사전 답사였다.
타티아나는 살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이었다.
‘아, 드디어…….’
나도 현장에 나설 수 있는 것인가.
성곽 위에서 지켜볼 때마다 어찌나 부럽던지 눈물이 날 뻔했다.
타티아나를 비롯한 수색대는 말을 타고 힘차게 달렸다.
마물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산기슭을 향해서였다.
그러나 이동하는 도중에도 일행은 시시각각, 적잖은 수의 마물 떼를 만났다.
가끔은 말에서 내려 그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간 도륙하고 불태운 마물의 숫자가 어마어마한데, 역시 뿌리를 뽑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한 듯했다.
북부인들이 왜 고전해 왔는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번식 속도가 상상 초월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호감이 가지 않는 외양이네.’
타티아나는 찐득찐득한 진액을 내뿜는 마물을 바라보다가 치를 떨며 검을 뽑았다.
기드언도, 살수들도 일제히 공격 태세를 취했다.
이건 사실 그들에게는 다소 시시한 싸움이다.
배울 점이 있는 상대와의 대련을 즐기는 타티아나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지성이 없는 저들에게서 기술적인 특이점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하던가.
타티아나는 그녀 나름의 목표를 세웠다.
여기에 있는 어떤 훌륭한 동료보다도, 내가 가장 많은 수의 마물을 처리하겠노라고.
그녀는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그간 성곽 위에서 내리는 눈을 맞으며 보내야 했던 인고의 시간을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살수들은 왕자비가 오늘따라 컨디션이 참 좋구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타티아나는 혼자만의 경쟁을 펼치다가 그냥 내가 다 처리하고 끝내겠다는 듯,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다 반복적인 찌르기와 베기가 무료하게 느껴지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힐끔거리기도 했다.
그중에는 본인의 남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데 그때 그녀의 눈에 이상한 게 포착됐다.
기드언의 검에 아지랑이 같은 게 스멀스멀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비비면 그 희뿌연 기운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다 다시 휙, 하고 쳐다보면 그 연기는 또 검 부근을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몇 차례나 그 행동을 반복했다.
무슨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저게 뭐야,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