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4
길초량과 함께 도착한 곳은 같은 규격의 작은 초옥들 수십 채가 질서정연하게 지어져 있는 공간이었다.
초옥이 작다보니 마당도 아담했다. 각각의 초옥과 마당을 낮은 울타리가 두른 모습이었다. 마당의 모양새나 넓이 또한 각 초옥마다 일정했다.
매우 작은 초옥들인 만큼 숙식 모두를 해결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는 용도의 개인 공간으로 보였다.
나를 이끌고 걷던 길초량이 한 초옥의 울타리 입구 앞에 멈춰 섰다. 사립문 같은 건 따로 없고, 그냥 울타리 사이의 빈 공간이 입구였다. 그 입구의 오른쪽에 명패가 걸려 있었다.
명패를 일견한 길초량이 내게 물었다.
“송 형, 문자는 기억나시오?”
기억을 잃은 내가 혹시 문자도 기억하지 못할까 염려해서 물은 모양이었다.
“다행히 문자까지 잊은 건 아닌 모양이오. 송유겸이라고 적혀 있구려.”
“말을 기억하니 글도 기억하지 않을까 싶기는 했소. 정말 다행이오.”
내가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길초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이곳이 송 형의 거처요. 온 몸이 젖었으니 들어가서 몸을 닦고 옷도 갈아입고 계시오. 나 또한 하의가 젖어서 갈아입고 다시 오겠소. 치료는 제대로 해야 할 테니까. 참고로 내 거처는 이 열의 저쪽 끝이오.”
“오늘 내가 길 형 앞에서 못난 꼴을 보인데다가, 계속해서 폐만 끼치고 있구려.”
못난 꼴을 보인 것도 원래의 송유겸이요, 폐를 끼치게 된 원인도 원래의 송유겸에게 있다.
그러나 도움을 준 이에게 이 정도의 인사는 해줘야겠지. 가뜩이나 이곳에서 가장 친한 벗이라고 하니까.
“벗이 어려움에 처했는데 돕는 게 당연하잖소. 평소 송 형이 내게 보인 관대함을 생각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오. 그러니 폐 끼친다는 생각일랑 하지도 마시오.”
“내가 길 형에게 무슨 관대함을 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건 고맙소.”
“하하. 송 형이 평소에 내게 술을 많이 샀소. 그걸 다 얘기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그 이야기는 차후에 합시다. 어쨌든 이따가 다시 오겠소.”
방에 들어서자 중앙에 서탁이 놓여 있는 게 보였고, 그 서탁 위에 유등이 보였다. 재빨리 유등에 불을 붙이고는 방 안을 살폈다.
초옥의 방은 아담한 크기였고 나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방문의 왼쪽 벽면에는 벽장이 있어 침구류를 수납하는 공간으로 보였고, 오른쪽 벽면에 위치한 장롱은 의복이나 개인 물품 등을 수납하는 용도로 보였다.
실제로 열어서 대충 확인해보니 내 예상대로였다.
갈아입을 옷을 꺼내놓은 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룡관이라니.’
죽은 내가 송유겸이라는 인물이 되어 살아 있는 것도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데, 그 말을 들으니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천마의 다섯 번째 제자였던 나 서무욱이 백도 무림맹 산하의 잠룡관에 와있다니, 이 무슨 우스운 일인가.
백도 무림맹은 호북 무창에 본맹을 두고 있고, 그곳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네 개의 지맹을 두고 있다.
동부지맹, 서부지맹, 남부지맹, 북부지맹.
그 네 개의 지맹에서 또다시 각 지역별 지부로 나뉘는 식이다.
네 개의 지맹들은 각각 산하에 잠룡관이라는 교육기관을 두고 있어, 인근 지역의 후기지수들이 모인다. 그렇기에 잠룡관 또한 총 네 곳이다.
길초량은 이곳이 동부지맹의 잠룡관이라고 했다. 무림맹의 동부지맹은 강서 동북부의 옥산현에 위치해 있음을 알고 있다.
길초량을 통해 날짜를 확인했었다.
놀랍게도 오늘이 바로 내가 사형제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날이었다.
가만히 돌이켜 보니 서무욱이었던 내가 죽은 시각과, 송유겸인 내가 깨어난 시각이 얼추 비슷했다. 둘 다 술시초(저녁 7시)를 약간 넘어선 시각이었다.
그 즈음에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영문을 알 수가 없으니 두렵다.
이쯤 되니 누군가가 시원하게, 이 의문스러운 상황에 대한 답을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다. 간절히.
“후우우우······.”
답답함에 한숨만 나온다.
문득 길초량이 해준 다른 이야기가 떠올랐다.
송유겸이라는 인물이 잠룡관의 계반癸班에 속해있다는 이야기였다.
길초량은 계반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까지 곁들였지만,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백도의 후기지수들이 모이는 만큼, 잠룡관에 대한 정보는 천마신교에서도 공들여 수집하기 때문이다. 네 곳에 있는 잠룡관 자체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잠룡관에 속해 있는 주요 후기지수들에 대한 정보들까지도.
잠룡관은 무공수위에 따라 관도들을 열 개의 등급으로 나누어 수준별 교습을 받게 한다. 그 열 개의 등급으로 나눈 게 바로 ‘반(班)’인데, 상위 반에서 하위 반까지의 명칭을 십천간十天干의 순서대로 붙였다.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
저 순서가 실력 순이니 송유겸이 속한 계반은 꼴찌 반이다.
천마신교에서 수집한 정보에도 나와 있는 사실인데, 꼴찌반인 계반은 교관들이 딱히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즉, 무공으로는 가망도 없고 답도 없는 인생들이 모인 게 바로 계반인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다가 곧바로 정좌하고 앉았다.
이 몸뚱이의 상태를 한 번 들여다보고 싶어서였다.
길초량과 걸어오면서 느꼈는데 이 몸으로는 주변의 기척을 파악하는 일조차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단전의 존재 정도는 파악이 되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수준이었다.
답도 없는 계반 소속이니 그다지 기대가 되는 바는 아니나, 아무리 꼴찌반이라도 잠룡관도는 잠룡관도다. 일말의 기대감 정도는 들었다.
눈을 감고 마음을 차분하게 한 후, 회회심공을 운용했다.
사부님의 제자가 된 후에 배우기 시작한 심법이 바로 회회심공이다.
천마에게서 배운 심법이니 마공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마공이었으면 애초에 이곳에서 운용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곳은 백도의 교육기관인 잠룡관이니까.
회회심공은 정사마의 어느 속성도 띠지 않는, 무속성의 심법이다. 정종도 아니고 마공도 아니고 사공도 아니니 중성적인 심법이라고도 하겠다.
그렇게 나는 명상에 빠져들 듯 차분히 진기를 돌리며 이 몸의 신체 상태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상태 점검을 마친 후 조용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예라잇······!”
사실은 신체 내부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몇 번이나 화가 치밀었었다. 그걸 꾹 참으며 상태 확인을 마친 것이다.
일단, 단전의 공력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이십 년 공력은커녕, 십 년 남짓의 공력이나 될까 싶을 정도였다.
이건 공력이라고 말하기도 쪽팔린 수준이다. 무인의 입장에서 이 정도의 공력은 없는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나 천마의 제자였던 내 입장에서는 더더욱.
예상보다 공력이 너무 적었던 탓에 신체 상태를 확인하는 그 쉬운 과정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린 것이다.
길초량에게서 듣기로 송유겸의 현재 나이는 열여덟.
그래도 잠룡관에까지 들어온 놈이, 이 나이에 겨우 이 정도 공력이라니.
하······!
송유겸 너 이 새끼야. 염치가 있지, 이 수준으로 잠룡관에 기어 들어올 생각을 해? 엉?
이 몸뚱이의 문제는 민망한 수준의 공력만이 아니었다.
이 몸으로 깨어난 후부터 줄곧 느끼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확인해 보니 신체 내부의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주독의 영향이 가장 커보였다.
아무리 혈기왕성한 나이라지만 이건 마셔도 너무 마셨다. 언제부터 마신 건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두 해 이상은 거의 매일 죽자고 마셨을 것이다. 그래야 이 정도의 주독을 축적할 수 있을 테니까.
어린놈의 새끼가 말이야. 술을 처먹어도 적당히 처먹어야지 말이야. 그 좋은 공력 대신 주독이나 쌓고 말이야.
주독도 주독이지만, 송유겸이라는 놈은 식습관도 매우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주독 이외에도 체내에 좋은 기운이라고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맛은 기가 막히지만 건강에는 좋지 않은 음식들만 신나게 처먹고 다녔다고 봐야 했다. 이 답이 없는 새끼가.
“아아아······.”
절망적인 현실에 탄식이 새어 나왔다.
천마신교 전체를 통틀어도 상위 이십 위 근처였던 이 몸이, 몇 년만 지나도 열 손가락 안에 들 게 확실했던 이 몸이, 이제 백도 전체도 아니고 백도의 애새끼들만 모아 놓은 집단에서조차 찌끄레기라니.
이렇게까지 빼도 박도 못할, 삼류 중의 삼류라니.
나는 억울하게 사형제들에 의해 죽임당한 입장이다.
하지만 죽지 않고 마침 이런 상황이 되었으니, 혹시 먼 미래에라도 복수 비슷한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수라께서 보살펴서 이런 기회가 온 건가 싶기도 했다.
한데 이런 수준의 몸뚱이라니.
절망을 넘어 허탈감마저 몰려온다.
젖은 의복을 다 벗고 마른 천으로 몸을 닦은 후, 하의 쪽부터 입고 허리끈을 묶고 있을 때였다.
“송 형, 나요.”
“길 형, 오셨소? 들어오시오.”
아직 상의를 걸치지 않은 상태였지만 곧바로 대꾸해줬다.
이곳에서 가장 친한 벗이라는데 상의쯤이야 뭐, 보는데서 걸쳐도 되겠지.
한데 방문이 열린 후 먼저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길초량이 아니었다. 웬 여인이었다.
“헛! 누, 누구시오!”
놀라서 그렇게 묻는 와중에도, 나는 재빨리 상의를 집어 들고 상체를 뒤쪽으로 틀며 대충 상의를 걸치기만 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놀란 눈으로 그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의 반응이 매우 의외였다.
민망해하며 내게서 시선을 돌리기는커녕,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계속해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이 여자는?
보이기에는 십대 중반쯤의 소녀였다.
열여섯? 열일곱?
아직 성장기가 끝나지 않았겠지만, 현 상태만으로도 눈이 번쩍 뜨이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뒤쪽으로 들어선 길초량을 향해 말했다.
“아니, 길 형! 여인을 대동하셨으면 밖에서 미리 말을 하셨어야지, 깜짝 놀랐잖소! 하의를 입고 있었으니망정이지, 만약 벗은 상태였으면 어쩌시려고······!”
“아, 미, 미안합니다, 송 형. 시간이 상당히 지났으니 이쯤이면 당연히 갈아입었을 거라 생각했소. 한 식경(30분가량)이 훌쩍 지났는데 이제야 갈아입고 있을 거라고는······.”
내 딴에는 신체 상태를 점검한 후에 곧바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는데, 내 생각보다 신체 상태 점검이 오래 걸려서 이렇게 된 모양이다.
길초량으로서도 약간은 억울한 면이 있을 것 같아,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타이르는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동행이 있었으면 밖에서 미리 말을 좀 해주시지 그랬소. 가뜩이나 사내도 아니고 여잔데.”
그 와중에도 신경이 계속 쓰이는 건, 미소녀가 여전히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상의에 팔을 한 짝씩 차례로 끼워 넣고 있을 때 길초량이 말했다.
“그게, 이분 소저가 송 형에게는 여자라기보다는 가족이신지라······.”
이에 나는 눈매를 좁히며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예?”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여동생도 기억 못하시는구려.”
여동생?
내가 놀라 있는 사이에 길초량이 다시 말했다.
“이분 송 소저, 그러니까 송유하 소저는 송 형의 여동생이시오.”
내가 놀라며 미소녀를 바라보자, 미소녀 또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채로 말했다.
“두, 둘째 오라버니······.”
내가 눈만 껌뻑거리고 있자 미소녀가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정말로 저까지도 기억을 못하시다니······.”
분위기를 보아하니 미리 길초량한테서 들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뭐, 저 소녀가 내 가족이라니 자초지종을 다 얘기했겠지.
길초량이 말했다.
“송 형과 헤어지고 나서 생각하니 송 소저가 떠올랐소. 송 소저가 마침 잠룡관의 신반辛班 소속이고, 신반 여관도들의 처소가 이곳에서 멀지는 않은지라.”
“아······.”
“기억을 잃은 송 형이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려면 아무래도 가족이나 가문부터 시작하는 게 순서 아니겠소? 나도 송 형의 가족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긴 하지만, 그래도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이왕이면 가족에게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았소.”
말이야 당연히 맞는 말이었다.
게다가 길초량의 입장에서는 나를 최대한 배려해주기 위해 억지로 이런 수고까지 한 것이다.
길초량이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보따리를 서탁 위에 내려놓으며 다시 말했다.
“의원한테 가서 치료에 필요한 것들도 얻어왔소. 내가 해줘도 되는데 송 소저가 하시겠다는구려. 내 생각에도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소. 어쨌거나 가족끼리의 이야기가 짧게 끝날 것 같지도 않고, 남의 가정사를 외인인 내가 듣고 있는 것도 적절치 않을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소.”
길초량에게 고맙기만 하다. 감동스러울 정도로.
나는 아직 그를 잘 모른다.
사형제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입장이다 보니 누군가를 함부로 믿지도 못하겠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그가 내게 보여준 성의만큼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길초량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길 형, 신경 써주고 배려해줘서 정말 고맙소.”
“하하. 반대의 입장이었어도 송 형 또한 내게 똑같이 했을 것이오.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시오. 내일 들를 테니 치료 잘 받고 푹 쉬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