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5
살짝 등을 돌린 채 상의의 앞섶을 여미려는데 뒤에서 송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아직 입지 마세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무슨 뜻이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송유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머리······, 풀어서 젖은 천으로 닦아야 해요. 피가 굳어서 머리카락이 뭉친 부분은 물을 많이 묻혀서 닦아야 하구요. 물기가 흘러내리면 옷이 다시 젖을 거예요. 피 섞인 물이 흐를 수도 있구요.”
“아.”
“제대로 치료하고 머리카락을 닦기 전까지, 상의는 그냥 탈의하고 계시는 게 좋겠어요. 춥지만 않으시다면.”
“춥지는 않으니 그렇게 하겠소.”
내 대꾸에 송유하의 눈동자가 커졌다.
순간적으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경어를 사용했기에 저러는 거겠지.
“아, 그러니까 이게······, 누이동생이라는 건 알겠는데 지금의 내 입장에서는 초면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경어가······.”
“그, 그래도 오라버니가 말을 높이시니 저 또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어서······.”
“그, 그렇겠구려. 아, 아니, 그렇겠지. 어쨌거나 내 상황을 알게 됐으니······, 누이가 이해를 좀 해줬으면 좋겠네.”
내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대꾸하자 송유하가 또다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놀라는 거야? 내 말이 뭔가 이상했나?
내가 그 생각을 하는 사이, 송유하가 금세 표정을 바르게 하더니 대꾸했다.
“그럴게요. 일단 나가서 물을 좀 떠와야 하니 잠시만 계세요.”
송유하가 그 말을 남기더니 방을 나섰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아, 이것 참.’
여동생이라는 존재는 서무욱의 인생에는 없었다. 누나든 여동생이든, 그 비슷한 존재도 없었다. 그렇다보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영 어색하기만 하다.
게다가 내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송유하 자체도 형제라는 느낌보다는 여인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하필 저렇게 예쁘게까지 생겨서는.’
인상으로만 봐서는 발랄하거나 활기찬 쪽의 느낌은 없다. 저 나이의 소녀들답지 않게 매우 조용하고 차분한 인상이다.
약간의 그늘도 느껴지는데, 그 옅게 그늘진 느낌이 오히려 탁월한 미모에 묘한 분위기까지 더하고 있다고 할까?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모종의 신비함 같은 분위기 말이다.
그나저나.
“후우우우.”
더 이상 한숨 쉬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을 또 들었다.
아까 길초량이 말하길, ‘신반’이라 했다. 잠룡관에서 송유하의 반이.
계반 위가 임반이고 임반 위가 신반이다. 즉 여동생 송유하가 이놈 송유겸보다 두 단계 윗반이라는 거다.
내가 졌다, 송유겸.
최고다, 송유겸.
곧, 밖에서 기척이 있더니 방문이 열렸다.
송유하가 한 손에는 물이 담긴 통을 들고, 다른 손에는 빈 대야에 바가지를 담아서 들고 있었다.
그것들을 받아주려고 내가 엉덩이를 떼자 송유하가 말했다.
“그냥 계셔도 돼요.”
“가, 가만히 있기가 미안스러워서······.”
“괘념치 마세요.”
들고 온 것들을 내 근처에 내려놓은 송유하가 이번에는 장롱 쪽으로 다가가더니, 곧장 세 번째 칸의 서랍을 열어 마른 천들을 꺼내왔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젖은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었기에, 저 세 번째 서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고 있다. 한쪽에는 마른 천들이 있고, 한쪽에는 송유겸의 속옷들이 있다.
다 큰 여동생이, 다 큰 오라비의 속옷이 들어 있는 서랍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열고 닫다니.
게다가 송유하는 마치 저 장롱의 어디에 뭐가 들었는지 훤히 알고 있는 듯, 일련의 행동이 너무도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잘 찾네.”
“여러 번 열어봤으니까요.”
“내 장롱을 무슨 이유로······.”
“오라버니는 고뿔에 자주 걸리셨어요. 고뿔에 걸릴 때마다 이삼 일은 고열과 몸살로 크게 앓는 체질이시구요. 그럴 때마다 길 공자께서 제게 상태를 알려주셨어요.”
“서, 설마 그때마다 번번이 와서 내 간호를······.”
“네.”
이제야 대강 이해가 갔다.
고열이 있었다면 땀이 많이 났을 테니 깨끗한 천을 찾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송유겸의 장롱을 열어볼 수밖에 없었겠지.
“내가 심하게 앓으면 혹여 간호하면서 밤을 샜다거나······.”
“몇 번은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아팠던 거 가지고 뭐라고 하긴 참 그런데, 송유겸 너는 그냥 민폐 덩어리였구나.
그리고 솔직히 네놈 탓이 없었던 건 아니지. 본인의 몸을 약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네놈이기도 하니까.
어쨌거나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후로 계속 느끼는 건데, 송유하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처음에 놀란 표정을 지었던 후부터는 계속 그랬다.
얼굴을 찡그리는 일도 없었지만 미소를 짓는 일도 없었다.
목소리 자체는 듣기 좋은 목소리인데, 차분한 느낌이지만 건조함도 공존한다.
거기에 어조마저도 고저가 별로 없다.
전체적으로 그렇다보니 감정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원래 저런 성격인 걸까?
아니면 내 앞에서만 저러는 걸까?
“일단 이거, 풀게요.”
길초량이 내 머리에 감아놨던 천을 말하는 거였다.
“응······.”
그렇게 송유하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그 후로 우리 사이에서는 치료에 필요한 말 외의 다른 말은 오가지 않았다. 치료가 끝나고 송유하가 내 머리카락을 모두 닦아줄 때까지도 계속.
물통과 대야 등을 정리하고 돌아온 송유하가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곧바로 벽장을 열었다. 침구를 꺼내려는 듯했다.
얼른 일어서며 송유하에게 말했다.
“놔, 놔둬. 그런 건 내가 할 수 있어.”
“그냥 계세요.”
송유하가 이미 이불들 속으로 양 팔을 집어넣은 상태라, 나는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랫목 쪽에 두꺼운 요를 깔고 이불을 펼쳐 놓으며 송유하가 말했다.
“머리, 마른 후에 누우세요. 상처 보니까 웬만하면 며칠간은 누워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응······.”
“그러는 동안에는 제가 매일 한 번씩 들를게요.”
“아, 아냐. 그렇게까지는 폐 끼치기 싫어. 누이도 누이대로 일과가 바쁠 거 아냐.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게.”
내 말에 송유하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의아해서 물었다.
“왜······? 내가 뭔가 말을 잘못했다거나······.”
송유하가 금세 평소의 표정을 되찾더니 대꾸했다.
“아, 아니에요.”
곧, 송유하가 서탁의 반대편으로 가서 다소곳이 앉았다.
아직은 서있는 상태에서 그녀의 앉은 모습을 보다가, 나는 다시 벽장을 열어 잘 개어진 요 하나를 꺼냈다. 적당한 두께의 요였다.
그걸 들고 송유하의 옆에 가만히 놓았다.
방석이 없으니 이거라도 깔고 앉으라는 뜻으로.
그래도 여동생이라고 한달음에 와서 다친 오라비를 챙기느라 여러 모로 고생한 그녀였다. 한데 딱딱한 방바닥에 그냥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송유하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이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니?
평소에 송유겸은 이 정도 배려도 안 해줬다는 건가?
어쨌거나 나를 올려다보며 놀란 송유하의 저 모습······.
정말이지 기가 막힐 정도로 예쁘고 귀엽다. 이 순간의 저 표정과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두고 싶을 만큼.
안 돼, 안 돼.
심장아, 진정해.
이 몸과 저 송유하는 엄연한 오누이 사이라고.
서탁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곧 송유하가 서탁에 시선을 둔 채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혹시 지명은 기억하시나요? 강서, 포양호, 남창, 옥산현, 광풍현, 삼청산. 이런 지명들이요.”
지명은 당연히 알고 있다. 그래서 송유하가 왜 저 지명들을 늘어놓았는지도 알고 있다.
포양호는 강서의 유명한 호수이며, 남창은 강서의 성도다.
무림맹 동부지맹은 강서 북동부의 삼청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동부지맹의 잠룡관은 삼청산의 더 깊은 산속에 있다.
삼청산은 강서 북동부의 옥산현에서 가깝다. 그리고 광풍현은 옥산현의 남쪽에 인접한 고을이다.
그러나 이 몸은 기억을 잃은 것처럼 보여야 한다.
“아까 길 형이 무림맹, 동부지맹, 잠룡관 같은 것들에 대해서 짧게 설명을 해줬었어. 대부분 그때 들어 본 지명들이네. 광풍현? 그 지명은 처음 들어보고.”
송유하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더니 말했다.
“나중에 지도를 가져와서 위치를 알려드려야겠네요. 오라버니가 저한테서 처음 들어 본 그 광풍현이라는 곳에 송가장이라는 장원이 있어요. 우리의 아버지가 그곳의 주인이시고요.”
송가장은 송씨 가문의 장원이라는 뜻이다.
중원에 송씨는 많으니 송가장도 한 곳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내가 아는 송가장만 해도 서너 곳은 되는데, 내가 모르는 송가장도 더 있을 것이다. 이 넓은 땅덩어리의 구석구석까지 내가 다 아는 건 아니니까.
강서, 광풍현의 송가장.
역시나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강호세력으로서 그다지 영향력 있는 곳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송가장이라는 명칭이 붙는 곳 중에서 천마신교가 경계할만한 곳이 딱히 없기도 하다.
“우리는 사남매예요. 삼남일녀 중에서 제가 막내이니, 제 위로 세 분의 오라버니가 계시죠.”
“아까 처음 봤을 때 나를 둘째 오라비라고······.”
“네. 오라버니가 제 둘째 오라버니세요. 일단 송가장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면······.”
그렇게 송가장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들어보니 광풍현의 송가장은 그 지역의 토호 가문에서 이어져 내려온 장원인 듯하다. 덕분에 광풍현과 그 인근에는 제법 알려진 가문이고, 재산도 넉넉한 모양이다.
토호 세력들이라는 게 드러난 재산 외에 현금이나 현물 재산들을 숨기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드러난 것보다 더 부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현급 지역의 유지들 중 하나.
강서 전체도 아니고 작은 광풍현의 유지들 중 하나라면, 명성이든 재력이든 딱 그 정도 수준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광풍현 인근을 벗어나면 그 송가장의 존재를 아는 사람조차 급속도로 적어지는 수준일 것이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살아 계세요. 그리고 우리 사남매는 간단한 것 같지만 복잡한 관계예요.”
이유는 송가장주가 세 명의 여인을 통해 네 명의 자식을 낳았기 때문이란다.
차례로 송유백, 송유겸, 송유상, 송유하.
장자인 송유백은 송유겸과 두 살 터울로, 현재 스무 살이다.
삼남인 송유상은 이 몸에게는 한 살 터울의 남동생으로, 현재 열일곱 살.
막내인 송유하는 이 몸과 두 살 터울로, 현재 열여섯 살.
이 중에서 장남인 송유백과 삼남인 송유상을 본처가 나았고, 차남인 송유겸과 막내 송유하는 각각 다른 첩이 낳았다고 한다.
본처는 살아 있고, 송유하의 모친 또한 장원에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제 어머니는 원래 장원에서 일하던 시녀셨어요.”
그리고 이 몸, 송유겸의 모친은 외부의 여인이었던 모양이다.
송유겸이 두 살이었을 때, 부친인 송가장주가 송유겸을 장원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본인의 자식이라면서. 어미는 없이 송유겸만.
송유겸의 어미에 대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송가장주는,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계속 침묵으로 일관해온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후에 송유겸의 어미가 나타난 것도 아니니, 송가장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요절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송가장주가 송유겸에게도 이야기를 안 해줬는지 송유겸마저도 그렇게 알고 지냈대나.
“큰 오라버니와 셋째 오라버니는 우리를 못마땅하게 여겨요. 저는 여자인데다가 막내라서 덜했지만, 형제면서 중간에 낀 둘째 오라버니는 어려서부터 괴롭힘을 많이 당했어요.”
어떤 그림이었을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더 들어보니 송유겸의 정신적 고통이 상당했을 것 같았다. 정상적으로 자라날 확률이 매우 희박한 환경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어느 정도 큰 후부터 오라버니는 대부분 장원에서 겉도셨고, 언젠가부터 술을 드시고 다녔어요. 항상 취해서 주무셨고, 일어나면 곧바로 장원을 벗어나 또 술을 드시러 가셨죠.”
그게 잠룡관에 입관한 후에도 쭉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우리 사남매 모두가 동부지맹 잠룡관의 관도예요. 송가장이 있는 광풍현과 동부지맹 잠룡관이 있는 이곳은 매우 가까워요. 마침 좋은 환경이니 아버지가 우리 모두를 이곳에 입관시킨 거예요. 어떻게든 다 입관시키려고 동부지맹에 기부를 많이 하신 것으로 알아요.”
이 이야기를 들으니 송유겸이 어떻게 이 실력으로 잠룡관에 있는 건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어쨌거나 송가장주의 입장에서는 집 떠난 자식들을 걱정해야 할 만큼 먼 타지도 아니고 바로 옆 고을이다. 심적인 거리는 거의 집근처라고 해도 무방할 거리다.
그런 곳에 백도의 공인교육기관이 있는 셈이니, 아비로서 송가장주의 결정도 이상할 건 없다.
물론 송가장주가 교육만 생각했을 리는 없다고 본다.
잠룡관은 말 그대로 백도 내 후기지수들의 교류의 장이다. 자식들의 인맥을 위해서도 최고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자식들의 인맥 또한 가문의 인맥이니까.
이러다가 만에 하나 자식들 중 하나라도 백도의 유력한 세력과 혼담이 오가게 되면 그건 그냥 대박인 거고.
“첫째인 유백 오라버니는 무반이에요. 그러니까 잠룡관에서 반이라는 건······.”
“그것도 아까 길 형한테서 들었어. 십천간의 순서대로, 실력 순으로 반을 나눴다지. 무반이면 다섯 번째 반이겠네.”
“네, 맞아요.”
무반이면 갑을병정의 바로 아랫반이다. 송유백은 입관한 후로 사 년간 차분히 승반한 모양이었다. 장남이고 잠룡관에서의 연차도 높은 만큼, 형제들 중에서는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셋째인 유상 오라버니는 경반이구요.”
경반이면 일곱 번째 반이다.
송유상은 입관 이 년차로, 한 살 터울인 이 몸 송유겸과 같은 해에 입관했단다. 송유상 또한 입관 당시보다 한 단계 승반하여 경반이 되었다고 한다.
“저는 신반이고, 입관 초년차예요.”
“누이가 신반이라는 건 아까 길 형이 말할 때 들었어.”
신반이면 여덟 번째 반으로, 송유상이 속한 경반의 바로 아랫반이다.
송유하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입관 당시에는 임반이었다고 했다. 반년 만에 한 단계 승반하여 신반이 된 것이다.
나름 송유하가 대단하다고 생각할 때쯤,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오라버니는······.”
“그것도 아까 길 형한테서 들었어. 꼴찌반인 계반이라지.”
“오라버니를 비하하려는 게 아니고 이전의 상황을 말씀드리자면······, 오라버니는 입관 이후로 승반 심사를 한 번도 치지 않으셨어요. 심사라도 보시라고 권했었는데······.”
송유하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송유겸이 왜 승반 심사를 한 번도 치지 않았는지는 내가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이 공력으로 무슨 승반 심사인가.
시험을 쳐봐야 어차피 어려울 거라고 판단했을 테지.
한심하다. 한심한데,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을 문제도 아니었다. 송유겸의 문제가 이제는 내 문제이기도 한 탓이다.
송유하는 인시초(새벽 3시)쯤이 되어서야 내 방을 나섰다.
중간에 두 차례 정도, 밤이 너무 깊었다고 말해줬었다.
그러나 송유하가 아직까지는 괜찮다며 이야기를 이어갔고, 그러다가 이제야 돌아간 것이다.
참고로 송유하에게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일단 가문에는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머리의 상처는 나을 테고, 기억 상실 증상은 일시적일 수 있으니, 굳이 어른들에게까지 알려서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댔다.
잠룡관에 있는 다른 형제들이 알게 돼도, 가능하면 그들에게도 지금의 뜻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입원으로 붙잡혀 있기 싫어 의원에도 안 갔는데, 이 상황에서 가문으로 불려갈 수는 없다.
내가 왜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깨어난 건지,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유등을 끄고 이부자리에 몸을 눕혔다.
눕긴 누웠는데 잠이 오지는 않을 것 같은 밤이다.
내가 겪고 있는 이 모든 황당한 상황 때문에 혼란스럽고 복잡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난 하루는 내가 사형제들에 의해 배신당해 죽은 날이며, 사부님이 돌아가신 날이기도 하니까.
* * *
내가 이 이상한 상황을 겪게 된 후로 일주일쯤 흘렀을 무렵, 하나의 소식이 온 강호를 강타했다.
<천마 혁련총이 죽었다!>
다름 아닌 사부님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었다.
위지광 놈이 공식 발표를 했다는 건, 나와 사부님을 죽인 후 상황 정리를 확실하게 끝냈다는 뜻이다.
이후에 교내의 분위기를 다잡기 위한 계획도 철저하게 점검을 마쳤다는 뜻이며, 모든 상황에 대처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림맹에서 입수하여 발표한 내용은 역시나 내가 예상하던 대로였다.
<오공자였던 서무욱이 병상에 누워있던 천마를 시해한 후, 그 일을 대공자 위지광이 한 일로 꾸미려 시도함.
이전부터 서무욱에게서 이상한 조짐을 느끼던 대공자 위지광이 흑풍대주와 수라단주를 이끌고 범행 현장을 급습, 범행 중에 들켜서 맹렬히 저항하던 서무욱을 결국 처단함. 천마의 다른 제자들 또한 당시의 상황을 목격했다고 알려짐.
이후의 조사에 의해 서무욱은 본인이 차기 천마에 오르기 위해 천마의 유언장까지 조작했음이 밝혀짐.>
주된 내용은 그러했다.
당금 강호의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던 사부님이 돌아가신 만큼 잠룡관은 축제 분위기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홀로 억울함과 분노와 슬픔을 삭이며 한동안 눈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