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3
여러 모로 놀랍기도 하고 의문스럽기도 한데, 일단 나는 그를 모르는 것처럼 반응해야 한다.
“누, 누구십니까? 왜 이곳에······, 아니, 어떻게 이곳에······.”
백발사내, 선우훤의 정체를 알았으니 놀란 마음도 이미 진정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겉으로는 놀란 척을 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사실 고의긴 했단다. 그런 후에 이런 식으로 사과할 생각이기도 했고.”
“고의로 그러셨다니 제가 그 사과를 받아들일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무어라? 푸허허허헛!”
“그보다도, 보아하니 백도의 대선배님이신 것 같은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곳에 함부로 출입하시는 건 규정에 위배됩니다.”
선우훤의 경우에는 전대 잠룡관주였던지라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른 척 그렇게 말한 것이다.
사실, 여전히 궁금한 건 그가 어떻게 이 안에 있는지와, 언제부터 이 안에 있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푸허헛! 규정이라 했느냐? 아니, 이 상황에서 어찌 규정 얘기나 하고 있단 말이더냐? 너란 아이는 대체······! 헛헛헛!”
선우훤이 나를 보며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왠지, 방금 전까지 이 안에서 있었던 일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느낌이다.
여러 가지를 내심으로 계속 추측하고 있는데, 선우훤이 다시 입을 열었다.
“헛헛! 그리고 규정에 위배되지도 않는다. 나는 과거에 이곳 잠룡관에서 근무했던 몸이니까. 그런 경우에는 출입 자격이 있느니라. 규정에도 있다.”
“아, 저도 그 규정은 알고 있습니다. 하면······.”
말을 잠시 멈춘 후, 나는 곧바로 관리자석에 가서 대야를 내려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 후에 출입대장을 펼친 후 붓을 들고는 말했다.
“하면, 대선배님께서 과거 잠룡관에서 근무하시던 시절의 소속과 직함과 성함을 말씀해 주십시오. 더불어 현재의 소속과 직함과 성함까지도.”
나를 바라보는 선우훤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이없다는 표정이 극을 향해 가고 있었다.
“무, 무어라? 푸허허허허허허! 아이고, 내가 죽겠구나. 푸허헛! 너라는 아이는 정말이지······! 푸허허허!”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재촉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말하겠다. 말하면 되잖느냐. 한데, 문득 궁금해서 그러는데, 만약 내가 말을 해주지 않으면 어쩔 생각이냐?”
“그 경우에는 규정상 출입자격이 없는 상태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퇴실을 정중하게 부탁드려야겠지요.”
“만약 그래도 안 나가면?”
“그러면 곧바로 비상 상황을 알리는 폭죽을 밖에다가 터트리고, 위사님들이 오시면 그분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야겠지요. 이후에는 따로 서고 관리부에 가서 보고도 해야 합니다.”
“허허허허허!”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 선우훤이 말했다.
“네게 그런 수고를 끼칠 수도 없고, 괜히 잠룡관을 소란스럽게 만들 수도 없으니 얼른 밝혀야겠구나. 소속, 직함, 이름이라고 했지? 과거에 내가 이곳에서 근무할 때는 잠룡관주실, 잠룡관주, 선우훤이었다.”
이에 나는 일부러 살짝만 눈을 크게 떴다가 금세 평상시의 눈으로 되돌렸다. 그 후, 출입대장에 그 내용을 적어 넣으며 물었다.
“현재는요?”
내 반응을 확인한 선우훤이 더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다.
“뭐, 뭐야? 별로 안 놀라우냐? 내가 이곳의 전대 관주였다니까?”
“매우 놀랍습니다. 그보다도 현재는요?”
“아니, 네가 놀란 기색을 거의 보이지 않으니 하는 말이 아니냐.”
“제 놀라는 모습을 바라시는 듯하니, 바라시는 대로 해드리기가 싫었습니다. 속으로는 많이 놀랐습니다. 그보다도 현재는요?”
“푸허허허! 그 놈의 현재, 현재 타령은. 하여간 너 때문에 못 살겠구나. 허허헛. 너야말로 지금껏 내가 봐 온 서고 관리자들 중에 가장 깐깐한 관리자일 것이다. 알았다, 알았어. 현재는 무림맹 본맹, 집법당주, 선우훤이다.”
역시나 안에서 벌어진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느낌이다.
“무림매앵, 본매앵, 집법당주우, 선우훠언.”
일부러 입으로 읊으며 출입대장을 작성한 후, 붓을 놓고 일어서서 선우훤을 향해 공손하게 포권했다.
“전대 관주님이시자, 현 무림맹 집법당주이신 선우훤 대협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무림말학으로 동부지맹 잠룡관······.”
“계반 이 년차 관도 송유겸이지. 지금은 제일서고의 임시 관리자고.”
선우훤이 내 말을 도중에 끊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 부분에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임시 관리자라는 사실, 계반이라는 사실, 이름이 송유겸이라는 사실은 서고 안에서도 아이들과의 대화 중에 드러나긴 했었다.
한데 어떻게 내 정확한 연차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어떻게 저에 대한 사항을······.”
“아까 들었다.”
“예에? 어, 언제······.”
“그 아까 누구냐, 우문세가의 아이가 처음에 이곳에 와서 너와 이야기를 나눌 때 말이다. 그 아이의 이름이 우문직이었지? 병반에 삼 년차고.”
나는 또다시 눈을 부릅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완전히 처음부터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물었다.
“호, 혹시 그럼 서고 안으로 들어가셨던 때가······.”
“그래. 우문직과 네가 이야기를 나눌 때는 밖에서 듣고 있었고, 네가 측간에 간 사이에 몰래 서고에 들어갔던 것이다.”
설마 그때일까 싶었는데, 진짜로 그때부터였을 줄이야.
“하면 아까 이 안에서 있었던 일도······.”
“그래. 처음부터 다 봤다. 안휘 출신의 아이들이 잘못했지. 가만있어 보자. 걔들이 각각 정반 삼 년차 이금정, 병반 사 년차 위재흠, 정반 사 년차 고호웅, 병반 이 년차 하후영이었지. 하후영 그 아이는 여기에서는 병반이라더니, 네가 안에서 기록할 때 말하는 걸 보니 정반인 것 같더구나. 하면 그게 맞겠지. 뒤에 들어온 광동의 아이들은 각각 정반 삼 년차 황성락, 을반 사 년차 소충광, 무반 일 년차 진운령이었고. 진운령은 이번에 승반시험을 통과해서 출입이 가능했던 것이고.”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까 출입대장을 작성할 때 관도들이 말해줬던 정보들을 모두, 순서대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심지어는 하후영이 처음에 내게 일부러 반을 틀리게 말해줬던 것과, 아직은 무반인 진운령에 대한 사항까지도 모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선우훤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어때? 이 정도면 이곳의 전대 관주다운 모습이지? 겸사겸사 자랑을 하나 하자면, 나는 이곳의 관주로 재직할 당시에 모든 관도들의 반, 연차, 이름, 얼굴을 다 기억했었다. 계반까지도 모두 말이다.”
이건 정말 놀랍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선우훤이 초고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멸문지화당한 세가를 본인 대에서 재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렇듯 강호인들에게서 인정을 받는 이유도.
왜 무림맹이 그에게 요직인 집법당주를 맡겼는지도.
선우훤이 말했다.
“네가 그 상황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정말 의외였다. 놀랍더구나.”
칭찬은 기분 좋지만 티를 낼 필요는 없겠지.
곧바로 선우훤에게 물었다.
“그 상황을 처음부터 보셨으면서도 왜 다툼을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아이들이 어쩌는지 보고 싶었다. 게다가 내가 현 잠룡관주도 아닌데, 낄 데 안 낄 데 구분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도 무림맹의 집법당주이시니 개입하는 게 월권은 아니잖습니까. 아시다시피 이곳은 무림맹의 산하기관이니까요.”
“그렇긴 한데, 그 정도 다툼을 무엇 하러 말리느냐? 그 정도 다툼쯤은 겪으면서 커야 각자 느끼는 게 생기는 법이다. 게다가 네가 알아서 훌륭하게 처리하지 않았느냐. 내가 나섰다면 그 모습을 못 봤을 테니, 결과론으로 따져 봐도 잘 된 일이고.”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데, 선우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오늘, 네 덕분에 재밌었다.”
우문직에 이어 오늘 저 얘기를 두 번째 듣는다.
“아까 너한테, 지금껏 내가 봐 온 서고 관리자들 중 가장 깐깐한 관리자라고 했었지? 그거 칭찬이다. 앞으로도 소임에 최선을 다하길 바라마. 반가웠다.”
선우훤도 이제는 가려는 모양이었다.
“저 또한 뵙게 되어 좋았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내가 포권하며 그렇게 말하자 선우훤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더니 건물 입구로 향했다.
입구를 나서려던 그가 고개를 돌려서 말했다.
“아, 참! 아까 내 사과를 받아들일지는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 그 사과, 일단 받아들이지 말고 있거라.”
“예? 어찌하여 그러십니까. 그건 그냥 했던 말에 불과합······.”
“아니. 그렇게 하려무나. 그러다 보면 혹시라도 언젠가는 내가 네게 빚을 갚을 날이 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
“겨우 그런 걸 갖고 빚이라고까지 하시기에는······.”
“별 것 아니든 어떻든, 그냥 그리 알거라. 그리고 이 부분은 너와 나만의 비밀로 하자. 그럼 잘 지내거라.”
“그, 그리하······.”
채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선우훤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가 사라진 입구 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 * *
신법을 펼치며 제일서고에서 벗어난 선우훤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흥미로움이 담긴 미소였다.
‘광풍현 송가장의 송유겸이라······.’
오늘 하루 잠룡관을 몰래 돌아다니며 여러 관도들의 모습을 엿봤지만, 단연 기억에 남는 관도는 바로 그 송유겸이었다.
관도들 사이에서 주먹다짐이 벌어졌을 때, 송유겸이 밖에서 듣고 있다가 늦게 개입했음을 알고 있다.
한데 그가 기록을 하며 그런 식으로 확실하게 안휘 쪽 관도들을 궁지로 내몰 줄은 몰랐다.
‘능구렁이 같으면서 당당한 기백도 느껴지고.’
제일서고에서 관도들을 상대하던 모습도 그랬지만, 자신을 대하던 모습도 그랬었다.
잠룡관주로 재직하던 시절을 포함하여 수많은 후기지수들을 봐 왔다.
저런 느낌을 주는 후기지수들이 아주 가끔 있다.
그런 이들을 발견하는 게 즐겁다.
그리고 기대하게 된다.
‘계반이라고······?’
생각이 거기에 이른 선우훤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내공 수준이 결코 계반 수준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훨씬 벗어난 수준으로 느껴졌었다.
물론 송유겸의 내공이 좀 미묘한 느낌이라 정확성이 다소 떨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수많은 관도들을 봐 온 입장에서의 감이라는 게 있기도 하다.
승반 심사라는 게 내공 수준만을 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그 내공만으로도 기반 이쪽저쪽은 충분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왜 계반에 있는 걸까. 한창 자신의 성과를 보여주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나이일 텐데.
또래의 아이들에게 무시당하는 걸 참으면서까지 왜.
자신도 계반에서 시작했지만 그 부분만큼은 의도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그 아이가 나를 발견한 직후에 보였던 모습은······.’
처음에 송유겸은 화들짝 놀랐었다. 즉, 발견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던 게 확실했다.
한데 그 상황에서도 송유겸은 거의 즉각적으로 대처하며 스스로를 보호하려 했다.
놀라서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사고가 정지되어 몸이 굳지도 않았다. 움직임을 보니 무릎이 풀린 것도 아니었다.
상당히 숙련된 무인이 아니라면, 그 정도로 놀랐을 경우에 송유겸처럼 대처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한데 십대 후반의 잠룡관도가, 그것도 일개 계반 관도가······.’
놀랄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여전히 의아할 정도로.
‘흥미로운 아이야. 기대되는 아이이기도 하고. 그러니 몰래 한 번 알아봐야겠어.’
계반은 교관들이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대신, 관도들 사이에 맹의 감시 인력이 투입되어 있다.
계반에는 출신성분이 모호한 관도들이 존재하니, 그들에 대한 감시역이다. 유사시에 관도들을 보호하는 역할이기도 하다. 극비사항이지만 전 잠룡관주였기에 알고 있다.
송유겸은 출신성분이 확실하니 감시 대상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정보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선우훤이 신법을 멈추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는 흥미로운 무언가를 발견한 아이의 그것처럼,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문득, 곧 입관할 손녀 생각이 났다.
‘그래. 이렇게 된 바에 아예 린아를 계반으로 넣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같은 계반이라고 해서 꼭 친분이 생긴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송유겸에 대한 이야기는 더 많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계반 생활이 불편한 면이 있겠지만 어렸을 때는 그런 경험도 필요한 법이다.
그러다가 손녀가 계반 생활에 영 불편해 하면 그때 가서 승반하라고 해도 되는 것이고.
‘일단 오늘은 동부지맹으로 복귀했다가, 육 관주와는 내일쯤 만나서 회포를 풀어야겠어.’
* * *
선우훤이 떠난 후 잠시 멍하니 있다가 청소에 생각이 닿았다.
이제 서고 개방 시간이 반 시진도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는 찾아 올 관도들도 없겠지만, 나는 건물 입구의 문밖에다가 아예 열람시간 종료 팻말을 걸어 두었다. 그 후, 안에서 건물 입구의 문을 걸어 잠그기까지 했다.
혹시라도 누가 찾아오면 청소하다 말고 귀찮아질 테니, 그냥 처음부터 아예 축객령을 내리자는 차원에서.
행주가 담긴 대야를 들고 탁자와 의자를 닦으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서고의 중앙쯤에 있는 탁자를 닦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근처에서 꺼림칙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살짝 들어보니 거미 한 마리가 거미줄을 타고 쭉 내려와서 내 머리 바로 위쪽에 매달려 있었다.
‘옘병, 짜증나게······!’
일단은 그대로 둔 채로 살짝 물러나서 고개를 들어 보니, 천장에 그물 모양의 거미줄이 보였다.
제일서고는 큰 건물인 만큼 천장도 전체적으로 상당히 높은데, 중앙 쪽의 천장은 더 높다.
내 키의 거의 네 배쯤?
한데 이 거미 새끼가 겁도 없이 거미줄을 길게도 뽑아서 여기까지 내려 온 것이다.
천장을 쓱 한 번 둘러보니 거미줄이 쳐져 있는 곳은 내 위쪽밖에 없는 것 같았다.
거미줄이 여기저기에 많이 쳐져 있었으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딱 내 위의 한곳에만 쳐져 있으니 그냥 넘어가기에는 왠지 거슬린다.
거미줄을 떼어서 거미를 바닥에 닿게 함과 동시에, 대야의 밑바닥으로 눌렀다.
뒈져, 이 새끼야!
그 후에 곧바로 서고의 입구를 벗어나서 관리자석 옆에 둔 빗자루를 가져왔다. 천장의 거미줄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공력을 일으켜 몸을 가볍게 하고는 거미줄을 향해 뛰어 올랐다. 쑥 떠올라서 가뿐하게 빗자루로 거미줄을 긁어내자, 도약했던 몸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착지를 생각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서가(책을 얹어 두거나 꽂아 두는 선반)들의 대략적인 배치 구조가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왔다.
서고에 있는 가구라고는 서가와 탁자와 의자뿐이다.
서가의 상판은 사람의 키보다 높은데, 그 꼭대기들에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었다.
내가 지금 청소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먼지 쌓인 서가의 꼭대기들만 집중적으로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착!
착지하자마자 인상이 구겨졌다.
‘내가 미쳤다고 저걸 청소해? 안 해!’
딱 봐도 매우 오랫동안 쌓인 먼지.
저건 다수의 전문 인력이 투입되어야만 가능한 청소다.
당연히 안 할 생각인데, 허공에서 봤던 서가들의 배치 자체가 인상적이긴 했다.
이곳에서 일을 시작할 때, 서고의 약식 배치도를 통해 분야별 서가들의 구획은 당연히 숙지했었다.
약식 배치도에는 정사각형의 제일서고 내부가 간략하게 아홉 개의 바둑판식 구획으로만 나뉘어 있다.
그 각각의 구획마다 어떤 분야의 서책이 비치되어 있는지가 적혀 있었다. 예를 들자면 북쪽 구획은 ‘검법서’, 북동쪽 구획은 ‘역사·지리·교양서’, 동쪽 구획은 ‘도법·창법서’와 같은 식으로 분류만 적혀 있는 것이다.
참고로 서고의 중앙 구획에는 서가가 하나도 없고, 탁자와 의자들만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렇기에 아홉 개의 구획 중에서, 중앙을 제외한 여덟 개의 구획들에 각 분야별 서가가 존재한다.
약식 배치도만 보면 그 여덟 개의 구획들에는 서가들만 빼곡하게 들어차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가 보면 그렇지 않다.
구획 안의 서가들 사이에도 여기저기에 탁자와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약식 배치도에는 그것까지 나와 있지는 않다.
그간 제일서고를 많이 돌아다녀 봤기에 나도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한데 우연히 높은 곳에서 먼지 쌓인 서가들의 꼭대기들만 보고 나니, 지금껏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서가들의 꼭대기만 떼어놓고 봤을 때는 마치, 전체 서가들의 배치를 이용하여 진법이라도 구현해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다시 한 번 도약해서 쓱 훑어보니, 왠지 진법 같다는 느낌이 더 굳어졌다.
언뜻, 이곳을 이용하는 관도들의 머리라도 맑게 해주려는 용도의 진법이 아닐까 싶다. 그게 아니어도 다른 긍정적인 의도의 진법이긴 할 것이다.
이곳은 대단하신 갑을병정 반의 관도님들이 이용하는 제일서고니까.
하여튼 백도 놈들, 사소한 부분에서도 쓸데없이 꼼꼼하단 말이야.
천마신교의 환마幻魔 장로는 진법, 기관학, 역용술 등등의 분야가 주특기인 사람이다.
흑풍대 시절에 환마 장로를 통해 그 분야들에 대한 기본 이론 강의를 이수한 바 있었다. 흑풍대원뿐만 아니라 천마신교의 정예 무력 조직에 속한 구성원이라면 필수적으로 환마 장로의 그 강의를 이수해야 한다.
이후에는 사부님의 제자가 되었기에, 그때부터는 그 분야들에 대한 기본 이론을 넘어서 심화 과정까지 이수해야 했다. 물론 심화 과정의 교관도 환마 장로였다.
천마의 제자이니만큼, 필수 소양 교육 차원이었다.
말이 좋아 소양 교육이지, 실제로는 강제 주입식 교육이다.
그렇듯 내가 진법에도 조예가 좀 있다 보니, 이게 대략적으로 어떤 용도의 진법일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