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4
얼른 관리자석에 가서 종이와 필묵통을 가져왔다.
서가가 하도 많다보니 위치를 정확하게 기록하며 확인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후, 다시금 몸을 가볍게 하여, 이번에는 아예 서가의 상판 위로 뛰어 올랐다.
서가 제작에 사용된 목재 자체가 두껍고 튼튼해 보였기에 딱히 무너질 것 같은 염려는 들지 않았다.
착!
서가의 상판 위쪽에 가볍게 착지하자 먼지가 일었다.
상판 위에서 천천히 일어선 후 주변 서가들의 위치 위주로만 눈에 담으며 종이에 기록했다.
제일서고는 넓기 때문에 한 곳에서만 보면 정확한 위치들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아까 중앙의 허공에 떠올라서 확인했을 때도 먼 곳의 서가들은 정확한 간격을 파악하기가 어려웠었다.
그렇기에 다른 구획의 서가들에 가서도 상판 위에 올라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종종 천장까지 도약하여 전체적인 배치까지도 틈틈이 확인하면서.
부지런히 움직였기에 모든 서가들의 위치를 기록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확인을 마친 후 서고 중앙의 바닥에 착지했을 즈음, 이미 나는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종이에 서가의 위치들이 채워질수록 점점 의아함이 짙어지고 있었는데, 모든 서가의 위치를 완전히 채우고 나자 그 의아함이 확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평소 혼잣말을 밖으로 내뱉는 법이 거의 없는데, 그 소리가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분명히 진법은 진법이었다.
한데 백도 방식의 진법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어서 종이를 보고 또 봐도 결론은 같았다.
어처구니없지만, 이건 천마신교 방식의 진법이다.
세상에, 백도의 교육기관인 잠룡관의 제일서고에 천마신교의 진법이라니?
어찌하여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떤 괴상한 인간이 이런 짓을 해놨느냔 말이다.
분명히 천마신교의 진법이긴 한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해를 주는 진법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곳에 왔던 백도의 고수들이 이상한 기운을 느꼈을 테고, 조사를 통해 뭔가를 알아챘을 것이다.
그 경우 잠룡관 측에서 이미 조치를 취했을 테니, 서가들의 배치가 이 상태로 남아 있을 리도 없다.
당장 방금 전에 왔던 선우훤 자체가 초고수이자 전대 잠룡관주였다. 그런 그조차도 이걸 모르고 있는 것이다.
모를 수밖에 없다.
이 진법은 천마신교의 정예 무력 조직에 속해야만 알 수 있는 진법이다. 그들만이 환마 장로의 진법 기본 교육을 이수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백도인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진법이다.
나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서가의 모든 배치를 조사했다 쳐도, 그냥 관도들이 독서하기 편하게끔 서가와 탁자들을 알맞게 배치해 둔 정도로만 보일 것이다.
나처럼 이런 형태의 진법이 눈에 익은 게 아니면, 애초에 진법이라는 의심이 드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할까.
만에 하나 진법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해도, 이 진법의 정체를 알려면 천마신교의 정예 무력 조직원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들이 뭐, 백도인들이 만나고 싶어 하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겠냐고.
일견 복잡해 보이는 진법이나, 차분히 살펴보니 대강 어떤 진법인지 알 것 같았다.
이 진법은 마둔일로잠종진의 변형으로, 어떠한 위치를 알려주는 목적의 진법이었다.
호기심이 강하게 일었다.
이 진법이 장난으로 만든 진법일 리 없다.
천마신교의 정예 출신만 알아낼 수 있는 진법을, 누군가가 굳이 백도의 잠룡관 안에다가 만들어 둔 것이다.
어쩌면 그 누구도 영영 알아보지 못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분명한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한다.
진법의 정보가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오래지 않아 알아낼 수 있었다.
제일서고의 약식 배치도로 따지면 중앙을 기준으로 팔방 중에서 일단은 서쪽 방향이다.
서쪽 방향은 심법·무공이론서가 있는 구획이다.
하지만 이 진법은 애초에 십육방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그 중 십오방은 모두 쇄문鎖門이며, 한 방향만 개문開門이다. 이 진법의 개문은 십육방 중에서 서북서, 그 중에서도 외곽이다.
곧바로 그 정보가 가리키는 서가로 향했다.
해당 서가에 도착했다.
심법서가 꽂혀 있는 서가다 보니, 나름의 심법비급 정도를 감춰 놓은 건가 싶다.
왜, 이야기책에 많이 나오는 그런 거 있잖은가. 분명히 평범한 심법서인데, 정작 비급은 두꺼운 표지 안에다가 양피지의 형태로 숨겨놓거나 하는.
결과물이 비급일 가능성이 높다 보니, 솔직히 큰 기대가 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사부님의 무학이 현재로서는 최고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숨겨진 비급이 아무리 과거의 개세무학이라 해도, 현재는 과거에 비해 무학이 더 발전해 있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져 있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있는 것이다.
해당 서가에 있는 서책들 중, 고서를 비롯하여 비교적 오래 된 서책들을 빠르게 꺼내어 확인했다. 한데 그것들 중에 딱히 표지가 두꺼운 책은 없었다.
그나마도 평균보다 두껍다고 생각되는 표지들을 열심히 구부려도 보고 비틀어보기도 했는데, 이질감이 느껴지거나 의심이 가는 표지도 없었다.
비급을 표지에 숨겨놓지 않았다면 서책의 내용 안에 암호 형식으로 풀어놨다는 건가?
암호라는 게 정해진 형태나 양식만 알아채면 해독도 금방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정해진 형태나 양식을 파악하는 일 자체가 어렵고 피곤하다는 점에 있다.
예엠병! 그걸 언제 다 확인하고 앉았냐고오!
한숨이 나왔다.
“에휴우우우······.”
아니야.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야.
저 심법서들을 일일이 다 확인한다는 건 시간낭비일 뿐이야.
포기하자.
어차피 심법비급 따위는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잖아?
계속 머릿속으로 그 생각을 하는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드는 것이다.
충분히 쓸 만한 심법비급일 수도 있잖은가.
나한테는 필요 없어도, 혹여 송유하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비급일 수도 있잖은가 말이다.
참고로 나는 사부님이 창안한 다른 하나의 무속성 심법을 외우고 있다. 한데 회회심공은 특성상 다른 심법과 동시에 익힐 수가 없다.
그래서 그걸 송유하에게 익히게 할 계획이다.
당장 익히게 하지 않는 이유는 그 심법의 묘리가 너무 심오하여, 현재의 송유하 수준에서는 익혀봐야 오히려 역효과일 게 너무 빤하기 때문이다. 혼란만 가중되어 현재의 심법에 비해 축기 효율도 크게 떨어질 것이다.
아무리 내가 설명을 잘해줘도 묘리 터득은 또 다른 문제다.
말로 설명해서 다 되는 거면 강호의 모두가 절정고수 되게?
송유하의 경지가 최소한 일류의 중간 이상은 되어야 익힘직 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더더욱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한데 심법비급이라······.
차분히 돌이켜 보니 내가 처음부터 너무 비급 쪽으로만 치중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위치가 이쪽 서가를 가리키고 있으니 자연스레 그 생각부터 났던 탓이다.
그래서 서책이나 표지에 얽매였던 것이고.
혹시 기관 같은 게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 기관을 작동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모든 서가는 각각 두 개씩 서로 등을 맞대고 있어, 양쪽 반대편에서 책을 뽑고 꽂는 구조다.
그 생각에, 천천히 주변을 돌며 서책이 아닌 서가 자체를 살폈다. 최대한 안력을 돋운 채로.
엎어져서 맨 아랫단까지 유심히 살폈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장치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이것저것 하나씩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다.
일단 강력한 충격을 가하는 방법이 있다.
이에 서가의 측면으로 이동하여 발바닥으로 서가의 옆면을 강하게 찼다.
재료로 쓰인 목재가 두껍고 단단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했다.
퍽!
아무 일도 없다.
반대편으로 이동해서 그쪽의 옆면을 찼다.
퍽!
그런데도 반응이 없다.
하면 지속적이면서 강력한 충격을 가해 보자.
퍽! 퍽! 퍽!
반응이 없다.
무게 및 압력을 가하는 방법도 있다.
곧바로 도약하여 서가 위로 올라가서 먼지 쌓인 상판 위를 걸어 다녔다.
한데 아무 일도 없다.
솔직히 이 방법은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먼지가 많이 쌓여 있어도, 어쩌다 한 번씩은 누군가가 이 위에 올라가서 청소를 했을 게 아닌가.
지속적인 압력도 가해보기 위해, 상판 위의 안전할만한 지점에서 콩콩 뛰어 보기까지 했다.
역시나 반응이 없다.
무게 및 압력을 줄이는 방법도 있고, 분리하는 방법도 있다.
이것도 안 되면 오늘은 그냥 청소나 마치고 돌아갔다가 거처에서 따로 궁리를 해 볼 생각이다.
사흘간 쉬면서 차분히 궁리해 보고, 다음에 와서 그 방식들을 시도해보지, 뭐.
어차피 아직도 임시 관리자 역할은 이 주 남짓 남았으니까.
공력을 일으킨 후, 허벅지 높이에 있는 서단을 양손으로 받쳤다. 그 단에는 물론 서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상태였다.
언제 저 서책들을 다 빼고 있어?
귀찮으니 압력을 줄이는 방법과 분리하는 방법을 동시에 쓰기 위함이었다.
“끄으으으으응······! 옘병!”
생각보다 쉽지 않았기에, 마지막에 기합까지 넣었을 때쯤이었다.
철컥, 철컥.
스으으으으으-
“헙······!”
깜짝 놀라서 힘을 가하고 있던 서단을 놓았다.
그럼에도 내 앞에 있던 서고가 내 쪽으로 천천히 밀려오고 있다.
기관이 작동한 것이다.
실제로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 자체는 이 서가의 근처에서만 들릴 정도로 매우 은밀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 귀에는 벽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얼른 서가의 옆면으로 돌아가서 확인해 보니, 등을 맞대고 있던 두 개의 서가가 서서히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 아래로 계단이 얼핏 보이며 시커먼 공간이 드러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인공의 구조물.
눈알과 턱이 빠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들짝 놀란 상태였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냉정하고 침착하게 현실을 파악했다.
서무욱 시절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나는 어둠속에서도 시야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만큼 내공 경지가 높지 않다. 게다가 공간은 천천히 열리고 있는 상태다.
생각이 미치자마자 대처도 곧바로 이어졌다.
즉시 천섬무를 일으켜, 신법인 천섬비를 최대한으로 펼쳤다.
사사사사사사사사삭-
머리털이 빠질 정도로 빠르게 달려 관리자석에 도착했고, 재빨리 사물함에서 화섭자와 유등을 챙겼다.
그 후, 다시금 천섬비를 최대한으로 펼치며 기관이 발동한 서가로 향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왔더니, 서가 아래의 공간이 완전히 열려 있었다.
지체하지 않고 유등에 불을 밝힌 후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으로 확실히 들어선 후, 유등의 빛에 의지하여 계단의 입구 쪽을 한 차례 살폈다.
입구 가까운 곳의 벽면에 손잡이 비슷한 게 보였다.
그걸 잡고 아래 방향으로 힘을 가해 보니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위쪽으로 밀어 올렸다.
철컥, 철컥.
스으으으으으-
기관이 작동하며 내 위의 공간이 닫히는 게 보였다.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는 역시나 은밀했다.
다시 한 번 손잡이의 아래 방향으로 힘을 가하자 기관이 작동하며 내 위의 공간이 열렸고, 그 후에 위쪽 방향으로 힘을 가하자 공간이 닫혔다.
환마 장로의 가르침대로, 확실하게 한 차례 더 확인을 마친 것이다.
조심스럽게 계단 하나하나를 밟아 내려갔다.
시야에 보이는 모든 정보들에 집중했다.
만에 하나 함정 같은 게 존재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위험한 기운 같은 건 없는지 살펴야 한다.
어떤 상황이든 즉각 대비할 수 있게끔 공력도 활성화시켰다. 혹시라도 위험이 발생하면 즉시 천섬무를 일으켜 경공을 펼쳐야 할 테니까.
계단은 상당히 오랫동안 아래로 이어졌고, 나는 마지막까지 신중을 기하며 내려왔다.
내 염려와는 달리, 계단이 끝나는 지점까지 내려왔음에도 위험 요소 같은 건 없었다.
극도의 긴장상태를 계속 유지해서 그런지 등짝이 척척하다.
계단이 끝나는 곳은 막혀 있었다.
유등을 들고 살펴보니 석문石門이었다.
석문 중간의 옆쪽에도 위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손잡이가 보였다. 기관을 발동하는 손잡이인 것이다.
환마 장로는 중간에 관문 따위와 마주쳤을 경우에 특히 조심하라고 했었다.
여전히 공력을 활성화 시킨 채로 언제든 천섬비를 펼칠 준비를 한 후, 손잡이를 잡고 아래쪽으로 힘을 가했다.
고오오오-
혹시 모를 위험 요소에 대비하고 있는데, 석문만 조용히 열리고 있을 뿐 별 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석문이 열리면서 그 안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일렁이는 빛이 아니라 차분히 정돈된 빛.
그 사실이 뜻하는 바는 하나다.
‘야명주!’
품질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라지만, 설령 하품下品이라도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는 게 야명주다.
안에서 새어나오는 빛의 밝기 또한 충분하여, 이미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도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조심스럽게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제법 널찍한 동굴이었다. 천장도 적당히 높았다.
동굴 벽면의 이곳저곳에 야명주들이 박혀 있어, 그것들이 빛을 밝히고 있었다.
세어봤더니 아홉 개였다.
조막만한 크기인데 조도는 상당했다.
본디 야명주는 크기가 작고 조도가 높을수록 상품上品으로 친다. 그렇기에 자세히 보지 않았음에도 이미 저게 최소한 중상품 이상이라는 걸 알 것 같다.
우오오이씨! 저런 게 아홉 개나 된다고?
손바닥으로 심장 위를 눌렀다.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들고 왔던 유등이 초라해졌다. 얼른 유등의 불을 끄고 입구 옆에 내려놓았다.
중앙에 인공적인 구조물들이 보였지만, 나는 일단 마음을 차분하게 먹고 동굴의 외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환마 장로의 가르침에 따른 행동이었다.
혹시라도 이런 상황에 처했을 경우, 공간의 전체적인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별개의 공간이 더 있는지, 또 다른 통로나 퇴로는 있는지, 그런 것들부터 우선적으로 파악하라고 했다.
돌아보니, 원래는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에 인공적으로 여기저기 손을 보고 구조물을 추가한 모습이었다.
입구의 반대편에 석문이 하나 더 있어, 손잡이를 아래로 당겨보니 문이 열렸다. 드러난 건 어두운 공간이었는데, 얼핏 어딘가로 이어진 통로로 보였다.
지금은 대략적으로 이 공간을 훑어보며 파악하는 중이니 굳이 들어가 볼 필요는 없다.
손잡이를 위로 올리자 석문이 자동적으로 닫혔다.
그 통로 외에는 특별한 게 없었기에, 동굴 중앙에 있는 인공 구조물 쪽으로 다가갔다.
석단 세 개가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었고, 그 석단들의 위에는 석함과 함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석단의 뒤쪽에는 상당히 커다란 비석 같은 게 세워져 있었다.
석단 위쪽에 신경이 가득 쏠렸지만, 나는 마음을 차분히 먹고 뒤쪽의 커다란 비석을 먼저 살폈다.
이런 경우, 뭐든 글귀 같은 게 적혀 있으면 무조건 그것부터 확인하라는 게 환마 장로의 가르침이었다. 탐욕에만 눈이 멀어 비명횡사한 여러 경우들을 열거하기까지 하면서.
넓고 커다랗지만 두께 자체는 얇은 비석이었다. 부수고자 마음먹으면 금방 부술 수 있을 정도로.
비석에는 작은 글씨들이 빼곡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나는 연승휴라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