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9
제갈수광을 향해 전음으로 짧게 대꾸했다.
[예.]
이에 제갈수광이 다시금 네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특유의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반, 연차, 이름, 출신.”
“정반, 삼 년차, 황성락, 청원표국입니다.”
“무반, 일 년차, 진운령, 광주진가입니다.”
“을반, 사 년차, 소충광, 남천검문입니다.”
“병반, 삼 년차, 우문직, 우문세가입니다.”
네 사람이 차례로 대꾸하자 제갈수광이 잠시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음······. 다들 큰일들을 겪으며 자랐겠군.”
저들이 속한 문파나 가문들이 해적과 싸웠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뜻을 알아들었는지, 네 사람도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게다가 요즘도 심정이 썩 좋지는 않을 테고.”
네 사람이 또다시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데 나는 제갈수광의 방금 전에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근래에 동남부 해안가에 또다시 해적이라도 출몰했나?
눈치를 보아하니 그런 느낌이긴 한데, 송유겸의 몸으로 깨어난 후에 벌어진 일이라면 내가 잘 모를 수밖에 없긴 하다.
제갈수광이 우리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밖에 티 나지 않게 유등은 최소한으로. 대화는 조용히.”
그 말을 남긴 제갈수광이 식당을 벗어났다.
저들과 함께 이곳에서 마시라는 뜻이기도 했다.
방금 들어온 네 사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는데, 길초량이 설명해주자 다들 표정이 환해졌다.
어쩌다 보니 양쪽을 다 아는 사람이 나뿐인지라, 내가 서로를 소개해줄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대강은 누군지 알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인 관계들이 많기에 정식 소개가 필요하긴 했다.
내가 맨 마지막으로 소개한 사람이 바로 송유하였는데, 광동과 복건의 네 사람은 역시나 그 시점에 가장 큰 호응을 보였다.
잠룡오화의 위엄이라고 할까.
“소저를 멀리서 본 적은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이렇게 가까이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영광입니다.”
소충광의 첫 인사였고.
“임시 관리자님, 아니 송유겸 공자의 누이시라서 그런지 더 아름다워 보이십니다. 오늘부터 정했습니다. 앞으로 제게 있어 잠룡오화 중 최고는 무조건 송 소저십니다.”
황성락의 능청스러운 발언이었으며.
“저, 저 또한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오전 나절의 임시 관리자시라고 들었는데, 혹여 그때도 뵙게 되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문직의 다소 소심해 보이는 인사였다.
송유하는 매우 민망해하며 세 사람의 인사에 응대했다.
진운령이 송유하에게 말했다.
“에휴. 나보다 예쁜 여인하고 친하게 지내봐야 나만 손핸데, 왜 하필이면 송유겸 공자님의 여동생인 거예요? 송유겸 공자님이 좋은 분이라서, 이러면 송 소저하고도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잖아.”
발언만 보면 투정이 다소 섞여 있었지만, 송유하를 바라보는 진운령의 표정에는 호감이 가득했다.
“진 소저야말로 정말 예쁘신데 그 무슨 말씀이세요.”
송유하가 대꾸할 때 나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분위기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길초량도 같은 마음인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있었다.
진운령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녀가 송유하에게 말했다.
“참! 송 소저도 이 번에 두 단계 승반했죠?”
“네. 진 소저도 두 단계 승반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대단하세요. 저처럼 하위 반도 아니고 상위 반에서 그렇게······.”
“에이, 누가 더 대단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요. 주어진 상황은 각자 다른 거고, 그 상황 속에서도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게 중요한 거죠.”
송유하가 미소를 보이자 진운령이 말했다.
“아, 참! 우리, 나이도 같고 연차도 똑같은 거, 맞죠?”
“네. 그렇게 알고 있어요.”
“동갑내기 친구이기도 하니까, 앞으로 우리 잘 지내 봐요.”
“네······. 잘 부탁드려요.”
진운령이 송유하에게 말했다.
“우리가 가서 교자도 내어 오고 필요한 것들도 준비해 올까요?”
“네, 그래요.”
송유하가 대꾸하자 길초량이 말했다.
“아, 우리도 돕겠소.”
“딱히 어려울 것도 없으니 이 정도는 그냥 저희가 할게요. 그리고 여자들끼리의 대화도 필요하거든요.”
진운령이 대꾸하자 길초량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다.
“그, 그러시다면야······.”
진운령과 송유하가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들만 남았기에 우리는 술병들을 꺼내어 가지런히 정리해 놓은 후 의자에 앉았다.
탁자를 마주한 채 길초량과 내가 한편에 앉았고, 나머지 세 사람이 반대편에 앉았다.
어쨌거나 이들과 다시 만나니 괜히 웃음이 난다.
특히 황성락과 진운령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욕설 솜씨가 대단했었다. 황성락의 경우에는 비아냥거리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더 대단했던 건 진운령이었다. 그 가증스러웠던, 그러나 상황마다 매우 적절했던, 그 어마어마했던 연기력은 앞으로도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소충광이 주방 쪽을 일별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진 매가 원래 소저들에게는 저런 식으로 싹싹하게 대하는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러는 걸 보면 송유하 소저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뭐, 송유겸 공자의 영향이 컸겠지만요.”
그에게 대꾸했다.
“제 누이가 처음에는 붙임성이 좀 부족한 편이고, 전체적으로는 감정 표현도 서툰 편입니다. 그래도 수더분하고 속정이 깊어서, 가까워질수록 진 소저도 누이를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아하. 송 소저가 그런 성격이군요.”
소충광이 대꾸하자 황성락이 조용히 말했다.
“그나저나 송유하 소저 말인데, 잠룡오화시니 미모가 빼어나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가까이서 보니 묘한 느낌이 있군요. 원래 미인들이 차분하면 분위기가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송 소저는 그 이상의 오묘한 느낌이 더해져 있습니다.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신비로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식의 표현으로도 설명이 다 안 되는······.”
그 말에 우문직도 공감한다는 듯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초량이 말했다.
“공자들이 말씀하시는 게 어떤 느낌인지 나도 왠지 알 것 같습니다.”
나도 얘들이 말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
어쨌든 다들 내 누이가 예쁘다고들 해주니 내 기분도 좋다.
황성락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번에 잠룡오화 중에서 두 분이 졸업하시니까, 이제 내년부터는 잠룡삼화가 되려나요? 그럴 거면 우리 진 매도 끼워서 잠룡사화 해주면 안 되나? 하핫.”
소충광도 그랬는데 황성락도 진운령을 ‘진 매’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걸 보면, 광동의 저 세 사람이 매우 가깝긴 가까운 사이인 모양이다.
어쨌거나 황성락은 개인적인 바람을 말한 것이겠지만, 나 또한 별 이견은 없다. 내 주관적인 시선으로도 진운령은 충분히 빼어난 용모니까.
다만 단목지와 송유하는 미모만으로도 전해지는 특유의 존재감 같은 게 있는데, 진운령은 그게 약간 덜한 느낌이다.
뭐, 인간으로서의 매력 얘기가 아니라, 미모만을 따졌을 때의 얘기다.
소충광이 대꾸했다.
“신입 여관도들의 수준이 어떤지에 따라 달린 문제겠지.”
“저 또한 진 소저는 충분히 자격이 되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문직도 조용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하여튼 사내들이 모이니 자연스럽게 여자 얘기가 나오고, 미인 얘기가 나온다. 천마신교고 백도고 할 것 없이.
우문직이 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년에는 역대급으로 강력한 경쟁자가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응? 그건 무슨 얘기요?”
황성락이 급하게 관심을 보이며 조용히 묻자, 우문직이 대꾸했다.
“제가 알기로, 매우 유명한 소저들 두 명이 이번에 잠룡관에 입관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번에 들어올지, 아니면 다음 해에 들어올지는 아직 확실치 않지만요.”
“나이가 되었다는 걸 보면 이제 열여섯 살이 된다는 뜻일 텐데······.”
황성락의 말이었다.
열여섯 살이 입관 최소 조건인데, 꼭 그 나이에 입관할 필요는 없다. 열여섯부터 열아홉까지는 언제든 입관할 수 있다. 당장 송유겸만 해도 열일곱에 입관한 경우였다.
“그 중에서 매우 유명한 소저들 두 명이라고 하시면······.”
황성락이 궁금해 하자 우문직이 조용히 말했다.
“한 명은 선우린 소저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모든 사내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그, 선우세가의······?”
“왜 아니겠습니까. 전대 잠룡관주이시자 현 무림맹 집법당주이신 그 선우훤 대협의 장손녀시죠.”
어제 제일서고에서 선우훤과 만났었기에, 나 또한 관심이 크게 쏠렸다.
소충광이 말했다.
“선우훤 대협의 손녀시니 무공이야 말할 것도 없겠고, 용모만으로도 어려서부터 될성부른 꽃봉오리라는 얘기가······.”
“요새 아주 활짝 피어나고 있는 모양입니다.”
우문직이 대꾸하자 사내놈들 모두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그 미모를 어서 보고 싶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황성락이 주방 쪽을 빠르게 일별하더니 소충광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혀, 형님, 진 매가 예쁘기는 하지만 선우린 소저와 비비기에는 아무래도······.”
“우, 우리가 아무리 진 매랑 친하다 해도 그건 좀······. 친분과 상관없이 객관적 기준은 지키자고. 탐미정신은 고귀한 거야. 양심 문제라는 것도 있고.”
“그, 그렇죠? 어, 어쨌든 나머지 한 명이 누군지에 따라, 진 매가 내년 잠룡오화에 진입할 가능성이 아직까지는 남아 있는 거니까요.”
“그렇지. 응원하는 마음으로 들어 보자고.”
대화를 나눈 소충광과 황성락의 시선이 우문직에게로 향했다.
나머지 한 명을 어서 말해달라는 눈빛으로.
우문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다른 소저는······, 나, 남궁설 소저라서······.”
그 말에 사내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있을 뿐,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너무 유명해서,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이름이 나온 탓이었다.
물론 나 또한 놀랐다.
남궁설과 선우린은 워낙 유명해서 굳이 천마신교에서 정보를 찾아 볼 필요도 없는 이름들이었다.
그냥 예전부터 들었던 이름들이라, 마냥 애들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걔들이 벌써 잠룡관에 들어올 나이가 된 거구나.
꼬마들인 줄 알았는데 송유하랑도 겨우 한 살 차이밖에 안 났던 거구나.
잠깐의 침묵 속에서 충격이 어느 정도 가셨을 때쯤, 소충광과 황성락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 다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 * *
식탁 위에 교자와 함께 술상이 차려졌다.
“유하랑 저, 그냥 이름도 편하게 부르며 친구로 지내기로 했어요.”
“우, 운령이가 선뜻 그러자고 제안해서······.”
송유하가 아직은 어색한 느낌으로 그렇게 대꾸하자 소충광이 진운령과 송유하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잘 했네. 잘 됐구려.”
나도 동의하며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광주진가는 광동제일세가이며, 송가장과는 애초에 급이 다른 가문이다. 그리고 진운령은 그곳의 장녀다.
그런 진운령이 송유하에게 편한 친구 사이로 지내자는 제안을 먼저 한 것이다.
무한 인맥 지상주의자인 송천광이 들으면 만세라도 외칠 일이다.
물론 성격상 송유하가 이 사실을 송천광에게 먼저 떠벌릴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되지만.
“자, 그럼 첫 건배는 두 분 소저들께서 친구가 된 걸 기념하는 의미로 할까요?”
길초량이 제안하자 모두가 수긍하며 잔을 들었다.
길초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본격적으로 마시기 전에, 미리 두 가지 규칙을 말씀드립니다. 첫째, 되도록 조용히 마실 것. 둘째, 아까운 술이니 내공으로 주기를 몰아내지 말 것. 아시겠지요?”
“예······!”
모두가 목소리에 바람소리를 가득 넣어서 대꾸했다.
이에 길초량이 조용하게, 그러나 또박또박 외쳤다.
“두 분 소저의 아름다운 우정을 위하여!”
“위하여!”
그다지 술이 고픈 건 아니었으나, 첫 잔인데다가 분위기도 있고 하니 단숨에 한 잔을 비웠다.
뭐, 섣달그믐이잖나. 곧 새해고.
크으······!
이게 얼마만의 술맛이냐.
기연마저 얻었기 때문인지, 오늘따라 술맛이 더욱 기가 막힌 느낌이다.
잔을 내려놓고 보니 내 옆에 앉은 송유하도 어느새 빈 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아까 내 거처에 모였을 때부터 길초량이 술 얘기를 했었는데, 송유하도 마시고 싶다고 했었다.
술 마시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 아니냐고 했더니, 송유하가 이렇게 대꾸했었다.
「오라버니는 열여섯 살이 되기 직전부터 드셨어요. 그리고 저는 곧 열일곱 살이 되구요.」
그 얘기를 들으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송유하는 어렸을 때 호기심에, 장원에서 일하는 어른들이 마시는 술을 몰래 마셔본 적이 두세 번 있었다는 모양이다.
「그런데 저는 아무렇지도 않더라구요. 어지럽거나 그런 것도 하나도 없어서, 왜 어른들은 이런 걸 먹고 휘청거리는 건지 이상하다고 느꼈어요.」
보통 그런 애들이 커서 주당이 되곤 하는 법인데, 오늘 한 번 지켜 볼 일이다.
송유하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누이, 마음껏 마셔.”
“네.”
말이라도 절대로 빼는 법이 없구나, 넌.
이것도 먹는 거다, 먹는 건 일단 뱃속에 집어넣고 본다, 뭐 그런 거냐?
“누이, 이왕 마시는 거, 오리 될 때까지 마셔.”
“가, 갑자기 오리라니요······?”
송유하가 되묻기에 바로 대꾸해줬다.
“나중에 꽤액, 꽤액 할 때까지, 시일컷 마시라고.”
그 뜻을 알아들은 모두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푸흐흐흡!”
“푸하하하하하!”
앞에서 보고 있던 진운령이 말했다.
“우와! 근데 송유겸 공자님, 되게 열려 있는 오라버니시다아! 우리 외사촌 오라버니들은 내가 술 마시겠다고 하면 온갖 잔소리들을 해대는데.”
사실은 내가 열려있는 오라비라서가 아니라,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송유하가 그간 열심히 노력한 것에 대한 보상 차원이다.
사람이 항상 팽팽하게 당겨져 있기만 하면 마음의 여유를 잃는 법이다. 송유하는 지금껏 매우 열심히 해왔다. 게다가 이런다고 해서 각오가 흐트러질 아이도 아니다.
가뜩이나 송유하는 또래들과의 이런 자리에 대한 경험도 거의 없다. 마침 좋은 이들과 함께이니, 이런 때 아쉬움 없이 친분도 쌓으며 기분 좋은 추억을 남겼으면 하는 마음이다.
둘째, 내 눈으로 직접 송유하의 주량을 점검하기 위함이다.
주량을 미리 점검해둬야 앞으로도 여러 모로 참고도 하고 대비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나아가서는 주사가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만취해도, 혹여 실수를 해도, 차라리 내가 있을 때 그러는 편이 낫다.
내 속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교자들은 계속해서 송유하의 입속으로 직행하는 중이었다.
하여튼 잘 먹는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