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안에 마교있다-30화 (30/416)

내 안에 마교있다 30

내 앞에 앉은 광동과 복건의 네 사람을 향해 물었다.

“한데 네 분이 같이 나타나실 줄은 몰랐습니다. 서고에서 뵀을 때는 서로 이전부터 교류가 있던 사이는 아닌 느낌이었던지라.”

내 말에 소충광이 대꾸했다.

“아, 그렇습니다. 누구신지야 알고 있었지만 친분은 딱히 없었습니다. 아까 우리 셋이서 술을 사러 나가는 길에 우문 공자와 우연히 마주쳤던 겁니다. 어제의 일도 있었고 해서 같이 마시자고 제안했던 겁니다.”

“아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길초량이 눈치를 살피다가 네 사람을 향해 말했다.

“아까 제삼서고 관리자님이 마지막에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신 거······, 해적들 얘기지요?”

“그렇습니다.”

소충광이 대꾸하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서글픔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는 미소였다.

황성락, 우문직, 진운령의 표정에도 비슷한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소충광이 회상하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광동의 관군도, 광동 무림도, 해적들을 만만하게 봤다가 정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해적들은 강했습니다. 배를 타고 다니며 우리의 약한 곳을 기습했고, 기습에 성공하면 기세를 올려 더 잔인하게 인근을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러다가 불리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배를 이용해 퇴각하는 식의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모두가 묵묵히 듣고 있는 가운데 소충광의 말이 이어졌다.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악몽과도 같은 시간들이 계속 이어졌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무림맹과 동부지맹에서도 광동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치가 쉽지 않아서 몇 년이 걸렸던 겁니다.”

“저도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 마음이 참 무겁습니다.”

길초량의 대꾸였다.

그런 일들을 겪었으니 저들의 무공이 자연스럽게 실전 위주의 무공들로 바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들에게 있어 변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을 테니까.

길초량이 말했다.

“최근에도 복건의 남부 해안과 광동의 동부 해안에 또다시 해적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아까 제삼서고의 관리자님도 그 말씀을 하시는 것 같더군요. 과거에 겪은 일도 있으니 네 분 모두 염려가 크시겠습니다.”

복건의 남부 해안과 광동의 동부 해안은 행정 구역만 다를 뿐, 붙어 있는 해안이다.

어쨌거나 아까의 내 예상이 맞는 것 같다.

최근의 해적출몰에 대한 정보는 천마신교에 있을 때 접하지 못했었으니, 아마도 내가 송유겸의 몸으로 깨어난 이후의 일인 모양이다. 최근의 일인 것이다.

황성락이 대꾸했다.

“당연히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처럼 쉽게 당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 때문에 저희들은 상시 대비 체제입니다. 피난 체계, 대응 체계가 즉각 발동할 테고, 관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울 겁니다.”

처절한 희생을 감내하고 얻은 교훈이 있으니 대비도 잘 되어 있을 것이다. 근래의 경험이니까.

진운령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동부지맹에서도 즉각 정예 무인들을 파견했다고 해요. 그래서 그나마도 염려가 덜한 거예요. 게다가 어차피 지금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잠룡관에서 더 강해져서 돌아가는 일뿐이니까요. 저희가 평소에는 술을 거의 안 마시는데, 마음도 무겁고 해서 겸사겸사 한 잔 마시기로 했던 거예요.”

그녀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우문직도 고개를 끄덕였다.

길초량이 진운령에게 말했다.

“나도 들었소. 이번에는 처음부터 정예 전력을 포함한 다수의 전력을 파견했다고 하더구려. 동부지맹이 보유한 전력의 사 할 가량이 그쪽에 파견되었다고······.”

“동부지맹 또한 이전의 경험이 있으니까요. 어설픈 전력을 파견했다가 피해만 커지느니, 아예 처음부터 확실한 전력을 파견해서 제대로 퇴치를 하겠다는 뜻이죠.”

해적들 얘기를 할 때의 네 사람에게서는 비장함마저 엿보일 정도였다.

나는 흑풍대 시절에 적지 않은 실전을 겪어 봤고, 그 와중에 동료들이 죽는 모습도 수차례 보았다. 그렇기에 저들의 비장함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해적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에도 좀 더 이어지다가 끝났다.

길초량이 술 한잔을 들이키더니 말했다.

“사실, 그 일로 인해 다음 학기부터는 잠룡관에도 변화가 생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네 분에게는 불편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해적 얘기를 꺼냈던 겁니다.”

“변화라니요?”

소충광이 묻자 길초량이 대꾸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현재도 동부지맹 전력의 사 할 가량이 해적 퇴치에 파견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전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전력이 투입될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 동부지맹에 남은 전력은 확 줄어들지요.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잠룡관도들은 모두 동부지맹의 예비 전력이기도 합니다.”

“예. 우리가 기본적으로 예비 전력으로 분류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동부지맹에 남은 전력이 부족해지는 경우, 예비 전력인 잠룡관도는 동부지맹을 방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경우, 평소 동부지맹의 무인들이 하던 역할들을 우리가 수행하게 됩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길초량이 말했다.

“그래서 아마 다음 학기부터는 우리 잠룡관도 비상 대비 체제로 운영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동부지맹 수뇌부의 뜻이 그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은 모양입니다.”

“비상 대비 체제라면······.”

“말 그대로 지금까지의 교육 방식과 다르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적극적인 교육과 훈련이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동부 해안의 해적 퇴치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그곳에 파견되었던 동부지맹의 전력들이 복귀하기 전까지는.”

그 말에 모두가 금세 놀란 표정이 되었다.

소충광이 말했다.

“해적들과의 싸움이 어느 정도 정리되기까지 길게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겪어 봐서 잘 압니다.”

“예. 그렇기에 잠룡관의 비상 대비 체제도 제법 오래 지속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황성락이 말했다.

“길 공자님께서는 그런 정보를 어떻게······.”

“하핫. 제가 사실 숨은 정보통입니다. 동부지맹 쪽에 지인들이 몇 분 계신지라.”

길초량의 정체에 대해 대강이나마 추측하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그의 정보에 신뢰가 갔다.

신룡대의 황룡조장인 태무엽과 맨얼굴로 독대할 정도라면, 무림맹 내의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입장인 것이다.

음, 잠룡관이 비상 상황 대비 체제로 돌아가면 계반 관도들이라 해도 여러 모로 귀찮아질 것 같은데.

만약 계반인데도 이래저래 귀찮아지면 다음 승반 심사에서는 승반을 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해적 퇴치가 오래 걸릴수록 잠룡관의 비상 대비 체제도 오래 지속될 테니까.

술자리는 계속되어 어느새 자정이 넘어갔다.

자정 남짓에 새해를 기념하며 건배를 하고도, 이후에 반 시진동안 더 마신 후에야 끝나갔다.

나는 분위기를 봐 가며 최소한만 마셨지만, 나를 제외한 여섯 명은 그야말로 고래처럼 들이부었다. 여섯 명은 계속 건배하며 모두가 엇비슷한 양을 마신 것 같다.

다들 어느 정도 취기가 도는 시점에서 가장 멀쩡해 보이는 건 길초량이었다. 예상했던 바이기도 했다.

한데 놀라운 점은 길초량만큼이나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송유하라는 사실이었다.

얘, 대체 뭐야······?

어렸을 적 몰래 술 마셨던 일을 얘기할 때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즉, 얘는 그냥 태생이 주당인 것이다.

가장 취한 게 진운령이고 그 다음이 황성락으로 보이는데, 둘 다 휘청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 함께 식당 정리를 마쳤다.

여럿이서 하니 정리도 금방이었다.

“오늘 좋은 분들과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서 안부도 주고받으며 한 잔씩 하면 어떻겠습니까?”

우문직의 말에 소충광이 대꾸했다.

“찬성입니다. 어차피 모두가 잠룡관에 영원히 머물 것도 아니잖습니까. 언젠가는 졸업하여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테니, 기회가 있을 때 친분도 쌓아 놓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송유겸 공자님만 함께하신다면 찬성이에요.”

진운령이 갑자기 그렇게 말하니, 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에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제가 뭐라고······.”

“송 공자님은 당연히 끼셔야죠. 우리 모두가 이렇게 모일 수 있었던 게 다 송 공자님 덕분인데.”

진운령이 그렇게 대꾸하는데, 나머지도 다들 무조건 공감한다는 듯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길초량이 말했다.

“하핫! 여러분도 우리 송 형의 매력을 알게 되신 것 같아서 흐뭇합니다. 나도 송 형이 참여하는 조건으로 합류하겠습니다.”

아니, 이것들이!

분위기상 어쩔 수 없기도 하고, 오늘 모인 아이들은 모두가 괜찮은 아이들이기도 했다. 나중에 송유하의 인맥을 위해서라도 이런 관계가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알겠소. 알겠는데, 나를 그리 중요한 인물처럼 띄워주지는 말아주시오. 부담스럽소.”

내 대꾸에 모두의 표정이 환해졌다.

송유하도 좋은 모양이었다.

우문직의 거처에 좋은 술 몇 병이 더 있는 모양이라, 길초량과 소충광은 그쪽으로 합류하겠다고 했다. 그들이 당직실에 열쇠를 전해주고 가겠다고 했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더 마실 생각이 없어, 그 날의 내 술자리도 그렇게 끝났다.

* * *

방학이 빠르게 지나갔다.

새해가 된 후에도 이 주간 임시 관리자로 근무하며 갑을병정 반의 여러 관도들을 접했다. 개중에 이 몸에게 버르장머리 없게 굴었던 아이들은 기억해 두었다.

방학은 삼 주 남짓인데, 삼 주를 채운 시점에 제일서고의 관리자가 복귀했다. 그래서 그 시점부터는 송유하와 나의 임시 관리자 역할도 끝났다.

그동안 열심히 회회심공 수련을 하며, 백년음양선과의 뿌리도 다섯 차례 달여 마셨다.

덕분에 내 내공은 사십 년 공력을 확실하게 넘길 수 있었다.

송유하에게도 고천비룡결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연구를 통해 매우 적절해 보이는 심법들의 원리를 조합했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본디 심법을 바꾼다는 게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얘가 꺼려하면 어떻게 꼬드겨야 할지 고민도 되었는데, 송유하는 의심 없이 내 의견에 따라 심법을 바꿨다.

이런 말을 하면서였다.

「그간 오라버니가 얼마나 열심히 무공 연구를 하셨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오라버니가 추천하시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익히는 건 열심히 익힐 수 있지만, 어떤 무공이 더 나은지는 잘 모르기도 해요.」

무공은 처음에 적응할 때의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송유하가 고천비룡결의 초반 묘리 터득을 최대한 쉽게 할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 썼다.

송유하는 어차피 스스로 열심히 하는 아이다.

초반 묘리 터득만 어느 정도 도와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소처럼 열심히 할 터였다. 중간에 궁금한 게 있으면 능동적으로 물어보기도 할 테고.

참고로 아직 송유하에게는 백년음양선과의 줄기와 잎을 복용시키지 않았다. 고천비룡결의 성취가 조금이나마 올라온 후에 복용시킬 생각이다. 그게 더 효율적일 테니까.

그래서 백년음양선과의 줄기와 잎은 건조를 시킨 후, 보존진법이 걸린 석함 안에 일단 넣어 두었다.

별개로 요즘은 풍우비룡무를 연구하는 중이다.

이후에 송유하에게 가르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나 또한 그 안에서 취할 게 있으면 취하기 위해서다.

풍우비룡무를 탐독하다 보니, 연승휴가 쓰던 검의 이름이 ‘비룡검’임을 알 수 있었다.

가보이니 검에 이름이 있을 것 같긴 했는데, 만약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면 나도 비룡검이라는 이름을 붙일 생각이었다. 고천비룡결과 풍우비룡무에 공통적으로 ‘비룡’이라는 명칭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데 실제로도 이름이 비룡검이었던 것이다. 납득할만했다.

비룡검도 열심히 휘두르며 손에 익게 만드는 중이다.

* * *

내일이 개학이다.

이삼 일 전쯤부터 잠룡관은 또다시 활기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방학 때 잠룡관을 비웠던 관도들이 속속 복귀한 탓이기도 했지만, 신입 관도들이 입관 수속을 위해 찾아든 탓이기도 했다.

신입 관도들의 경우에는 보호자들도 동행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 시기의 잠룡관은 더더욱 북적거리는 모양이다.

오늘 오전까지 신입 관도들의 반 배정 심사가 마무리 된다고 들었다.

그러고 나면 보호자들은 퇴장하고, 신입 관도들은 거처를 배정받아 본격적인 잠룡관 생활이 시작된다고 한다.

송유하와 함께 새벽 구보를 마친 후, 내 거처에서 잠깐이나마 그녀의 고천비룡결 운용을 도와줬다. 아직은 초창기이기에 잠깐씩이라도 자주 점검을 해줘야 한다.

송유하를 보낸 후에는 벽곡단으로 끼니를 때운 후, 적당히 씻고 제삼서고로 향했다.

제일서고에서의 임시 관리자 역할이 끝난 후, 나는 오전 시간은 제삼서고에서 보내고 오후 시간은 실내 연무동에서 비룡검을 휘두르며 보내고 있다.

잠룡관은 아침부터 북적거리는 모양이지만, 계반 거주구역과 제삼서고 인근은 역시나 조용했다.

제삼서고에 도착하니 처음 보는 얼굴이 관리자석에 앉아 있었다.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문사풍의 사내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반갑네. 나는 오늘부터 제삼서고에서 근무하게 된 정원진이라는 사람일세.”

엥? 오늘부터 제삼서고를 관리하게 되었다고?

그럼 제갈수광은?

“아······, 그러시군요. 인사드립니다. 저는······.”

“계반, 이 년차, 송유겸이겠지. 내일부터는 삼 년차일 테고.”

살짝 놀라고 있는데 정원진이라는 사내가 곧바로 출입대장을 펼쳐서 내게 보여줬다.

‘계반, 이 년차, 송유겸.’

출입대장에 온통 같은 내용뿐이었다. 날짜와 시간만 다르다.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정원진이라는 사내도 저걸 보고 나에 관련된 사항을 알아낸 모양이다.

“원래의 관리자님께서는······.”

“아, 원래의 업무로 복귀하는 모양이더군. 나도 그 이상 자세히는 모르네.”

원래의 업무?

뭐야, 제삼서고 관리자가 원래의 업무 아니었어?

물론 제갈수광이 현 제갈세가주가 아끼는 사촌동생임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어쨌거나 문재文才도 상당히 뛰어났다고 하니, 이런 한직에서 탱자탱자 놀고만 있을 수준의 인물은 아닌 것이다.

업무 복귀라면 본맹으로 갔나? 아니면 동부지맹으로 갔나?

에이씨. 거, 사람 참.

그래도 그간 봐 온 정이 있는데, 떠나면 떠난다고 한 마디라도 해줄 것이지.

당장 어제도 봤으면서.

뭔가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든다.

* * *

점심에 거처에 들러서 벽곡단으로 끼니를 때웠다.

잠시 쉬다가 비룡검을 들고 거처를 나섰는데, 거주 구역의 입구 쪽에서 길초량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데,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를 열댓 명의 인원들이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 송 형!”

길초량이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인물들을 보니 모두가 앳되어 보였다.

소년 열 명쯤에, 소녀들이 여섯 명이다.

금세 길초량이 가까워졌고, 그 뒤를 따르는 소년소녀들도 가까워졌다.

고개를 갸웃하며 길초량에게 물었다.

“뭐하시오?”

“아, 이들 모두가 계반의 신입 관도들이오. 당장 이제부터 잠룡관에서 생활해야 하잖소. 그래서 교관님의 부탁으로 여기저기 안내해주던 참이었소.”

“아, 그렇소? 수고하시오. 소생은 그럼 이만.”

엮이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 빠르게 몸을 돌렸는데, 길초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 형, 잠깐!”

야, 이 자식아, 눈치껏 그냥 보내줄 일이지, 잠깐은 무슨 잠깐이야?

고개를 돌리자 길초량이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이들 모두 계반의 후배인데, 이제 삼 년차가 되시는 계반의 선배께서 생활에 도움이 되는 말씀 정도는 한 마디 해주시는 게 좋지 않겠소?”

“오 년차가 되시는 계반의 대선배이자 계반의 살아있는 전설께서 몸소 안내해주고 계신데, 삼 년차 찌끄레기가 무슨.”

그러고 곧바로 휙 돌아서는데 뒤쪽에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선배님! 해주세요!”

“해주십시오!”

에이씨! 진짜! 귀찮고 짜증나게!

등 돌린 상태에서는 오만상을 찌푸리다가 뒤로 고개를 돌릴 때는 표정을 바르게 했다.

애들이 무슨 죄라고, 대놓고 짜증난 표정을 보일 수는 없잖은가.

길초량이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후배님들, 저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일부터 삼 년차가 되시는 송유겸 공자시오. 계반의 매력덩어리이자, 계반을 대표하는 외모 쪽의 초고수이기도 하오.”

저 인간이 지금 나를 놀리려고 저러는 거다.

“외모 고수 송유겸 선배님, 너무 좋아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여자애들의 목소리였다.

그 즈음 남자애들은 대부분 호의적이지 않은 표정이었다.

“자, 한 말씀 하시오, 송 형. 후배님들이 기대하고 있잖소.”

길초량이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렇게 말했다.

너 이 자식, 두고 보자.

아이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참 파릇파릇하다.

뭘 기대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향한 눈동자들도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

“여러분, 반갑소. 나는 요 옆 광풍현 송가장의 한심한 둘째로, 방금 들었듯 송유겸이라 하오. 이곳 잠룡관에서도 그 버릇 남 못 주고, 거기 계신 길초량 공자와 함께 식충 짓을 하며 한심함을 담당하고 있소.”

“푸하하하하!”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 아이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사실, 계반은 계반다워야 하오. 남들이 우리를 어떤 시선으로 보든 간에, 계반 관도로서 꿋꿋한 자부심을 가지시오.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길이 있는 법이오. 그럼 부탁도 받았으니, 내가 계반 생활에 금과옥조가 되는 말씀을 잠시 해드리겠소. 엣헴!”

한 차례 꼰대 분위기를 풍겨준 후, 뒷짐을 진 채 아이들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길초량, 너 이 자식, 기대해라.

“일단 계반에 들어왔으면 마음껏 인생을 낭비하시오. 수련과 공부를 멀리할 것이며, 웬만하면 술에 의존하시오. 딴 거 다 필요 없소. 목숨 걸고 오로지 인맥만 구걸하시오. 나중을 위해 그게 좋다는 걸 다들 아실 것이오. 참고로 계반끼리 친목해봐야 답이 없소. 윗반 관도들과 친목함에 있어, 지금 여러분의 옆에 있는 이들은 모두가 경쟁자요. 이런 종류의 경쟁자는 도태시키거나 제거하는 게 상식 중의 상식이오. 서로를 열심히 헐뜯고, 음해하고, 교묘하게 왕따시키시오. 상대가 바보면 이용해먹어도 좋소. 양심 따위 팔아치우시오.”

“소소, 송 형······!”

길초량이 제지하듯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계반을 제외한 모두와는 첫째도 친목, 둘째도 친목이오. 처음도 친목, 끝도 친목임을 항시 명심하시오. 특히 위대하신 갑을병정 반의 관도들과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최대한 친목할 생각만 하시오.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시오. 그들이 가랑이 사이를 지나라 해도 헤헤하면서 기꺼이 통과해 주시고, 설령 똥구녕을 핥으라고 해도 이왕이면 헐 정도로다가 깨끗하······.”

“소소소소소소, 송 형······!”

길초량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손바닥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읍! 읍! 그것도 꿀이라 생각하면······! 읍읍!”

“송 형! 제발 좀······!”

“푸하하하하하하하!”

“끄끄끄끄끄······!”

입이 틀어 막힌 채로 보니, 애들은 웃겨서 배를 잡거나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길초량은 황당함이 극을 넘은 표정이었다.

“아잇! 송 형, 진짜······!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가 있소! 내가 못 살아! 그만 하시오!”

제발 부탁이라는 기색이었다.

푸히히! 그러게 이 자식아, 누굴 건드려?

짜식이 까불고 있어. 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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