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53
“여기 부상자! 빨리!”
제갈수광의 외침이 들리자마자 담당무인인 이미랑과 구달호가 내게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지쳤기에 잠시 위령비 쪽에 붙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이었다.
우리는 현재 위령비를 등진 채 반원형으로 진형을 갖추고 적들을 상대하는 중이다. 그렇기에 반원의 중심인 위령비에 가까울수록 안전지대이기도 하다.
“괜찮아······?”
이미랑의 물음이었다.
“예, 등 좀 찔리고 옆구리 좀 베였다고 사람이 금방 죽는 건 아니니까요.”
내 능청스러운 대꾸에 이미랑과 구달호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보였다.
구달호가 말했다.
“자, 일단 이쪽으로······!”
위령비 옆에 도착하자마자 청여홍이 다가와서 물었다.
“소, 송 공자님, 괜찮으신 거죠? 그렇죠?”
고개를 끄덕여주자 청여홍이 내 상처에 조심스럽게 금창약을 바른 후, 내 상처부위를 동여맸다. 그러는 내내 그녀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줄곧 내가 청여홍의 짐을 짊어지고 이동했었기에 평소에도 그녀는 내게 매우 깍듯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알아서 마실 물을 받아다 줬으며, 내 설거지 당번 때도 꼭 와서 돕곤 했다.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기에 저 염려가 진심어린 염려임을 안다.
“잠깐 쉬고 싶소. 누가 나를 방해하지 못하게 좀 해주시오.”
“네, 알겠어요, 송 공자님.”
옘병할 거, 싸우기만 하면 적잖게 다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해야 한다.
통각이 느껴지고 있기에 나는 위령비에 눕다시피 기댄 채 계속해서 구결을 외워 잠력을 쌓았다.
그러면서 보니 전체적으로 전황이 좋지 않은 와중에도 그나마 다행인 게 있었다.
단목강과 장우혜가 빼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인들이 지쳤으니 단목강은 완전히 전선에 나선 상태다. 단목세가 특유의 웅장한 검법을 펼쳐내며 적들을 상대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과연 육룡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지금 보니 그 이상이다.
보니까 쟤도 천재과다.
실전 경험이 있어 보이긴 했으나 전투 초반의 단목강에게서는 약간의 어설픔이 느껴졌었다. 한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번 실전을 치르는 와중에 많은 부분들을 빠르게 깨달아가며 대처력을 보완한 것이다.
저게 말은 쉽다.
그러나 자칫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곳인 만큼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든든하다.
지금껏 적 궁수의 무음시 공격을 도맡아서 대처했던 건 나였다. 그랬던 내가 다친 상황이라, 이제는 단목강 또한 그 부분에도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느낌이다.
움직임이 그렇다.
내 입장에서 더 놀라운 건 단목강보다 장우혜 쪽이다.
지금의 장우혜는 무공연원을 드러내지 않으며 매우 간결한 무공만을 구사하는 중이다.
한데 그게 번번이 유효타가 되어 적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그걸 단목강과 무인들이 마무리하는 식이다.
장우혜가 마무리할 줄 몰라서 저러고 있는 게 아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본인이 어떻게 하는 게 전체적인 면에서 가장 효율적인지를 알고 저러는 것이다. 그 와중에 틈틈이 유은무를 돕기까지 하고 있다.
쟤가 실전이 겨우 두 번째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놀라운 성장속도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다른 조원들의 눈에는 지금의 장우혜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마무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검술이 화려하지도 않으니까.
그러나 고수는 안다.
저 검술은 형(形)을 버리는 영역에 한 발짝이라도 발을 들여놔야만 가능한 검술이다.
저 어린 나이에 저러고 있다.
참고로 나는 장우혜가 산장에서 검환을 펼쳐냈을 때부터 그녀의 천재성을 알아본 바 있다.
단목강이라는 천재의 옆에서, 장우혜는 남궁세가임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본인의 천재성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천부적인 재능만 따지면 서무욱 당시의 내 재능도 저 둘에게 못 미친다. 기재 수준이었던 나는 운 좋게 천하제일인의 눈에 들어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뿐이니까.
유은무와 묘옥련의 활약도 준수하다.
장우혜에 비해 실전 적응이 상대적으로 약간 느릴 뿐, 유은무도 기본적으로 빼어난 적응력을 보이고 있다.
묘옥련은 내공에 비해 실전에 익숙한 움직임으로 이리저리 활약하는 중이다.
둘 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감초 같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무반인 곡양걸과 호연웅, 기반인 금승경과 항미금도 조심스럽게 최소한의 지원을 하는 중이다.
네 사람은 혹여 지원이 성공하지 못해도 곧바로 뒤로 빠지며 안전을 최우선시하고 있다. 아마도 제갈수광 내지는 단목강이 따로 전음 지시를 내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 외의 나머지 조원들은 청여홍처럼 부상당한 무인들을 돌보는 중이다.
무음시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위령비의 반대편으로 서서히 이동하며 싸웠다.
구결을 외우면서 보니 그동안 무음시는 세 차례 날아왔다.
두 번은 제갈수광이 쳐냈고 한 번은 단목강이 겨우겨우 쳐냈다.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자 무음시도 한동안 날아오지 않았다.
궁수 놈도 이동하여 다시금 자리를 잡는 시간이 필요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이번의 공백은 좀 긴 느낌이다.
화살에 내공을 담아서 날리는 일도 쉬운 수법은 아니기에, 놈의 공력도 어느 정도나마 소모된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놈도 운기를 취하느라 잠시 잠잠한 상황일 수도 있다.
나는 쉬는 척 벽에 기대어 잠력을 적당히 쌓고, 적당한 시점에 운기를 취하여 그 잠력들을 내공으로 전환시켰다. 이후 다시 잠력을 쌓았다가 눈치껏 또다시 운기를 취했다.
바닥이었던 공력이 일 할 남짓까지는 회복된 것 같다.
회회심공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 어떤 심법도 이 정도 시간에 이 정도의 공력을 회복할 수는 없다.
회회심공의 경우에는 잠력을 전환시키는 방식이라서 가능한 것이다. 상처를 입은 초반에는 통각이 가장 활성화될 때이기에, 그 시점에서의 효율이 특히 좋기도 하다.
이 할 정도까지는 모으고 싶지만 그러려면 지금까지 소요된 시간보다 한 배 반의 시간은 더 걸릴 것이다.
그럴 만한 시간은 없다.
일단은 궁수 놈의 위치를 가늠해야 할 때다.
회회심공을 활성화시키며 감각을 넓게 퍼트렸다.
잠시 후 나는 급격하게 눈매를 찡그려야 했다.
불이 붙지 않은 전각의 지붕 위에서 놈의 기척을 발견할 수 있었던 탓이다.
제갈수광이 있는 방향의 전방이 아니라, 단목강과 장우혜 등이 싸우고 있는 방향의 전방이다.
만약 이번에 기척 감지가 안 되면 곧바로 조금만 더 공력을 모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다 텄다.
지금의 공력으로는 천섬보를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거리도 짧다.
결국 단목강과 장우혜 등이 있는 곳 근처로 다가가야 한다.
놈이 화살에 공력을 주입하기 시작한 것 같다.
저 상태에서 약간이나마 겨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전에도 감지를 해봤기에 알고 있다.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어어······?’
하나의 쾌속한 기운이, 궁수가 있는 지붕 위로 빠르게 다가가는 게 느껴졌다.
제법 먼 거리에서부터 다가가는 중인데 그야말로 엄청나게 빠르다.
뭐지? 갑자기 저런 고수라니?
궁수 놈 쪽에서 맺혔던 기운이 급격하게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놈도 누군가가 다가오는 걸 알고 겨누기를 중지한 것이다.
한데 그때쯤에는 빠르게 다가가던 고수가 이미 그 궁수 놈의 지척에 다다른 상태였다.
정말이지 놀라운 속도다.
그 직후에 나는 또다시 놀라야 해다.
궁수 놈의 기척이 튕기듯 빠르게 도주하는가 싶었는데, 그 후에 그의 기척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찰나 간에 멀어지며 사라진 것도 아니고, 은신술 따위로 순식간에 기척을 지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완전히 사라졌다.
궁수 놈이 죽은 것이다.
초입쯤이라 해도 놈은 절정고수였다.
그런 그가 제대로 도망쳐보지도 못하고 죽다니.
전각의 지붕 위에서 궁수 놈을 지워버린 그 고수가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으니 그 빠른 속도감이 더 크게 체감된다. 전생에 그 많은 고수들을 봐왔던 내 입장에서도 이렇듯 계속 놀랄 정도인 것이다.
나는 곧바로 일어서서 위령비 하부의 기단 위로 올라섰다.
정체불명의 고수가 워낙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기에, 이제는 굳이 기척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곧 눈으로도 보일 테니까.
우리를 포위한 채로 공격하던 적들의 후방에 정체불명의 고수가 근접한 순간, 나는 눈을 부릅떠야 했다.
최후방에 있던 적들의 어깨 위쪽이 뚝뚝 떨어져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서너 개가 떨어져 나갔다.
잠깐만, 내가 뭘 잘못 본 건가?
한 차례 눈을 크게 깜빡였다가 다시 떴다.
아니다. 잘못 본 게 아니다.
적들의 목 위쪽과 아래쪽이 계속 분리되고 있다.
정체불명의 고수가 너무도 빠르고 강해서 적들이 인지조차 못한 상태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 것이고.
참고로 이 시점에서 그는 더 이상 정체불명의 고수가 아니다.
내가 아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남궁찬이다.
단목강과 장우혜 쪽에서 싸우고 있던 절정고수 한 놈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놈도 마지막 순간에는 남궁찬의 존재를 인식하긴 했었다.
그러나 이전에 단목강과 장우혜 쪽에 신경이 너무 쏠려 있었다. 그래서 인지도 늦었던 것이다. 물론 남궁찬이 너무 빨랐던 이유가 더 컸지만.
그쪽에 있던 또 다른 절정고수 한 놈을 마저 처치한 남궁찬이 적진의 외곽을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다시 적들의 목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남궁찬이 다다른 곳은 제갈수광과 싸우고 있는 절정고수의 뒤편이었다.
그 즈음 제갈수광은 더욱 맹렬하게 절정고수를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남궁찬의 존재를 인식하고 일부러 저러는 것이다.
곧 그 절정고수가 남궁찬의 존재를 인식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남궁찬의 검극이 이미 그의 등에 닿은 후였다.
절정고수의 복부 앞으로 남궁찬의 검신이 불쑥 튀어나왔다.
“커헉!”
저게 남궁찬이구나.
이곳에 있는 모두와, 아예 차원이 다르다.
서무욱 시절의 나는 남궁찬을 따라잡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되지 않고 서무욱인 채 그대로 있었다면, 그래서 남궁찬과 동갑인 채로 서른세 살을 맞았다면, 과연 지금의 남궁찬을 따라잡을 수 있었을까?
오늘의 남궁찬을 보니, 적어도 올해에는 아니었을 것 같다.
내년에도 어려웠을 것 같다.
남궁찬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아마도, 며칠 전에 태화지부의 내각주 진극태가 지원 요청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니까 그는 머리카락이 온통 산발한 모습이었다.
의복도 먼지, 풀잎과 나뭇잎, 땟국 등으로 온통 지저분했다.
남궁찬이 동부지맹에서 이곳까지 며칠간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쉬는 걸 최소화한 채, 비도 맞고 이슬도 맞아가며 계속 달려왔을 것이다.
서무욱 시절에는 경쟁자로 느꼈으나, 지금의 남궁찬은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 아군이다.
저렇듯 지저분한 모습인데도 그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다.
이윽고 적들 사이에서 다급한 호각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삐빅- 삑- 삐빅-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적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제갈수광과 남궁찬의 시선이 한차례 얽혔다.
곧 제갈수광이 자신의 쌍검 한 자루를 남궁찬에게 던졌다.
이제는 남궁찬이 양손에 모두 검을 쥔 상태.
남궁찬의 양손에 들린 검들이, 달빛 아래에서 찬란한 검광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제갈수광은 남았고, 남궁찬은 도주하는 적들 사이를 맹수처럼 누볐다.
그 시점에서 우리의 전투는 끝났다.
대신 남궁찬의 일방적인 도륙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대로 기단을 깔고 앉으며 위령비에 드러눕다시피 몸을 기댔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체력에 한계가 있다.
그 한계는 진즉에 왔었다.
마지막까지 무음시에 대처하기 위해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을 뿐이다.
처음에 쇠구슬을 이용해 전체를 지원할 때부터 계속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했었다. 조금의 실수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빌어먹을 무음시가 등장했을 때부터는 아예 초긴장 상태로 있었다.
남궁찬의 등장으로 전투가 끝나자 그 모든 긴장 상태가 한 순간에 풀려버렸다. 그러자 진즉에 바닥났던 체력이 곧바로 몸에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저절로 내려앉는 눈꺼풀을 다시 들어 올릴 힘도 없다.
너무너무 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