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55
서서히 눈을 떴다.
제대로 자고 일어났을 때의 개운한 느낌이 든다.
머리가 맑다. 기분이 좋다.
낮 시간인 것 같다.
버릇처럼 몸을 일으키려던 중, 나는 옆구리와 등에서 큰 통증을 느껴야 했다.
“큭······!”
“어? 일어났다!”
“일어났다, 일어났다아!”
호들갑을 떠는 두 개의 얼굴이 보인다. 너무도 익숙한 장우혜와 유은무다.
아마도 교관 제갈수광이 쓰던 방인 것 같은데, 두 소녀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 하하. 누이들······.”
“송 오라버니, 뭘 그렇게 오래 주무시는 거예요!”
유은무가 양손을 허리춤에 올린 채, 짐짓 책망하듯 말하고 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장우혜가 나를 흘겨보며 말을 보탰다.
“잠보. 잠탱이.”
“하. 하하. 내가 그렇게 오래 잤나?”
“자다가 그대로 죽는 건가 했어요. 하도 오래 자서.”
“꼬박 다섯 시진을 주무셨다구요!”
장우혜와 유은무가 차례로 그렇게 대꾸했다.
야, 장우혜! 나, 환자거든? 악담하지 말라고!
그나저나 유은무의 말이 의외다.
내가 다섯 시진(10시간)이나 잤다고?
무인으로 살면서 이렇게나 오래 자 본 적은 몇 차례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은 하다.
지난밤의 전투에서 바닥난 체력으로 계속 움직였던 탓도 컸겠지만, 이곳에서 지내는 며칠간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한 적이 없었던 탓도 컸겠지.
항상 적습을 염두에 두고 긴장 상태에서 잤으니까.
장우혜가 말했다.
“상처 다시 소독하고 약도 다시 바르고 천도 갈아야 해요. 몸도 닦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구요.”
“원래 송 오라버니 주무실 때 겉옷 정도는 갈아입힐까 했는데, 그러면 깰 수 있으니 그냥 자게 놔두라고 하셨어요. 교관님이.”
유은무의 말이었다.
이제 보니 얘들 둘 다 피로가 가득한 얼굴이다.
그녀들의 뒤쪽으로 물을 받아둔 대야와 깨끗한 천들, 내 봇짐 등이 보였다.
“누이들, 안 잤어?”
“둘이서 돌아가면서 이 옆에서 잠깐씩 자긴 했어요. 송 오라버니 깨면 바로 간호해드리려고······.”
말은 저렇게 하는데, 얼굴이 별로 못 잔 얼굴들이다.
내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계속 저러고들 있었던 거다.
이것들이 사람 감동하게.
이윽고 두 소녀가 치료를 위해 내 상체를 닦기 시작했다.
“우와, 근육 봐. 우람하고 그런 건 아닌데 완전 쇳덩이야.”
“송 오라버니가 생긴 건 부드러운 느낌인데 몸은 참 좋지.”
유은무와 장우혜가 차례로 그렇게 말했다.
이것들아, 치료만 해!
계속 그렇게 더듬지 말라고! 간지럽다고!
그 와중에도 두 소녀는 계속 지들끼리 재잘거리는 중이다.
“몸이 이래서 체력 바본가?”
야, 장우혜! 강철체력이라는 좋은 대체어도 있잖아.
“근육이 이런 식이면 칼도 뚫고 들어오다가 짜증나서 막 덜 들어오고 그런 것도 있을 거야, 그치?”
야잇, 유은무! 외공도 안 익혔는데 그럴 리가 있겠냐? 요즘 누가 외공 익히냐고.
“어? 송 오라버니 민망해 한다.”
내 앞쪽에서 유은무가 그렇게 말하자 뒤쪽에 있던 장우혜의 대꾸가 들려왔다.
“역시나 칭찬 비슷한 거에 약해. 유독 그래. 흥미로운 부분이야.”
아, 이 여시들.
그냥 여시들도 아니고 백여시들이다.
이후에 나는 두 소녀를 내보내고 하체 쪽은 내가 닦고는 알아서 치료했다.
이후에 두 소녀가 들어와서 치료에 사용한 것들을 챙겨서 나갔다.
본인들도 눈 좀 붙일 테니 상처 잘 돌보라는 말과 함께였다.
고마운 아이들이다.
* * *
누운 채로 구결이나 읊고 운기나 취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두 소녀가 나간 이후에 한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단목강이었다.
“어? 조, 조장님.”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단목강이 얼른 다가오더니 양손으로 내 상체를 부드럽게 눌렀다.
“일어나지 마시오, 송 공자. 그렇게 다쳐놓고 뭘 몸을 일으키고 그러시오.”
단목강이 침상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시오?”
“하하. 예. 잠을 푹 자서 그런지 기분이 아주 상쾌합니다. 상처도 덜 아프고요.”
“다행이오. 쾌유를 기원하고 있소.”
“고맙습니다.”
잠시 조용히 있던 단목강이 말했다.
“송 공자에게 부끄러웠소.”
“무슨 말씀이신지······.”
“내 누이와 사촌동생이 송 공자에 대해 여러 얘기들을 해줬었소. 보이는 것보다 더 대단한 게 있는 분이라는 말들을 공통적으로 했었소. 그럼에도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송 공자의 대단함을 알아보지도 못했소. 그러고는 목숨 빚만 졌지요.”
“에이, 무슨 그런 걸로······.”
그러자 단목강이 갑자기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소. 송 공자한테서 입은 은혜, 결코 잊지 않겠소.”
“이러지 마십시오, 조장님. 전투 중에는 위기상황도 많고, 그럴 때마다 서로 돕는 게 당연하잖습니까. 그걸 갖고 일일이 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니려면 끝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 동료 간에 적당히 오간 도움 정도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소. 내게 쏘아졌던 첫 무음시는 당시의 상황에서 송 공자가 아니면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 거였잖소.”
“하하, 그건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서······.”
“그 무음시를 막아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 사람은, 지난밤에 싸웠던 모든 이들을 통틀어 세 명 뿐이오. 교관님, 송 공자, 그리고 나요. 나는 단 한 번 막았을 뿐이나, 교관님과 송 공자는 몇 번씩이나 막았잖소. 운······? 그런 걸로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알고, 송 공자가 더 잘 알잖소.”
쯧. 이래서 뛰어난 놈들이란.
내가 민망함 가득한 표정을 짓자 단목강이 얼굴에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송 공자께서 이런 상황을 매우 민망해한다고 들었는데, 역시 그 말이 맞구려. 그러니 더는 민망하게 만들지 않겠소.”
“엥? 서, 설마······.”
“장우혜 소저가 귀띔해주더구려.”
장우혜, 네 이녀어어어언······!
“그러나 내가 송 공자에게 더없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꼭 말씀드리고 싶었소. 덧붙여 모두가 송 공자에게 고마워하고 있소.”
“하핫······.”
내가 뒷머리를 긁적여 보이자 단목강이 말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니 속 보이는 느낌도 적지 않으나, 앞으로는 송 공자와 사담도 나누며 지내고 싶소.”
“조장님이 속 보일 일이 뭐가 있습니까. 다른 조원들 대하듯 저를 공평하게 대했던 것뿐인데요. 저는 오히려 조장님이 누구보다 훌륭한 조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훌륭하기는 무슨. 많이 부족하다는 걸 이번에 더 느꼈소.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도와주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당연히 열심히 협조해야지요. 아,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게 좀 있는데······.”
“뭐든 말씀해 보시오.”
“혹시 지난밤의 적들 중에 사로잡힌 자들도 있습니까?”
단목강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대꾸했다.
“있었다고 들었소.”
“있었다······?”
“그 자들은 사로잡히자마자 다들 독단을 깨물고 자결했다고 하더구려.”
그 말에 눈매를 좁히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밤의 적들 중에는 사파인들과 산적들이 섞여 있었잖습니까. 한데 산적들마저도 자결했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들었소.”
“하면 혹시 적측 시체들의 복면 벗은 모습들은 보셨습니까?”
“잠룡관도들은 시체 수습하는 걸 못 보게 하더구려.”
“아······.”
아직 어린 관도들도 많으니 이해는 되었다.
단목강이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시체 수습할 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대강은 봤소. 조장인데다가 나이도 충분하다 여겼는지, 딱히 제재하진 않더구려.”
“어땠습니까? 산적들 말고 사파인들 쪽이 좀 궁금해서······.”
“그게 나도 이상하기도 했고 놀랍기도 했소. 사파인들 쪽에는 십대로 보이는 얼굴들이 매우 많더구려. 일류고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우리랑 싸우던 그 절정고수들도 대부분 십대였소. 나이가 많아 보여도 나와 비슷한 정도였고.”
이에 나는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단목강은 그들이 십대라는 사실 때문에 내가 놀란 것으로 알겠지만, 내 놀람은 다른 쪽이다.
이전의 내 억측이 조금씩이나마 억지를 벗어가고 있는 모양새이기에 놀란 것이다.
“게다가 불타지 않은 전각의 지붕에서도 시체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그쪽은 활을 지니고 있던 시체였소.”
그 말에 관심이 크게 동했다.
전각의 지붕 위라면 무음시를 날렸던 궁수이며, 남궁찬이 처치했던 절정고수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 무음시에 의해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난밤 우리를 가장 괴롭혔던 존재가 바로 그 궁수임은 분명하다.
“그녀 또한 십대였소.”
“그녀······?”
“그렇소. 십칠팔 세쯤의 여인이었소. 사실, 십대 여인은 일류고수들 중에도 몇 명 끼어 있었소.”
내가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단목강이 말했다.
“조원들 중에서는 나만 알고 있는 일이오. 그런 걸 궁금해 하는 조원들은 없었기에 딱히 말할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마침 송 공자가 물어보시는구려.”
“잠깐씩 적들과 가까워졌을 때 복면의 눈자위로 드러난 부분에서 앳된 느낌들이 종종 보이더군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여쭤 본 겁니다.”
단목강이 눈매를 가늘게 하며 내게 물었다.
“이상하지 않소? 어려서부터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영재 교육을 받았던 나조차도 아직 절정이 아니오. 나는 또래들 중에서 성취도 매우 빠른 편이었소. 한데 나와 비슷한 나이에, 심지어는 나보다 어린 나이에 절정이라니.”
그렇지? 너도 이상하지?
진작부터 나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거든.
단목강은 이후에도 한동안 나와 더불어 그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사담을 나누며 지내고 싶다더니, 마침 둘만의 공통 관심사가 생겨서 그런지 내심 즐기는 모습이었다.
* * *
단목강이 나가자마자 두 사람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묘옥련과 청여홍이었다.
두 사람은 소반을 들고 왔는데, 내려놓은 걸 보니 죽 한 그릇과 간단한 반찬이 차려져 있었다.
묘옥련과 청여홍도 내 상처에 대해 물은 후 쾌유를 기원해줬다. 그 후에 청여홍이 말했다.
“시장하실 것 같아서 식사는 저희가 챙겨왔어요. 조장님이 오래 계시는 바람에 약간 식었을 수도······.”
밖에서 단목강이 나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황공해서 이거······.”
내가 대꾸하자 청여홍이 곧바로 내게 물었다.
“송 공자님, 혹시 거동 불편하시면 제가 먹여드려요?”
헉! 야, 너무 훅 들어오는 것 아니냐?
청여홍은 상단에서 자라서 그런지, 백도 명문세가의 아이들에 비하면 생각이 좀 더 자유분방한 느낌이 많다.
“하하. 마음은 고맙소만 충분히 혼자 먹을 수 있소.”
두 여인은 내가 먹는 걸 방해하지 않기 위해 문 옆의 간이 침상 쪽에 앉아서 잠시 사담을 나눴다.
죽이라 금방 먹었다.
내가 다 먹은 걸 확인한 묘옥련이 소반을 받아서 입구 옆에 놓더니 말했다.
“지난밤에 저를 많이 도와주셨죠. 감사드려요, 송 공자님.”
“감사는 무슨. 부조장님이야말로 고생 많으셨소. 특히 부조장님은 워낙 움직임이 좋으셔서 도와드리기도 매우 편했소.”
내 말에 묘옥련은 감격한 표정이었다.
정반 관도가 계반 관도에게 실력을 인정받고 매우 좋아하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묘가검문은 우문세가와 함께 복건 무림을 대표하는 세력이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이렇듯 기회가 왔을 때 더 많은 환심을 사놓도록 하자.
“저도 깊이 감사드려요, 송 공자님.”
“청 소저야말로 지난밤에 응급처치도 잘 해주셨고, 그 외에도 여러 모로 마음 써 주신 것 알고 있소. 고맙소.”
청여홍의 경우에는 눈동자가 떨리고 있다.
얘는 무공은 약해도 광동제일상단인 연주상단의 장녀다.
미래에 비룡장을 세울 때 여러 모로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 예를 들어 건축 자재를 싸게 구입할 수 있다던가.
청여홍에게는 이미 많은 환심을 사놨지만 이런 식으로 쐐기를 박도록 하자.
곧 묘옥련이 소반을 들더니 청여홍과 함께 일어섰다.
“그만 가볼게요. 푹 쉬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묘옥련과 청여홍이 각각 그렇게 말하더니 방을 나섰다.
* * *
내 입장에서는 무공 실력을 감추고 싶었으나, 지난밤의 상황은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읽었다.
내가 실력을 감추면 다 죽는 상황이라는 걸.
우리의 전력을 최대한 오래 유지해야만 극복이 될까 말까한 상황이며, 그러려면 내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걸.
기본적으로는 모두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특별히 제갈수광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조원 중 누군가가 죽거나하면 제갈수광이 그 책임감 때문에 너무도 괴로워할 것 같아서였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연유들로 인해 결국 많은 이들이 내 실력을 알아채게 된 것이다.
쯧. 이러면 앞으로 귀찮은 일들이 많아질 게 빤한데.
빌어먹을 사파 놈들 때문에 이게 뭐냐고.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들어섰다.
제갈수광이다.
술 냄새가 지독할 정도다.
내가 저 인간을 오래 봐 와서 아는데, 이 정도 주향은 역대 급이다. 저 정도면 술에 몸을 절인 수준이다.
직전까지도 계속 마시다 온 모양인데, 그것도 모자랐는지 손에 술병을 쥐고 있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제갈수광이 문 옆의 간이침상에 털썩 몸을 눕혔다.
제자가 다쳐서 누워있는데 단 한 차례 눈길조차 주지 않는 교관이라니. 하여튼 추측불가의 인간이다.
“어으으으으······.”
게다가 얼씨구? 한 손에는 곰방대까지 쥐고 있다.
그가 곰방대를 빨았다가 연기를 내뱉었다.
“후우우우우······!”
이, 이보쇼! 여기 환자 있잖소!
원래 당신 방이다 그거요? 그러니 맘대로 하겠다 그거요?
진짜 싸울 때만 딱 멋있지, 그 외의 모습은 그냥 한량 중에서도 상 한량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해해 주자.
지난밤에 가장 힘들었을 사람도, 가장 마음 졸였을 사람도, 저 제갈수광이었을 테니까.
가만히 제갈수광을 보다가 물었다.
“아주 그냥 술독 속에서 헤엄이라도 치다가 오셨습니까?”
그래도 우리 둘 사이에서만 오가는 정이 있으니, 이렇듯 시비 한 번쯤은 걸어줘야지. 암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