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61
정가장의 건물과 시설들은 모두 제법 오래된 것들인데, 관리를 매우 잘 해온 느낌이었다.
딱 봐도 꾸준히 정성들여서 관리한 상태들이다.
저 가족들을 포함해서 이 장원에 상주하는 사람들은 열 명도 되지 않는 것 같던데, 다들 보통 부지런한 게 아닌 모양이다.
별채는 제법 커서 방도 많았다.
우리 여섯 명이 각자 넓은 방들을 쓰고도 작은 방들이 몇 개나 남을 정도였다.
식당 또한 별채의 바로 옆에 붙어 있다.
별채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넓은 공터 형태의 연무장이 있고, 그 옆에 실내 연무장도 세 곳 있다. 두 곳은 잠룡관의 실내 연무장보다 크고 한 곳은 약간 작은 정도다.
정세건이 안내해 줄 때 확인했는데, 연무장이나 실내 연무장은 장원의 이곳저곳에 몇 군데 더 있었다.
과거에 이곳이 융성했을 당시에는 제법 많은 무인들이 머물며 무공을 갈고닦았던 모양이다.
짐을 풀어 놓은 후, 오후의 남은 시간에는 다 같이 장원을 천천히 둘러보고 인근의 호숫가를 돌며 경치를 감상했다.
쭉 돌아보니 정가장의 입지 조건이 상당히 괜찮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위치가 호변 언덕의 적당한 고지대인데다가, 바로 아래에 호숫가를 끼고 있어 운치도 있었다.
적절한 위치에 나루터까지 있으니 수로 이용에 편리한 면도 많다. 물론 암초 지대와 거센 물길이 있긴 하나, 전체적인 면에서 큰 문제는 아니다.
여러 생각들을 하며 애들을 따라다녔다.
저녁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다 같이 별채로 돌아왔다.
다들 점심 때 너무 배불리 먹었기에, 저녁은 간단하게 우리끼리 해서 먹자는 의견이었다.
특히 유은무와 장우혜가 지들이 요리하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귀하게 자랐을 텐데 쟤들이 요리해본 적이 있긴 하려나?
쟤들이 해놓은 요리가 과연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켜주긴 하려나?
한데 이것도 괜한 선입견일 수 있다.
쟤들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니까 적극적으로 나섰겠지.
내 경우 몇 가지 요리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그러나 굳이 나서지 않고 일단 두 소녀를 믿어보기로 했다.
식당의 주방이 시끄럽다.
“아니, 우혜야! 육인분인데 그러면 물이 너무 많다니까?”
“소금을 설탕인줄 알고 집어넣은 멍충이가 누구한테 지적질이야?”
“아니, 그건 잠깐 헷갈려서 그랬던 거구! 그리고 누구한테 멍충이래! 넌 아까 그거 다 태워먹구선!”
유은무가 대꾸하자, 중간에 돕겠다고 끼어든 청여홍이 말했다.
“그런데 동생들, 이거 그냥 볶는 거 맞아? 야채들이 점점 새카매지고 있는데, 원래 이렇게 되는 거지?”
옆에 앉아 있는 단목강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나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단목강의 눈동자에는 지진이 났다.
[조장님이 좀 도와주시지 그럽니까.]
[진심으로 그러고 싶소. 한데 나도 요리는 전혀 못하오. 어쨌거나 아까 지나치면서 잠깐 저기를 봤는데, 독을 제조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느낌이었소.]
단목강을 향해 웃어 보이자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요리 실력들이 저렇게까지 심각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소. 비슷한 나이여도 내 누이는 요리를 좀 하던데.]
[오호? 단목 소저는 요리도 하시는 군요?]
[세가에 가면 간혹 야식을 만들어오는데, 먹어보니 맛이 제법 괜찮았소. 그래서 저 소저들도 어느 정도는 하겠거니 여겼는데.]
역시 단목지다.
그때쯤, 수련장에서 간단히 몸 좀 풀고 오겠다던 송유하가 돌아왔다.
[송 소저의 요리 실력은 어떻소?]
전음에 다급함과 간절함이 가득 묻어 있다.
[글쎄요? 저도 누이가 직접 요리하는 건 못 봐서······.]
실내 연무장에서 수련할 당시에 송유하가 싸온 도시락들은 잠룡관의 식당에서 적당히 챙겨온 것들이었다.
한데, 왠지 송유하 쟤라면 어느 정도는 요리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귀하게 자란 애가 아니라서, 어려서부터 송가장에서 일하는 일꾼들과도 많이 어울렸던 모양이니까.
요리 현장을 목격한 송유하의 고운 아미가 찡그려지고 있다.
송유하가 뒤로 묶었던 머리카락을 고쳐 묶더니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손을 씻었다.
그때부터 기적이 일어났다.
요리를 먹는 내내 단목강한테서 탄성과 찬사가 계속 흘러 나왔다.
송유하를 보는 그의 표정은 흡사 여신이라도 모시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사실 송유하가 요리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눈빛은 이미 몽롱해져 있었기도 했다.
요리는 내가 느끼기에도 제법 맛이 좋았다.
송가장에서 눈칫밥 먹으며 자란 세월의 힘이라는 건가.
그녀의 모친인 진양옥이라면 어떻게든 가르쳤을 것 같기도 하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유은무, 장우혜, 청여홍은 송유하에게 요리를 가르쳐달라며 애원했다.
“나도 수련이 바빠서 일과 시간에는 곤란해. 하지만 저녁 먹는 시간을 약간 늦춘다면 큰 차질은 없을 것 같아.”
송유하와 청여홍은 지난 며칠 새 서로 말을 편하게 하는 친구 사이가 됐다. 그녀들은 유은무, 장우혜 등에게도 말을 편하게 하게 됐다.
세 소녀가 매우 기뻐할 때 단목강도 나섰다.
“나도 옆에서 재료 손질을 도우며 좀 배우고 싶소. 기본이라도 배워놓으면 써먹을 데가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볼 때 이 자식은 제사보다 젯밥이 더 관심이 많은 쪽이다.
* * *
정가장에서의 이틀째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각자의 수련을 시작했다.
실내 수련장 하나는 나와 송유하가, 다른 하나는 세 소녀가, 상대적으로 작은 하나는 단목강이 쓰기로 했다.
단목강의 경우에는 개인 수련을 하는 와중에 종종 청여홍의 수련도 돕기로 했다.
선생이 많다고 좋은 건 아니니 나중에 보완할 부분만 한 번씩 점검해준다는 모양이다. 장우혜와 유은무의 실력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틀째의 일과가 끝나고 사위가 어둑어둑한 시각.
나는 소화를 시킬 겸 산책을 위해 홀로 별채를 나섰다.
다들 송유하한테서 그놈의 요리를 배운답시고 저녁 식사 시간이 늦춰졌다. 그래서 이렇듯 어둑어둑한 시각인 거다.
정가장 전체에 고즈넉한 어둠이 내려앉은 상태라 분위기는 마음에 든다.
본채를 지나쳐서 좀 걷다 보면 방풍림 너머로 절벽이 나타난다. 방풍림 지대로부터 절벽까지는 바위가 듬성듬성 솟아 있는 초지와 작은 텃밭이 있다.
절벽 쪽에서 시원한 바람이나 쐴까 하는 마음으로 걷는데, 방풍림 지대로 들어선 순간 절벽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귀를 기울여 보니 창이나 봉 등의 장병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가 수련하는 소리다.
원래의 내 성향대로라면 방해하지 않기 위해 곧장 돌아섰을 것이다. 그게 무인들 간의 예의이기도 하니까.
한데 순간적으로 어제의 정세건이 떠올랐다. 그 어설픈 장병 다루던 솜씨가 기억난 것이다.
게다가 나는 정가장에 흥미가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잠시 고민하다가 기척을 지운 채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기척을 들키지 않을만한 최소한의 거리에서 조심스럽게 나무 위로 올랐다.
어두운 시각이라 크게 어려운 건 없었다.
이 나무에 다가오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지만 수련을 하고 있는 인물은 정세건이 아니었다.
육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노인이다.
아직 정가장주와 직접 대면한 일은 없었는데, 아마도 그가 정가장주일 것 같다.
장창술을 수련하고 있다.
슈슈슉! 쉬익! 부웅- 슉슉!
수련을 하고 있으니 무공 경지를 파악하기도 좀 더 쉽다.
보아하니 일류의 초반을 살짝 넘었다.
정세건도 장창술 느낌으로 긴 노를 다뤘었으니, 이 가문의 가전 무예가 장창술인 건가 싶다.
정가장주의 초식 수련이 두 차례 반복되었다.
내 양미간은 좁아진 상태였다.
초식의 몇 부분과 연결 동작의 몇 부분이 매우 어색했다.
이쯤 되니 장창술을 응용하여 노를 다루던 정세건의 모습이 왜 어색했었는지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어떤 무공도 완벽한 무공은 없다.」
사부님의 지론이었으며 지금은 내 지론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천섬무조차도 완벽한 무공일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정리하여 네게 전수한 것들은 하나의 기준일 뿐이다. 그 기준을 토대로 네 스스로 고민하며 네게 맞게 보완하고 발전시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식으로 천섬무라는 무공 자체도 성장해 가는 것이다. 보다 완벽에 가까운 쪽으로, 조금씩.」
열려 있는 사고로 보다 나은 변화를 시도하는 것.
그게 바로 사부님께서 내게 가르쳐주신 가장 큰 가치다.
한데 가전 무예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경우에는 선조들의 노고를 너무 높이 사서, 그것만을 맹신하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런 이들은 과거에 가전 무예가 이름을 날렸던 영광의 시절을 기리며 기계적인 답습만을 반복한다.
시대가 변하며 무학은 점점 발전하고 있는데도, 본인의 자질이나 성취가 부족하여 가전 무예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자책하는 것이다.
저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정가장주의 창술 또한, 가전 무예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과 기계적인 답습이 손잡고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어제 정세건에게서도 느꼈지만 창술이 품고 있는 기세 자체는 참으로 좋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도 더 크다.
그 즈음, 문제가 발생했다.
스으으으으-
내가 앉아 있는 나무 아래쪽에서 심상치 않은 기척이 느껴지기에 봤더니, 옘병할 뱀 한 마리가 나무를 타고 기어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닌가.
자, 잠깐만!
이 미친 새끼야, 꺼지라고!
지금의 나는 무기 같은 게 하나도 없는 상태다.
식사 후 가볍게 정가장 내를 산책하러 나온 길이라서 그렇다.
지풍 등을 통해 경력을 발출할 수는 있으나, 그러면 기척을 무조건 들킬 수밖에 없다.
일단은 뱀이 그냥 기둥을 타고 지나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이에 나는 나무기둥에서 멀어지며 나뭇가지의 끝 쪽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그쯤 되니 가지가 매우 얇아진 상태라, 이게 부러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그 직후, 나는 눈을 부릅뜨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친 뱀 새끼가 내가 있는 가지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이런 개 씨ㅂ······!
순간적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이 가지에서 살포시 내려섰을 때 내가 숨을 수 있는 곳은 없다. 정가장주와 매우 가까워서 모습이 그냥 드러난다.
하면 방풍림 쪽으로 도주할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 가지를 박차면 이 가지는 무조건 부러진다. 즉, 인기척은 들킨다. 천섬무를 펼쳐서 도주해도 누군가가 숨어서 무공을 엿봤다는 사실 정도는 정가장주가 당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정가장에 외부인은 우리 일행밖에 없다.
평소에도 이런 일이 잦았을 리는 없으니, 결국 의심은 우리 일행 쪽으로 향할 것이다.
조금만 조사하면 이 시간에 산책을 나온 내가 용의자로 지목될 수밖에 없다.
그 경우 우리 일행들 사이에서의 내 신뢰는 수직 하락하게 된다. 무공 수련을 몰래 엿보다가 도망친 놈이 되니까.
결론은 하나다.
저 뱀 새끼가 근접한 순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야 한다.
은룡삭을 이용하려면 공력을 제법 주입해야 한다. 그러면 당연히 기척이 드러난다. 결국 맨손으로 죽여야 한다.
죽이는 건 문제가 되지 않으나, 나도 사람이다.
뱀은 당연히 징그럽다.
그걸 맨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비룡수투가 있다는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자.
뱀이 지척에 다다랐다.
가까운데서 보니 옘병, 그 와중에도 독사다.
독사가 약간 경계하는 듯 자세를 취하더니 이윽고 나를 향해 대가리를 쏘았다.
키익!
순간적으로 손을 은밀하고 빠르게 움직여 독사의 대가리 아래쪽을 꽉 쥐었다.
이 새끼가 내 팔뚝과 손목을 몸통으로 둘둘 감싼 채 꽉 조이며 발악을 했다.
건방진 새끼가 발악은.
내가 이 새끼야, 장우혜와 유은무가 인정한 쇳덩이 근육이라고.
독사의 모가지를 잡은 손아귀를 더욱 강하게 쥐어짜자, 놈의 몸통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놈의 생이 다했다.
독사의 모가지를 꽉 쥔 채로 팔을 털어 놈의 징그러운 몸뚱이를 떼어냈다.
여전히 징그러워서 닭살이 돋아 있긴 한데, 마음속으로는 모종의 성취감이 몰려왔다.
나름의 위기 상황을 무난하게 이겨낸 데 대한 성취감이었다.
헤헤. 허접 새끼.
어디서 한낱 미물 따위가 감히!
투툭!
그 순간 내가 밟고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아아! 나는 바보다.
절정고수를 상대할 때도 끝까지 방심하지 않던 나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면 지금도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데 그런 상황이 아니었기에, 독사 따위를 처치하고는 무사히 상황을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했던 거다.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신형을 빙글 회전시키며 바닥에 착지했다. 한 손에는 여전히 독사를 쥔 채다.
“누구냐!”
노인네의 외침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노인네가 경계 자세로 창을 꼬나 쥔 채, 나를 쏘아보고 있다.
노인의 눈에는 의아함도 섞여 있었다.
뱀 때문이겠지.
수상해 보이는데다가 이상해 보이기까지 하겠지?
내가 저 입장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아하하, 어르신······. 아하하.”
나는 뱀을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이 뱀, 먹을 수 있는 건가요?”
으이씨! 순간적으로 아무 말이나 둘러댄 건데 하필이면 왜 이딴 말이 튀어나온 거지?
더 수상해 보이고 더 이상해 보이겠지?
이걸 어쩐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