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72
고호웅을 따라 근처의 한산한 곳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보니 또 하나의 낯익은 얼굴이 나무 그늘 아래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안휘 태화무문의 이금정이었다.
나를 발견한 이금정이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조신한 자세로 목례를 취했다.
“오랜만에 봬요, 송유겸 공자님.”
“아, 오랜만이오, 이 소저.”
얼떨결에 대꾸하며 나도 목례를 해줬다.
고호웅 놈이 나를 왜 이금정이 있는 곳으로 이끈 거지?
이 상황은 대체 뭐냐?
이금정이 앉으라고 권하기에 긴 의자의 끝 부분에 앉았다. 곧 그녀도 나와 약간 거리를 두고 반대편 끝 부분에 앉았다.
고호웅은 앉지 않은 채 우리의 뒤쪽에 어색하게 서있었다.
“송 공자님에게는 어색할 수 있는 자리라는 걸 알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에 응해주신 점 감사드려요.”
“대화하는 거야 뭐······.”
이후에 이금정이 약간의 안부 등을 묻더니 본론을 말했다.
“제일서고에서 저희가 송 공자님과 좋지 않게 엮인 일이 있었잖아요. 그 일에 관련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고는 그때의 일밖에 없기도 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했다.
“사실 저는 성격이 소심해서 누군가에게 미움 받기 싫어하는 성향이 강해요. 우리 일행에게 미움 받고 싶지도 않았지만, 광동 분들이나 송 공자님에게도 미움 받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시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거였구요.”
본인이 소심한 탓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당시의 안휘 애들 중에서 정상적인 사람은 이금정뿐이었다.
일행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쪽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거다. 일행들과의 관계도 있으니 광동 애들이나 내 편을 들어주지도 못했던 거고.
용기를 내어 일행들을 자제시켰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각자의 처지라는 것도 있으니까.
“제일서고에서 돌아가는 길에 우리 네 사람의 분위기는 싸했어요. 특히 저를 향한 우리 일행의 시선은 냉랭했죠. 저는 일행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나서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비슷한 지역 출신이니 어떻게든 맞춰주며 관계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결국은 그 후로 서먹서먹해졌어요.”
그쪽 애들의 성향을 알고 있다 보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처음에는 제 성격에 대해 자책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됐어요. 제가 반성해야 할 건 우리 일행을 돕기 위해 나서지 못했던 소심함이 아니라, 애초에 우리 쪽이 잘못하고 있는데도 그걸 말리지 못했던 소심함이라고······.”
기특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며칠 후에 그분들에게 사과하면서 제 이런 뜻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렸어요. 위재흠 공자와 하후영 소저의 분위기는 싸늘하기만 했죠. 그때 나서준 게 고호웅 공자였어요.”
고개를 들어보니 고호웅이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다.
이금정이 말했다.
“저에 이어서 고 공자도 나머지 두 분에게 많은 얘기들을 했어요. 고 공자 또한 밉보이기 싫어서 맞춰주며 어울렸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본인도 모르게 자제력을 잃고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식의 얘기였죠. 그런 고 공자를 향한 반응 또한 좋지 않았어요. 결국 그날 이후 우리 네 사람은 더 이상 함께 다니지 않게 됐어요. 그 두 분 따로, 저와 고 공자 따로가 되었죠.”
“아하······.”
“고 공자는 본인이 잘못을 범했던 분들에게 사과하고 싶어 했어요. 앞으로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진심어린 사과부터가 시작이라면서요. 이미 여러 분들에게 사과했고, 제일서고에서 엮였던 광동 분들에게도 사과했어요. 다행히 그분들도 용서해주셨죠. 이제 남은 분이 송 공자님이세요.”
이제야 대강의 상황을 알 것 같다.
고호웅이 왜 아까의 비무 당시에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도.
고호웅이 나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정말 미안했소, 송 공자. 내 철없는 행동 때문에 여러모로 언짢으셨을 것이오. 당시에 괜한 고생도 하셨지요. 용서를 하고 말고는 송 공자의 몫이겠으나, 사과만큼은 꼭 제대로 하고 싶었소.”
“알겠소. 그 사과 받아들이겠으니 허리 펴시오.”
고호웅이 허리를 폈고, 나는 곧바로 궁금했던 걸 물었다.
“하면 아까 비무할 때도 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정면 공격만 하셨던 거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소. 아시다시피 내 체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라 초반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소. 그래서 시험 삼아 극초반에 최선을 다해서 공격해봤는데 송 공자가 어렵지 않게 대처하시더구려. 여유가 느껴졌소.”
고호웅이 바로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송 공자는 내 체력 상태를 생각하여 장기전으로 끌고 갈 생각 같더구려. 한데 초반의 최선을 다한 공격이 통하지 않았으니, 결과는 그때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래서 그냥 수련하듯 열심히 검만 휘둘렀던 거요. 과거에 내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 한두 대쯤은 시원하게 맞아드리려고 했는데, 그걸 또 안 때리시더구려. 하하.”
하아, 그랬던 거였냐?
“궁금한 게 있는데, 고 공자는 혹시 청심단이 필요해서 이 비무대회에 참가하셨소?”
마침 분위기가 이렇게 된 김에 꺼낸 말이다.
딱히 그가 필요 없다고 하면 비용을 지불하고 살 생각으로.
“그건 아니오. 눈치를 보아하니 이 비무대회에 참가하면 어찌어찌 순위권에는 들 수 있을 것 같았소. 오 년차이기도 하니 입상 경력 하나쯤은 만들어두고 싶은 생각이었다고 할까. 한데 그건 왜 물으시······.”
고호웅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금정이 끼어들었다.
“혹시 송 공자님은 청심단이 필요해서 참가하셨던 거예요?”
눈치가 빨라서 좋네.
“그랬소. 필요한 데가 좀 있어서 말이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고호웅이 곧바로 품속에 넣어뒀던 작은 목갑을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필요하시다면 이것도 가져가시오. 말씀드렸듯 나는 이게 필요해서 참가했던 것은 아니라서.”
“필요하긴 하나 이 귀한 것을 그냥 받기는 좀 그렇소. 적절히 가격을 책정해 드리겠소.”
“아시다시피 내가 돈이 궁한 입장은 아니잖소. 사과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주시오. 양생단이라면 우리 표국에도 많아서 딱히 청심단이 필요한 것도 아니오. 혹여 청심단 말고 다른 양생단도 필요하시다면 좋은 걸로 몇 개정도는 그냥 제가 구해다가······.”
“아니오, 아니오. 이것 정도면 되오. 고맙소.”
못 이긴 척 목갑을 받아들었다.
아싸!
잠시 후 고호웅이 자리를 정리하듯 말했다.
“사과했다고 갑자기 친한 척 하고 그러는 것도 좀 우습겠지요. 그래도 지나다니다가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건네도 되겠지요?”
“그럽시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해준 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보아하니 두 분 사이의 분위기가 좀 묘한 것 같은데······.”
아까부터 그런 기류를 읽었기에 한 말인데, 아니나 다를까 이금정의 볼이 붉어졌다. 고호웅도 민망하다는 듯 미소를 지은 채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다.
때때로 저런 과정들을 겪으며 눈이 맞는 경우가 있는데, 얘들이 그렇게 된 모양이다.
위재흠은 바보다.
겨우 그딴 자존심 때문에 이금정 같은 좋은 여인을 놓치다니.
아직 민망함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고호웅이 말했다.
“어쨌거나 오늘 사과 받아주셔서 고맙소.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송 공자.”
“감사해요, 송 공자님.”
“두 분의 인연도 행복하게 이어져 나갈 수 있기를 빌겠소.”
두 사람이 동시에 민망하다는 듯 미소를 보이더니, 이윽고 목례한 후 자리를 벗어났다.
보조를 맞추어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좋아 보인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여 내가 갑자기 고호웅을 신뢰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좋은 쪽으로 변화하려는 자세 자체는 높이 사주고 싶다.
나름 청심단을 선뜻 건네주기도 했으니, 이에 대한 고마움 정도는 따로 기억해 주자.
* * *
그날 밤.
취침 시간이 되어 나는 유등을 끄고 정좌했다.
내 앞에는 열 개의 목갑이 나란히 놓여 있다. 청심단이 들어있는 목갑들이다.
이제부터 회회심공과 청심단에 대한 실험을 해볼 작정이다. 취침 시간 전에는 혹여 지인들이 찾아올 수도 있으니 일부러 이 시간을 택한 것이다.
사부님의 말씀처럼 청심단과 회회심공이 특별한 상승작용을 일으킬지 기대된다.
청심단 하나를 복용한 후 곧바로 회회심공 운기를 시작했다.
회회심공을 통해 청심단 하나의 약기운을 완전히 흡수하기까지는 총 네 차례의 운기조식이 필요했다.
네 차례의 운기조식을 마친 나는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공력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청심단은 공력을 상승시켜주는 영약이 아니기에, 아무리 회회심공과 만나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해도 공력이 얼마나 상승할까 싶었다. 상승해도 미미한 수준일 것이라 생각하며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데 아무리 봐도 반 년 공력 정도는 상승한 것 같다.
‘이럴 수가······!’
내가 차지한 청심단은 총 열 개다.
즉, 그걸 다 복용하면 최소 오 년 공력은 얻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오 년 공력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결코 그렇지 않다.
개념상으로 일 년 공력이란, 강호의 평균적인 심법을 기준으로 무인이 일 년간 축기해야 늘어나는 공력이라는 뜻이다.
심법의 축기 효율에 따라 기간이 달라질 수 있고, 같은 심법이라도 성취에 따라 기간이 달라지긴 한다.
요즘의 어지간한 심법들은 효율이 좋기에, 일 년 공력이라 해도 웬만하면 일 년이 지나기 전에 모을 수 있다.
회회심공은 특유의 수련 방식으로 인해 빠르게 공력을 늘릴 수가 있다.
그런 회회심공으로도 오 년 공력을 모으려면 삼 년이 넘게 걸린다. 현재의 내 성취에서는 그렇다.
한데 그 기간 동안 꾸준히 모아야만 늘어나는 공력이 한 순간에 늘어나는 것이다.
이건 기대하지도 않았던 횡재다.
청심단 아홉 개를 차례로 복용하며 차분히 운기조식을 취했다.
모든 청심단을 복용하고 약기운을 완전히 흡수하기까지 총 두 시진(4시간) 남짓 걸렸다.
늘어난 공력은 총 오 년 남짓이다.
남들이 복용했을 때는 공력 상승의 효과가 없는 양생단인데, 나는 그걸로 적잖은 공력을 상승시켰다. 즉, 내게 있어 청심단은 양생단이 아니라 영약이며 영단인 셈이다.
왠지 공짜 이득을 취한 느낌이다.
이런 달콤한 꿀이 있나.
사부님 만세, 회회심공 만세다.
앞으로 청선곡과도 친하게 지내야겠다.
내가 청심단을 필요로 하는 걸 알고 장우혜는 세 개를, 유은무는 하나를 확보해줬다. 비록 청심단을 확보하지는 못했으나 송유하 또한 최선을 다해줬다.
그녀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다.
이쯤 되니 청심단 하나를 선뜻 건네준 고호웅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다.
그가 이런 사실을 알고 준 건 아니지만, 내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반 년 공력을 공짜로 받은 셈이니까.
연승휴의 동굴에서 백년음양선과를 복용한 후의 내 공력은 삼십구 년 공력 수준이었다.
백년음양선과의 뿌리를 복용한 후에는 사십이 년 공력 정도가 되었고, 이후의 회회심공 수련을 통해 사십삼 년 공력에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한데 청심단과 회회심공의 상승작용을 통해 오 년 남짓의 공력이 추가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사십팔 년 공력에 거의 근접한 상태다.
내공 경지상으로는 일류의 중후반이다.
절정이 언제부터인지는 심법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강호상의 흔한 분류법인 내공 경지로 따졌을 경우다.
일반적으로는 오십오 년 공력부터 절정의 초입으로 치며, 일 갑자 즉 육십 년 공력부터는 무조건 절정으로 본다.
나는 서무욱 시절에도 회회심공을 통해 절정에 올랐었다.
절정에 오르던 순간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공력이 오십육 년에서 오십칠 년으로 가던 중이었다.
시력, 청력, 감각, 인지력 등 모든 면에서 스스로 딱 알 수 있는 뚜렷한 변화가 갑작스럽게 찾아왔었다.
당시에는 첫 경험이라, 놀라서 얼른 사부님을 찾아가서 그 변화를 말씀드렸었다.
사부님은 대견스럽다는 듯 환한 미소를 보이시며, 절정에 진입한 걸 축하한다고 말해주셨다.
그 날 사부님과 함께 밤새도록 축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껴뒀던 귀한 술을 다 꺼내셨다.
지금도 회회심공을 익히고 있으니, 이번에도 최대 오십칠 년 공력이 모일 즈음에 절정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한다.
현재의 공력에서 따졌을 때 최대 구 년 공력만 더 모으면 절정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구 년 공력을 모으려면 회회심공의 현재 성취를 기준으로 육 년 남짓 걸릴 것이다.
송유겸은 지금 열아홉 살이다.
사 개월여면 스무 살이 된다.
즉, 앞으로 나는 회회심공만 꾸준히 수련해도 스물대여섯 살에 절정고수가 된다는 뜻이다. 추가적인 이로운 변수가 하나도 없다고 가정해도 그렇다.
세상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