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71
구경하고 싶은 비무가 있어서 다른 비무장으로 향했다.
십육강전은 시합이 총 여덟 번 펼쳐져야 하기에 각 비무장에서 두 차례씩으로 나뉘어 치러진다.
나는 우리 비무장의 첫 시합이었고 송유하는 다른 비무장의 두 번째 시합이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이윽고 송유하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송유하의 십육강전 상대는 경반의 남자 관도였다.
비무가 시작되자마자 상대가 초반부터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송유하가 한 단계 높은 기반이라는 걸 알고 초반부터 기세를 잡으려는 의도다.
처음부터 갑작스러운 맹공을 받고 있어서인지 송유하도 약간은 긴장한 모습이었다. 무덤덤한 그녀라 해도 이런 식의 비무대회는 처음이다. 긴장이 아예 안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송유하는 오래지 않아 안정을 찾아갔다.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대처하더니 금세 상대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각 남짓 된 시점에 비무를 마무리 지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인 것 치고 훌륭한 모습이라, 송유하가 매우 대견스러웠다.
내 팔강전 상대는 무반 관도였다.
그는 계반인 나를 상대하면서도 전혀 방심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태화지부에서의 일 때문에 내 암기술이 빼어나다는 식의 소문이 약간은 퍼진 모양인데, 그걸 들었나 싶다.
그게 아니면 내가 비록 계반이라도 팔강에 올라온 만큼 방심하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빨리 끝내고 싶은데 상대가 방심하지 않으니, 결국 내 예상보다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비무를 마칠 수 있었다.
나는 넘어져 있는 상대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준 후,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비무장을 벗어났다.
내가 비무를 빠르게 끝내고 싶었던 이유는 팔강전의 다른 비무를 구경하고 싶어서였다.
송유하의 팔강전 상대가 하필이면 정반의 고호웅이었다.
내가 제일서고의 임시 관리자 일을 할 때 얽혔던, 안휘 숙주표국의 그 고호웅이다.
그는 올해 스물두 살에 오 년차인데, 이번에도 승반을 못했는지 여전히 정반으로 되어 있었다.
객관적인 실력에서 앞서는 고호웅을 상대로 송유하가 어떻게 싸우는지 직접 관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도착해 보니 두 사람이 근접한 상태로 치열하게 공수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오호라?’
고호웅을 상대로 송유하는 잘 싸우고 있었다.
계속 보고 있자니 송유하 쪽이 약간씩 밀리는 느낌은 있다. 그러나 눈에 띠게 밀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호웅 쪽이 당황한 기색이다.
기반이면 정반보다 두 단계나 아래인데, 그런 송유하가 만만치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탓이다.
송유하는 여름 승반 심사 때 충분히 무반으로 승반할 수 있음에도 승반하지 않았었다.
대신 그 시간에 정가장에서 필사적으로 수련했었다. 가뜩이나 나한테서 엄격한 실전 훈련까지 받았다.
정반인 고호웅의 입장이라 해도 그런 송유하를 상대하는 게 결코 쉬울 리가 없다.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그간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며 저런 수준에까지 올라온 송유하가 매우 기특해서였다.
송유하와 고호웅의 비무는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우와! 저, 송 언니가 제대로 검술 펼치는 모습은 처음 봐요! 송 언니가 저 정도 수준이었어요?”
비무를 끝내고 온 장우혜의 말이었다. 놀람이 가득하다.
장우혜가 비무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저게 어딜 봐서 기반 실력이에요? 정반 관도와 거의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데······!”
이후에 합류한 유은무도 송유하가 싸우는 모습을 보며 놀람을 말로 쏟아냈다.
“움직임에도 망설임이 없고, 검로도 간결해요. 전체적으로 군더더기가 없어요. 우와! 우와! 송 언니의 실력이 저 정도였던 거구나!”
두 소녀의 반응을 보니 더더욱 뿌듯한 마음이 든다.
얘들아, 오늘은 적당히 놀라도록 해.
너희들은 미래에도 송유하 때문에 계속 놀라게 될 테니까.
송유하와 고호웅의 비무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장기전으로 이어졌다.
이쯤 되니 두 사람 모두 호흡이 상당히 거칠어진 상태다.
애초에 이 비무는 송유하가 이기기 어려운 비무였다.
고호웅은 저 실력에 오래 머물러 있었던 만큼 그 안에서의 노련함이 더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비무가 이렇듯 쉽게 끝나지 않는 이유는, 송유하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력 면에서도 결코 뒤처지지 않기에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은 모습이다.
고호웅의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일 것이다.
다음 시합도 있으니 체력을 조금이라도 아끼고 싶은 생각일 텐데, 송유하 때문에 이미 체력 소모가 적지 않은 상태가 된 탓이다.
결국 비무가 끝났는데, 그 즈음에는 고호웅과 송유하 모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우와! 송 언니! 정말 대단했어요!”
“깜짝 놀랐어요!”
결국 패배하고 돌아왔음에도 유은무와 장우혜는 송유하를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이후에 나도 빙그레 웃으며 칭찬을 보태줬다.
“정말 잘 했어, 누이. 대진운이 안 좋았을 뿐이야. 내가 만났던 상대를 누이가 만났더라면 누이도 사강에 들었을 거야.”
내 말에 송유하가 엷은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후회 없이 싸우며 많은 걸 배운 것 같아요. 제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게 됐어요. 앞으로 수련할 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좋은 경험이었어요.”
이 상황에서도 기특한 소릴 한다.
이로서 사강 대진이 완성되었다.
어쩌다 보니 결과적으로 사강에 진출한 이들이 정반 한 명과 계반 세 명이다.
아무리 관심도가 별로 없는 대회였다고 해도 이런 일은 지금껏 없었을 것이다.
첫 번째 대진은 유은무와 장우혜의 대결이고, 두 번째 대진은 나와 고호웅의 대결이다.
이제부터는 주 비무장에서만 한 시합씩 차례로 치러진다.
유은무와 장우혜의 사강전이 펼쳐졌다.
두 소녀는 무공 연원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적정선에서 열심히 겨루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관심도가 적은 대회라도 사강전이다. 지켜보는 이들이 있기에 그리 한 것이다.
두 사람의 대결은 장우혜의 승리로 끝났다.
[송유겸 공자, 오랜만이오.]
비무장의 건너편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들려온 고호웅의 전음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가 내 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있다.
한데 전음에서 느껴지는 어조도 그렇고 지금 보이는 표정도 그렇고, 내가 아는 그답지 않게 공손한 느낌이다.
[아, 오랜만이오. 고 공자.]
[이런데서 송 공자와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소. 실은 송 공자의 암기술이 빼어나다는 소문을 얼핏 들었소. 한데 대진표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임반, 경반, 무반의 관도들을 차례로 꺾고 사강까지 올라오셨더구려.]
놈답지 않게 공손할 때부터 왠지 느낌이 왔는데, 역시나 나에 관련된 소문을 어느 정도 들은 모양이다.
고호웅도 어쨌거나 잠룡관 오 년차에 상위반이다.
상위반 관도들은 정보에도 더 밝은 편이니 고호웅이 내 소문을 들었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고호웅의 전음이 다시금 들려왔다.
[원래부터 실력을 드러내지 않고 계셨던 것이오?]
[우리가 제일서고에서 만났을 당시에는 그저 그런 실력이었소. 이후에 열심히 배우며 피나게 노력하다보니 실력이 빠르게 는 것이오.]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마침 이전의 내 시합이 송유하 소저와의 시합이었소. 예상했던 것보다 송 소저의 실력이 매우 빼어나셔서 고생을 많이 했소.]
[아, 나도 마지막에 잠깐 봤소.]
[내가 체력이 좀 소진된 상태라서 송 공자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나 않을지 걱정이오. 그러나 방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소. 멋진 승부 펼쳐봅시다.]
이 자식은 원래 위재흠, 하후영 등과 함께 싸가지를 밥 말아먹은 종자였다. 그랬던 놈이 공손하게 저러고 있으니 도통 적응이 안 된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으나, 되지도 않는 수작질에 넘어가줄 내가 아니다.
비무가 시작되었음에도 우리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마주 서있기만 했다.
이번 비무에서 나는 실력을 최소한으로만 발휘하며 이기는 게 좋다. 놈이 내 실력을 알고 떠벌리고 다니면 그건 그것대로 귀찮아질 테니까.
긍정적인 점은 송유하가 고호웅의 체력을 많이 소진시켰다는 사실이고, 그 대결을 보며 내가 놈의 습관 등을 적지 않게 파악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굳이 먼저 공격하지 말고 놈의 공격을 적당히 막거나 피해주며 체력전으로 몰고 가는 게 현명할 것 같다.
문제는 고호웅 놈의 저 표정이다.
놈은 나를 마주한 상태에서도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비웃음은 아니다.
음흉한 미소도 아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악의가 깃든 미소는 아닌데, 그래서 더더욱 무슨 개수작인지 궁금할 뿐이다.
이윽고 고호웅이 바닥을 박찼다.
놈이 처음부터 매우 강력한 공세를 펼치고 있다.
체력전으로 가면 본인이 불리하다는 계산 하에, 아예 초중반에 승부를 볼 생각인 모양이다.
알아서 저래주면 나는 좋다.
나는 그의 공격을 피하거나, 양손에 쥔 비도 두 자루를 이용하여 검을 적당히 흘리며 대처했다.
내 경지에서 상대하기가 어려울 리 없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놈의 움직임이나 검에 담긴 위력을 보니 역시나 정반은 정반이라는 생각이 든다.
“헉! 헉! 허억!”
놈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맹렬한 공격을 계속 퍼붓고 있다.
한데 이상한 점은 공격을 시작한 이후로 놈이 지금껏 정직한 공격만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변칙적인 수법은커녕, 움직임을 속이거나 시선을 교란시키는 기본적인 실전 수법조차도 쓰지 않고 있다.
뭔가 노림수가 있을 것 같아서 나 또한 대처할 준비를 잔뜩 하고 있었는데, 아직까지도 노림수는 펼쳐지지 않았다.
사실 이 시점이면 노림수를 펼친다 해도 너무 늦었다.
지금의 고호웅은 움직임이 상당히 둔화된 상태인데, 저게 지금 나를 속이려고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다. 지쳐서 움직임이 느려진 것이다.
실제로 호흡이 매우 가빠졌을 뿐만 아니라, 온 몸에서도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다. 즉,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태다.
이 자식이 뭐하자는 거지?
놈은 지쳐도 너무 지쳐서, 이쯤 되니 굳이 틈을 노리려 하지 않아도 온통 빈틈투성이다.
부웅-
고호웅의 목검이 한 차례 내 상체 쪽으로 크게 휘둘러진 사이, 나는 자세를 낮추며 놈에게 파고들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혹시 모를 상황이 생기면 언제든 몸을 뺄 수 있게끔 마음의 준비를 한 채였다.
놈은 지쳐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말아 쥔 주먹을 놈의 복부를 향해 강하게 날렸다.
이놈은 제일서고에서 이 몸에게 건방지게 굴었던 죄가 있다.
그래, 질 때 지더라도 한 대 제대로 얻어맞기나 해라.
하지만 나는 마지막 순간, 주먹을 멈췄다.
주먹이 고호웅의 옆구리에 닿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지쳤어도 고호웅의 실력에 내 움직임을 아예 못 알아챘을 리 없다.
한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몸을 비트는 등의 회피 동작을 전혀 취하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의심이 들었다.
이 자식이 혹시 어딘가 아픈 상태라서, 나한테 얻어맞고 그걸 뒤집어씌우려는 건가 하는 의심이었다.
놈이 오늘 내 앞에서 보인 여러 모습들이 하도 괴이하니, 내 입장에서도 최대한 조심할 필요가 있다.
곧바로 몸을 뒤로 뺀 후,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요?”
“왜 멈추셨소. 시원하게 한 대 날리시지.”
이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내가 폭력을 좋아하긴 한다. 그래도 피할 의사가 없는 상대를 때리고 싶을 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
곧 고호웅이 심판 쪽을 향해 말했다.
“최선을 다해서 싸웠는데 너무 지쳐서 더 이상 못 싸우겠습니다. 기권하겠습니다.”
심판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 지켜본 만큼, 고호웅이 크게 지쳐있는 상태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삑, 삑, 삐익-
종료를 알리는 호각이 울리자 고호웅이 돌아서더니 비무장의 반대편을 향해 걸었다.
“이보시오, 고 공자! 이게 무슨······!”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말했으나, 고호웅은 그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비무장을 벗어날 뿐이었다.
뭐야? 저 자식이 왜 저러는 거냐고!
실력 대 실력으로 맞붙었어도 당연히 내가 이길 시합이긴 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기고 나니 뭔가 찝찝하다.
고호웅 녀석의 꿍꿍이를 알 수 없으니 더더욱 찝찝하다.
어찌됐든 다음은 장우혜와의 결승전이었다.
그 전의 휴식 시간에 장우혜와 더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우혜는 무공연원을 드러내지 않을 작정이니 차라리 권각술로 실컷 대결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소규모 비무대회에서 지인끼리 맞붙는 경우에는 이런 일이 종종 있다. 그래서 승낙해줬다.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서로를 마주보고 선 상태에서 장우혜의 전음이 들려왔다.
[송 오라버니가 적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마주서니까 느낌이 완전히 다르네요. 압박감의 차원이 달라요.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더 열심히 한 수 배울게요.]
그 직후부터 장우혜와 신나게 권각술 대결을 펼쳤다.
비무라는 말의 뜻은 무공을 견준다는 의미이다.
기본적으로는 누구의 경지가 더 높은지를 견줘보는 일이나, 승패를 떠나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파악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부족함을 파악해야 보완할 수 있고, 보완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비무에 임하는 장우혜의 목적 또한 그것이다.
이에 나는 장우혜가 바라는 대로 그녀의 여러 약점들을 공략해줬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천재인 저 장우혜라면 내 의도를 당연히 알아챌 것이다.
비무가 끝나자 역시나 장우혜가 내게 깊게 허리를 숙였다.
“송 오라버니가 비무 중에 제게 얼마나 많이 신경 써주셨는지 잘 알아요. 정말 감사했어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감사 표시였다.
평소에는 내게 장난도 많이 치는 장우혜와 유은무지만, 애들이 기본이 되어 있으니 내가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상은 청선곡의 지객당주라는 인물이 맡았다.
그는 결승전다운 훌륭한 비무였다며 나와 장우혜를 칭찬해줬다. 나와 장우혜가 어떤 마음으로 비무에 임했는지를 그 또한 알아본 것이다.
시상식이 끝나고 주 비무장을 벗어나려는데, 함께 시상식에 참여했던 고호웅이 말했다.
“송유겸 공자, 잠시만 따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소? 잠깐이면 되오.”
표정이 진지한데다가, 나 또한 아까 그가 비무 중에 왜 그랬었는지 의아하던 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