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72
경신술을 펼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드넓고 아름다운 서호와 마주할 수 있었다.
내게는 오랜만의 서호였다.
흑풍대 시절에 임무 때문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데 오랜만에 봐도 역시나 절경은 절경이었다.
포양호가 순박하고 진중한 느낌이라면 서호는 밝고 고운 느낌이다. 둘 다 나름의 매력이 있으나 수려한 풍광만을 놓고 비교하자면 역시나 서호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북부지맹 출신의 교관들과 관도들이 특히 좋아하며 감탄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그들의 생활권에서 이곳까지는 거리가 먼 만큼, 서호를 처음 접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여기저기에서 감탄사가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는 서호 변을 지나쳤다.
이후에도 꾸준히 달려 정오 무렵에는 임안읍에 도착했고, 그곳의 객잔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 다시 달려 신시 초(오후 3시) 무렵이 되었을 때쯤, 내 옆에서 달리던 단목강이 말했다.
“저 앞에 보이는 두 개의 산이 바로 천목산이오. 동천목산과 서천목산인데, 우리 세가는 서천목산의 산자락에 있소. 어쨌든 거의 다 온 셈이오.”
“아하.”
동천목산과 서천목산의 정상은 높이가 비슷한데, 각각의 산정에 하나씩의 못이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을 바라보는 한 쌍의 눈동자 같다고 해서 천목산(天目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들었다.
천목산은 운무 속의 봉우리, 기이한 바위, 커다란 나무, 깨끗한 물줄기 등이 어우러져서 매우 수려한 경관을 만들어 낸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멀리서 봐도 산세가 참 좋다.
기회가 되면 올라가 보고 싶은데 그럴 만한 시간이 될지는 모르겠다. 이번이 아니면 다음에라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계속해서 달리다 보니 서천목산의 산자락에 길게 펼쳐진 깔끔한 담장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딱 봐도 규모가 매우 커 보이는 장원의 담장인데, 그 안쪽의 곳곳에 우뚝 선 시설들과 건물들도 보이고 있다.
저곳이 바로 단목세가인 것이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네 명의 무인들이 재빨리 양옆으로 비켜서는 게 보인다. 선두에서 달려가고 있는 단목진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단목진이 정문 앞에 도달하자 정문 경비 무인들이 절도 있게 예를 취해 보였다.
단목진도 경비 무인들을 향해 짧게 묵례하며 답례하더니 우리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여러분을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이오. 단목세가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갈수광이 대표로 대꾸한 후, 모두가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단목진이 직접 우리를 객실 건물까지 안내해줬다.
이후에는 총관의 지시에 따라 하인들이 우리를 각자의 방으로 이끌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단목세가는 전체적으로 손님 맞을 준비를 철저하게 한 모습이었다.
동갑도에서 단목세가행이 결정된 후부터 검풍대의 무인들 서너 명이 즉시 섬을 떠나긴 했었다. 섬을 벗어난 그들이 세가로 전서를 날려 미리 손님 맞을 준비를 시켰던 모양이다.
방에 들어와서 보니 혼자 쓰기에는 충분히 넓은 방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푹신한 침구류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서둘러 씻고 와서 침구를 펴고 잠시 몸을 눕혔다.
기동타격조에 소집된 후로 지금껏 이렇듯 편안한 여건의 잠자리는 없었다. 가뜩이나 요 며칠간은 출렁이는 배 안에서 보내기도 했다.
그런 생활들을 하다가 오랜만에 이렇게나 편안한 이부자리에 눕자, 입에서 기분 좋은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히야아아!”
씻고 나온 상쾌한 기분에 포근한 이불의 감촉까지 느껴지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계속 이대로 누워 있으면 잠들 것 같아서 얼른 몸을 일으켰다. 지금 자면 밤에 못 잘 것이다.
근처나 슬슬 둘러볼 생각으로 밖으로 나와서 천천히 경내를 걸었다.
잠시 걷다 보니 저 멀리 내원으로 통하는 다리 위로 단목강의 뒷모습이 보였다.
단목강도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모습이다.
한데 그의 옆에 여인 한 명이 함께였다.
여인은 다리의 난간을 양손으로 잡고 있었는데, 내가 있는 방향에서는 단목강에 가려져서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옆으로 드러난 체형을 보니 한 가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임산부다.
배가 많이 부른 모습으로, 만삭에 가까운 것 같다.
단목세가에서 같이 지내는 친척쯤 되나 싶다.
오랜만의 재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려는데, 단목강이 갑자기 뒤로 몸을 돌리더니 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쪽으로 오라는 손짓인데, 매우 열심히 손짓하고 있다.
옆에 있는 여인에게 당장 나를 소개해주고 싶어 하는 느낌이다.
여인의 고개도 이미 내 쪽으로 향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쪽을 향해 서둘러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인의 용모도 확인할 수 있다.
임산부이기에 나름 젊은 축의 여인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내 예상보다는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으나, 겉으로 보이기에는 삼십 대 극후반으로 추측된다. 잘해야 마흔 정도?
임신으로 인해 얼굴과 몸이 불어 있는 상태이기는 하나, 원래의 미모는 매우 빼어났을 것 같은 미부인이다.
그즈음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설마 하는 생각이 들고 있어서다.
살이 붙어 있는 얼굴이긴 한데, 미부인의 이목구비를 보니 자연스럽게 단목지가 연상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단목강의 외모와도 상당히 닮아 있다.
가까워질수록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설마가 맞을 것 같다는 예감이 더 강하게 든다.
내가 두 사람의 앞에 가서 서자 단목강이 말했다.
“하하, 송 공자. 산보 중이었나 보구려.”
“예. 가장 먼저 씻고 밖으로 나왔더니 아무도 없기에, 천천히 세가 구경이나 하고 있을 생각이었습니다. 한데······.”
내가 말을 줄이며 미부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단목강이 바로 입을 열었다.
“하하, 하하······. 우리 어머니시오.”
소개를 하는 와중에도 살짝 민망해하는 웃음과 표정이다.
그리고 미부인의 정체는 역시나 내 예상대로다.
곧바로 미부인을 향해 포권하며 예를 취했다.
“가주 부인,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부지맹 잠룡관도인 송유겸이라 합니다.”
“어머나! 공자가 바로 그 송유겸 공자였군요. 정말 반가워요.”
‘바로 그 송유겸 공자’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사전에 나에 대해서 들은 게 상당히 많은 모양이다.
포권을 풀고 고개를 들자 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미부인의 얼굴이 보였다.
임신으로 살이 붙은 얼굴로도 이런 미모라니.
단목지의 미모가 괜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가주 부인이 말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꼭 한 번은 만나 보고 싶었죠. 송 공자가 빼어난 미남이라고 들어서.”
나를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가 내 외모 때문이었다는 듯 말하고 있다.
“아하하······. 과장된 소문입니다.”
겸손한 척하기 위해 그렇게 대꾸하자 가주 부인이 말했다.
“전혀 과장되지 않았는데요? 정말 대단한 미남이네요. 그냥 잘생긴 미남이 아니라, 매력적으로 잘생긴 미남이에요. 이십여 년 전에도 내 주변에 송 공자 같은 미남이 있었다면, 나는 결코 얘네 아버지를 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가주 부인은 단호한 표정이었다.
단목강이 본인의 모친을 제지하듯 말했다.
“어, 어머니······, 초면에 그런 농담을 하시면 송 공자가 얼마나 당황하겠어요.”
“아하하하······.”
이런 상황에서는 뭔 말을 해도 실례일 수 있기에, 나는 어색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그러자 가주 부인이 단목강에게 대꾸했다.
“호홋. 하긴, 초면에 당황스럽긴 하겠네. 그래도 내 말이 농담은 아니라는 거, 너는 알잖니?”
단목강의 미소가 점점 난감함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아하하. 하하······.”
나는 계속해서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가주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어쨌든 우리 아들딸과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자녀분들에게 신세 많이 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딸은 나름 성격적으로 재미있는 면이 있는데, 아들은 고리타분한 성격이라 친하게 지내기가 참 고역이었을 텐데.”
“컥! 어, 어머니······!”
“헙······! 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지는······.”
나와 단목강이 동시에 당황하여 그렇게 대꾸하자 가주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얘가 성격이 나를 닮았어야 좀 재미있고 시원시원했을 텐데, 대책 없이 아버지 쪽을 닮아서 그래요. 그러니 함께 지내기 지루하더라도 송 공자가 잘 데리고 어울려 주면······. 앗!”
가주 부인이 말을 하다 말고 본인의 불룩한 배를 바라보며 한 손으로 만졌다.
이후에도 잠시 배에 손을 댄 채로 가만히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가 이윽고 고개를 들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호홋. 이 아이가 발로 차네요.”
“아······!”
내가 대꾸하자 가주 부인이 이번에는 단목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와 지아를 뱄을 때보다 발길질이 더 센 느낌인데, 나중에 너희들보다 무공도 더 잘하려나?”
확실히 강호세가다 보니 이왕이면 아이의 무재가 뛰어나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단목강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 하하······. 그러면 좋겠지요.”
그러자 가주 부인이 다시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호홋. 내가 늦둥이를 뱄다는 걸 얘도 오늘 알았거든요. 그 후로는 저렇듯 계속 민망해하네요. 자랑스러워해야지! 부모가 아직 젊고 건강하다는 뜻이고, 여전히 금슬이 좋다는 뜻인데. 안 그래요, 송 공자?”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가주 부인도 마주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죠? 가뜩이나 요즈음 이름난 세가들은 다들 늦둥이 하나쯤은 낳으려는 추세거든요.”
“아, 그, 그렇습니까?”
내가 이름난 세가 출신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 이런 일에도 추세 같은 게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본다.
가주 부인이 말했다.
“남궁세가의 늦둥이가 너무 착하고 예쁘고 무공도 잘한다고 알려져서, 다들 한동안 늦둥이 갖겠다고 난리였거든요. 실패한 가문도 많은데 우리는 성공한 거죠.”
“아하.”
와아! 그놈의 천하제일세가는 하여간 별의별 유행을 다 만들어내는구나!
하긴, 그러니 천하제일세가인 거겠지. 다른 세가들이 별 이상한 부분들조차 다 따라 하고 싶어 한다는 거니까.
그런데요, 아주머니. 제가 그 집 늦둥이 딸내미를 좀 아는데, 예쁘고 무공도 잘한다는 건 인정해도 착하다는 건 선뜻 인정할 수가 없네요.
가주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바람도 적당히 쐤으니 슬슬 들어가야겠군요. 어쨌든 송 공자,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아, 저도 뵙게 되어 좋았습니다.”
“지금쯤 만찬이 한참 준비되고 있을 텐데, 잠시 후에 식사 때 봐요.”
“알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내가 묵례하며 대꾸하자 가주 부인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돌아섰다. 단목강이 곧바로 가주 부인의 옆으로 붙었다.
그러자 가주 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으니 송 공자에게 세가 구경이나 시켜주렴.”
“그래도 어머니······.”
“얘, 나 아직 젊어. 처음 임신한 것도 아니고 벌써 세 번째 임신이야. 게다가 지금껏 꾸준히 수련해온 무인이기도 하고. 그러니 어서 가 봐.”
결국 단목강이 수긍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가주 부인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는 중이지만, 기분이 좋아서인지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저 청년이 송유겸 공자였구나······!’
단목세가의 안주인인 교문혜의 얼굴에는 현재 만족감 가득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작년, 그러니까 일 년 남짓 전에, 겨울 방학을 맞아 세가로 돌아왔던 딸의 분위기는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딸과 어미 사이이기에 눈치챌 수 있었던 그 분위기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연정이었다.
딸이 그런 분위기를 풍긴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조심스럽게 이것저것 물으며 파악을 해봤었다.
그때 알게 된 이름이 바로 송유겸이라는 이름이었다.
「정말 매력적으로 잘생겼어요. 그래서 헤어지고 나면 금세 또 보고 싶어지곤 해요. 얼른 다음 날 새벽 수련 시간이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될 만큼.」
「현재의 반은 계반인데, 그것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사람이에요. 그는 분명히 범상치 않은 사람이에요. 눈빛부터 그래요. 저는 첫눈에 느낄 수 있었어요.」
당시에 딸의 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좀 아쉬웠었다.
너무 빼어난 미남이라는 점과 계반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물론 딸 앞에서는 그런 기분을 전혀 표현하지 않은 채, 응원한다고 말해주긴 했었다. 자식들의 정략혼인 따위는 애초에 고려하고 있지 않았으니, 결국 자식들이 좋다면 그 뜻을 존중해줄 마음이기도 했으니까.
그렇듯, 어쩔 수 없이 딸의 안목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웬걸, 송유겸은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을 차지해버렸다.
그 외에도 송유겸에 관해서 들려오는 정보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정보들이었다.
그러던 중에 방금, 직접 송유겸을 보게 된 것이다.
직접 마주하고 보니 정말 마음에 든다.
그리고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딸의 사내 보는 눈이 자신보다 낫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