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24
회회심공의 기운을 넓게 퍼트린 상태로 지붕 위를 천천히 오가며 우리 일행들의 전투를 살폈다.
이후의 전투 양상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적측에 절정고수가 한 명도 남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일행은 경비 무사들과 합심하여 남은 적들을 차분히 정리해가는 모습이었다.
그 과정에서 길초량, 단목강, 소충광, 우문직 등이 보인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일정 시점부터 네 사람은 각각 이곳저곳에 흩어진 채로 후배들의 전투를 엄호하기만 했다.
네 사람은 이런 식의 실전 경험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인 만큼, 후배들이 조금이라도 더 실전에 적응할 수 있게끔 알아서 도운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일각 남짓이 흘렀을 때쯤 전투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장원의 모든 인원들을 본채의 응접실로 모이게 했다.
적습으로 인해 도예주에 대한 치료도 늦어진 까닭에, 치료 담당인 단목지, 포연월, 청여홍은 열외였다.
한데 전투 과정에서 경비 무사들 쪽에서 소수의 중상자가 추가로 발생하여, 원래의 치료 담당인 세 여인만으로는 손이 부족해졌다.
결국 송유하, 장우혜, 유은무가 알아서 돕겠다며 나섰기에 그 세 명도 추가로 열외였다.
새로운 중상자들은 응급처치를 위해 일단 이 층 거실 근처의 방에 눕혀 놓은 상태이며, 단목지와 포연월이 도예주의 병실과 다른 중상자들의 병실을 교대로 오가며 치료하는 중이다.
모두 모인 상태에서 면밀히 확인해 봤는데, 예상대로 우리 일행들은 경상자들만 소수 존재할 뿐, 다들 무사한 모습이었다. 절정고수들을 잡기 위해 특별히 신경을 기울인 보람이 있다.
경비조장 이추관이 말했다.
“우리 쪽은 전사자 두 명에 중상자 세 명이오.”
그의 표정이 매우 무거웠다.
일행들의 표정도 무거워졌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길초량의 표정이 가장 무거웠다.
길초량이 감정을 추스르듯 눈을 한 차례 감았다가 뜨더니 이추관과 경비 무사들을 향해 공손히 포권했다.
“너무도 죄스러운 마음입니다. 애초에 제가 아까 이곳으로 피신을 오지 않았더라면······.”
이추관이 길초량에게 대꾸했다.
“길 공자가 어디, 일이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일부러 이곳으로 오셨겠소? 아니잖소. 그저 중상을 입은 그 소저 때문에 도움을 구하고자 다급히 친우들을 찾아온 것뿐이잖소. 이게 길 공자를 탓할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우리도 잘 알고 있소. 나쁜 놈들은 따로 있잖소.”
이추관이 바로 말을 이었다.
“물론 죽은 조원들을 생각하면 우리도 마음이 매우 무겁소. 그러나 애도하는 마음은 갖되, 우리끼리 너무 자책하지는 맙시다. 그 친구들도 우리가 그러지 않기를 바랄 것이오.”
길초량이 대답 대신 눈빛에 고마움을 담아서 다시 한번 공손하게 포권했다.
이추관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침대로라면 우리는 두 곳에 전서를 보내어 이 상황을 즉시 보고해야 하오. 한 곳은 연주상단 남창지점이며 다른 한 곳은 무림맹 남창지부요. 특히 무림맹 남창지부에서 조사하러 오기까지는 현장을 보존하며 대기하게 되어 있는데, 현재 무림맹 남창지부에도 큰일이 벌어진 상황이라고 하니 어찌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소.”
“지금 무림맹 남창지부로 전서를 날리면 이곳의 상황을 적들에게 보고하는 꼴이 될지도 모릅니다. 전서는 연주상단 남창지점으로만 날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 말에 경비 무사들 쪽도 잠룡관도들 쪽도 모두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추관이 말했다.
“하면 이제는 우리 남창지점에서 보냈다는 배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는 수밖에 없겠구려. 어차피 배가 오기 전까지는 대강의 응급 치료들도 끝날 테고.”
그를 향해 대꾸해줬다.
“우리가 방금 전의 흉악한 자들을 상대로 승리하기는 했으나, 아직 안전해졌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대비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적극적으로 대비해야 한다는 말씀은······.”
“이곳으로 배가 도착하기까지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이곳을 뜨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뜻입니다.”
그 말에 이추관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반 시진(1시간) 하고 일다경(20분) 정도만 기다리면 우리 남창지점에서 보냈다는 배가 이곳에 도착할 것이오. 그리 긴 시간도 아닌데 그냥 이곳에서 그 배를 기다리는 게 낫지 않겠소?”
설마 그 안에 또다시 적습이 있겠느냐는 투의 질문이었다.
다른 많은 경비 무사들의 표정도 비슷했다.
경비 무사들의 구성은 수준급의 일류고수는 소수이며 어중간한 실력의 무인들이 대다수다.
그런 이들이 전투 초반부터 치열하게 싸웠다 보니 제법 많은 인원들이 지쳐 있는 상태다. 그렇기에 어딘가로 움직이기보다는 쉬며 배를 기다리고 싶은 것이다.
경비 무사들을 향해 대꾸해줬다.
“웬만하면 저도 그리했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가 혈교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곳도 아니고 무림맹의 지부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힐 정도로 치밀하고 무시무시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선에서만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도예주를 제거하는 작전에 아까와 같은 전력을 보냈다면 확실하게 제거하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 와중에 작전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신속하게 후속 조치를 취하려 할 것이다. 그 가능성이 결코 적지 않다.
그렇다면 되도록 신속하게 이곳을 떠야 한다.
물론 적들도 추종술을 통해 추적을 해오겠지만 그렇다 해도 적측의 추격조와 최대한 늦게 마주치는 편이 낫다.
길초량이 말했다.
“제 생각도 송 형과 같습니다. 저 또한 아까 적들을 충분히 따돌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이 저를 금세 추적하여 방금 전과 같은 일이 발생한 겁니다. 쉽게 생각할 자들이 아닙니다.”
길초량까지 그렇게 말하자 경비 무사들도 금세 납득한 표정이 되었다. 지친 몸이라도 이끌고 움직이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이추관이 내게 말했다.
“혹여 계획이나 지시사항 등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오.”
“연주상단의 남창지점에 전서를 보낼 때, 이미 이곳으로 보낸 배 말고도 다른 두 장소로 쾌속선 두 척을 최대한 신속하게 보내달라고 요청해 주십시오. 한 곳은 산배촌 이가산 서쪽의 호변이고, 다른 한 곳은 파양현에서 북쪽으로 가면 나오는 죽림산 북부의 호변입니다. 물론 우리 인원들 모두가 승선할 수 있는 규모의 배여야 합니다.”
산배촌의 이가산은 이곳 장원에서 북쪽으로 계속 달리면 나오는 장소이며, 죽림산은 산배촌에서 북동쪽으로 달리면 나오는 장소다.
이추관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곳씩이나······?”
아무리 유비무환이라지만 준비도 이 정도면 너무 과한 준비가 아닌가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시점이 맞지 않으면 첫 지점으로 호출한 배가 도착하기 전에 그 인근에서 우리가 먼저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 경우에는 배를 기다리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계속 도주할 수밖에 없는 만큼, 이런 식의 이중 대비가 필요하다.
내 입장에서 최우선 사항은 일행들의 안전이다.
필요하다면 이보다 더한 준비라도 할 수 있다.
청여홍의 안위도 함께 걸려 있는 사안이기에 연주상단의 남창지점에서도 최대한의 조치를 취해줄 것이다.
“예.”
내가 짧고 단호하게 대꾸하자 이추관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리하리다.”
“우리에게는 중상자들이 있으니 가능하면 배에 의원도 동선(同船)시켜 달라고 요청해주십시오.”
“상단에 상주하며 상단 식구들을 돌봐주는 의원이 있소. 그를 동선시키라고 요청하겠소. 한데 두 척 모두에 의원을 태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려. 혹여 한 척에만 의원이 타고 있는데 우리가 타게 될 배가 그 배가 아닌 경우에는······.”
“무림맹 남창지부가 타격을 입은 마당에 현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동부지맹입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도 동부지맹이며, 육로보다는 수로가 더 안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방향으로 가려면 신강(信江)의 강줄기를 타야 합니다. 만약 의원이 탄 배가 우리를 싣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 강어귀에 가서 대기하고 있게끔 조치해 주십시오.”
내 말에 이추관이 대꾸했다.
“그러면 되겠구려. 알겠소.”
이후에 나는 관도들과 경비 무사들 전원에게 말했다.
“우리는 중상자들도 데리고 가야 하기에 적측에서 고수가 추격해 온다면 의외로 금방 따라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행장을 최대한 가볍게 하십시오. 여벌의 의복 등, 꼭 필요하지 않은 물품들은 한데 모아서 태우는 게 좋을 겁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을 향해 다시 말했다.
“또다시 전투를 치르게 될 수도 있으니 일류고수들은 운기조식을 취하고, 일류고수가 아닌 분들은 들것을 제작해 주십시오. 중상자들을 옮길 들것입니다. 중상자들에 대한 응급 치료가 끝나는 대로 출발하겠습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 모두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나는 곧바로 행장을 들고 아궁이에 가서 여벌의 의복 등을 모두 태워버렸고, 그 후에는 원래 내가 머물던 객실로 들어가서 운기조식을 취했다.
운기조식을 취하기 시작한 후로 한 식경 정도가 흘렀다.
운기 속도가 증가했기에 그 시간 안에도 적지 않은 공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즈음 밖에서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섯 차례 들렸다.
똑똑, 똑똑똑.
중상자들의 응급 치료가 완료되면 방문을 다섯 차례 두드려 신호를 달라고 했었다. 즉, 치료가 끝났다는 의미다.
진행하던 운기조식을 마저 마무리 짓고는 즉시 본채의 응접실로 향했다.
대부분의 인원들이 모여 있었다.
운기조식을 마무리하지 못한 네댓 명만이 아직 모이지 않은 상태였다.
단목지, 포연월, 청여홍이 보였기에 곧장 그녀들 쪽으로 다가갔다.
“고생들 많으셨소. 연월이도 고생 많았다.”
세 여인이 한 차례씩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곧바로 단목지에게 물었다.
“환자들의 상태는 어떻소?”
“시간이 촉박했던지라 상태가 더는 악화되지 않게끔 조치해둔 정도예요. 최대한 빨리 제대로 된 의원을 찾아서 치료를 받아야 해요. 물론 송 공자님이 의원을 대기시켰다는 얘기는 들었구요.”
이 층에서 치료를 받던 중상자들 네 명도 들것에 실린 채로 응접실의 한쪽에 눕혀져 있었다. 도예주를 포함한 네 명이다. 모두가 마취 침술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모습들이었다.
가만 보니 네 개의 들것들 중에서 도예주가 누워 있는 들것만 모양새가 약간 달랐다.
다른 들것들은 천의 양쪽에 작대기를 고정한 일반적인 형태의 들것이었는데, 도예주의 들것은 튼튼해 보이는 나무판에 이불을 깔고 그 위에 환자의 몸을 눕혀 끈으로 몸을 고정시켜 둔 형태였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단목지가 말했다.
“왕철양 공자가 들것 하나 정도는 혼자서 들고 이동할 수 있다며 이런 식으로 제작했다고 해요.”
마침 왕철양이 내 뒤쪽에 위치해 있었기에 녀석을 돌아봤다. 그러자 녀석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저, 저는 가진 게 힘뿐이라 혼자서 저 들것을 들고 달려도 신법을 펼치는 속도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여, 여기에 행장 몇 개쯤을 더 짊어져도······.”
그래도 신법 펼치는 속도에는 지장이 없다는 뜻이다.
하여튼 장사는 장사다.
참고로 신법이 느렸던 왕철양은 합숙 기간 내내 신법 수련에 특히 중점을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행들 중에서 가장 느리긴 하겠으나, 합숙 전에 비하면 속도 자체는 상당히 개선된 상태다.
지금은 본인이 전투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돕겠다는 마음일 것이다.
왕철양은 외모는 우락부락해도 실제로는 사려 깊고 개념도 충만한 녀석이다.
곧 모든 인원들이 집합했기에 우리는 즉시 장원을 벗어나 북쪽의 산배촌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아까 몰래 장원을 나서서 우연히 길초량과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구름이 제법 떠 있을망정 달과 별이 종종 보이던 밤하늘이었다.
한데 달빛과 별빛은 어느새 보이지 않고, 구름은 어느새 먹구름으로 변해 있었다. 왠지 잠시 소나기 정도만 쏟아내다가 지나갈 구름은 아닌 것 같다.
중상자들이 들것에 실려 있다 보니 전체적인 이동 속도는 아무래도 평소에 비해 다소 느릴 수밖에 없었다.
경비 무사들 쪽의 들것은 그쪽 여섯 명이 알아서 나눠 들고 있고, 도예주의 들것은 왕철양이 혼자 들고 이동하는 중이다.
대열의 선봉에는 단목강이, 중진에는 길초량이, 후미에는 내가 위치했다.
이동 중에도 나는 우리가 지나온 후방 쪽에 모든 신경을 기울였다.
이대로 무사히 이곳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상황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리고 만약 혈교 측에서 장원의 상황을 파악하고 추격자들을 보낸다면 아까처럼 어설픈 자들을 보낼 리 없다.
고수를 보낼 것이다.
나는 혈교 쪽의 고수들이 사파의 고수들에 비해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내가 과민할 정도로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목적지인 동부지맹에 모두를 이끌고 도착하는 순간까지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장원을 떠난 후로 약 반 시진 가까이 흘렀을 무렵 우리는 일차 접선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배촌 이가산의 서쪽에 있는 호변이다.
도착하자마자 호수 쪽을 살폈는데 연주상단의 남창지점에서 보냈다는 배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휴식도 취할 겸 일각 정도는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대열의 후미에 동떨어져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그 상태로 우리가 지나쳐온 후방의 대지 위로 기척을 낮게 깔아 멀리까지 퍼트렸다.
길초량이 내 근처로 다가왔다.
신룡대원답게 혹시 모를 혈교의 추격조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그의 경우에는 아까 당한 것도 있으니까.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를 리 없는 만큼, 길초량은 나를 방해하지 않은 채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반의반 각쯤 흘렀을까.
후방 멀리까지 퍼져 있는 내 감지 영역의 끝자락에 불순한 기운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