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43
이 학기가 시작되었다.
이세옥은 북부지맹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북부지맹 잠룡관에서 당분간은 그냥 이쪽에 머무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어디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보니 안전을 생각해서 굳이 무리하게 복귀시키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세옥은 통합 잠룡대전을 위해 본맹으로 가는 길에 동부지맹 측의 인원들과 같이 이동하기로 했다. 그랬다가 통합 잠룡대전이 끝난 후에 북부지맹의 인원들과 같이 복귀한다는 계획이다.
그 전까지 이세옥은 파견 교관 자격으로 동부지맹의 계반에서 교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덕분에 가장 신난 건 유은무와 장우혜다.
두 소녀는 장원에서 전투를 치르면서 암기술의 실전 효용성에 대해 절실히 느낀 바 있다.
그 일로 철비정술에 더 파고들 각오를 하고 있던 차에 전문 교관인 이세옥을 만나게 된 건데, 이번 조치로 인해 더 오래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백송학은 동부지맹에 머물고 있다.
우리 합숙 인원들이 무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백송학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동풍단의 조사를 통해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진 만큼 백송학은 동부지맹에서 크게 환영받고 있다.
동부지맹주 관필만이 백송학을 동협당의 특임 호법으로 임명했다고 들었다.
백송학의 공을 치하하는 의미이며, 빼어난 무공 실력을 인정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임 호법은 임시직이기는 하나 동협당의 일을 보좌할 권한을 갖고 있다.
거리가 멀지 않은 만큼 백송학은 잠룡관에도 종종 들러 포연월과 나를 만나고 돌아가곤 했다.
들어보니 동협당의 일을 거들며 즐겁게 지내고 있다는데, 특히 동협당의 부당주인 남궁찬이 잘해준다고 한다.
둘이서 술도 벌써 두 차례쯤 마시며 친분도 적잖이 쌓았다는 모양이다.
남궁찬 덕분에 동부지맹의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이것저것 배우는 것도 많다고 한다.
참고로 나이는 남궁찬 쪽이 네 살 많다.
길초량과 함께 도예주의 병문안도 한 차례 다녀왔다.
가보니 도예주는 동부지맹 안에 있는 독립된 공간에서 조용히 집중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아마도 사성운룡패를 제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세가 크게 호전된 모습이었다.
내공을 익힌 무인의 회복 속도는 일반인에 비해 빠르다.
말 그대로 내공이라는 힘 덕분이다.
거기에 운기조식까지 취하게 되면 회복력은 더 좋아진다.
참고로 대부분의 심법이 기본적인 치유력을 갖고 있다. 회회심공의 경우가 특별히 회복력이 매우 뛰어날 뿐이다.
가뜩이나 도예주는 고수일 뿐만 아니라 한창때의 나이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회복력이 좋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다행한 일이다.
다음에 시간을 내서 또 병문안을 오겠다고 했더니 도예주는 굳이 그럴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본인이 얼른 나은 후에 잠룡관으로 찾아오겠다며 회복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이었다.
혈교가 일으킨 사태로 인해 강호는 여전히 떠들썩한 상태다.
잠룡관도 그 분위기에 영향을 받고 있기는 하나, 잠룡관 생활 자체는 평소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내 생활도 평소와 비슷했다.
새벽에는 일어나서 한동안 운기조식을 취했고, 동틀 무렵이 되면 송유하와 함께 구보를 했다.
간단히 씻은 후에 아침 식사까지 마친 후, 통상 사시 초(오전 9시) 전까지는 고천비룡결과 풍우비룡무의 수정 작업을 했다.
워낙 새벽부터 깨어 있기에 아침 시간도 길다.
이후의 오전 일과 시간에는 계반삼조의 아이들을 지도했다.
조원들은 합숙 이전에도 수련에 열심이었지만 합숙 후에는 더 열심이다.
실전을 겪었기에 다들 느낀 바가 많을 수밖에 없고, 마음 자세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들어보니 조원들은 합숙도 합숙이지만 뒤풀이 자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당시에 단목강, 소충광, 우문직이 했던 이야기들 때문이다.
선배들이 그때 보였던 여러 각오와 분위기 등이 애들에게는 많은 자극이 된 모양이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내가 이번 학기를 끝으로 졸업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잠룡관에서 내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이 반 학기밖에 남지 않은 만큼, 그 기간 안에 최대한 많은 것들을 배우겠다는 각오일 것이다.
조원들 중에서는 특히 명호운, 심산화, 왕철양의 무공 성취가 쑥쑥 상승하고 있다.
세 사람은 합숙 기간에 ‘쾌류’ 무공들의 형태에 충분히 익숙해졌었다. 그로 인해 성장세가 서서히 빨라질 시기이기는 했는데, 그 상태에서 마침 실전까지 겪은 것이다.
덕분에 이제는 본인들이 겪었던 실전 상황들을 떠올리며 수련할 수가 있다.
이전까지는 막연하게 초식 수련을 반복할 뿐이었다면, 이제는 초식의 실전 적용과 응용에 대해 생각해 가며 수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성장세도 더 빠를 수밖에 없다.
내가 창안한 무공을 익히며 성장하는 조원들을 보고 있자니 상상했던 것 이상의 흐뭇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전생에 사부님도 천섬무와 회회심공을 익히는 나를 보며 이런 기분을 느끼셨을까 싶다.
점심 식사 후에는 실내 연무장에서 장우혜의 수련을 도왔다.
뒤풀이 날 밤에 그녀가 했던 부탁 때문이다.
수련은 비무 형식의 수련이었다.
장우혜가 원하는 건 두 가지였다.
첫째, 약간 다쳐도 좋으니 실전을 방불케 하는 수련일 것.
둘째, 속도 위주일 것.
어차피 장우혜는 천하제일세가의 탄탄한 무공을 기본으로 깔고 있는 애다.
그런 만큼, 속도만 쫓아갈 수 있으면 웬만한 상황에는 대처할 수 있다는 판단인 듯했다.
충분히 납득이 되는 판단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는 다쳐도 상관없다고 했으니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다소 거칠게 다뤄줬다.
덕분에 우리가 펼치는 비무의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절친한 친구인 장우혜가 통합 잠룡대전을 목표로 하고 있는 만큼, 유은무는 우리의 수련을 방해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다만 실내 연무장의 구석에 앉아서 우리의 비무를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우리 둘의 비무를 집중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본인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
현명한 생각이기도 하다.
유은무는 수련을 지켜보다가도 우리가 중간에 휴식을 취할 때면 항상 빠르게 다가와서 물을 챙겨주곤 했다.
장우혜와의 수련은 미시 초(오후 1시) 무렵부터 신시 정(오후 4시) 무렵까지 이어졌다. 오후 일과 시간의 대부분이다.
장우혜와의 수련이 끝나면 신시 정(오후 4시)부터 유시 초(오후 5시)까지의 반 시진 동안은 소충광, 우문직과 이 대 일의 비무를 했다. 장원에서 합숙할 때부터 해왔던 형태의 비무다.
소충광과 우문직의 경우에는 단목강, 길초량의 수련을 차례로 마친 후에 나한테 오는 것이다.
장우혜도 장우혜지만 소충광과 우문직의 각오 또한 대단하다.
잠룡관의 일과 시간이 끝나는 유시 초(오후 5시)부터는 송유하와 청여홍을 지도했다.
하루는 송유하를 지도하고 하루는 청여홍을 지도하는 식이었다.
청여홍도 쾌류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초창기라, 꾸준히 지도해 줄 필요가 있다.
청여홍도 수련에 항상 열심이다.
명색이 상인인데 돈 욕심보다 무공 욕심이 더 많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될 정도다.
들어보니 무공의 성취가 상승할 때마다 본인이 느끼는 성취감과 만족감이 매우 크다고 한다. 그때의 기분이 너무 좋단다.
게다가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친우들과의 연결 고리가 무공인지라, 차후에 본격적으로 상단의 일을 하게 되더라도 무공 수련만큼은 꾸준히 할 계획이라고 한다.
돈도 많은 것이 굳이 힘들게 산다.
그래서 더 기특하고 믿음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주된 일과를 마친 후에는 송유하와 함께 저녁 구보를 한 후, 씻고 나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는 운기조식을 취하다가 잠들었다.
이렇듯 나는 매일 매우 바쁘게 사는 중이다.
너무 빡빡한 하루하루이기는 한데, 어차피 동부지맹 잠룡대전 전까지만 고생하면 된다.
끽해야 한 달가량의 고생에 불과한 만큼, 묵묵히 감내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 * *
어느덧 팔월 보름이다.
중추절이다.
일반인들에게는 큰 명절이나, 잠룡관에서 생활하는 관도들에게는 평범한 휴무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식사가 중추절 기념 특식으로 구성되는 정도인데, 그게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전부라 할 수 있다.
원래는 외출이 가능한 기간이지만 이번에는 강호가 뒤숭숭한 마당이라 외출마저도 전면 금지되었다.
명절 기분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잠룡관도들은 다들 들뜰 수밖에 없다.
잠룡관의 축제인 각 지맹의 잠룡대전이 통상 팔월 열이레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잠룡관의 중추절 연휴는 총 사흘간으로 열엿새까지다. 즉, 연휴가 끝난 다음 날부터 곧장 축제가 시작되는 셈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오늘이 중추절 당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소충광, 우문직, 장우혜의 수련을 차례로 도와야 했다.
당장 모레부터가 동부지맹 잠룡대전이다.
통합 잠룡대전의 동부 예선도 그때부터 시작이다.
출전권이 걸려 있는 만큼 내일부터 세 사람은 대회에 맞춰 몸 상태를 관리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은 막바지 점검을 겸하여 집중 수련을 해줬던 것이다.
내일부터는 세 사람과의 수련 시간들이 빌 테니 나도 시간적으로 많이 여유로워질 것이다.
수련을 모두 마무리하고 거처로 향했다.
오후 늦은 시각이다.
거처의 문밖에서 사립문을 열었는데, 열자마자 마루에 앉아 있는 제갈수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다.
개학 초기에는 제갈수광의 무공 창안 건으로 종종 만났었는데 근래에는 이 주 넘게 못 봤었다.
장난을 치려는 마음으로 사립문을 다시 닫았다.
그러자마자 제갈수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 저! 으휴, 저 웬수. 은혜도 모르고.”
이에 나는 곧장 사립문을 다시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우와!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이 정도를 갖고 은혜도 모른다는 말씀까지 하시다니요.”
제갈수광은 피식 웃어 보일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를 향해 다시 말했다.
“이 시기만큼은 교관님 뵙는 걸 피하고 싶은 마음이 저도 모르게 발출된 것뿐입니다. 그걸 갖고 은혜 운운까지 하시깁니까.”
진심이기도 하다.
내내 안 보이다가 이 시기에 불쑥 찾아왔으니 통합 잠룡대전에 연관된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높다.
나는 이번 통합 잠룡대전은 절대로 나가지 않을 생각이라, 오늘만큼은 그의 방문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
제갈수광이 대꾸했다.
“할 만한 소리니까 하지, 인마.”
곧바로 그에게 말했다.
“송구한 말씀이오나 이번에는 절대 안 갈 겁니다. 혹시 모를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 소규모 비무대회에조차 참가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보니까 작년 우승자는 무조건 출전해야 한다는 식의 규정 같은 것도 없더군요. 다 확인했습니다. 심지어는 호위대에도 끼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통합 잠룡대전 얘기다.
제갈수광이 무슨 말을 꺼낼지 모르니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호위대에 끼지 않겠다는 말도 진심이다.
혈교의 위험성이 예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합 잠룡대전을 강행하기로 결정했다면, 관련된 호위 문제도 무림맹 차원에서 알아서 철저하게 준비했어야 한다.
막바지에 나 같은 관도를 끼워 넣어 꾸역꾸역 전력을 채워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그 또한 잘못된 것이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제갈수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짜식이 넘겨짚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