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49
천섬무를 상 단계로 계속 유지하자 공력은 역시나 상당히 빠른 속도로 증발되었다.
내가 실전 중에 천섬무의 속도를 수시로 조절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속도와 공력 사이의 효율을 최대한으로 추구하기 위함인 것이다. 참고로 나도 마음 같아서는 계속 상 단계, 최상 단계로만 싸우고 싶다.
제갈수광은 조금씩 상 단계의 속도에 적응해가는 모습이었다.
적응한다는 게 내 속도에 발맞추어 그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상대인 내가 빠르다고 해서 갑자기 그의 속도도 빨라질 수는 없다.
내 속도에 대처하는 역량이 조금씩 상승하고 있다는 의미다.
현재 제갈수광은 본인의 움직임을 최대한 간결하게 변화시키려 노력 중이다. 반응 속도를 끌어 올리기 위해서다. 그 노력이 조금씩이나마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 한 번의 수련으로 완벽하게 이 속도에 적응할 수는 없다.
이런 식의 수련이 몇 차례는 더 지속되어야 그나마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될 것이다.
나는 나대로 신나게 비룡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나는 무도를 닦기 위해 검술을 익히는 게 아니라 실전을 위해 검술을 익히는 사람이다.
그런 만큼 혼자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누군가가 내 검을 받아줄 때 수련의 효율도 올라간다.
제갈수광은 쌍검술의 경지가 매우 높아서, 내가 마음껏 검을 휘둘러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다. 당연히 내 검술 성취 상승에도 더 도움이 될 수밖에 없다.
근 몇 개월간 항상 남의 수련만 봐줬었는데, 이렇듯 마음껏 내 수련을 하게 되니 참으로 개운했다.
공력이 거의 소모되어 뒤쪽으로 거리를 벌리자 제갈수광도 알아서 뒤로 물러났다.
지난밤에 공력이 상승한 덕에 상 단계의 지속 시간도 어느 정도 늘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는 짧은 시간이다.
길지 않은 비무이긴 했으나 매우 격렬했다.
우리는 한동안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호흡을 어느 정도 정리한 제갈수광이 말했다.
“와아······ 정말이지 순간순간 등줄기가 서늘하더군. 네가 빠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이런 기분인데,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당했던 자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질려버렸다는 듯 고개를 두어 차례 가로저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만 삐끗해도 당한다는 정신적 압박감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야.”
저런 말들을 늘어놓는 걸 보니 그도 이 수련이 매우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저야말로 무슨 벽에다 대고 칼질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대꾸하자 제갈수광이 물었다.
“어때? 도움은 좀 되는 것 같나?”
“이렇게 마음껏 검을 휘둘러 본 게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교관님께서 왜 진작 이런 제안을 안 하셨는지가 의아할 뿐입니다.”
내 대답을 들은 제갈수광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하긴, 네가 이렇게까지 검만 휘두르는 모습을 보는 건 나로서도 처음이었다. 너는 실전에서 대부분 암기술 위주로 싸우고, 간혹 검을 쓸 때도 그냥 쾌검술 정도로만 인식되거든. 너 자체가 너무 빠르게 움직이다 보니 그렇게 보이는 거다. 한데 검술 실력마저 이 정도일 줄이야. 하!”
어이가 없다는 투로 그렇게 말한 제갈수광이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봐, 송유겸. 접신이라도 한 건가? 너한테 무신(武神)의 신령이라도 내린 거야?”
대답을 바라고 묻는 질문이 아니다.
저 사람 나름의 농담인 것이다.
“아하하······.”
“천재도 너 정도 천재는 너무 과하잖나. 그래서 묻는 거다.”
내 혼이 송유겸의 몸에 깃든 걸 보면 접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신의 은총을 받았다는 생각 정도는 종종 든다.
물론 무신의 은총이 아니라 아수라신의 은총이겠지만.
그리고 마침 천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볼 때 진짜 천재는 제갈수광이다.
이렇게 다방면에 특출한 사람이 강호에 또 있을까?
천마신교에서도 이런 경우는 못 봤다.
추가로 궁술 재능 쪽은 하늘이 너무 과하게 만져준 느낌마저 있다.
“어쨌든 수고 많았다.”
“교관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실 처음 계획할 때는 수련 시간이 이보다는 더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수련을 일주일에 두 번으로 제안했던 건데, 오늘 보니 이런 식이면 시간은 한 식경(30분)이면 족하겠군.”
내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너만 좋다면 일주일에 세 번으로 늘리면 어떨까 싶은데. 수련 시간을 네 저녁 구보 시간 전으로 맞추면 너한테도 크게 부담은 안 될 것 같고.”
“저는 좋습니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 데다가 내 성취에도 큰 도움이 된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 * *
동부지맹 잠룡대전의 일정이 하루하루 차곡차곡 진행되는 가운데, 나는 여유로운 일상을 만끽할 수 있었다.
여유로운 일상이라고 해도 빈둥빈둥 노는 건 아니었다.
고천비룡결과 풍우비룡무의 수정 보완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여유로운 일상이다.
참고로 고천비룡무와 풍우비룡무의 수정 작업을 하는 건 단순히 송유하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수준급의 무공인 만큼 높은 수준의 무학 지식과 이론을 총동원하여 검토하고 정리해야 한다.
그러니 당연히 고난이도일 수밖에 없고, 그런 만큼 내 깨달음 상승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런 작업들을 해봐야 나중에 회회심공과 천섬무도 수정하고 보완하여 발전시킬 수 있다.
그게 바로 사부님이 원하시는 바다.
어느덧 동부지맹 잠룡대전의 칠 일차다.
제갈수광과의 수련 삼 회차를 마친 후 송유하와 함께 저녁 구보를 시작했다.
천천히 뛰기 시작했을 무렵, 송유하가 여느 때와 같이 오늘의 대회 소식을 알려줬다.
“지역 예선 십육강전의 여덟 경기는 흥미진진한 대결들이 많았어요. 역시 십육강전다웠어요. 재미있었어요.”
“오호.”
참고로 소충광, 우문직, 장우혜, 단목홍신은 모두 삼십이강을 통과하여 십육강에 진출한 상태였다.
작년 통합 잠룡대전의 진출자들이 삼십이강까지는 끼지 않는 구조다 보니, 역시나 실력 있는 도전자들이 대진운의 영향을 덜 받은 것이다.
“단목강 공자님과 우문직 공자님의 대결은 역시나 단목강 공자님의 승리로 끝났어요.”
이거야 누구나 예상했던 바다.
이 시점에 궁금해지는 건 따로 있다.
“우문 공자의 패자전 상대는 어때 보여? 강해 보여?”
“지켜본 길 공자님의 얘기로는 우문 공자님 쪽이 더 우세해 보인대요.”
길초량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실제로 우문직이 이길 가능성이 더 높다.
놈은 신룡대라 원래 눈썰미가 좋았다.
그 상태에서 절정에 오르기까지 했으니 눈썰미도 더더욱 믿을 만하다.
“십육강 네 번째 시합에서는 우혜가 팔강에 올라갔어요. 우혜, 아까 정말 멋있었어요.”
“오오오!”
역시 장우혜다.
“우혜가 이긴 순간에 관중들의 함성이 대단했어요. 우혜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아요. 이제 겨우 이 년 차에, 여관도에, 계반이기까지 해서······.”
하긴 그렇게 생각해 보니 관중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는 다 갖추고 있긴 하다.
“응원은 했어도 십육강이었던 만큼 다들 우혜가 이길 가능성은 낮다고 예측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랬는데 우혜가 이겨버렸으니······.”
장우혜에 대해 모르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재미있는 시합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장우혜가 십육강 네 번째 시합의 승자인 만큼, 다음에는 세 번째 시합의 승자와 붙게 될 것이다.
“십육강의 세 번째 시합이 주경명 공자의 시합이었지?”
“네. 그리고 주경명 공자가 이겼어요.”
그러면 장우혜는 팔강에서 주경명과 붙게 된다.
거기에서 이기면 진출권을 바로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솔직히 장우혜가 주경명을 꺾을 가능성은 낮다.
장우혜의 재능과 역량에 대해 누구보다 높이 사고 있는 게 나라고 자부하지만, 그럼에도 현실은 현실인 것이다.
팔강에서 진다고 해도 기회가 한 번 더 있으니 그 기회를 잘 잡기를 바랄 뿐이다.
“십육강의 다섯 번째 시합은 관중들의 관심도가 정말 높았어요. 대결도 치열했구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옥연과 소충광의 시합이었기 때문이다.
박빙일 수밖에 없는 대결인데 나는 그래도 소충광 쪽이 약간 더 우세할 것이라 예측하긴 했었다.
“결국 소충광 공자님이 이기셨어요.”
“오오!”
역시 소충광이다.
사옥연도 보통내기가 아닌데, 그런 그녀를 꺾은 것이다.
“소 공자의 팔강 상대는?”
“길 공자님의 예상으로는 소 공자님이 충분히 이길 것 같대요.”
“오오오.”
아직 결정된 건 아닌 만큼 설레발은 금물이겠으나, 역시나 그 또한 길초량의 예측이 맞아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소충광은 일찌감치 통합 잠룡대전의 진출권을 따내게 된다.
“마지막 여덟 번째 시합에서는 단목홍신 공자가 이겼어요.”
“이야······!”
“경기 전에는 박빙일 거라고 예측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의외로 단목홍신 공자가 여유롭게 이겨서 많이들 놀란 눈치였어요.”
지난 한 달간 단목강과 단목지가 단목홍신의 수련을 헌신적으로 도왔다고 한다. 근래 새벽 구보 중에 들은 내용이다.
혈연관계의 두 명이 그런 식으로 도왔으니 단목홍신이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가뜩이나 단목강은 절정고수인 만큼 단목홍신에게도 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전의 일곱 번째 시합이 아마 강하령 소저의 시합이었지?”
“네. 물론 강하령 소저가 올라갔구요.”
그러면 단목홍신의 팔강전 상대는 강하령이다.
기동타격조의 일원이기도 했던 강하령은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강자다.
강하령은 나와 길초량, 단목강을 제외하면 현재 이 잠룡관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관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만큼 단목홍신이 강하령을 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도 이후의 시합들을 잘만 준비한다면, 사촌 형제간 두 명이 동시에 통합 잠룡대전에 출전하는 희귀한 그림도 만들어질 수가 있다.
기대해볼 일이다.
* * *
다음 날 점심 무렵.
식사를 마친 후 서탁 앞에 다시 앉았는데 밖에서 사립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송 형, 계시오?”
길초량의 목소리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루로 나가 보니 길초량과 우문직의 모습이 보였다.
금세 다가온 길초량이 마루에 앉으며 내게 물었다.
“오전에 끝난 팔강전 결과는 들으셨소?”
“아니, 못 들었소. 그래도 뭐, 네 시합 모두 결과는 빤했잖소.”
내가 대꾸하자 길초량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송 형이 어떻게 예측했는지나 한번 들어봅시다.”
“첫 시합에서는 당연히 조장님이 이겼을 것이고, 두 번째 시합에서는 주경명 공자가 장 매를 이겼을 것이고, 세 번째 시합에서는 소충광 공자가 이겼을 것이고, 네 번째 시합에서는 강하령 소저가 단목홍신 공자를 이겼겠지요. 이 정도는 솔직히 예측이라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잖소.”
말을 마치고 확인하듯 길초량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맞소.”
이러면 단목강, 주경명, 소충광, 강하령의 네 사람은 통합 잠룡대전 진출 확정이다.
“일단 소충광 공자는 됐고······.”
내가 그렇게 말하며 우문직을 바라보자 우문직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물었다.
“일정상 오후에 바로 십육강 패자전 시작이지요? 우문 공자는 준비 잘 하셨소?”
우문직이 대꾸했다.
“하하. 주, 준비야 뭐······.”
이쯤에서 나는 눈매를 좁히지 않을 수 없었다.
우문직은 기본적으로 자신감 넘치는 성격은 아니다.
오히려 여리고 세심한 편에 속한다.
한데 아무리 성격이 그렇다 해도 지금의 모습은 많이 주눅이 들어 있는 느낌이다.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는 느낌도 있다.
처음부터 저런 기색이기도 했다.
뭐 하는 거야? 떨어지면 완전히 탈락하는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저런 모습이라니.
각오를 보여도 모자랄 판에.
우문직에게 물었다.
“우문 공자, 뭔가 문제라도 있소?”
질문은 우문직에게 했는데 대꾸는 길초량한테서 나왔다.
“아, 송 형,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찾아온 것이오.”
“뭔데 그러시오?”
“패자전에서 우문 공자와 붙게 될 상대는 기정산 공자라고, 육 년 차의 갑반 관도요.”
낯익은 이름이다.
제일서고에서 임시 관리자로 근무할 당시에 관도 명부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복건의 대운문 출신이었던가?
그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데 길초량이 말했다.
“그는 현재 복건 대운문의 소문주이기도 하오.”
역시 내 기억이 맞았다.
길초량이 말을 이었다.
“우문세가와 대운문은 같은 복건에 있는 만큼 자주 교류해 왔다고 하오. 참고로 우문세가가 있는 복주와 대운문이 위치한 대운산은 그리 멀지 않기도 하오. 덕분에 우문 공자와 그쪽의 기 공자는 어려서부터 아는 사이라는구려.”
“지금 우문 공자의 안색으로 추측해 보자면 둘 사이에 무슨 악연이라도 있었던 모양이구려? 우문 공자 쪽에 안 좋은?”
길초량에게 물었는데 대답은 우문직에게서 나왔다.
“아니오, 송 공자. 기 공자와 악연 같은 건 없소. 기 공자도 좋은 사람이오. 다만······.”
“다만?”
내가 되묻자 이번에는 길초량이 대꾸했다.
“한쪽은 어려서부터 대운문의 기대주. 다른 한쪽은 우문세가의 소가주. 게다가 비슷한 연령대. 그렇다 보니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줄곧 비교 대상이었다고 하오. 교류 비무에서도 계속 두 사람이 대전 상대였던 것이고.”
“아하.”
이제야 대강 이해가 되었다.
곧바로 우문직에게 물었다.
“많이 졌소?”
“그게······,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소.”
한 번도 못 이겨봤다면 저런 상태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다는 패배감이 의식과 무의식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우문직 특유의 소심한 성격이라면 더더욱 저런 상태에 빠지기가 쉽다.
우문직에게 다시 물었다.
“마지막으로 진 게 언제였소?”
“잠룡관에 입관하기 이 년 전이었소.”
그 정도면 아주 어린 시절도 아니다.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도 진 셈이니 우문직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정신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울 수 있다.
길초량이 말했다.
“아니, 내가 어제 기정산 공자의 시합도 봤단 말이오. 봤는데, 아무리 따져 봐도 지금은 우문 공자가 실력이 더 좋소. 친분 관계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우문 공자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더란 말이오.”
어제 송유하한테서도 길초량의 저 예측을 들었었다.
“그 얘기까지 해줬는데도 계속 저 상태지 뭐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송 형에게 데려온 것이오. 송 형이 어떻게든 투지를 좀 끌어 올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래도 송 형은 우리 친우들의 중심이니, 송 형의 말이라면 먹힐 수도 있는 거니까.”
길초량의 어조에는 답답함이 섞여 있었다.
그런 길초량을 바라보는 우문직의 표정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투지라······.”
나는 그 말과 함께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문 공자.”
생각을 정리한 내가 입을 열자마자 우문직이 대꾸했다.
“마, 말씀하시오, 송 공자.”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기대감이 담겨 있다.
이에 나는 편안한 미소를 보이며 우문직에게 말했다.
“통합 잠룡대전 좀 못 나가면 어떻소? 그런 거로 너무 부담 갖고 그러지 맙시다. 그냥 마음 편하게 가지시오.”
“오! 역시 송 형. 마음의 부담을 더는 게 우선이라는 의미구려.”
길초량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고, 나는 우문직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사실 나는 우문 공자의 생각을 크게 존중하오. 아니, 애당초 열 번 싸워서 열 번 졌다고 치면, 열한 번째에도 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이오? 그건 당연한 거잖소?”
길초량 놈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이다.
“천적인 거잖소. 스무 번을 싸워도, 백 번을 싸워도, 죽었다 깨나도, 우문 공자는 기 공자를 이길 수 없게끔 정해져 있는 거잖소.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천적을 만났는데 어쩌겠소. 방법이 없잖소.”
“소, 송 형······?”
길초량이 개입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이런 상황이라도 지혜를 발휘해 봅시다. 가령, 외나무다리에서 천적을 만난 경우에도 굳이 싸우다가 비참하게 다리 아래로 떨어질 필요는 없는 것이오. 엎드려서 외나무다리를 양팔과 양다리로 바짝 감싸는 방법도 있소. 천적이 편하게 내 등을 밟고 지나갈 수 있게끔. 이런 기회에 이쪽에서 미리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나중에 천적과 다시 마주쳤을 때에도 그쪽에서 먼저 아량을 베풀어줄 가능성도 높아지잖소.”
이쯤 되니 우문직의 눈동자도 급격하게 커져 가고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힘들게 땀 뺄 필요 없이 그냥 기권하자는 뜻이오. 그러면 기 공자도 체력 소모를 안 하게 되니 다음 시합을 준비하기에도 좋잖소. 기 공자가 얼마나 고마워하겠소?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그러니 우문 공자, 자존심 따위는 과감하게 버리시오. 자존심은 밥을 먹여주지 않소. 우문 공자라면 할 수 있소.”
“소소, 송 형······!”
길초량이 그렇게 반응하는 가운데 우문직은 눈을 부릅뜬 채로 나를 바라보는 중이다.
나는 우문직을 향해 히죽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우문 공자도 그만하면 지금껏 최선을 다했다는 거, 내가 잘 알고 있소. 그래도 어쩌겠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오. 애초에 사람마다 각각 그릇의······.”
“잠깐! 잠깐, 송 공자!”
우문직이 양손을 내밀며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말을 멈추고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로 우문직을 바라보았다.
곧 우문직이 사정하는 어조로 내게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았소. 알았으니까, 그릇 얘기는 참아 주시오. 그랬다간 나, 정말로 상처받을지도 모르오.”
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우문직을 향해 되물었다.
“응? 왜 그러시오? 아시다시피 나는 지금 누구보다도 우문 공자의 편에서 우문 공자를 이해해 주고 있는 중이오. 얘기를 마저 이어가자면 각자 그릇의 크기와 재질은······, 읍!”
내가 말을 이어가지 못한 이유는 중간에 길초량이 다가와서 내 입을 틀어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아닛! 진짯! 송 형, 그만하시오오!”
그러자 우문직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와! 정말이지 정신이 바짝 드는구려. 딱 기다리시오. 내, 반드시 이기고 돌아올 것이오.”
말을 마친 우문직이 튕기듯 몸을 일으키더니 빠르게 내 거처를 벗어났다.
웃음이 난다.
하여튼 어린놈들, 하는 짓들이 귀여워 죽겠다.
길초량이 내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풀더니 하소연하듯 말했다.
“아닛, 송 형!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떡하오오!”
“왜 그러시오? 투지를 끌어 올려 달라기에 요구대로 해줬을 뿐인데. 방금 보셨잖소? 투지를 불태우며 나가는 모습.”
“아니, 그거야 그렇긴 한데, 그래도 말하는 본새는 좀······.”
“내가 이런 본새로 말 안 했으면 뭐, 다른 방법이라도 있으셨소? 이제 시합 시작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아니, 그, 그래도······, 우문 공자가 송 형 말에 진짜로 상처받으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걱정 마시오. 이게 다 사람 봐 가면서 하는 것이오. 우문 공자는 이런 것으로 상처받고 친우 탓할 사람이 아니오. 오히려 이 일로 스스로를 돌이켜보며 반성할 사람이지.”
“거참, 확신이 너무 가득하니까 반박도 못 하겠네.”
길초량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어쨌든 송 형은 가끔 보면 사람이 좀 못됐어. 그건 확실하오.”
“잘 보셨소. 나도 애초에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거든.”
“으휴, 하여튼 말발로 송 형을 어떻게 이겨.”
길초량이 그렇게 말하더니 마루에서 엉덩이를 뗐다.
일어선 길초량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데 송 형, 요새 도 닦듯 거처에만 계시더니 신선이라도 만나고 오셨소?”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아니, 주변 공기가 좀 변한 것 같아서. 그냥, 내 느낌에.”
아, 그 얘기였어?
이 자식이 하여간 눈치는 빨라 갖고.
나보다 경지가 낮다고는 해도 길초량 또한 절정고수인 데다가 나와 매우 친한 사이다.
그렇다 보니 어렴풋이나마 내 성취 변화를 느낀 모양이다.
내가 대답 대신 빙그레 미소만 지어 보이자 길초량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좀 살살 가시오. 뒤쫓아 가는 사람 가랑이 찢어지겠소.”
말은 저렇게 하고 있는데, 길초량 또한 절정에 갓 올랐던 한 달 전에 비해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졌다.
겨우 한 달 남짓 지났을 뿐인데도 이렇다.
축기가 잘되는 절정 초반의 시기에 매우 열심히 운기를 취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무리 봐도 길 형의 가랑이 걱정은 안 해줘도 될 것 같구려.”
의미를 알아들은 길초량이 입가에 미소를 보이더니 마당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관전하러 가봐야겠소. 나중에 봅시다.”
“살펴 가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