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266
동굴 입구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보니 인공 동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연 동굴이 아니라 인공 동굴이면 모종의 시설일 가능성이 크다.
동굴 입구의 모습이 훤히 보이는 위치에서 특수삼조가 이동을 멈추고 몸을 낮췄다. 뒤에서 따라가던 우리 조도 자연스럽게 멈추며 몸을 낮췄다.
입구 안쪽 벽에 기대어 쓰러져 있는 세 개의 인영 때문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시체들이다. 목이 꺾인 채로 몸이 축 늘어져 있었는데, 동굴 입구를 지키던 혈교 측의 무인들인 듯했다.
그즈음, 기척 탐지를 우선시하며 이동하던 나는 동굴 입구 근처에 은신하고 있는 하나의 인기척을 알아챈 상태다.
입구 위 비탈 지형의 바위 뒤쪽 음영에 숨어 있는데, 은잠술 실력이 상당히 뛰어난 자다. 특수삼조와 특수사조의 인원들을 다 합해도 은신하고 있는 저자의 존재를 알아챈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일대에서 다른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다.
곧, 청룡이 몸을 낮춘 상태에서 조용히 동굴 입구로 다가갔다.
청룡 정도의 무공 경지라면 동굴 위에 은신해 있는 존재를 분명히 알아챘을 것이다. 한데 마치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듯, 동굴 입구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에만 시선을 둔 채로 움직이고 있다.
그렇듯 누가 봐도 시체들을 살펴보려는 목적으로 움직이는 듯하던 청룡이 동굴 입구 앞에서 갑자기 위로 도약해 올랐다.
청룡은 도약과 동시에 양손에 한 자루씩의 유엽비도를 빼 드는 모습이었다. 은신해 있는 이가 적일 경우 곧바로 유엽비도를 발출하려는 것이다.
그 찰나, 은신해 있던 자에게서 미약한 기운이 일었다.
아마도 순간적으로 청룡을 향해 전음을 보낸 듯하다.
도약해 있는 청룡에게서도 비슷한 수준의 미약한 기운이 일었다. 은신해 있던 자에게 전음으로 뭔가를 대꾸한 것이다.
청룡은 결국 유엽비도를 발출하지 않은 채로 동굴 입구 위에 착지했다. 그는 착지하자마자 유엽비도를 다시금 가죽띠에 장착하는 모습이었다.
참고로 은신해 있던 자의 은잠술 실력은 최소 흑풍대나 신룡대급이었는데, 청룡의 저러한 반응을 보면 신룡대원이 아닐까 싶다.
본인이 아는 자이니 저렇듯 간단하게 경계 태세를 푸는 것이겠지.
이후에도 청룡은 은신해 있던 자와 잠시 전음을 주고받는 듯하더니 우리 쪽을 향해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와도 된다는 손짓이다.
우리가 동굴 입구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할 때쯤 청룡이 동굴 입구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은신해 있던 자도 모습을 드러내며 청룡의 뒤를 따라 뛰어내렸다.
한데 매우 가냘픈 인영이다.
여인이다.
그녀도 흑의를 입은 채 죽립을 쓰고 있었다.
안력을 돋워서 살펴보니 그녀는 눈 아래의 얼굴을 가리는 복면을 착용한 모습이었다. 그 와중에 이마를 두르는 머리띠까지 착용하고 있어, 얼굴에서 실제로 드러난 부분은 눈매 정도가 전부였다.
눈매만 봐도 매우 젊은 여인임을 알 것 같다.
잘해야 스물 한두 살 정도?
총기가 느껴지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다.
무공은 일류의 중후반쯤인 듯하다.
내 주변에 괴물들이 워낙 많아서 그렇지, 저 나이에 저 정도 경지면 매우 뛰어난 실력자다.
특히 저 은잠술 실력이 놀랍다.
저 나이에 저런 은잠술 경지는 뛰어난 소질만으로 이룰 수도 없으며, 피땀 어린 노력만으로 이룰 수도 없다. 그 두 가지가 모두 뒷받침되어야만 이룰 수 있는 경지다.
하긴, 저러니 어린 나이의 일류고수임에도 불구하고 특수작전조에 차출될 수 있었겠지.
순간적으로 내 근처에서 미약한 기운이 일었다.
길초량의 기운이었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보니 길초량은 방금 내려선 여인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보이는 중이었다.
여인이 뭐라고 전음으로 대꾸한 모양인데, 길초량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오호라, 둘이 아는 사이라는 거군.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궁금하다.
같은 묵룡조원일까?
비슷한 나이인 만큼 입대 동기이거나 훈련소 동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윽고 청룡이 특수삼조와 특수사조 전원을 가까이 모이게 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친구는 신룡대원입니다. 조는 다르나 저와 구면인 친구입니다. 암구호를 확인하기 위해 전음을 주고받다가 서로의 목소리를 알아챈 겁니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신룡대원이다.
어쨌거나 청룡의 육성을 듣기는 처음인데, 적당히 낮은 저음에 발음도 또렷했다. 듣기에 편안한 음성이다.
청룡이 말을 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모두가 같이 들어야 할 내용이기에 모이시라 한 겁니다.”
청룡이 말을 마치더니 여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여인이 앞으로 나서더니 우리를 향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특수이조 소속입니다.”
앳된 목소리다.
“저로서도 여러분의 신원을 특정하기가 어려웠기에 계속 숨어 있었던 점, 양해해 주십시오.”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우리를 향해 등 뒤의 모습을 잠시 보여줬다.
등 뒤의 허리띠에 손톱만 한 표식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표식의 색이 우리처럼 녹색이었다. 이번에 특수작전조의 표식이 녹색이다.
여인이 말했다.
“이 동굴의 입구로 들어서면 위쪽으로 향하는 통로가 나옵니다.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공간이 약간 넓어지면서 두꺼운 석문石門이 나오는데, 기관으로 작동하는 석문입니다. 저희 조원들이 노력 끝에 기관 작동법을 밝혀낸 후, 내부 조사를 위해 안으로 진입한 상태입니다. 그게 약 한 식경 전쯤의 일이었습니다. 저희 조장님께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저를 밖에 대기시키신 겁니다.”
특수이조도 조원들 대부분이 절정고수들일 가능성이 크다.
동굴 안에서의 작전은 위험할 수도 있는 만큼, 일부러 일류고수인 저 여인을 밖에 대기시킨 듯하다. 저 여인은 은잠술 실력이 매우 뛰어나니 이곳에 대기시키기에 안성맞춤이기도 했을 것이다.
“조장님께서는 한 식경이 완전히 지난 후에도 조원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경우, 밖에서 기관을 발동시켜 석문을 열어두라 하셨습니다.”
개폐 장치는 내외부에 모두 존재할 것이나, 상황에 따라 내부의 장치는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적의 입장에서 침입자를 안에 가둘 목적으로 그런 기관을 발동시킬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런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특수이조의 조장이 저 여인을 외부에 남긴 것이다.
“이후에도 은신한 채로 일각을 더 기다리다가, 그래도 조원들이 나오지 않으면 표식을 남긴 후 은밀히 본대 쪽으로 가서 이 사실을 보고하라 하셨습니다. 슬슬 시간이 되었기에 동굴 입구로 들어가서 석문을 열어둘 생각을 하던 차에 여러분께서 나타나신 겁니다.”
청룡이 여인에게 말했다.
“우리 두 조가 안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조사하며 너희 조원들의 행방을 찾을 것이다. 조금 더 대기하도록.”
“예.”
여인이 짧게 대꾸했다.
청룡이 두 조의 조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두 조라서 인원도 많고 전력도 강합니다. 이 친구 혼자만 이곳에 대기시키는 것보다, 한두 명 내지는 두세 명 정도를 더 남겨서 이쪽의 안전도 조금이나마 더 보장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 말에 많은 조원들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청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면 외부에 남을 인원을 신속하게 정한 후에 안으로 진입하겠습니다. 이왕이면…….”
청룡이 말을 줄이며 현역 청룡조원 중에서 가장 젊은 조원을 바라보았다. 특수삼조에서 유일하게 일류고수인 그 조원이다.
동굴 내부는 위험할 수 있는 만큼 이왕이면 경지가 낮은 인원들 위주로 외부에 남기겠다는 의미다.
단, 청룡은 우리 조의 유일한 일류고수인 남궁설 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청룡도 남궁설의 정체를 모를 리 없다.
즉, 본인이 아무리 신룡대의 청룡이라 하더라도, 천하제일세가의 금지옥엽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가뜩이나 남궁찬도 함께인 마당이니 더더욱 관여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점에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제가 남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남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다.
이에 나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말을 보탰다.
“삼조장님의 말씀대로 내부 진입조의 전력은 충분합니다. 제가 빠진다 해도 전력 누수는 거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외부 대기조의 안전을 조금이라도 더 도모하는 편이 모두에게 좋잖습니까.”
내가 빠진다 해도 진입조의 전력은 강력하다.
현직 신룡대의 조장이 두 명이며, 남궁찬, 제갈수광, 원을태와 같은 대단한 고수들이 즐비하다. 꾸준히 지켜봤는데 쉰 살가량의 중년인 또한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삼조의 여인들 두 명도 암기술에 능하여 내가 빠져도 후열 또한 탄탄하다.
물론 나도 이곳 내부의 시설이 궁금하기는 하다.
그러나 어차피 이곳 대규모 거점의 중심은 중앙에 있는 산이다. 그곳에서의 전투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만큼, 굳이 이곳에서 미리 힘을 뺄 필요가 없다.
청룡이 의견을 구하듯 도예주를 바라보자 도예주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청룡이 이번에는 제갈수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갈수광과 내가 각별한 사이임을 알기에 제갈수광의 의견도 구하려는 의도다.
제갈수광은 잠시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도예주와 제갈수광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내가 남는 건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자마자 남궁찬이 남궁설에게 말했다.
“이렇게 된 만큼 너도 이곳에 남거라.”
나는 남궁설을 보호하는 역할이기에, 내가 남으면 남궁설도 남는 것이 여러 면에서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어쨌거나 현재 남궁찬의 눈빛에는 묵직한 압력이 담겨 있어, 이쯤 되면 아무리 남궁설이라도 거역하기 어려울 듯하다.
“네.”
역시나 남궁설의 입에서 수긍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 * *
길초량의 시선은 우벽희에게 고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희아…….’
우벽희.
그녀는 훈련생 기간부터 신룡대의 예비 대원 훈련 기간까지 계속 함께했던 신룡대 입대 동기였다.
훈련생 시절 초창기부터 자신과 우벽희는 서로의 뛰어난 실력을 금방 알아봤다. 이후에 힘든 훈련들을 같이 이겨내는 과정에서 점점 친해지며 가까워졌다.
최종 성적은 자신이 수석이고 우벽희가 차석이었으나, 만약 기수가 달랐다면 우벽희도 넉넉하게 수석을 차지했을 거라는 게 당시 교관들과 조교들의 일관된 평가였다.
물론 우벽희는 본인이 수석을 차지하지 못한 일에 대해 조금도 아쉬워하는 법이 없었다.
「나는 오히려 초량이처럼 뛰어난 실력자와 함께하며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그렇듯 매사에 긍정적인 자세로 임하던, 친우에 가까운 동기가 바로 우벽희였다.
그런 사이인 만큼 오랜만에 만난 그녀가 이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다.
우벽희는 황룡조다.
그녀가 특수이조라고 했으니, 특수이조에는 황룡조원들이 다수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청룡조가 다수 포함되어 있는 저 특수삼조처럼.
[희아, 정말 오랜만이다. 너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초량아, 오랜만이야!]
[일전에 교관님한테서 네 소식은 들었어. 황룡조에서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시더라. 그 얘기 들으면서 역시 희아구나 싶었고.]
[초량이 너야말로 일전에 동부 해안에서 사파를 상대로 활약이 엄청났다던데? 게다가 이번 여름에도 백룡조장님의 목숨을 구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고 들었고.]
[하하, 둘 다 훌륭한 동료들과 친우들 덕분이었을 뿐이야.]
우벽희와 빠르게 전음을 주고받을 때쯤 청룡조장은 외부에 남을 인원을 정하는 중이었는데, 친우인 송유겸이 갑자기 외부에 남겠다며 손을 드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벽희의 전음이 들려왔다.
[저 사람……, 그 유명한 송유겸 공자, 맞지? 초량이 너하고 아주 친한 사이라고 들었는데.]
[어.]
[대단한 미남이라고 듣긴 했는데 직접 보니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미남이다아! 나, 외모만 보고 반할 정도로 잘생긴 사람은 처음이야. 어떻게 저렇게 잘 생겼지?]
우벽희의 전음이 바로 이어졌다.
[그런데 의외네? 무공 실력도 굉장하다던데 내부 진입조로 들어가지 않고 외부에서 대기한다니.]
[하하, 송 형이 좀……, 의외성이 많은 사람이긴 해. 나도 송 형이 외부에 남겠다고 할 줄은 몰랐어.]
[밖에서 혼자 잠복하면서 조금 무섭기도 했는데 송유겸 공자가 함께라니 왠지 든든하다아.]
[뭐, 별일은 없을 거라 생각되지만, 혹여 위기 상황에서 혼란스러우면 송 형의 의견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거야.]
[알았어. 아, 나 잠깐만. 백룡조장님 전음.]
귓전으로 송유겸의 전음이 날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보니까 길 형과 저 신룡대 소저가 계속 전음을 주고받는 것 같더구려.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 같은 묵룡조요? 아니면 입대 동기?]
송유겸의 전음이었다.
우벽희와 티 나지 않게 전음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송유겸은 알아챈 모양이다.
하여튼 이 친우는 눈치가 너무 빨라서 무서울 때가 있다.
[그게……, 아무리 송 형이라도 신룡대원 개인의 신상 정보에 관련된 사항을 말해주기는…….]
그러자 송유겸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뭐, 알았소. 길 형과 친한 사이 같기에 혹여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서 물어본 것뿐이오. 잘됐구려. 저 소저한테는 신경 끄고 설 매만 신경 쓰면 될 테니. 사실 나도 괜한 오지랖 부리는 건 딱 질색이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잘 모르는 사람의 안위까지 굳이 신경 쓰겠소. 저 소저도 신룡대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
[아, 아니, 송 형, 내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고…….]
뭐라고 변명을 하려 했지만 송유겸은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하여튼 매사에 ‘아님 말고’식인 저 태도는 때때로 얄밉기 그지없다.
그때쯤 청룡이 결정을 내렸다는 듯 모든 인원들을 향해 말했다.
“하면 외부 대기 인원은 송 공자를 포함한 세 명으로 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내부로 진입하겠습니다. 일단 동굴 입구 안의 석문까지 바로 이동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 모두가 신속하게 움직이며 동굴의 입구로 들어섰다.
우벽희의 말마따나 동굴의 통로는 계단을 통해 위쪽으로 이어졌다. 통로는 성인 남성 두 명이 넉넉하게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계단을 오르다 보니 약간 넓은 공간이 나왔는데, 그 공간의 안쪽에서 석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벽희가 석문 앞으로 다가가더니 석문 근처의 돌부리 여러 개를 차례로 누른 후 석문의 손잡이를 젖혔다.
그러자 석문의 중간쯤이 세로로 벌어지며 미닫이 형식으로 양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르르릉-
이렇듯 해답부터 보면 쉽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저 기관 작동법을 알아내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특수이조도 석문을 열기 위해 적잖은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석문의 안쪽으로는 또다시 시커먼 통로가 드러났는데, 일단은 계단이 없는 평평한 통로였다.
한데 잠시 귀를 기울여보니, 통로의 안쪽 멀리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비슷한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듯했다.
다른 고수들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자신이 들은 것과 같은 소리를 들은 것이다.
청룡이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최대한 신속하게 이동하겠습니다. 단, 기관 장치로 인한 함정이 발동할 수도 있는 만큼, 두 조의 최고 고수들이 선봉 쪽에 서는 게 좋겠습니다.”
말을 마친 청룡이 몇 사람에게 시선을 두자, 그와 시선이 마주친 몇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원을태, 남궁찬, 오십 세 가량의 중년인, 제갈수광, 도예주 등이었다.
청룡이 남궁찬과 같이 최선봉에 서더니 뒤를 돌아보며 짧게 지시를 내렸다.
“이동합니다.”
진입조가 차례로 통로를 향해 들어서기 시작한 가운데, 길초량은 송유겸에게 전음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우벽희. 훈련생 시절부터 함께 했던 신룡대 입대 동기고, 황룡조요.]
전음을 들은 송유겸이 씩 웃는 게 보인다.
자신이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의 미소다.
아아, 오늘따라 친우의 저 미소가 이렇게나 재수 없어 보일 수가 없다.
그러나 이곳은 적진의 한복판이기에 외부 대기조라고 해서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혹시 모를 위기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에서 송유겸만큼 믿음직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기동타격조 시절에 여러 차례 확인했다. 안 보는 척 송유겸의 움직임을 항상 주시하고 있었기에 그의 역량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친한 동기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송유겸이 원하는 바를 알려줄 수밖에 없다.
길초량은 송유겸의 재수 없는 미소를 외면하며 우벽희에게도 짧게 전음을 남겼다.
[송 형은 내가 신룡대의 묵룡조라는 사실을 알아. 여름에 백룡조장님을 구하는 과정에서 송 형의 협조가 필요했고, 그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밝힐 수밖에 없었지. 조금 전에도 여러 사정상 네 이름과 조를 알려줬으니, 희아 너도 그렇게 알고 송 형을 대하도록 해. 그럼 간다. 몸조심하고.]
[알았으니까 초량이 너야말로 몸조심해. 나중에 봐.]
우벽희의 그 전음을 끝으로 길초량은 서둘러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 * *
셋만 남겨진 상황에서 우벽희는 송유겸의 옆에 서 있는 어린 여인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 소녀가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인 남궁설 소저였다니…….’
아까 백룡조장한테서 전음으로 들은 내용이었다.
남궁설은 대단한 미인이라고 들었는데, 지금의 용모는 그저 평범할 뿐이었다. 당연히 면구를 착용했을 것이다.
참고로 유명세로만 따지면 아무리 동천비룡 송유겸이라 해도 천하제일세가의 늦둥이 금지옥엽에 비할 수가 없다.
온 강호의 이목이 자연스럽게 집중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천하제일세가이며, 그곳의 직계라면 유명해지기 싫어도 유명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와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이 신기하다.
남궁설은 어려서부터 무재도 빼어나고 용모도 출중하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 통합 잠룡대전에서 그 용모와 실력 두 가지를 모두 증명했다고 들었다.
이렇듯 직접 보니, 과연 아직 스무 살이 안 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기도가 남다르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가 있다.
일단은 송유겸과 남궁설을 향해 먼저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백룡조장님께서 두 분이 누구신지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유명한 두 분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우 아무개라 합니다. 함께하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송유겸이 마주 포권하며 대꾸했다.
“반갑소, 우 소저. 송유겸이오. 잘 부탁하오.”
남궁설도 곧장 포권하며 인사를 건네왔다.
“남궁설이에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인사를 주고받자마자 송유겸에게 말했다.
“백룡조장님께서 위기 상황이 발생하거든 송 공자님의 지시에 따라 대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말고 바로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따를 것입니다.”
아까 백룡조장이 전음으로 그 얘기를 하는데, 송유겸에 대한 신뢰가 매우 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송유겸이 대꾸했다.
“하하, 우리는 조용히 은신한 채로 대기하기만 할 텐데 설마하니 별일이야 발생하겠소? 어쨌거나 만에 하나라도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리하리다.”
송유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숨으러 갑시다.”
은신을 위해 송유겸, 남궁설과 함께 동굴 입구 위의 비탈 지형으로 돌아 올라가 음영 속에 몸을 낮췄다.
송유겸이 작은 목소리로 남궁설에게 말했다.
“설 매는 아직 은잠술의 경지가 높지 않으니 이 뒤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 은신하는 게 좋겠어. 나는 즉각적인 상황에 대비할 필요가 있는 만큼, 원래 우 소저가 숨어 있던 저 바위틈에서 은신할 거야. 저곳이 동굴 입구에서 가장 가까우니까.”
“알겠어요.”
남궁설이 대꾸하자 송유겸이 이번에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우 소저는 은잠술 실력이 뛰어나시니 내가 숨는 바위의 바로 옆에 있는 바위 뒤에 숨으시면 될 듯하오.”
“그러겠습니다.”
이윽고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이동했다.
은신한 후부터는 계속해서 침묵만 이어졌다.
한동안의 침묵이 이어지던 중에 송유겸이 전음을 보내왔다.
[길 형과 신룡대 입대 동기시라 들었소. 훈련생 시절부터 예비 대원 시절까지 계속 함께였다고 하더구려. 서로 매우 친했던 모양이던데, 얼마나 친한 사이요?]
[동기 중에서 가장 친한 사이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초량이도 그렇게 여기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호. 그렇구려. 한데 어떻게 그렇게 친해졌소? 길 형도 그렇지만 우 소저도 실력이 출중하신 듯하니, 아무래도 우수한 훈련생들끼리 자연스럽게 친해진 게 아닌가 싶기는 한데.]
[추측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훈련생 시절 초창기부터 초량이와 저는 서로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금세 알아봤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함께 힘든 훈련을 이겨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던 겁니다.]
[훈련생 시절에 길 형은 어땠소?]
[모든 면에서 최우수 훈련생이었습니다. 성격도 좋아서 교관님들뿐만 아니라 동기들한테서도 인정을 많이 받았습니다. 친우 사이시니 초량이의 성격은 송 공자님도 잘 아시겠지만요.]
[그런 얘기 말고, 길 형의 실수로부터 비롯된 우스꽝스러운 일화라던가, 그런 거 없소?]
[초량이가 워낙 모범적이었던지라, 우스꽝스러운 실수 따위를 하는 걸 본 적은 없습니다.]
사실대로 대답한 건데, 여태껏 잘 대꾸해주던 송유겸에게서 대꾸가 없었다.
‘재미있는 걸 기대했다가 실망한 건가?’
그 생각에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일부러 초량이의 체면을 생각해서 말씀을 안 드리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초량이가 너무 모범적이어서 그런 실수를 했던 적이 없어서…….]
[쉿.]
갑자기 송유겸으로부터 의외의 전음이 들려온 만큼, 우벽희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표정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송유겸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로 어둠 속 먼 곳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갑자기 왜 저러지?’
송유겸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향해 조용히 신경을 집중해봤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의아하지만 잠자코 기다리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야 하리라.
백룡조장과 길초량이 인정하는 실력자가 괜히 저러고 있는 건 아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