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안에 마교있다-402화 (402/416)

내 안에 마교있다 402

활과 도검들을 챙겨서 큰 자루에 담았다.

도둑의 소굴이라서 그런지 창고에 큰 자루들이 많았다.

내 무기들도 큰 자루에 같이 담았고 눈에 띄지 않는 암기류만 착용했다.

여인은 큰 방수 주머니와 행낭을 준비해서 본인의 의복과 필요 물품들을 담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는 여인의 상체만 점혈했다.

무기들을 담아둔 큰 자루와 여인의 행낭을 앞뒤로 메고는 여인과 함께 은신처를 나섰다.

은신처의 석문을 나선 후부터는 여인의 말에 따라 기관 장치를 작동시켰다. 여인도 협조적이었다. 그녀로서도 문단속을 철저히 해둬야 하는 탓이다.

곧 계단 아래의 연못에 다다랐고 나는 송유하에게서 회수해둔 은룡삭을 꺼내어 가닥을 풀었다. 그런 식으로 은룡삭을 길게 만든 후, 끈의 한쪽은 여인의 팔과 상체를 단단히 묶고, 다른 쪽은 내 허리에 감았다.

여인이 말했다.

“이 끈, 범상치 않아 보이네. 묶인 후에도 계속 조여오는 것 같아.”

나는 씩 웃어 보이기만 했다.

여인이 말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틈을 봐서 당신을 기습하거나 당신에게서 도망치려는 생각 같은 거, 이미 버렸어.”

“믿어주고 싶구려.”

내가 미소를 보이며 대꾸하자 여인도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안 믿는다는 말보단 낫네.”

“그 말이 그 말이오.”

“아니. 달라.”

여인의 단호한 대답에 헛웃음이 나왔다.

“풋……!”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입수할 거요.”

“헤엄은 잘 치는 거지? 물속에서 날 끌고 갈 수 있을 정도로?”

“글쎄, 장담은 못 하겠구려. 그러니 불안하시면 미리 호흡 관리 잘해두시든가.”

내가 대꾸하자 여인이 말했다.

“익사는 절대 싫어. 죽일 거면 그냥 고통 없이 보내줘.”

이에 나는 씩 웃으며 같은 말을 반복해줬다.

“그러니 호흡 관리, 잘해두시오.”

“하아.”

여인이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강물의 수면에 다다르면 곧장 수면 위로 나가지 말고, 강물을 타고 조금 떠내려간 후에 나가줘. 이곳의 위치가 노출될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싶거든. 나도 늘 그렇게 하고 있고.”

저 정도야 어려운 부탁도 아니다. 여인으로서는 당연한 부탁이기도 하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에 말했다.

“갑시다.”

내가 수중 동굴의 연못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여인도 따라 들어왔다.

한 차례 호흡을 정리하고는 곧바로 잠수했다.

입수 초반에는 계속해서 물속 깊은 곳으로 잠수해야 하는 만큼, 기운을 묵직하게 하여 수중 통로를 따라 쭉쭉 하강했다.

그러다 보니 나와 은룡삭으로 연결된 여인도 빠르게 끌려왔다. 돌아보니 그녀도 수중에서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양발을 열심히 저으며 따라오는 모습이었다.

수중 통로의 모양새는 들어올 때 기억해두었기에 주저 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비스듬히 아래로 향하던 수중 통로는 어느 순간 위쪽으로 꺾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여인을 끌며 위로 헤엄쳐갔다.

그러자 머지않아 강으로 통하는 바위틈이 나타났다.

바위틈을 빠져나가면 장강이다.

이어서 바위틈으로 빠져나온 후, 한 손으로 돌부리를 잡고 한 손으로 은룡삭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겨서 여인도 빼냈다.

이후에는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천천히 수면을 향해 상승했다.

강물은 껌껌한 상태다.

어두운 시각인 것이다.

동굴 안에서 시간을 계산하여 추정한 시각은 대략 축시 정(새벽 2시)이었다. 그쯤이면 오차를 감안해도 어두운 시각일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에서 출발한 건데, 이 정도면 의도대로 된 셈이다.

우리는 오래지 않아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는데 선박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천천히 헤엄치며 강가의 적당한 지점으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주변에 인기척이 있는지 확인했다.

딱히 신경 쓸 만한 요소는 없다.

천천히 자갈밭으로 나왔다.

이후에는 여인을 이끌고 곧장 갈대밭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숨겼다.

하늘을 보니 인시 초(새벽 3시)에서 인시 정(새벽 4시) 사이인 듯하다.

여인을 점혈한 후 자리에서 일어서서 기운을 운용했다.

따뜻한 기운을 일으켜 의복과 머리카락을 말리기 위함이다.

갈대가 크다 보니 이렇듯 서 있어도 모습이 외부에 드러날 일은 없다.

의복을 모두 말린 후에는 여인의 점혈을 풀어줬다. 그녀도 의복을 말려야 하기 때문이다.

점혈을 푸는 중에 여인이 전음을 보내왔다.

[당신의 기운 말인데, 느낌이 참 희한해. 백도의 기운도 아니고, 마교 쪽의 기운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사파 쪽의 기운은 더더욱 아니고.]

이처럼 고요한 밤에는 음성이 잘 퍼져나간다. 그래서 전음으로 말한 것이다.

내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만 지어 보이자 여인의 전음이 이어졌다.

[지금껏 중성적인 느낌의 무공들을 적잖이 겪어봤는데, 당신의 기운처럼 완벽하게 중성적인 기운은 처음이야.]

신기하다는 표정.

내가 이번에도 희미한 미소만 지은 채로 대꾸하지 않자, 여인이 일어서서 기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여인이 옷과 머리카락을 모두 말린 후 서서히 기운을 거두더니 말했다.

[이곳에서 상류로 조금 올라가면 작은 나루터가 나와. 인근 마을의 어부들이 이용하는 나루턴데, 그들 중에 중경까지 가서 물고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어.]

[그쪽으로 갑시다.]

대꾸한 후에 행낭을 뒤져서 인조면구와 접착제를 꺼냈다. 그러자 여인도 자신의 행낭을 뒤지더니 면구와 접착제를 꺼냈다.

여인이 손거울을 들더니 내 얼굴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거울 들고 있어 줄 테니까 먼저 해.]

여인도 나도, 내공 경지가 있다 보니 어둠 속에서 충분히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은 달빛 덕분에 시야 확보가 더 편한 상태이기도 하다.

잠시 여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이후에 신속하게 면구를 착용하는 중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착용해본 솜씨네. 엄청 능숙해.]

내가 대꾸하지 않자 그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이십 대 초반의 백도 청년이 면구 쓸 일이 뭐가 그렇게 많았을까나?]

나는 이번에도 대답 대신 입가에 미소만 지어 보였다.

서둘러 면구 착용을 마친 후, 이번에는 내가 거울을 들어줬다.

여인도 능숙한 솜씨로 면구 착용을 마쳤다.

그녀가 물었다.

[점혈, 할 거야? 나한테 선택권이 없다는 건 아는데, 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우면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살 테니 하는 말이야.]

여인의 말마따나 그녀를 점혈한 채로 돌아다니면 당연히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차라리 그냥 그녀와 가까이 붙어 다니는 게 낫다.

[안 할 거요.]

내가 대꾸하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갈대숲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스으으으으으-

갈대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달빛에 비치는 그 광경이 제법 운치가 있었다.

여인은 옆에서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왤까.

한동안 조용히 걷던 중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말이야.]

내가 고개만 끄덕여 보이자 그녀가 전음을 이었다.

[내 이름은 안 궁금해? 아예 안 물어보네?]

[물어봐도 귀하가 본명을 알려줄 거라는 확신이 없잖소. 게다가 어차피 귀하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마당이라 굳이 물어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도 있고.]

그러자 여인이 잠시 나를 바라보며 걷다가 전음을 보내왔다.

[산영이야. 관산영.]

[본명 맞소?]

내가 의심하는 투로 되묻자 여인이 아미를 살짝 찡그리며 대꾸했다.

[본명 맞다고. 당신이 이미 내 정체를 아는 마당에 본명을 숨겨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

산영.

‘뫼 산’자에 ‘꽃 영’자다.

그녀에게 말했다.

[산꽃. 예쁜 이름이구려.]

내 말에 여인이 빙그레 웃었다.

상류 쪽으로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나루터에 다다랐다.

시각은 인시 정(새벽 4시)에서 묘시 초(새벽 5시) 사이.

조금만 지나면 동이 터오기 시작할 것이다.

나루터에는 소형 돛단배 다섯 척이 정박해 있었고, 각각의 배들은 나루터의 두꺼운 돌기둥에 쇠사슬로 연결되어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나루터의 한쪽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긴 의자가 세 개 있어, 우리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나는 자루를 벗어 놓으며 앉았고, 관산영은 아예 긴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누워버렸다.

그렇게 한 식경 남짓 지났을까.

희미하게 동이 터오기 시작한 가운데 두 개의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그러자 누워있던 관산영이 상체를 일으켰다.

이윽고 두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오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녀였다. 부부인 듯하다.

그들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주춤했다.

사내가 말했다.

“까, 깜짝 놀랐네.”

그러자 관산영이 대꾸했다.

“놀라셨다니 죄송해요. 그냥 조용히 쉬고 있었을 뿐, 놀라게 할 의도는 없었는데.”

싹싹한 말투다. 경계심을 누그러트릴 목적이다.

아니나 다를까, 중년 남녀의 표정에서 경계심이 빠르게 사라졌다. 우리가 무기를 들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무인의 행색이었으면 저들이 저렇듯 경계심을 쉽게 거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사내가 한 척의 돛단배 쪽으로 다가가서 쇠사슬의 자물쇠를 풀며 물었다.

“여객선 기다리시오?”

관산영이 대꾸했다.

“네.”

“중경 가는?”

“네.”

“그거라면 반 시진 후에나 올 거요.”

“아하.”

그렇게 반응한 관산영이 내게 전음을 보냈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봐.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빠르게 전음을 마친 그녀가 중년 남녀 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두 분은 이 새벽부터 고기 잡으러 가시는 거예요?”

“그렇소.”

“혹시 중경 쪽으로는 안 가시나요?”

“그 방향으로 가기는 가는데 중간 정도까지만 가오.”

“그러면 그 근처의 나루터까지라도 태워다 주시면 안 될까요? 삯도 챙겨 드릴게요.”

관산영의 제안에 사내가 대꾸했다.

“가는 길이니 태워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소만, 그냥 조금 기다렸다가 여객선 타고 한 번에 가는 게 더 편하지 않겠소? 우리 배는 보다시피 작은 고깃배라 흔들림도 많아서 불편할 텐데.”

“여기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더니 너무 지루해서요. 차라리 배 타고 가면서 새벽 강가의 정취라도 감상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요. 저희 둘 다 멀미는 안 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두 분도 이왕 가는 길, 소소하게나마 반찬값이라도 벌면 좋잖아요.”

그 말에 사내가 동의를 구하듯 아낙을 바라봤다. 그러자 아낙이 관산영에게 말했다.

“삯은 무슨 삯이우. 됐수. 가는 길이니 그냥 태워드리지 뭐.”

“아니에요. 삯은 당연히 챙겨드려야죠.”

“아유, 됐다니까. 그냥 타고 가시우. 어여 타시우.”

아낙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도 손짓했다.

이에 나도 배 쪽으로 다가가서 죽립을 벗고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신세 지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낙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꾸했다.

“어여들 오르시우.”

이에 관산영과 내가 배에 오르자 아낙도 배에 올랐고, 사내가 준비를 마치더니 마지막으로 배에 올랐다.

이윽고 사내가 노를 이용해서 배를 나루터에서 밀더니 돛을 폈다.

작은 돛단배가 서서히 강물 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관산영이 아낙에게 물었다.

“두 분은 부부시죠?”

“그렇수. 실은 큰딸이 시집을 갔는데, 아가씨의 나이와 얼추 비슷하다우. 그렇다 보니 딸 생각도 나고 해서 그냥 태워주기로 한 것이우.”

“아, 그러셨구나아.”

관산영이 대꾸하자 이번에는 중년 사내가 물었다.

“두 분은 무슨 사이요? 부부? 아니면 애인?”

“헛! 아니에요, 그런 사이. 저희는 그냥……, 이종사촌지간이에요.”

서둘러 둘러댄 느낌이다.

관산영을 도울 목적으로 말했다.

“누님이 중경에 볼일이 있다며 저를 끌고 나오신 바람에…….”

그러자 관산영이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얘는 누나라고 하라니까 자꾸 누님이래.”

“아하하, 그래도 나이 차이가 있으니 누님이 맞잖소.”

“아니. 이 정도면 나이 차이 별로 안 나는 거거든? 그러니까 누나.”

지금까지 내가 파악하기로, 여자들은 대개 누님이라는 호칭보다는 누나라는 호칭을 더 선호하는 듯하다. 누님으로 불리면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 같아서 그러는 모양이다.

“알았소, 누나, 누나. 알았소.”

내가 체념한 투로 대꾸하자 관산영이 그제야 흘겨보던 시선을 거두며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관산영이 품속을 뒤지며 말했다.

“아, 참.”

곧 그녀가 중년 부부 쪽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 은자 한 냥이 놓여 있다.

부부가 눈을 부릅뜬 건 당연했다.

이 돛단배를 소유하고 있다면 집안 형편이 나쁜 편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중산층 이하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형편에 은자 한 냥이면 매우 큰 돈이다.

“이, 이게 뭐유?”

관산영은 아낙이 묻는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은자를 아낙의 손에 쥐여 주려 했다.

순간적으로 아낙이 손을 뺐지만, 관산영의 손이 더 빨랐다. 순간적으로 아낙의 손을 낚아채더니, 기어이 그녀의 손에 은자를 쥐여 준 것이다.

“왜, 왜 이러시우? 이 큰돈을 왜…….”

관산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삯이에요.”

“아니, 삯은 안 받는다고 했잖수. 설령 삯이라고 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금액이고.”

“제가 부자라서요. 대신, 중경까지 데려다주시는 거예요.”

부부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내가 말했다.

“저, 정말로 중경까지만 데려다주면 이 큰돈을 그냥 주겠다는 것이오?”

“네.”

“허……! 세상에나.”

중년 사내가 그렇게 대꾸하자 관산영이 말했다.

“아, 제 목적지가 연주상단 중경지점 인근이니 그 근처에 내려주시면 더 좋을 것 같고요.”

“그 정도야 뭐 일도 아닌데…….”

저 큰돈을 받아도 되는 건지, 여전히 얼떨떨해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사내의 손은 이미 돛을 더 펴는 중이다.

배의 속도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 * *

어느샌가 시가지로 진입한 돛단배가 제법 널따란 나루터에서 멈췄다.

우리가 배에 탄 후로 한 시진 남짓 지난 시점이다.

“이곳이 바로 연주상단 중경지점의 나루터요. 대로大路 건너편에 보이는 장원이 연주상단 중경지점이고.”

중년 사내의 말에 관산영이 대꾸했다.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해요, 아저씨,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도 인사를 건네자 아낙이 말했다.

“감사는 무슨. 받은 돈을 생각하면 이 정도가 무슨 수고겠수.”

그러자 관산영이 대꾸했다.

“저희 때문에 괜히 멀리까지 오셨으니 고생하신 거 맞죠. 덕분에 저희도 편하게 왔고요.”

중년 사내가 말했다.

“어쨌거나 고맙소. 잘 쓰겠소.”

이에 우리는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차례로 배에서 내렸다.

관산영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두 분, 건강하세요.”

아낙이 대꾸했다.

“아가씨와 청년도 부디 하시는 일들 잘되시길 빌겠수.”

“두 분도요.”

대강의 작별 인사가 끝나자 중년 사내가 다시금 돛단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루터를 벗어나 대로로 올라섰다.

우리는 돛단배가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연주상단 중경지점의 대문으로 향했다.

다섯 명의 무사가 대문을 지키고 서 있는 가운데, 그중 선임으로 보이는 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에 나는 말없이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고급스러운 붉은 천으로 만들어진, 손바닥 크기의 넓적한 주머니다.

선임 무사가 천 주머니에서 내용물을 꺼냈다.

드러난 것은 사각형의 동패.

여인들의 손바닥 크기이며, 곳곳에 금장식이 되어 있다.

동패를 확인한 선임 무사가 눈을 부릅떴다.

저게 바로 연주상단의 특급 귀빈증인 탓이다. 청여홍이 발급해줬었다.

선임 무사가 말했다.

“저, 저는 곧장 이걸 가져가서 상부에 보고해야 합니다. 두 분께서는 잠시만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예.”

내가 짧게 대꾸하자 선임 무사가 부하 무사에게 말했다.

“제오第五 응접실로 모셔.”

그러자 부하 무사가 놀란 표정으로 대꾸했다.

“예!”

반응을 보니 제오 응접실은 특급 귀빈에게만 제공되는 장소인 듯하다.

선임 무사는 서둘러 장원 안쪽으로 사라졌고, 부하 무사가 우리를 이끌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부하 무사가 안내한 곳은 잘 꾸며진 정원의 외곽에 있는 아담한 이 층 건물이었다.

건물의 일 층으로 들어서자 깔끔한 복장의 삼십 대 여인 두 명이 우리를 맞이했다.

두 여인 중 한 명이 우리를 이 층으로 안내했는데, 공간으로 들어서서 보니 매우 고급스러운 응접실이었다.

여인은 우리에게 필요한 게 있는지 꼼꼼히 물은 후에 사라졌고, 잠시 후에는 다른 여인이 간단한 다과상을 차려왔다.

차의 향이 매우 좋았고, 과자는 고급 과자였으며 한입에 넣기 편한 형태였다.

응접실 공간에 둘만 남자 관산영이 말했다.

“아까 그 패가 귀빈증 같기는 했는데, 이렇게까지 극진하게 대접하는 걸 보면 매우 높은 등급의 귀빈인가 보네?”

내가 대꾸하지 않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연주상단 정도 되는 대상단으로부터 이 정도로 대접받는 귀빈이 흔치는 않을 텐데. 역시 백도의 떠오르는 샛별은 어딘가 달라도 다르네.”

“친우를 잘 둔 덕분일 뿐이오.”

친우란 청여홍이다.

“흐으음.”

관산영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말했다.

“보니까 연주상단이 귀빈 대접을 제대로 해주네. 이참에 나도 거래 좀 틀까 보다.”

도둑이다 보니 그녀의 재산은 장물贓物이 많지만, 금은도 매우 많다. 쌓여 있는 그 금은만으로도 그녀는 갑부다. 당연히 어딜 가나 귀빈 대우를 받을 것이다.

눈매를 찡그린 채로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을 계기로 은근슬쩍 접근하여 연주상단에 피해를 줄 생각이라거나, 연주상단의 중요 물건을 탐낼 생각이거든 그만두시오. 이건 경고요.”

“아니, 피해를 주다니 무슨! 물건을 탐내다니 무슨! 하……!”

여인이 억울하고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니거든? 거래처 겸 투자처로 고려해보려는 것뿐이거든? 나한테 의도적으로 손해를 끼치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 한은, 나도 사업 동료나 거래처는 안 건든다고! 하, 진짜 사람을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 별꼴이야, 정말.”

이에 내가 그녀에게 시선을 오래 두자, 그녀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서둘러 말을 보탰다.

“아, 아니, 그러니까, 벼, 별꼴이라는 말은 취소…….”

그때쯤 누군가가 계단을 빠르게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사십 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그가 내게 곧장 물었다.

“이 동패를 가져온 분이 공자십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대꾸하자 사내가 깍듯이 예를 취하더니 말했다.

“저는 이곳의 지점장인 고덕성이라 합니다. 본 상단의 절차에 따라 양해를 구할 게 있는데, 저는 보안 등의 이유로 이 동패의 주인에게 몇 가지를 따로 여쭤야 합니다.”

“그러십시오. 혹시 전음이 가능하시면 창가 쪽에서 따로 전음으로 대화하시지요.”

고덕성이라는 사내가 무공을 익힌 듯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가 대꾸했다.

“예, 알겠습니다.”

이에 우리는 곧 창가 쪽으로 이동했다.

잘 꾸며진 정원이 보이는 창가에 서자 고덕성이 전음을 보내왔다.

[일련번호를 보니 이 동패는 상단의 남창지점에서 송유겸 공자에게 발급한 동패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 공자께서는 송유겸 공자와 어떤 관계십니까?]

이에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제가 송유겸입니다.]

[예……?]

[지금은 면구를 쓰고 있는 겁니다.]

[허……! 저, 저, 정말이십니까? 정말 그 송유겸 공자시란 말입니까?]

못 믿겠다는 투가 아니라 너무 놀라서 믿어지지 않는다는 투다.

그에게 물었다.

[절차상 확인도 필요합니까?]

만약 확인이 필요하다면 면구를 벗어 보이면 된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 아닙니다. 확인을 안 해주셔도 저는 이 동패의 주인에게 최대한 협조해야 합니다. 단지, 그 유명한 창천비룡 송유겸 공자께서 저희 지점을 방문해 주셨다는 게, 게다가 제 바로 앞에 계신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이에 빙그레 웃어 보이고는 잠시 몸을 돌려서 면구를 떼어냈다. 이후에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대충 문질러, 얼굴에 붙어 있는 접착제를 대충 제거했다.

그리고 다시 고덕성 쪽으로 신형을 돌리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저저, 정말로 송……!”

고덕성이 황급히 양손으로 본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도 모르게 전음 대신 육성이 나온 모양이다.

이에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하하, 괜찮습니다. 저분도 제 정체를 알고 있으니.”

“아……! 그,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세상에 이런 일이……! 송유겸 공자가 바로 내 앞에 계시다니……!”

“저는 지금 행적을 감춘 채로 움직이는 중입니다. 그래서 면구를 착용한 거고요. 그러니 저와 만난 건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저만 알고 있을 겁니다.”

대꾸한 고덕성이 서둘러 필묵통과 종이를 꺼내더니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뭐든지, 전부 말씀해 주십시오. 단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일단 쉬실 공간부터 특실로…….”

“쉴 공간이라면 괜찮습니다. 저희는 바로 떠날 겁니다.”

“예에? 바로 떠나신다니요? 이왕 이곳에 들르신 길이니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푹 쉬시다가 가시지 왜…….”

“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제가 일정이 바빠서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아이고오, 이렇게 아쉬울 데가…….”

“포양호까지 갈 쾌속선을 부탁드리고 싶어서 온 겁니다.”

“아! 쾌속선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예, 딱히 없습니다.”

“정녕 없으십니까? 뭐든 상관없으니 말씀만 해주시면…….”

애원하는 투다.

“하하, 지점장님의 그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혹시 이후에라도 필요한 게 생각나시거든 꼭 말씀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일단 나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후 응접실의 문 쪽으로 향하던 고덕성이 문 앞에서 갑자기 홱 돌아서더니 말했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습니다. 급하게 떠나신다고 해도 제가 식사 한 끼만큼은 꼭 대접하고 싶습니다. 더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을 테니, 이 요청만큼은 들어주십시오.”

“아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고덕성은 그제야 다소 안도하는 표정을 짓더니 예를 취하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와아……! 그야말로 극진한 대우네.”

관산영이 혀를 내둘렀다.

고덕성과 함께 이른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나루터에 대기하고 있던 쾌속선에 올랐다.

예상은 했지만, 직접 올라서 보니 역시나 초호화 시설이 갖춰진 쾌속선이었다.

이러면 포양호까지 편하게 갈 수 있을 것이다.

관산영도 너무 좋다며 환호했다.

저 여자 저거, 같이 지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본인의 처지를 망각하는 것 같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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