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409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
난데없이 비명이 들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길초량이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 전음을 보내왔다.
[사,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물을 텐데 어찌하는 게 좋겠소?]
[어찌하긴 뭘 어찌하오. 사실대로 얘기해야지. 핑계 댈 만한 게 없잖소.]
[하, 하지만…….]
[사실대로, 그전에 길 형이 쓰던 방을 지금은 다른 여자 손님이 쓰는 중이다 보니 벌어진 사고라고 얘기합시다. 하필 여자 손님이 옷을 갈아입던 중이어서 일이 이렇게 됐다고.]
[난 정말 고의가 아니었소. 문을 열고 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오.]
이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길초량이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이 안에 계신 분한테 너무 큰 실례를 범했구려…….]
[내 지인이니 내가 잘 얘기해보겠소.]
그때쯤 사람들이 본채 안으로 들어왔기에, 우리는 서로를 향해 한 차례씩 고개를 끄덕인 후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곧 여러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가장 앞서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제갈수광이었다.
“무슨 일이야?”
다소 놀란 표정이다.
그의 뒤로 많은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아, 그게……. 이곳은 좁으니 일단 거실로 가시죠.”
이후에 우리는 거실로 이동했고, 나는 모두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명을 모두 듣고 난 제갈수광이 말했다.
“내가 알기로 길초량은 변태나 치한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 사고라고 봐야겠지. 그러니 그 방의 손님에게 공손히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 수밖에.”
그러자 이번에는 선우린이 말했다.
“맞아요. 길초량 선배님이 절대 고의로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거,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저희도 그 손님에게 잘 말씀드려볼게요. 아무래도 손님이 여자시니까, 같은 여자가 얘기하면 좀 더 나을 거예요.”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길초량을 걱정해주고 있다.
제갈수광이 말했다.
“그건 그렇게 해결하기로 하고…….”
그가 말꼬리를 늘어뜨리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송유겸 네가 벌써 도착해 있을 줄은 몰랐군. 시일이 상당히 걸릴 것이라고 전해 들었는데.”
“아하하, 일이 빨리 끝나서 이렇게 됐습니다.”
내가 대꾸하자 이번에는 남궁설이 말했다.
“그 여자 손님, 송 오라버니의 손님일 것 같은데 누구예요? 본채에 머물도록 배려한 걸 보면 보통 사이가 아닌 모양인데.”
미소 짓고 있는데, 시선이 날카롭다.
“하하, 그냥 사업 동료야.”
“사업 동료? 무슨 사업인데요?”
“이따가 정식으로 소개하면서 말해줄게.”
“흠…….”
남궁설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였다.
그 직후, 모든 이들의 시선이 갑자기 내 후방으로 향했다.
왜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뒤쪽에서 관산영의 기척이 다가오는 게 느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관산영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나는 눈매를 좁히지 않을 수 없었다.
우아한 옷을 차려입은 것까지는 좋은데, 몸매가 너무 잘 드러나는 옷이었던 탓이다. 게다가 머리카락이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채로 찰랑거리고 있다 보니 더 고혹적인 느낌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인 친우들의 동공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산영을 보고 있는 여인들은 애써 놀람을 감추려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 때문일 것이다.
다가온 관산영이 멈춰서더니 모두에게 공손히 포권하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중경에서 온 이교영이라 합니다.”
그녀가 포권을 풀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소란을 일으켰던 점, 사과드립니다.”
말을 마친 관산영이 상체를 살짝 숙였다가 펴자 길초량이 그녀의 앞으로 나섰다. 그러더니 관산영을 향해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송 형의 손님에게 초면부터 크나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송구합니다. 결코 고의는 아니었습…….”
그러자 관산영이 길초량의 말을 끊었다.
“허리를 펴세요, 공자.”
그 말에 길초량이 천천히 허리를 펴자 관산영이 말했다.
“문을 잠그지 않았던 제 책임도 큽니다. 제가 평소에 혼자 지내다 보니 집 안에서는 방문을 잘 닫지도 않고 잠그지도 않는데, 그 습관 때문에 외부에서도 간혹 깜빡하곤 해서…….”
잠시 말을 줄였던 관산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서 얼핏 들어보니 제가 지금 쓰고 있는 방이 이전에 공자가 쓰던 방이었던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이번에도 당연히 그 방을 쓰는 줄 알고 오셨다가 아까의 상황이 벌어진 거라고…….”
“그렇습니다. 저는 빠르게 짐을 던져놓고 송 형을 보러 갈 생각뿐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생각 자체를 전혀 안 했던지라…….”
길초량이 그렇게 대꾸하자 관산영이 말했다.
“그렇게 된 일이었군요. 공자의 말씀을 듣고 나니 단순한 사고였다는 걸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 공자께서는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쓱 둘러보니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걸리고 있다. 호감 어린 미소다. 다들 관산영의 저러한 태도가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녀가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첫인상을 좋게 심는 데는 성공한 듯하다.
관산영이 길초량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도 송 동생과 상당히 친한 사이이신가 봐요. ‘송 형’이라는 호칭을 쓰시는 걸 보면.”
그러자 선우린이 관산영에게 대꾸했다.
“아, 송 오라버니하고 길 선배님은 절친이거든요. 잠룡관 시절부터 쭉.”
“아…….”
관산영이 나와 길초량을 번갈아 일별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길초량에게 말했다.
“송 동생의 절친한 친우라면 더욱 명확해지네요. 송 동생이 여인을 상대로 허튼짓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저도 잘 알거든요. 그리고 예로부터 유유상종이라고 했지요.”
그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더 밝아졌다. 관산영에 대한 호감이 계속 올라가고 있는 모양새다.
“그런데 ‘송 동생’이라고 부르시는 걸 보니 손님께서도 송 오라버니와 매우 친하신가 봐요? 어떤 사이시길래.”
남궁설의 목소리다.
그쯤에서 나는 관산영의 옆으로 나섰다.
“아, 내 사업 동료야.”
어쩌다 보니 다들 모이게 된 만큼, 나는 모두에게 관산영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관산영을 소개한 후, 그녀가 한동안 장원에서 지낼 계획임을 알렸다. 그러자 다들 잘 지내보자며 관산영과 인사를 나눴다.
이후에는 모두 각자의 거처로 흩어졌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짐 풀 새도 없이 이곳으로 달려왔던 탓이다.
이에 나도 송유하, 길초량과 함께 본채의 이 층으로 올라왔다.
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기 위해 곧장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서재로 향했다.
잠시 후, 공은림이 서재로 찾아왔다.
“조교님.”
“어, 그래. 어서 와.”
일 층에 있는 본인의 방에 짐만 놓고 온 것이다. 내가 그러라고 했다.
공은림이 서재의 문을 닫은 후 집무 탁자 앞으로 다가왔다.
“부탁할 게 있어서 말이야.”
“기대돼요. 조교님이 이렇듯 저를 따로 부르실 때는 대개 흥미로운 사안이어서.”
이에 그녀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인 후, 작은 목함 하나를 집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공은림이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뭔가요?”
이에 육성 대신 전음으로 대꾸했다.
[약이야.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 봐줬으면 해서.]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공은림이 바로 다시 물었다.
[오, 어떤 약인데요?]
[영약 비슷한 거라는데, 성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라. 중원의 물건이 아니거든.]
[그럼 새외에서 온 거예요?]
[어.]
[구체적으로 새외의 어디에서 온 물건인지는 모르시고요?]
[파사국으로 알고 있어.]
[오호, 파사국이라니……!]
공은림의 눈빛과 표정에 흥미가 가득 담겼다.
그녀가 목함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기면서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혹시, 조교님의 손님을 통해 입수하신 건가요?]
우리가 투자 사업에서 귀중품과 고가품도 다룬다고 밝혔더니 저 질문을 하는 것이다.
[어, 뭐, 그렇지.]
[좋은 분 같아요.]
[그래 보여?]
[네. 여기 올라오기 전에 잠깐 마주쳤는데, 현관 밖으로 나가시길래 어디 가시는지 여쭤봤거든요. 그랬더니 유 총관님을 뵈러 간다고 하시더라고요. 궁금해서 왜 유 총관님을 뵈러 가는지도 여쭤봤죠.]
[그랬더니 뭐래?]
[모두가 전장에서 복귀한 날이니 좋은 술을 지원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근래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버셨다면서, 이곳에서 지내게 된 김에 한턱내고 싶으시다고.]
관산영 본인은 외부로 출타하지 않기로 했으니, 유영평에게 자금을 지원해서 대신 부탁하려는 모양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장원 사람들에게 점수를 제대로 따게 될 것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술꾼이니까.
이곳에서 잘 지내보려는 노력이 나름 가상하다.
공은림이 말했다.
[분석해서 이전처럼 조용히 말씀드리면 되는 거죠?]
[응.]
[네. 그럼 조만간 보고드릴게요.]
내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떡이자 공은림이 인사하더니 서재를 벗어났다.
활 하나와 활시위 하나를 챙겨 송유하의 방으로 향했다. 관산영의 은신처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문을 두드리며 나임을 밝히자 송유하가 방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서 보니 짐 정리에 한창인 모습이었다.
“방해한 거 아닌지 모르겠네?”
“그럴 리가요.”
대꾸하는 중에도 송유하의 시선은 이미 내가 들고 있는 활 쪽으로 향해 있는 상태다. 활을 좋아하는 그녀다 보니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선이 가는 것이다.
이에 곧바로 활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 이거, 선물로 주려고 가져온 거야.”
“갑자기 선물이라니요?”
“운 좋게 좋은 물건을 구했거든. 그래서 누이 주려고.”
말하면서 활을 내밀자 송유하가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그러더니 활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말했다.
“과거 발해국 최고의 장인이 만든 활이래.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송유하가 익힌 무공도 발해국의 후예인 연승휴의 무공이니, 활도 발해국의 활로 가져온 것이다.
송유하가 활에서 시선을 떼고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그러면……, 가치가 어마어마한 활일 거 아니에요.”
“아마도?”
“아무리 오라버니의 선물이라고 해도 이런 귀한 걸 덥석 받을 수는…….”
“좋은 무기는 훌륭한 주인에게 쓰여야 비로소 진가가 발휘되는 법이야. 주인을 잘못 만나면 망가지거나, 의미 없이 보관되고만 있거나, 둘 중 하나지. 즉, 지금 이 활의 입장에서는 누이가 최고의 주인인 셈이야.”
“하지만…….”
“그냥 써. 그 활로 우리를 더 잘 지켜주면 되지.”
그러자 송유하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체념한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알았어요. 그럼 감사히 쓸게요.”
이에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준 후, 손에 들고 있던 시위도 건넸다.
“시위는 이걸 써.”
관산영의 은신처에서 가져온 두 개의 시위는 모두 성능이 은룡삭의 반 정도다. 그중 검은빛을 띠는 시위가 성능이 더 좋은데, 방금 그걸 건넨 것이다.
활 자체도 명궁이고 시위도 일반적으로 쓰이는 시위와 비교하면 최상급이니, 은룡삭을 쓸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위력적인 성능을 낼 것이다. 물론 은룡삭을 쓰면 훨씬 더 위력적일 테고.
송유하가 순순히 시위를 받아 들며 말했다.
“감사해요, 오라버니.”
이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럼 마저 정리해.”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을 때였다.
“이번 광서 수복전과 귀주 수복전에서 실전을 통해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그리고…….”
내가 돌아서자 송유하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에게 더 감사하게 됐어요.”
“새삼스럽게 뭘 또.”
“오라버니가 초창기에 제게 기본기를 가르쳐주실 때부터, 철저하게 실전을 염두에 두고 지도하셨다는 걸 절실히 느낄 수 있었어요. 위태로운 순간마다 그 상황에서 뭘 우선시해야 하는지 금방 판단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몸에 밴 기본기가 저절로 반응하는 느낌이었어요. 그 덕분에 위기에서 무사할 수 있었구요.”
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에 말했다.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지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야. 지루함을 참고 꾸준히 해야 하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거든. 하지만 누이는 그걸 꾸준히 해온 거지. 결국 누이가 열심히 한 결과야.”
“오라버니에게 감사하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또 그런 식으로 말씀하셔…….”
“그게 사실이니까.”
빙그레 웃으며 대꾸하자 송유하도 졌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물오른 미모 때문인지, 미소 지은 저 얼굴이 이전보다 더 예뻐 보인다.
“앞으로도 열심히 배우고 부지런히 수련할게요.”
“누이는 잘할 거야. 이번에도 누이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었고. 다만 실전에서는 자신감이 생겼을 때가 가장 위험할 수 있어. 그러니 냉정을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 항상 그걸 명심해.”
“네, 오라버니.”
또렷한 눈으로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믿음직하다.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준 후, 연회장에서 보자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석양이 질 무렵, 조용히 본채를 나서서 비룡장의 내원을 벗어났다.
비룡장의 내원과 외원을 잇는 완만한 비탈길의 양옆에는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그 나무들의 아래에는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한동안 나무 아래의 긴 의자에 앉아 있다 보니 멀리에서 걸어오는 관산영이 보였다. 사실 내가 이곳에 나와 있었던 이유도 그녀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곧 관산영도 나를 발견하고는 빠르게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해?”
“누나를 기다리고 있었소.”
내 말에 관산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 누나……?”
둘만 있을 때 나는 그녀를 ‘귀하’라고 불렀었다. 그런데 지금은 둘만 있는데도 내가 ‘누나’라고 부르니 저런 반응인 것이다.
“우리 장원 사람들의 눈치가 보통이 아니오. 들키지 않으려면 평소에도 제대로 습관을 들여놔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그거야 맞는 말이기는 한데, 그럼 나도 둘이 있을 때는…….”
‘동생’이라는 호칭으로 불러도 되느냐는 뜻이다.
“그렇게 하시오.”
내가 대꾸하자 관산영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잠시 걸읍시다. 이쪽 절벽으로 가면 저 낙조가 호수면 위에 비쳐서 더 멋지거든.”
“응!”
관산영이 곧장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스무 걸음 남짓 말없이 걷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유 총관님한테 다녀오셨다고?”
“들은 모양이네. 최고급 술을 넉넉하게 준비해달라고 부탁하고 자금을 좀 지원해드렸지.”
“아까 보니 누나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에 호감이 가득하던데, 최고급 술까지 대량 지원했다고 하면 호감이 더 상승하겠구려.”
그러자 관산영이 말없이 몇 걸음을 걷다가 대꾸했다.
“일촉즉발의 현 강호 구도에서 나는 당신, 아니 동생을 선택했고 이제 돌이킬 수가 없잖아. 나는 한동안 이곳에서 지내게 될 거고, 만약 이곳 사람들이 싸우면 나도 같이 싸우게 될 가능성이 크지. 그러니 이왕이면 모두와 잘 지내고 싶다고 할까. 그러려면 일단 호감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관산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괜찮소? 아까의 일은 말 그대로 사고였지만, 그래도 누나로서는 매우 당황스럽고 창피하고 민망했을 거잖소. 한데 어디에 하소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고.”
그러자 그녀가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걷더니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동생은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구나.”
“풋, 갑자기 무슨.”
“내 기분을 거기까지 헤아려줄 줄은 몰랐거든.”
그렇게 대꾸한 관산영이 시선을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생각 하면 여전히 창피하고 민망해. 그래도 길 공자가 진심으로 사과했잖아. 그거면 됐지, 뭐. 아까도 말했지만, 문을 안 잠근 내 과실도 있고.”
이에 나는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여줬다.
“그리고 길 공자 말인데, 좋은 사람 같더라. 동생의 가장 친한 친우라고 하니까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지만.”
“좋은 사람이고 매력적인 사람이오. 지내다 보면 알게 될 것이오. 이번에는 길 형이 얼마나 머무를지 모르겠지만.”
“아, 보통은 오래 안 머물러?”
“길 형도 나름대로 바쁜 사람이라서 말이오.”
“뭐랄까, 이곳의 수많은 백도인들 사이에서도 기도가 좀 특별한 느낌이긴 하던데.”
길초량의 기도에는 달마하원의 정심함과 신룡대의 실전성이 섞여 있어서 매우 복합적이다. 관산영도 고수다 보니 길초량의 기도가 지닌 성질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내가 대꾸하지 않자 관산영이 말했다.
“어쨌거나 좋은 사람이고 동생의 가장 친한 친우이기도 하니, 지난 사고는 잊고 잘 지내도록 노력해볼게.”
“민망함이 좀 사라지고 나면 잘 지낼 수 있을 것이오.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거든. 재미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관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우리는 절벽에 도착했고, 관산영은 낙조가 너무 예쁘다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우리는 어둑어둑해졌을 무렵에야 비룡장의 내원으로 돌아왔다.
동쪽 별채는 이미 시끌시끌했다. 다들 이미 연회장에 모여 있는 모양이다.
우리도 그대로 동쪽 별채의 입구로 들어섰다.
현관에서 두 사람이 우리를 반겼다.
유영평과 유단금이었다.
장원으로 복귀해서 유단금과 마주친 건 처음이라,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우와! 이게 누구야? 단금 소저, 잘 지냈어?”
“네에. 오랜만에 뵈어요, 공자님.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늘 그렇듯 수줍어하는 기색이다. 귀엽다.
옆에서 관산영이 말했다.
“아까 총관님을 뵈러 갔을 때 유 소저와도 인사 나눴어.”
이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영평이 말했다.
“다들 연회장에 모여 계십니다. 아, 그리고 무림맹의 선박을 운행한 선장과 선원들도 내일 새벽에 출발한다고 하기에 송풍장의 숙소를 내어줬습니다. 송 장주님께서 잘 대접해서 보내라고 하셔서 좋은 숙소로 내드렸습니다. 그들도 지금 이곳의 식당에서 맛있는 요리와 술을 즐기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유 총관님이 잘 신경 써주셨군요. 감사합니다.”
“허헛, 감사라니요.”
민망해하며 그렇게 대꾸한 유영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청선곡의 전 곡주님이신 허 곡주님께서도 와 계십니다.”
허죽신을 말하는 것이다.
“오, 그렇습니까? 언제 오셨지……?”
“장원에 도착하신 지 일다경도 안 됐습니다. 도착하시자마자 하 공자의 숙소에 짐만 두고 연회장으로 향하신 겁니다.”
하조혁의 숙소에 짐을 뒀다는 뜻이다.
“그렇군요. 어서 가서 인사드려야겠습니다. 올 사람은 다 온 듯하니 유 총관님도 같이 올라가시지요.”
“아, 추가로 주문한 술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곧 도착할 시간이니 그것만 확인하고 올라가겠습니다.”
그냥 대충 하고 같이 올라가자고 하고 싶지만, 유영평은 업무 쪽으로는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에 말했다.
“그럼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올라오시는 겁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유영평이 대꾸했다.
나는 유단금에게도 한 차례 시선을 준 후, 관산영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식당 옆의 복도를 지나치는데, 선원들의 수가 제법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리 시끄럽지 않은 점이 흥미로웠다.
무림맹의 선원들답게 점잖은 사람들인 건가?
어쨌거나 지금은 막 식사가 시작됐을 시간이니, 인사는 이따가 잠깐 와서 하는 게 나을 듯하다.
그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걷던 어느 순간, 나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원 중 하나의 기운에서 왠지 모를 부조화를 느낀 탓이다.
얼핏 다른 선원들의 기운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는 듯한데, 약간의 어색함 같은 게 느껴진다. 일부러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 있다. 그게 오히려 내게는 부조화로 다가온 것이다.
의문을 가지고 그 기운을 분석해가던 한순간, 나는 놀라며 우뚝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게 부조화로 다가온 그 기운이, 실제로는 이미 매우 넓은 범위에 퍼져 있었음을 이제야 알아챈 탓이다. 내가 언제부터 그 기운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었는지조차 전혀 추측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쯤 되자 나는 넓게 퍼진 그 기운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거대한 존재감을 감추기 위해, 아예 인근의 모든 기운과 조화를 이루려 시도하며 자연스러운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존재감의 주인이 사마의 기운을 익힌 인물이었다면, 백도의 기운들이 많은 이곳에서 이런 식의 조화를 이뤄내는 건 불가능했다.
즉, 그 거대한 존재감의 주인은 백도인이다.
내가 아는 한, 이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인물은 백도에 한 사람밖에 없다.
맹주 운천흠.
바로 그다.
그래서 더 놀랍다.
맹주가 이곳에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그리고 그 순간, 내 귓전으로 한줄기 음성이 날아들었다.
[역시 창천비룡이군. 이쯤 되니 무서울 정도야.]
역시나 내가 아는 맹주 운천흠의 목소리다.
전음으로 대꾸하고 싶지만 대꾸할 수가 없다. 그와 나의 사이를 벽이 막고 있기 때문이다. 운천흠이 내게 음성을 전달한 방식이 단순한 전음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서 내 존재를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백도 내에 다섯 명도 되지 않는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