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땅거미 질 때
『내일은 수영장에 가자.』
어제 대표선발전에서 가볍게 10연승을 거둔 잇키는 아야세와 헤어질 때 그렇게 말했다.
딱히 놀러 가자는 뜻은 아니었다.
아야세는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연일 잇키와 함께 행하던 단련으로 아야세의 몸에는 차곡차곡 피로가 쌓여갔다.
특히 자세를 교정해서 지금까지 그다지 쓰지 않았던…… 즉, 단련되지 않았던 근육을 쓰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오늘은 몸을 쉬는 날로 정했다.
그리고 잇키는 그런 날에 할 트레이닝 메뉴로써 가장 적절한 훈련을 알고 있었다.
오늘은 그 훈련을 행하기 위해 수영장에 가게 되었지만,
"……스텔라도 가는구나."
아침, 교문 앞에서 아야세를 기다리는 잇키 옆에는 초여름에 어울리게 시원스러운 하얀 원피스를 입은 스텔라가 서 있었다.
"당연하지. 눈을 떼면 잇키가 또 선배에게 성추행을 할지도 모르고."
"성추행 같은 거 안 했어."
"거짓말. 그렇게 말해도 요전번에 했잖아. 보통 여자아이의 안쪽 허벅지 같은 곳을 만져?"
"그건 자세를 교정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니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잘못된 걸 가르쳐줄 수는 없으니까, 정말 너무 긴장해서 그런 켕기는 일을 생각할 여유 따위 없었어."
요 며칠 스텔라는 조금 저기압이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잇키라고 해도 알았다.
자신이 아야세만 상대해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리라.
뭐, 그렇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잇키 역시 어떤 이유가 있든지 간에 스텔라가 다른 남자와 사이좋게 지내면 결코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텔라는 잇키의 연인이기에.
그래서 스텔라의 기분도 이해했다.
그렇지만,
"저기, 스텔라. 나는 정말로 아야츠지 선배를 그런 눈으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그것만은 믿어줘. 아야츠지 선배와는 같은 검객 동료로서 조언할 뿐인 관계야.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할 때는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잇키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잇키를 도와주어야 할 어른들이 하나같이 잇키를 적으로 돌렸기에.
그렇기에 혹시 누군가가 벽에 부딪힌다면 그 벽을 뛰어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강하게 바라는 것이다.
그 벽을 혼자서 계속 뛰어넘어온 잇키는 그 괴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내가 아야츠지 선배에게 힘을 빌려주는 건 그런 이유이지, 결코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야. 그건 맹세할게. 왜냐하면…………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스텔라니까."
"……잇키…………."
잇키의 고백에 스텔라는 뺨을 발그레 물들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흔들리는 붉은색 눈동자에는 역시 조금 불안이 비쳤다.
그랬다, 사실은 스텔라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잇키가 아야세에게 스텔라가 우려하는 것 같은 감정을 일절 품지 않았다는 사실 정도는.
그녀가 좋아하게 된 사람은 그런 경박한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그저, 아무리 그래도 불안해졌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사이에는 그저 서로 말로만 나눈 약속이 있을뿐이었기에.
그 약속을 뒷받침할 행위는 무엇 하나 행하지 않았다.
문득 스텔라의 입술이 무언가를 바란다는 듯이 쓸쓸하게 움직였다.
그 연한 복숭앗빛 입술의 움직임이 잇키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아, 그랬다.
지금 여기에서, 그날 밤에 했던 말이 그저 빈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드러내면 스텔라도 지금보다 훨씬 자신을 믿어주지는 않을까.
'나는………….'
잇키는 꿀을 찾아 꽃으로 날아드는 벌처럼 스텔라의 입술에 이끌려,
"기다렸지!! 수영복을 좀처럼 찾을 수 없어서 늦었어!"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음? 왜 그래, 두 사람 다. 마치 밀회 현장을 들킨 커플처럼 비명을 지르고."
"우와, 비유 적중?!"
뜻밖에 날카로운 아야세의 말을 듣고 두 사람은 나란히 식은땀을 흘렸다.
"아, 아아아무 일도 아니야! 그렇지, 잇키!"
"응! 갑자기 말을 걸어서 깜짝 놀랐을 뿐이라고!"
"…………?"
아야세는 두 사람이 허둥대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확신을 얻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잇키는 서둘러 자리를 옮기려고 두 사람을 이끌고 출발하기로 했다.
위험한 참이었다.
스텔라의 입장상 두 사람의 교제는 세간에서 들썩일 스캔들이었다.
좋은 분위기를 만든다 해도 제대로 장소를 가려야 했다.
'……그렇지만 지금 건 아까웠어.'
그날 밤 이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생긴 좋은 분위기였다.
아야세가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두 사람이 어우러져 다음 단계를 밟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 기회를 놓친 것이 매우 커다란 손실로 느껴져 잇키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
하군 학원의 널따란 부지에는 당연히 수영장도 존재했다.
전체 길이 100미터급의 수영장이 두 개나 있었다.
그러나 그날 제1수영장 쪽은 정기 청소로, 제2수영장 쪽은 하군 학원 이사장이자 이전 KOK 세계 랭킹 3위인 신구지 쿠로노가 하는 특별 강습으로 대절 상태였다.
그렇기에 세 사람은 학원 부근에 있는 스포츠 센터의 실내 수영장으로 왔다.
남자의 준비는 여자에 비하면 빠르다.
그래서 잇키는 앞서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인 트렁크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여자 두 사람을 풀사이드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잇키 보다 몇 분 뒤 스텔라와 아야세가 각각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왔다.
아야세는 부끄럼쟁이에 성실한 성격에 걸맞게, 그대로 피트니스에도 사용할 수 있을 법한 활동적인 디자인의 투피스 수영복이었다.
색기는 적지만 어릴 적부터 꾸준히 해온 검술로 균형 잡힌 체형은 건강하고 멋진 매력을 자아냈다.
그러나 역시 한층 더 눈길을 끄는 사람은 옆에서 걷는 스텔라였다.
스텔라의 수영복은 이전에 잇키가 기숙사방의 욕실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검은 끈 비키니였다.
아야세의 수영복은 물론이거니와 일반적인 비키니와 비교해도 명백히 천의 면적이 적어서, 걸을 때마다 출렁출렁 흔들리는 커다란 질량의 흰 복숭아 같은 가슴이 지금 당장에라도 비어져 나올 것 같아서 조마조마했다.
가슴뿐만이 아니라 허리둘레도 군침을 삼킬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일본인에게서는 그다지 볼 수 없는 쑥 튀어나온 엉덩이.
그곳에서 뻗은 각선미가 눈이 부셨다.
그만한 힘이 있으면서 어째서 이렇게 부드러워 보이는 달콤한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의문은 잇키의 안력으로도 수수께끼였다.
너무나 불가사의했다.
사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요소 모두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걷는 방식이었다.
황족으로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스텔라는 걷는 자세가 매우 아름다웠다.
마치 파리 컬렉션에 나오는 모델 같았다.
'역시……스텔라는 예쁘구나.'
저도 모르게 잇키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잇키뿐만이 아니었다.
풀사이드에서 쉬고 있던 손님은 물론이거니와 수영 코스에서 헤엄치고 있던 이조차도 움직임을 멈추고 갑자기 나타난 이국의 미소녀의 모습에 못이 박혔다.
스텔라는 대중 매체에 얼굴을 내밀기도 해서 어쩌면 그녀를 아는 사람도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스텔라는 그런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모으면서,
"기다렸지. 역시 남자는 준비가 빠르구나."
잇키에게 말을 걸었다.
순간, 잇키는 화살처럼 날카로운 살기가 자신의 온몸을 꿰뚫는 감각을 느꼈다.
"하아?! 저거저거 뭐야, 저 미인 두 명 다 저 남자의 일행인가?!"
"거짓말이겠지……. 저렇게 귀여운 아이가 어째서 저런 촌스러운 녀석 따위와……."
"이것 보라고, 이런 폭거가 기혼률이 떨어지는 이 나라에서 용납되리라고 생각하나."
"저 녀석, 쳐 죽여 버리겠어."
'까딱하면 나는 오늘 불의의 사고로 익사할지도 모르겠네.'
잇키가 식은땀을 흘리는 것과는 상관없이 스텔라는 무엇인가 신기한 기색으로 빙그르르 실내 수영장 전체를 둘러보았다.
어쩐지 함께 생활하고 있으면 의식하지 않게 되지만, 스텔라는 일국의 공주인 것이었다.
서민의 실내 수영장 같은 곳은 처음 와본 것이리라.
수영장은 학원에 있는 것보다는 좁은 50미터급 풀.
그것을 수영 코스와 놀이 공간 2개로 코스 로프를 이용해 갈라놓았다.
아직 6월이기도 해서 입장객은 적었다.
"꽤 넓구나."
"버밀리온 양은 공주님이지? 그렇다면 역시 본가에도 이런 수영장이 있어?"
"없어. 욕탕이라면 이 정도 넓이는 있지만."
"와아! 굉장해! 부자구나!"
"그렇다고는 해도 사용인용 대욕탕이야. 황족용 욕탕은 좀 더 좁아. 적은 인원수로 커다란 욕실이라니 쓸쓸할 뿐이고."
돌이켜보면 스텔라는 평소에도 그다지 생활수준의 차이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인스턴트 커피의 존재에 놀랐던 모습 정도였다.
버밀리온 황국은 작은 나라인데다, 황족도 제법 검소한 생활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행이야. 소문으로 들었던, 콩나물시루처럼 북적대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사람도 적으니까 그럴 걱정은 없겠네."
"뭐, 아직 본격적인 수영장 시즌이 아니니까 말이지."
"이렇다면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놀 수 있겠네!"
어째서인지 들뜬 얼굴로 비치볼을 꺼내드는 스텔라.
"아니, 놀러온 게 아닌데 말이야."
"뭐어. 그럼 너 수영장에 뭐 하러 온 거야."
"스텔라야말로 뭐 하러 온 거야……."
"으윽, 모처럼 가지고 왔는데."
"……알았어. 그럼 단련을 끝마치면 다 함께 하자. 그러니까 지금은 볼은 넣어두기로 하고."
"어쩔 수 없네……. 그렇지만 나중에 꼭 노는 거야."
마지못해 하는 모습으로 스텔라는 잇키에게 볼을 넘겼다.
아무래도 스텔라는 정말로 놀러 온 모양이었다.
이상했다.
오늘은 단련을 하러 수영장에 간다고 전했을 터인데…….
일러
"그런데 쿠로가네. 오늘은 어떤 단련을 하는 거야? 역시 수영을 하는 건가?"
아야세의 질문에 잇키는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아니, 아까 전부터 단련 단련하며 반복하고 있지만, 실은 오늘은 단련이라고 할 만큼 무거운 훈련은 하지 않아. 슬슬 몸에도 피로가 쌓였을 시기이고 말이야."
"그럼 뭘 하는 거야?"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무것도 안 해."
"어?"
"해파리처럼 둥둥 물속을 떠돌 뿐."
"그, 그것만 해도 무언가 단련이 돼?"
"돼."
잇키는 딱 잘라 말했다.
"일단은 당연하겠지만 폐활량이 단련이 돼. 전투에서 발생하는 난타전. 이것은 무산소운동이야. 폐활량이 적은 쪽이 먼저 두 손 들고 패배하지. 우리들 기사에게는 근력이나 체력과 맞먹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야. ……그렇지만 뭐, 솔직히 오늘 이쪽은 덤 같은 거야."
그랬다, 이 단련에는 좀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한번 해보면 알겠지만, 물속에서는 자기 자신이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져."
"…………?"
잇키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겠는 것이리라.
아야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귀여웠다.
"물속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떠다니면서 서기 위해 주는 힘도, 시야의 풍경을 보며 이해하기 위한 의식도 전부 잊어버리고 그저 자신의 안쪽에만 의식을 향해봐. 그리고 자기 자신의 소리를 듣도록 해."
"……잘 모르겠지만, 해볼게."
결국 잇키가 자신에게 무엇을 시키려 하는지 아야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야세가 잇키를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얌전하게 지시에 따르며 숨을 들이마신 다음 아야세는 물속으로 몸을 가라앉혔다.
'아야츠지 선배 정도로 검술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번 해보면 이 훈련의 의미는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아마도 아야세의 폐활량으로 짐작해보면 3분 정도는 잠겨 있으리라.
"그럼 나는 이 볼을 일단 사물함에 넣어두고 올게. 여기에 두어도 방해되고."
그 시간에 잇키는 스텔라가 가져온 볼을 철수시키기로 했다.
◆
잇키가 어딘가로 가버리자 스텔라는 지루해졌다.
스텔라는 딱히 아야세와 접점이 있지도 않았고, 아야세의 검술에 대해서도 몰랐다.
그래서 화제가 없었다.
무엇보다 용건도 없는데 말을 걸어서 아야세의 단련을 방해하기는 미안했다.
'한가하네…….'
스텔라는 한가해서 무심코 잇키가 아야세에게 설명해준 단련법을 실행해보았다.
숨을 들이마시고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괴롭지는 않았다.
스텔라의 폐활량은 잇키의 그것보다 아득히 많았다.
그럴 마음이 들면 10분 정도는 계속 잠수해 있을 수도 있었다.
이미 초인의 영역이었다.
'……………………조용하구나.'
사람이 적다고는 해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수영장에는 다른 수영객이 물을 치는 소리나 아이들이 들떠서 돌아다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물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올려다보는 수면은 아스라해서 세상 그 자체가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반면…… 귓가에서 자신의 고동이 들려왔다.
밖에 있을 때에는 잡음 때문에 들리지 않았던 고동소리, 피의 흐름, 뇌수에서 단말까지 퍼지는 신경의 궤적, 그것들을 잡음이나 잡념이 차단된 세상에서는 훨씬 깨끗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물속에서는 자기 자신이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져.』
이것이 잇키가 했던 말의 의미였다.
그리고 스텔라 정도의 기사라면 이 정도의 일은 들을 것도 없이 이헤했다.
자신의 몸에 의식을 침투시켜가는 감각.
이 감각을 이해하는 일은 자신의 몸을 제어하는 의식을 싹 틔우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를테면 검을 휘두르는 동작 하나를 보아도, 그저 '검을 든 팔을 움직인다'는 행동과 엄지 끝에서 연동하는 모든 동작, 신경 전달, 근력 신축, 그것들 모두를 의식해서 '검을 휘두른다'는 행동을 비교하면 그 위력도 날카로움도 현격히 차이가 난다.
그리고 그런 미세한 조절은 자신의 몸 구조를 이해해야 비로소 실행할 수 있다.
아야세는 그 부분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이 부분을 갖추면 애초에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몸을 움직이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당연했다.
어디에서 무리가 일어나고 어디에서 손실이 발생하는지,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전 아야세의 움직임에 날카로움이 더해진 이유는 그 날 아야세의 컨디션에 맞춘 형태로 잇키가 자세를 교정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컨디션은 날에 따라 변덕스럽게 변한다.
그럴 때마다 자기 스스로 그때그때의 전력을 어저스트할 수 있게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자신의 힘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확실히 아야세에게는 이 단련이 매우 유효하리라.
그러나 스텔라에게는 필요 없었다.
스텔라는 이미 그 정도의 자기 통제는 일부러 의식할 필요도 없이 행해지도록 단련되었다.
단련되었기에 전날처럼 적당히 휘두른 스윙도 모든 것이 무의식중에 가장 좋은 형태로 어저스트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아직 한참 어설퍼.'
수면을 올려다보며 툭 중얼거렸다.
스텔라는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진지하게 단련해왔다.
한계까지 자신을 제어하게끔 되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생각은 착각이었다.
잇키의 '일도수라'.
──그것이야말로 맨 끝에 있는 극치였다.
자신은 아직 그 정도 수준의 영역에는 이르지 못했다.
자신을 완전히 제어해서 1분 동안 모든 역량을 끌어 쓰기는 무리였다.
그렇기에 스텔라는 체술에서 잇키에게 뒤처졌다.
폐활량은 물론이거니와 근력도, 순발력도, 온갖 신체 능력에서 잇키를 아득히 웃돌지만 결국 밀렸다.
1초 1초를 살아가는 방식.
그 태도가 다르기에.
말하자면 잇키는 지상에 서 있으면서도 오롯이 홀로, 지금 스텔라가 있는 물속보다도 훨씬 밑바닥, 소리도 빛도 닿지 않는 심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곳이야말로, 잇키의 세상이야…….'
자신도 그곳에 다다르면 아직 보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 할 수 있지는 않을까.
스텔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수면에서 내리비치는 빛은 사리지고 그저 자신의 안쪽에서 발하는 소리만이 귓가에 울렸다.
여기에 있는 존재는 자신뿐이었다.
침묵과 어둠 속에서 두둥실, 자신이 빚은 형태의 빛만이 떠오르는 비전.
그러나 부족했다.
아직 심도가 부족했다.
그렇기에 스텔라는 향했다.
깊게.
좀 더 깊게.
아득한 의식의 심해 '어나더원(무관의 검왕)' 이 사는 영역으로 손을 뻗어──.
"그런데 버밀리온 양은 쿠로가네와 사귀는 거야?"
"꼬로로로벡?!"
스텔라는 물에 빠졌다.
◆
"아려, 코가, 코가 시큰거려……. 콜록! 켈룩!"
스텔라는 코를 누르면서 눈물어린 눈으로 자신의 미숙함을 원통해했다.
의식 아래에 잠겨 있는데도 평범하게 말소리가 들리다니 수행이 부족하다는 증거였다.
이래서야 잇키가 사는 심해에는 도저히 닿을 수 없었다.
'……잇키라면 자신의 의지로 시각이나 청각을 차단하는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렇다고 해야 할까, 그 정도로 자신을 완전히 지배하에 두어야 '일도수라' 같은 곡예를 할 수 있다.
새삼스럽게 스텔라는 자신의 목표가 아득함을 깨달았다.
"미, 미안, 버밀리온 양. 괜찮아?"
"으, 응. 괜찮아……."
"그렇지만 과장된 반응은 역시……."
"우으 그그그, 그럴 리가 없잖아! 버밀리온 황국의 제 2황녀가 그런, 저런 서민과 사귀다니……!"
"정말로 사귀는 거 아니야?"
"당연하지."
"그럼 내가 쿠로가네에게 교제를 신청해도 상관없다는 말이지?"
"뭐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갈라졌다.
"자, 잠깐 기다려! 선배는 잇키에게 검을 배우고 싶었을 뿐이잖아?! 전에 켕기는 마음은 없다고 말했잖아!"
"맨 처음에는 그랬지. 그래도 봐, 쿠로가네는 정말로 신사적이고 멋진데다 나 같은 스토커 짝퉁의 부탁도 들어주었고…… 연하인데도 어른스럽잖아? 가르치는 방식도 쉽고 적확해서 나에게는 이상적인 남성이야. 최근에는 제대로 얼굴을 보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쿠로가네가 솔로라면 오늘 안에라도 좋──."
"아, 안 돼애애애애!"
참지 못하고 스텔라는 큰 소리를 내며 아야세의 말을 잘라냈다.
"안 돼, 안 돼! 저얼대로 안 돼애애애! 잇키는 내 남자친구야! 그러니까 안 돼애애애!!!!"
아이가 떼를 쓰듯이 철퍽철퍽 양손으로 물을 때리며 소리를 냈다.
자신 이외의 사람이 잇키에게 쓰는 '좋아한다'라는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소리로 말을 뭉개며 스텔라가 조금 눈물이 맺힌 눈으로 아야세를 노려보자,
"역시나."
빙글빙글 심술궂은 미소를 띠운 아야세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저질러버렸다아!'
"아까 약속 장소에서 굉장히 좋은 분위기여서 혹시나 하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랬구나."
"우으으으…… 선배가 카가미처럼 이렇게 질 나쁜 덫을 놓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 좀 더 맹하다고 생각했는데."
"버밀리온 양도 꽤 실례되는 말을 하네."
"이런 식으로 걸려들면 가시 돋친 말도 나오지. ……절대로 비밀로 해줘. 세간에 흘러나가면 조금 성가시니까."
"그건 알고 있어. 버밀리온 양은 유명인이니까 말이야."
"……그러면 아까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야?"
아야세는 까딱,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쿠로가네를 그런 눈으로 본 적은 없어. 그건 내 어리광을 들어줘서 헌신적으로 검술을 가르쳐준 쿠로가네에 대한 배신인걸. ……그렇지만 그렇구나아. 어렴풋이 그런 기분은 들었지만. 아아, 부럽다아. 나도 사랑을 하고 싶어어."
발그레 물든 뺨에 양손을 대며 꿈꾸는 소녀처럼 눈동자를 빛내는 아야세.
그 모습은 스텔라에게는 의외의 광경이었다.
"틀림없이 선배는 남성혐오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건 지독한 오해야. 나는 남자가 정말 좋아."
"선배. 그런 말을 이런 장소에서 해버리면 안 돼. 지금 가볍게 여섯 명 정도 반응한 녀석이 있다고."
"어쨌거나 나는 남성혐오 같은 게 아니야. 오히려 너무 의식하니까 부끄러운 거야. 같은 방을 쓰는 아이가 말하기를 나는 무뚝뚝한 모양이야."
'그렇게 당당하게 무뚝뚝하다고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하아, 좋겠다아. 사랑하고 싶다아……."
"하면 되잖아."
"무, 무리야, 무리. 굉장히 흥미는 있지만, 나처럼 미숙한 사람이 남자와 사귀기라도 하면 부끄러워서 죽어버릴 거야. 그래서 항상 만화나 소설로 참고 있어."
"까다로운 체질이네."
"그런데 두 사람은 역시 둘만 있을 매 야한 짓을 하거나 해?"
"쿨럭!"
갑자기 꽂아 넣은 강속구에 스텔라는 숨이 막혔다.
"무무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갑자기!"
"리얼 커플이 어떤 느낌인지 굉장히 신경 쓰여!"
눈을 빛내며 사적 영역에 파고 들어오는 아야세의 얼굴이 교실에 있는 매스컴 소녀와 겹쳐졌다.
고지식한 검도 소녀라는 아야세의 인상이 소리를 내며 무너져갔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주변에 있는 여자아이와 다름없는, 연애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하는 여자아이였다.
"안 하는 게 뻔하잖아. 아직 호적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너무 일러."
"그래? 소녀 만화에서는 그다지 호적 따위에 들어가지 않아도 야한 짓을 하니까 틀림없이 그런 거라고만."
"어, 그런 거야?! 세간에서는 호호호, 혼전 교섭이 당연해?!"
"그런 걸 남자친구 없는 경력=나이인 나에게 물어봐도 곤란해."
처량할 정도로 지당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 말투로 보아하니 버밀리온 양은 쿠로가네와 야한 짓이 하고 싶은 건가?"
'저, 정말로 푹 찔러 넣네, 이 사람!'
그렇지만 스텔라로서도 이미 커밍아웃을 한 이상 숨겨보았자 소용없는 문제였다.
이 기회에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만 해도 가슴속 불안이 가라앉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스텔라는 물에 깊이 잠겨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진심을 툭 털어놓았다.
"그,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지만…… 좀 더 연인다운 일을 하고 싶다……고나 할까."
"그럼 그걸 그대로 말하면 되잖아?"
"……그럴 수 있었으면 고생하지 않아."
"어째서?"
"왜냐하면…… 그런 말, 여자아이가 말을 꺼다니 경박하잖아."
"그럴까? 상대가 연인이라면 알콩달콩하고 싶은 건 당연하게 여겨지는데. 오히려 알콩달콩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 불건전하지 않아?"
'……어?'
새삼스럽게 제삼자가 하는 말을 듣고 보니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좋아하는 상대와 좀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마음에 남녀의 차가 있다고는………… 아니.
"그렇지만 역시 각각의 페이스라는 게 있을 거고…… 앞지른 말을 하면 헤픈 여자라고 여겨져서 미움을 받을지도 모르고……."
"설령 각각의 페이스가 있고 버밀리온 양이 앞질러버렸다고 해도, 그 정도 일로 버밀리온 양을 싫어할 정도로 쿠로가네는 박정한 사람일까?"
"그, 그렇지 않아!"
"그렇다면 아무 문제없잖아."
"그건………… 어어?"
확실히 듣고 보니 그 말 그대로였다.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어째서 그런 당연한 일을 깨닫지 못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스텔라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래서 사랑은 맹목이라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스텔라를 바라보며,
"소중한 사람과 지내는 시간은 아끼는 편이 좋아. 우리들이 생명이 있는 생물인 이상, 이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오는 거니까."
아야세가 어딘지 애수 어린 어른스러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선배가 처음 연상으로 보였어."
"덧붙여 이건 내 예상인데, 쿠로가네도 버밀리온 양과 알콩달콩하고 싶어 할 거야."
"그건 어째서?"
"버밀리온 양은 여기 왔을 때 수영장 안을 둘러보고 있어서 눈치 못 챘을지도 모르는데 버밀리온 양을 보았을 때의 쿠로가네의 눈, 굉장히 음흉했어. 뭔가 굉장히 칠칠치 못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재미있었다고."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윽!"
이게 웬 말인가.
평생 갈 불찰이었다.
엄청 보고 싶었다.
놓친 것이 한이었다.
부끄러운 생각에 스텔라가 괴로워하고 있노라니,
"어라. 아야츠지 선배는 벌써 숨이 다 찼어?"
비치볼을 두고 온 잇키가 돌아왔다.
"아니, 잠시 버밀리온 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야."
"그렇구나. 그래서 어땠어? 자신의 몸속으로 의식을 통하는 감각은 파악했어?"
"응. 이 단련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었어. 그래서 잠시 혼자서 집중하고 싶어.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도 될까?"
"그건 상관없어."
"그리고 버밀리온 양이 쿠로가네에게 할 매우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니까 들어줘."
"뭐엇?!"
갑작스러운 지적에 스텔라가 비명과도 닮은 놀란 목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야세는,
『요 근래 버밀리온 양의 남자친구를 독점했던 사죄야♪』
그렇게 윙크하면서 쓸데없이 빠른 수영으로 멀어져 가 버렸다.
'그런 사죄는 필요 없어어어어어!!'
◆
아야세가 가버린 후 잇키와 스텔라 두 사람은 풀사이드에 놓인 휴식용 벤치로 이동했다.
"그래서 중요한 이야기가 뭐야?"
"…………………………그게그러니까……."
그러나 스텔라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뺨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깐 채로 입을 다물었다.
뭐, 무리도 아니었다.
아까 전에는 아야세에게 어쩐지 이론으로 말려들어 가 버렸지만, 결국 이런 문제는 이론이 아닌 것이었다.
어째서 '좀 더 연인다운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 미움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어째서 그런 일로 잇키가 자신을 싫어하게 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그 이유를 스텔라는 잇키의 얼굴을 보고서 이해했다.
요컨대, 지극히 단순하게──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 척을 하며 적당한 이유를 붙여 문제를 계속 뒤로 미루어왔다.
어쩌면 잇키 쪽에서 말을 꺼내주지 않을까?
그렇게 자기 형편 좋을 대로 생각하면서.
그렇지만 그도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잇키에서 '키스해 줘'라고 조르다니…….
'그런 부끄러운 말, 할 수 있을 리 없다고오오오!!!!'
"……스텔라?"
"아, 미, 미안! 중요한 이야기였지, 그게 그러니까……."
그러나 아야세가 퇴로를 막아버린 이상, 적어도 무언가 말을 해야…….
"수, 수영복. 그래! 오늘 입은 수영복. 어떤가, 해서……!"
"물론 굉장히 잘 어울려. 스텔라는 몸매가 좋으니까, 그런 수영복이 정말 잘 어울리네."
스텔라가 간신히 짜내어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던진 질문에 잇키는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평상시와 같은 다정한 표정으로.
그러나 그 모습이 스텔라에게는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자신의 수영복 차림을 보았을 때 잇키가 칠칠치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말을 사전에 아야세에게 들었기 때문일까.
정말로 그렇다면 이렇게 태연하게 대답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어쩐지 아무래도 얼렁뚱땅 넘어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은 말이야, 나도 스텔라에게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잇키도?"
의외였다.
대체 무슨 일일까.
혹시나 잇키도 자신에게 수영복의 감상을 바란다든가?
그렇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스텔라가 보기에는 어떤 모습이라도 잇키는 멋지지만, 그 마음을 솔직하게 자신이 입에 담을 수 있을지 굉장히 의문이라──.
"우리들, 그, 이대로 괜찮을까, 하고 생각해서."
"어……."
"줄곧 생각했어. 우리들, 요 1개월 동안 전혀 연인다운 일을 하지 않았잖아. 그게 신경이 쓰여서……."
잇키가 꺼낸 말을 듣고 스텔라는 가슴 부근의 체온이 5도 정도 쓰윽 내려가는 감각을 느꼈다.
『우리들, 요 1개월 동안 전혀 연인다운 일을 하지 않았잖아.』
그것은 스텔라가 두려워하던 말.
상상하기조차 겁냈던 대사.
그 말이 지금 그녀의 연인이 벌린 입에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얼음물처럼 차가운 이해가 스텔라의 몸에 침투했다.
'역시…… 잇키는 이 관계에 만족하지 않았구나.'
그런데도 참게 만들었다.
1개월이나, 계속해서.
'나에게…… 질려버린 거구나.'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잇키에게는 시즈쿠도 있었다.
연상이지만 저렇게 예쁜 제자도 있다.
그밖에도 쿠사카베나 같은 반 여자아이들 중에도 귀여운 아이는 있었다.
잇키의 주변에는 그를 따르는 여자아이가 잔뜩 있었다.
언제까지고 건드리게도 하지 않는 높은 곳에 머문 여자 따위를 상대해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두 사람 사이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싫었다.
이어질 말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전의 관계로 돌아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잇키의 입에서 이 이상 이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다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스텔라는──.
"그, 그렇지! 실은 나도 사실 수영복이 아니라 그에 대해 말하려고 생각했어!"
잇키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그가 한 말을 자신의 갈라진 목소리로 덮어씌웠다.
"여, 역시 무리가 있었지! 황녀와 서민의 연애라니! 너무 먼걸! 잇키도 역시, 손도 잡을 수 없는 여자친구 따위보다 선배처럼 넓적다리라든가 엉덩이라든가 만지게 해주는 여자아이 쪽이 좋겠지!"
"하, 하아아?! 자, 잠깐 기다려, 스텔라! 너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냐니, 이, 이별, 이야기잖아! 연인다운 일을 전혀 해주지 않는 여자 따위 필요 없다는 말이잖아!"
"뭐────?!"
갑작스러운 스텔라의 말에 잇키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당연했다.
잇키 입장에서 보면 어째서 스텔라가 난데없이 그런 말을 꺼내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어! 잠시 진정하고 대화를 나누자!"
잇키는 새파래진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서 고개를 돌리고 있던 스텔라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스텔라를 마주 보려고 했지만,
"만지지 마!!"
스텔라는 진심 어린 거절의 목소리와 함께 어깨에 얹었던 손을 철썩 쳐내버렸다.
그 일순간, 물결치는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반짝 빛나는 물보라가 흩날렸다.
'스텔라, 울고 있는 건가.'
어, 어쨌거나 어째서 헤어지자는 말을 꺼낸 것인지 밝혀 내야 했다.
이 상황에서 자신까지 열이 오르면 끝이라고 생각하며 잇키는 스스로를 타일렸다.
그러나──.
"내가 무언가 스텔라에게 거슬릴 만한 짓을 했다면 사과 할 테니 말해줘. 부탁이야."
"……싫어진 사람은 잇키겠지."
"그렇지 않아! 그보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야!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말 안 해도 아는걸!"
"아니, 전혀 몰라! 조금 진정하라고!"
"나는 진정된 상태라고!!"
"아니, 흥분했어! 어째서 내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발상이 튀어나오다니, 스텔라 쪽이야말로 나를 싫어하는 거 아니야?!"
갑작스러운 사태에 잇키도 동요했다.
뭐, 정말로 좋아하는 연인이 갑자기 이별 이야기를 꺼내 들었으니 당연했다.
스텔라를 정말로 좋아하기에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애써도 음성이 거칠어져서 서로 고함을 치는 형태가 되었다.
"그, 그렇지 않아! 나는 잇키를 정말 좋아하는걸!"
"아니, 내 쪽이 더 좋아해!"
"거짓말이야! 절대로 저얼대로 내 쪽이 더 좋아해! 왜냐하면 잇키, 아까 전 수영복에 대한 감상을 물었을 때 굉장히 얼렁뚱땅 넘겼을 뿐이었는걸! 어차피 만지게도 해주지 않는 나 따위는 더 이상 아무래도 좋은 거겠지! 선배가 본 칠칠치 못한 표정을 한 잇키 역시, 선배의 수영복을 봐서 그랬을 게 뻔해!"
"뭐라고? 심한 트집이야! 아무리 나라도 적당히 하지 않으면 화낸다고?!"
"이미 화내고 있잖아, 바보!"
"스텔라가 트집만 잡으니까 그렇지! 정말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이렇게 매력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다른 여자아이에게 눈길을 줄 리 없잖아!!"
"그럼 어째서 감상을 물었을 때 그렇게 멀쩡했던 거야!"
"분명 감상을 물었을 때 얼렁뚱땅 넘어갔지만, 그렇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리 없잖아! 굉장히 야해서 두근거리는 나머지 눈을 뗄 수 없었다고는! 호색한 남자라고 여기면 스텔라가 싫어할지도 모르고! 도대체 스텔라야말로 왜 그래! 정말 좋아한다고 말한 주제에 요 1개월 동안 손도 만지게 해주지 않았잖아!"
"그런 거, 나 역시 잇키와 마찬가지야!! 여자 쪽에서 야한 짓을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헤픈 여자라고 여겨져 잇키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그럼 어째서 우리들은 이렇게 싸우고 있는 거야아아아아아아!!!!"
"모른다고, 그런 거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두 사람은 주변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고함을 치더니,
""……………………어라?""
거의 같은 타이밍에 자신들의 논쟁이 상당히 이상한 방향으로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기이 죄송한데, 손님. 다른 손님분도 계시니까 치정 싸움인지 애정 과시인지 잘 모를 문답은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하시길 부탁드려도 될까요오?"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윽!!!!""
히쭉히쭉 웃는 감시원에게 주의를 받고 두 사람은 나란히 얼굴이 귀까지 빨갛게 끓어올랐다.
보아하니 주변 손님들도 무언가 희귀한 동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미안해요오오오!"
두 사람은 도망치듯이 50미터 수영장 옆에 있는 아동용 수영장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잇키와 스텔라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을 이용하는 연령대 아이들에게 6월은 아직 수영장 시즌이 아니라서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두 사람은 이 아동용 수영장 한가운데에 설치된 우산 형태를 한 분수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곳이라면 떨어지는 물이 커튼이 되어 안쪽 상황은 보이지 않는 데다 목소리도 물소리에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두 사람만 안다.
동떨어진 장소──그렇기에,
"잇키, 저기, 지금 이쪽 보지 마…………."
"응. 나도 지금 얼굴을 보이기는 싫으니까, 마침 잘됐어……."
어쩐지 지금은 괜스레 거북했다.
함께 도망쳐 들어온 것은 좋았지만, 서로 어쩐지 아까 전 터무니없이 바보 같은 말다툼을 했음을 자각해버려서 부끄러운 나머지 상대방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저기 말이야, 스텔라."
"…………왜 그래?"
"……두 사람이서 함께,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 말하지 않겠어?"
"…………응."
분명히 바보 같은 말다툼을 했지만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키스, 하고 싶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자신을 바란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그래서 이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일순, 두 사람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사랑스러운 연인의 얼굴로 눈을 향했다.
더 이상 부끄러움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은 없었다.
잇키를 치켜 올려보던 스텔라가 살짝 눈꺼풀을 감았다.
긴 속눈썹 끝에는 아까 전에 보였던 눈물방물이 아직 맺혀 있었다.
잇키는 그것을 손가락 끝으로 다정하게 닦고서 그 손을 살짝 스텔라의 부드러운 뺨에 얹었다.
움찔.
스텔라가 몸을 굳혔다.
부드러운 뺨은 뜨거웠고, 긴 속눈씹은 처음 하는 행위에 불안으로 흔들렸다.
그렇지만 도망치려는 기색은 없었다.
눈꺼풀을 감고 자신에게 몸을 맡겼다.
그 사실이 기뻐서,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워서──.
분수가 수면을 때리는 소리와 물보라의 커튼 속에서 이끌리듯이 스텔라와 입술을 포겠다.
포겠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얕은, 그저 닿았을 뿐인 입맞춤이었지만.
그렇지만 입술이 불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당연했다.
뺨에 하는 입맞춤은 친구나 가족에게도 하겠지만 입과 입이 맞닿는 입맞춤은 절대 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두 사람이 이제 매우 소중한 관계라는 사실의 증명.
그날 했던 말이 그저 빈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두 사람에게 있어서 처음 하는 명확한 인연의 증거였기에.
"…………있잖아, 잇키."
"왜?"
"……잇키는, 자기 쪽에서 키스를 조르는 야한 여자아이는 싫어?"
"야한 여자아이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어. 오히려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스텔라는 그, 스텔라를 음흉한 눈으로 보는 남자는 싫어?"
"싫어. 그런 거, 잇키만 허락할 거야……."
한번 발걸음을 떼니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두 번째 입맞춤은 첫 번째보다 깊고 강하게.
"응…………."
아직 어른의 키스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안타까운 행위였지만 서로 필사적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을 원했다.
──이렇게 해서 혼란도 있었지만 그날은 두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하루가 된 것이었다.
◆
수영장을 나왔을 무렵에는 하늘은 완전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출출함을 느꼈던 세 사람은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에 거리에서 저녁 식사를 먹기로 했다.
잇키는 여성 두 사람에게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물었지만, 딱히 요구사항은 없었기에 적당한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일러
그곳에서 세 사람은 각각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했다.
잇키는 키츠네 우동 곱빼기.
아야세는 연어 정식.
스텔라는 믹스 그릴 4인분과 스테이크 3개였다.
"버, 버밀리온 양은 굉장히 잘 먹는구나……."
"……어쩔 수 없잖아. 이 정도는 먹어야 몸이 움직이는걸."
"그만큼 먹고서 어째서 그렇게 잘록한 거야……, 어쩐지 여러모로 납득이 안 가."
많이 먹는다는 자각이 있는 스텔라는 조금 부끄러운 듯 이 뺨이 달아오르면서도 식사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우걱우걱, 칼로리 가득한 저녁식사를 평정해갔다.
뭐, 스텔라 정도의 힘을 지닌 육체를 움직이려면 그 나름대로 연료가 필요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 먹는 모습을 본 아야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어쩐지 버밀리온 양은 공주님이라는 느낌이 안 들어."
"우물우물. 무슨 의미야, 그거."
"악담이 아니야. 그저 정말로 대하기 편한 데다, 식사 방식도 우리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서."
"그야 물론 테이블 매너 수업 정도는 받았지만, 여기는 그런 자리가 아니잖아."
스텔라가 빙그르르 둘러본 가게 안은 저녁식사 때라 매우 혼잡했다.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점원과 손님이 오가는 소리.
부모와 함께 온 아이가 우는 소리.
학생들이 내는 주변을 아랑곳 않는 상스러운 웃음소리와 말소리 등──잡음투성이였다.
이런 장소에서 홀로 품위 있게 식사를 해보았자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리라.
"때와 장소에 따라 구별해 쓰는 것이야말로 몸에 익힌 기술이야. 매너도 검술도 말이야."
"하하. 귀가 따가워."
자신의 미숙함을 지적당했지만 아야세는 즐거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아니, 오늘도 정말 공부가 되었어. 쿠로가네와 함께 수행하게 되고 나서 매일같이 발견하고 성장하게 돼. ……아빠에게 배운 오의를 제대로 다루려면 아직 한참 미숙하지만, 그렇지만 조금씩 아빠에게 다가간다는 실감이 들어. 정말로, 쿠로가네에게는 아무리 감사를 해도 부족해."
"모든 건 아야츠지 선배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야. 게다가 아야츠지 선배라면 혼자서라도 머지않아 깨달았을 거고, 그 오의에도 언젠가 다다랐을 거야. 내가 한 일은 아주 조금 등을 밀어준 정도니까,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아니, ……나에게는 지금 안 사실이 소중해."
"그 말은 대표전을 치루고 있어서란 의미?"
"그렇지. 나는 3학년. 올해가 마지막 칠성검왕제야.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대표전에 이겨서 남아야만 해. 칠성검왕제에 나가서, 빼앗긴 소중한 것을 되찾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지금'힘이 필요해……."
'…………응?'
중얼거리는 아야세의 눈동자에서 잇키는 언뜻 신경 쓰이는 감정을 발견했다.
분노.
……그것도 어지간한 정도가 아니었다.
거의 '살의'에 가까운 증오였다.
──아야세는 대체 무엇을 그토록…….
"하핫, 역시나.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낯짝이라고 생각했더니 아야세잖아."
문득 갑작스럽게 잇키의 등 뒤에서 까슬까슬한 남자의 목소리가 아야세의 이름을 불렀다.
"────으윽?!"
순간, 아야세의 두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시선 끝에는 키가 180센티미터 정도는 될 큰 키의 남자가 서 있었다.
염색한 머리카락.
선글라스 너머로도 사나움을 숨길 수 없는 삼백안.
금연석 구역인데도 담배를 피우며 요란스러운 검붉은색 상의를 흐트러지게 입었다.
크게 벌어진 가슴께에서는 웃는 해골 문신이 얼굴을 내비치며 주변의 손님을 압도했다.
그 특징적인 외견을 잇키는 본 기억이 있었다.
이 가게에 들어왔을 때 금연석 구역 안쪽에서 낄낄거리며 소란을 피우던 매너 나쁜 한 무리 중 한 사람이었다.
"요즘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고 생각했더니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아. 핫하아. 재미있는 우연도 다 있구만."
"이봐, 쿠라우도, 누구랑 얘기하는 거야아?"
"빨리 오락실 가자아."
"오? 이거 봐, 아야세잖아아, 오랜마안."
"요즘 놀러오지 않아서 걱정했다고오? 갸하하."
"이봐, 너 쿠라우도가 말을 거는데 무시하냐아?"
"꽤나 비싸지셨구만? 어엉?"
해골남을 뒤이어서 줄줄이 그와 함께 소란을 피우던 불량한 외모의 젊은이들 열 명 정도가 잇키 일행의 테이블에 모여들었다.
아무래도 그들과 아야세는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야세는 그들 쪽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참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잇키는 행동을 정했다.
"미안하지만 일행이 싫어해. 떨어져주겠어?"
"어엉? 뭐야, 네놈은?!"
"건방진 소리 하면 뒈진다!!"
추종자가 잇키에게 떠들어대도 잇키는 상대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상대해야할 사람은 한 명이었다.
잇키는 그 사실을 이해했기에 쿠라우도라고 불린 해골 문신을 새긴 남자에게만 시선을 향했다.
그러자 해골 문신을 새긴 남자는 잇키를 흥미 깊게 흘겨 보더니 이상한 말을 물어왔다.
"……네놈, 검객이구만?"
"알겠어?"
"핫, 왠지 모르게 말이지. 네놈들에게는 독특한 기척이 있어."
중얼거린 다음 해골문신의 남자는 잇키 일행 가까이에서 식사를 하던 가족 손님의 테이블에서 맥주병과 유리잔을 집어 올렸다.
"미안하군, 형씨. 식사의 방해를 했어. 반가운 얼굴이라서 무심코 허물없이 말을 걸어버렸네."
유리잔에 맥주를 따른 뒤 잇키 앞에 그것을 미끄러뜨렸다.
"이건 사죄의 표시야. 받아줘."
"아아. 고마워."
'네 맥주가 아니잖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섣불리 일을 악화시키지 않는 편이 바람직했다.
잇키가 테이블 위의 유리잔에 손을 뻗자,
"잇키이이이이!!!!"
"쿠로가네에에에!!!!"
순간 해골남이 휘두른 맥주병이 잇키의 후두부를 강타했다.
◆
맥주병이 와지끈 부서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정도의 타격을 머리에 받으며, 잇키는 테이블에 꼬꾸라지듯이 쓰러졌다.
"핫하앗! 검객이 방심하지 말라고, 멍청이!"
"아하하, 제법이네에."
"과연 쿠라우도. 여전히 불같은 녀석이야!"
"그 점이 짜릿해서 동경한다고오!"
해골남이 한 거친 행동에 추종자들이 환성을, 주변 손님이 비명을 질렀다.
남자는 깨진 병을 던져버리더니 혀로 입술을 핥으면서 어떤 물건을 꺼내 들었다.
"난 말이지, 네놈 같은 검술 꼬맹이를 쳐부수는 걸 정말 좋아해. 자, 한판 붙자고. 가지고 있겠지, 디바이스를!"
남자가 꺼내 든 물건은 마치 백골처럼 빛나는 하얀 톱날이 달린 야태도.
──디바이스였다.
그랬다, 그가 흐트러지게 입은 검붉은 색 상의는 '하군' 과 마찬가지로 도쿄에 있는 기사 학교 '돈로 학원'의 교복.
이 남자도 잇키 일행과 같은 블레이저였던 것이다.
"이 빌어먹을 노오옴! 재가 될 각오는 되어있겠지이이!!"
잇키가 상처를 입은 것에 격노해서 스텔라의 머리카락에서 불꽃의 빛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스텔라가 '레바레인'을 꺼내 들려고 손을 펼치자,
"물러서, 스텔라."
그 팔을 잇키가 꽉 움켜쥐었다.
잇키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소란 피울 일이 아니야. 살짝, 그의 손이 미끄러졌을 뿐이야."
한 줄기,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스텔라에게 미소를 지었다.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역시 그저 조금 머리가 찢어지고 옷이 젖었을 뿐이야. 전혀 싸울 일이 아니야."
잇키가 그렇게 말하며 스텔라를 제지했다.
이런 장소에서 디바이스를 꺼내 들고 더군다나 난투극까지 벌인다면 정학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틀림없이 퇴학 처분이다.
그래서 잇키는 스텔라를 막았다.
그러나──.
"""푸, 아하핫하하핫하핫하하하하핫!!!!"""
해골남의 추종자들에게는 그 모습이 겁쟁이가 강자와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시선을 피하는 행위로 여겨진 모양이었다.
낄낄거리고 품위 없는 웃음소리를 내더니 손가락 질을 하며 잇키를 비웃었다.
"이봐, 진심이냐, 갑자기 머리를 쳐 맞고 헤실헤실 웃는 거봐."
"아무리 쿠라우도가 무섭다고 해도, 정말 자존심이 없는 놈이네!"
"캬하하. 싫다아. 찌질이!"
"하핫하아. 이건 놀랍군. 검객 주제에 대단한 겁쟁이구만. 네놈 그래도 불알은 달려 있냐아?"
해골남이 천박한 말을 잇키에게 퍼부으며 그를 조소했다.
그러나 잇키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분위기를 흘려 넘기려고 맥없는 미소를 띠웠다.
그 얼굴에 해골남은 침을 뱉었다.
"윽!"
스텔라가 다시 분노의 온도를 높였지만, 그것을 잇키는 더욱 강한 힘으로 억눌렀다.
그렇게까지 해도 불이 붙지 않는 잇키의 모습에 해골남이 김샌다는 표정을 띄우며,
"핫, 흥이 깨졌다. 이런 겁쟁이에게 시비를 걸면 이쪽의 격도 떨어진다고. 이봐, 가자."
발길을 돌리며 가게 밖으로 향해 나갔다.
"바이바이, 겁쟁이."
"다행이구만. 쿠라우도가 약한 놈을 괴롭히지 않는 녀석이라서."
"정말 그래. 약해빠져서 다행이네용. 아하하핫."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당황한 기색으로 점장처럼 보이는 남자가 잇키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는 땀을 줄줄 흘리면서 잇키에게 꾸벅꾸벅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손님, 괜찮으신가요?! 지금 당장 구급차를……!"
"아아, 괜찮아요, 괜찮아. 그보다 구급상자 있습니까? 가볍게 치료할 거라서, 있으면 빌려주세요."
"예, 예, 지금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잇키가 부탁하자 점장은 후다닥, 허둥대는 모습으로 직원실을 향해 구급상자를 가지러 갔다.
다른 아르바이트 직원들은 다들 손님들에제 소동이 일어난 점에 대해 사죄를 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최저한의 소란으로 사태는 수습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잇키는 냅킨으로 묻은 침을 닦으며,
"…………왠지 얼굴이 두 배 정도로 부풀어 올랐어, 스텔라."
옆에서 풍선처럼 볼을 볼똑 부풀린 스텔라에게 말을 걸었다.
"얼굴이 부풀어 오를 만도 하지! 저런 쓰레기들이 멋대로 지껄이면! 도대체 잇키, 너 아까 맥주병, 일부러 피하지 않았잖아! 어쩔 셈이었어?"
"섣불리 피하면 발끈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이런 장소에서 다툼을 일으킬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런 녀석들, 잇키라면 '음철'을 쓰지 않아도 꺾을 수 있잖아?"
"글쎄, 그건 어땠을까."
"무슨 뜻이야?"
"그 한가운데 있던 해골 문신을 한 그 남자, 상당히 강해. 맨손으로 맞붙기는 벅찬 상대야."
"그야 그렇지. 그렇고말고. 어쨌든 그는 작년 칠성검왕제 베스트 8이니까♪"
""──윽?!""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밝은 소년의 모습에 잇키와 스텔라는 나란히 경악으로 가득찬 안색이 되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놀라는가.
그 이유는 목소리의 주인이 소리도 없이 그림자도 없이 기척도 없이, 마치 영화 도중에 다른 필름을 갑자기 끼워 넣은 것처럼 두 사람의 눈앞, 식기가 흩어진 테이블 위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칙칙한 은색의 곱슬머리.
생기 없는 금색의 눈동자.
자칫하면 유치원생으로조차 보이는 자그마한 몸집의 소년은, 그러나 그 작은 몸에 하군 학원의 교복을 걸쳤다.
소년은 마치 붙여 넣은 것만 같은 웃는 얼굴로 잇키에게 고했다.
"아하하☆ 이러언, 정말 재난이었구나. 눈에 들면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물어뜯는 저 광견으로 유명한 돈로 학원의 에이스, '소드 이터(검사 살해자)' 쿠라시키 쿠라우도가 시비를 걸다니. ……그렇지만 네 판단을 옳았어, '워스트원'."
"쿡쿡…… 네, 정말이에요. 그 말이 맞아요."
뒤이어서 이번에는 너무나 명확한 기척과 함께 또 한 사람의 배우가 나타났다.
가게 안인데도 양산을 들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키가 큰 여성.
눈가는 모자의 챙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턱의 윤곽이나 곡선을 그리는 아름다운 금발로 볼 때 수려한 용모가 상상되었다.
몸에 걸친 귀부인처럼 새하얀 벨라인 드레스가 눈에 선연했다.
그러나──잇키와 스텔라는 그 모습에 온몸에 난 털이 바짝 곤두서는 혐오감을 느꼈다.
그녀가 걸친 옷은 더러움 하나 없는 깨끗한 하얀색.
그런데도, 일순 그 모습이 선혈로 물들어 보였기에.
어째서인가.
그 이유를 잇키는 금세 눈치챘다.
그녀의 몸과 기척에는 향수 같은 것으로는 전혀 숨길 수 없는 너무나 농밀한 피 냄새가 엉겨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에 잇키는 확신했다.
'……틀림없어. 진짜야.'
"만일 당신들까지 날뛰었다면, 이 자리에서 제가 전원 제압해야만 했던 참이에요."
피와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순백은 마치 노래하듯이 우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너무나도 꺼림칙한 감각에 스텔라는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내며 나직한 목소리로 잇키에게 물었다.
"잇키, 이 녀석들 누구야. ……정체가 뭐야."
"하군 학원 학생회 부회장 미소기 우타카타 선배와 회계인 토토쿠바라 카나타 양이야."
"……토토쿠바라! 당신이……."
소문에 둔한 스텔라도 토토쿠바라의 이름은 역시 들어 본 기억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토토쿠바라 카나타.
'샤를라하 프라우'라는 별명을 가진 하군 학원 교내 서열 2위인 B랭크 기사.
월등히 뛰어난 전투력으로 이름을 떨치며, 학생의 신분이면서도 몇 번이나 '특례 소집'이라는 형태로 실전에 참가.
'리벨리온(해방군)'을 필두로 하는 다양한 능력 범죄자 조직의 거점을 파괴한 실적을 가진 우수한 학생 기사였다.
"아무래도 이름을 댈 필요는 없는 모양이구나. ……아니아니, 그렇지만 그 자리에서 굳이 피하지 않았던 쿠로가네의 대응은 정말로 훌륭했어. '소드 이터'는 비공식적으로 다른 학교에 뛰어들어 행패를 부리지, 마을에 있는 무술도장을 밟고 다니지, 어쨌거나 난폭한 사내니까 날뛰면 처리하기 버거워. 네 덕분에 우리들도 귀찮은 일을 떠맡지 않고 끝났어. 정말로 고마워. 아무래도 우리들은 너를 조금 과소평가한 모양이야."
"렌렌 양이 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네요. 이 소질을 싸움 한 번 보고 간파한 점은 역시 '야차공주'라고 할까요. 저희들도 인식을 고칠 필요가 있어요."
"아하하. 정말 그래. ……그럼, 잠시 상처를 보여주겠어? 치료해줄게."
"아니, 이 정도는 스스로."
"괜찮아 괜찮아♪ 선배에게 맡겨두라고. 내 손이 약손이다아."
그렇게 말하고서 우타카타가 부드럽게 잇키의 상처를 만지자,
"자. 나았다."
찢어진 피부도 타박상에 의한 내출혈도 순식간에 깨끗이 치료되었다.
"아니…………."
그 솜씨에 잇키는 세 번 경악했다.
분명히 상처는 가벼웠다.
피하지는 않았지만 비껴 맞았으니까.
그렇지만 그래도 이 솜씨는 이상하다고 해도 좋았다.
마력 제어만이라면 A랭크에 필적하는 시즈쿠라도 치유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
'아니, 그보다 지금 것은 치유라기보다는 마치 상처 그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 같아.'
일단 틀림없이 단순한 치유능력은 아니었다.
미소기 우타카타.
별명은 '피프티/피프티(예측 불능)'.
도대체 어떤 능력자인 것일까.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점만은 확실하지만──.
"아하하.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관찰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대표선발전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니까."
"아, 죄송합니다. 상처를 치료해주셨는데 예의에 어긋난 짓을 해서."
"아하하. 괜찮아, 괜찮아. 그래야 예비 기사지. 믿음직스러워. 그럼, 이제 후배의 치료도 마쳤고 하니 우리들도 이쯤에서 실례할게. 가자, 카나타."
"예, 부회장님."
"너희들도 밤놀이는 적당히 해."
미소기 우타카타와 토토쿠바라 카나타는 그 자리를 뒤로 했다.
두 사람이 떠나간 후 창문에서 드리우는 황혼을 보며 잇키는 피곤함을 토해내듯이 한숨을 쉬었다.
'……땅거미 질 때, 라고 해야 하나.'
꽤 거물만 만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떠나간 사람의 분위기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잇키에게는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저기, 아야츠지 선배."
"!"
아야세도 역시 자신에게 말을 건네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거북한 표정으로 잇키에게서 도망치듯이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잇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저 질 나쁜 녀석들과는 어떤 관계야?"
저쪽은 아야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야세는 대중 매체에 이름이 나올 만한 수준의 기사가 아니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임은 이미 확실했다.
그러나 전혀 화목한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다.
아야세의 그 표정을 보면 일목요연했다.
그렇다면.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그렇지만…… 그들이 말을 걸었을 때 아야츠지 선배, 조금 이상했어. 혹시 그들과 무언가 트러블을 안고 있다면 나도 무언가 힘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친구로서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잇키의 그 물음에 아야세는 조금 망설임을 띠우며 대답하려고 입을 열고,
"……그건."
순간.
학생 수첩에서 울리는 문자 착신음이 대화를 토막내었다.
문자 착신음은 잇키와 아야세의 주머니에서 동시에 울렸다.
잇키는 이런 때 누구인가 생각하며 화면을 보았다.
보낸 이는──'선발전 실행 위원회'.
……지독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불운하게도 적중했다.
『쿠로가네 잇키 님의 선발전 제11시합의 상대는 3학년 1반 아야츠지 아야세 님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기막힌 타이밍이다.'
틀림 없이 아야세 쪽에 온 문자도 같은 내용일 터였다.
보아하니 아야세의 표정에서 핏기가 가시고,
"저, 미안! 잠시 룸메이트가 당장 돌아오라고 문자를 보내서, 오늘은 돌아갈게!"
새파래진 얼굴로 갑자기 그렇게 말을 꺼냈다.
틀림없이 거짓말이었다.
대전 통지 문자를 보게 되자 잇키와 함께 있기가 거북해진 것이리라.
"……응. 알았어. 그럼 내일 봐."
그 점을 눈치채고 잇키는 아야세를 막지 않았다.
쿠라우도와 아야세의 관계는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아야세를 붙잡아 억지로 실토하게 할 일은 아니었다.
이 거북함이 가라앉고 나서 기회를 보아 다시 물어보면 되리라.
"…………응, 그럼 내일……."
아야세는 테이블에 자신의 음식값을 놓아둔 다음 잇키와 스텔라를 남겨두고 달려가 버렸다.
"굉장히 안색이 나빴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상황을 모르는 스텔라에게 잇키는 말없이 문자를 보여주었다.
"……이런."
"이것도 운명이란 거겠지만, 될 수 있으면 부딪치고 싶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선배, 무언가 되찾기 위해 칠성검무제에 나가야 한다고 말했지."
"그랬지."
"……일부러 져주거나 하진 않겠지?"
"내가 그럴 거 같아?"
그렇게 되묻자 스텔라는 조금 안심한 듯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천만에. 어리석은 질문이었구나."
그렇다, 잇키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설령 상대가 스텔라라도, 시즈쿠라도 그것이 시합이라면 정정당당하게 싸운다.
그것이 기사의 예의였다.
그렇지만 그래도 역시 이 운명은 불운이리라.
'……일단 내일 또 보자고 말했지만, 한동안 아야츠지 선배는 수행에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잇키의 그 예감은 진실이 되었다.
그날부터 아야세는 잇키 일행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아니, 그렇지만 걸작이었어, 오늘 그 녀석은."
"하핫, 그런 녀석을 진짜 '겁쟁이'라고 하는 거겠지."
"그렇지. 그 정도까지 당하고서도 계속 헤실헤실거릴 뿐이라니, 찌질해."
"그런 말 하지 마, 미사토. 쿠라우도에게 거스르지 않다니 영리하잖아."
"크하하. 확실히 그렇지. 승산 없는 싸움이라면 하지 않는 편이 현명한가!"
본거지로 삼고 있는 폐허 같은 도장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소년들이 낄낄거리며 품위 없는 목소리로 조소했다.
이야깃거리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본 남자의 추태였다.
"……하핫, 네놈들은 그렇게 생각하냐?"
갑자기 홀로 떨어진 곳에서 무너진 지붕 구멍으로 보이는 달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던 쿠라우도가 추종자들에게 물었다.
"아아, 물론이지. 그런 약골이 너를 이길 리 없잖아, 쿠라우도?"
"정말 그렇지. 그런 겁쟁이, 쿠라우도가 상대할 가치도 없어. 나라도 한 손으로 비틀어주겠어."
"갸핫하. 약자 괴롭히기는 관둬라아. 또오 경찰에 신고 당한다고오."
낄낄.
무엇이 그렇게까지 우스운지 소년들은 계속해서 웃었다.
"하핫."
그 모습을 흘낏 보고는 쿠라우도는 다시 달로 눈을 돌렸다.
'……머저리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네놈들은.'
떠올리는 광경은 똑바로 자신을 향하던 잇키의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에는 겁이나 위축 따위의 감정은 일절 없었다.
그저 얼음 같은 냉정함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 자리를 어떻게 최소한의 소란으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때 잇키는 그것만을 강하게 생각했던 것이었다.
인사 대신 넣은 자신의 일격을 받은 것도 일단 일부러 그랬으리라.
그 정도의 눈빛을 띠울 수 있는 남자였다.
그 정도 기습을 피할 수 없을 리 없었다.
"비싼 녀석이네. 그런 싸구려 도발로는 싸울 마음이 들지 않나. ……하핫."
뭐, 좋다.
그 수준이라면 반드시 '칠성검무제'에 나올 터였다.
'녀석을 밟는 건 그때 누릴 낙이야.'
쿠라우도는 유리잔의 술을 들이켰다.
오랜만에 보았던 거물의 감각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
아야세가 잇키 일행을 만나러 오지 않게 되고 나서 사흘.
시합 전날의 저녁이 되어도 아야세는 잇키 일행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에 스텔라가 조금 근심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결국 한 번도 오지 않았구나. 선배."
"어머, 스텔라 양에게는 그편이 좋은 거 아니었나요. 오라버니에게 딱 달라붙어 검을 배우는 아야츠지 선배에게 잔뜩 질투를 했으니까요."
"……시끄러워.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야. 없으면 없는 대로 쓸쓸하다고."
"제멋대로인 분이시네요. ……뭐, 그 부분이 장점일지도 모르지만요."
"무슨 말 했어?"
"다리 두꺼워요."
"두껍지 않다고 했잖아!"
사이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평소처럼 토닥거리기 시작한 두 사람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잇키는 손에 든 학생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잇키에게 아리스인의 긴 그림자가 다가왔다.
"지금까지 줄곧 문자로도 감감무소식이야?"
"……그렇지 뭐."
"정말로?"
잇키는 고개를 들어 아리스인 쪽으로 눈을 향했다.
아리스인은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띠우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살피는 기색이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어째서 의심하는 거야?"
"어째서고 뭐고, 당연한 걱정이잖아? 이래저래 모르는 일은 많지만, 아야세 선배의 '절대 목표'는 명확해. '칠성검무제에 출전하는 것'. 그렇다면 내일 벌일 잇키와의 시합은 질 수 없어."
칠성검무제 대표전은 전적우수자 중에서 '6명'이 선발 된다.
담임교사인 오레키의 말로 비추어 보아 아마도 시합 수는 많게 잡아 20회.
그 정도라면 무패를 유지하는 학생이 어느 정도 나온다.
한 번 지면 일단 출장의 가능성은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았다.
"그렇지만 평범하게 싸우면 아야세 선배가 이길 승산은 없어. 당연하겠지. 수준 차이가 너무 나. 그리고 그 사실은 너에게 직접 검을 배운 아야세 선배가 가장 잘 알아. 그렇다면 당연히 사전에 이기기 위한 책략을 써올거야. 틀렸니?"
"아리스는 정말로 날카롭구나."
어깨를 으쓱이며 잇키는 만지작거리던 학생 수첩을 아리스인에게 던져서 넘겨주었다.
그 화면에는 한 통의 문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보낸 사람은 아야츠지 아야세 였다.
『쿠로가네에게만 이야기할 중요한 상담이 있어.
네 힘을 빌리고 싶어.
내일 오전 3시, 본교사 옥상에서 기다릴게.』
"오늘 아침에 도착한 문자야."
"그야말로 함정입니다, 하는 느낌이 드네, 이거."
"하하…… 확실히 그래. 그렇지만 이건 함정 따위가 아니야."
"딱 잘라 말하는구나."
"믿고 있으니까 말이지. 아야츠지 선배는 그런 비열한 수를 쓰는 사람이 아니야. 고작 며칠이었지만 아야츠지 선배와 함께 있었던 나는 알아."
잇키의 눈으로 본 아야세는 지나치게 성실할 정도로 착실하고 우직한 노력가였다.
게다가,
"아야츠지 선배는 내 손을 좋아한다고 말해주었어."
시합할 상대방에게 장외 공작을 거는 비열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할까.
그렇게 다른 사람의 노력을, 이 싸움을 바라는 모든 기사의 각오를 비웃는 사람이.
──말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야츠지 선배를 만나러 갈 거야."
아야세는 소중한 친구였다.
그 친구가 자신에게만 털어 놓을 수 있는 상담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것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잇키는 단언했다.
그러자 아리스인은,
"눈부시구나, 너."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 잇키를 너무도 아득한…… 아무리 해도 손이 닿지 않는 것을 보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눈부셔?"
"응, 정말로. 때로는 부럽기도 해. 시즈쿠와 스텔라처럼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이나, 잇키처럼 누군가를 올곧게 믿을 수 있는 마음이. 그리고 그때마다 내 마음의 추악함을 뼈저리게 느껴. 나는 더 이상 어떻게 해도, 사람을 똑바로 보려는 마음이 들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아리스인은 말을 매듭짓더니 다시 한 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충고했다.
"그런 나니까 깨닫게 해줄 수 있는 점도 있어. ……쓸데 없는 참견일지도 모르지만, 만약의 경우에는 아야세 선배와의 연을 자를 각오는 해두도록 해. 인간 따위 한 꺼풀 벗겨보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몰라. 어중간하게 동요를 질질 끌면 이길 시합도 이길 수 없게 돼. '사냥꾼'과의 시합 때처럼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때도 충고를 해준 사람은 아리스였지. 그렇지만 괜찮아, 아리스. 나에게 가장 소중한 목표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아."
그렇게 고하며 잇키는 시즈쿠와 토닥거리는 스텔라에게 시선을 향했다.
──정점을 둘러싼 싸움에서 다시 만나자.
스텔라와 그렇게 약속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와의 약속을 배신하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후후, 쓸데없는 참견이었구나. 미안해. 불쾌한 소리를 해서."
"그다지 그 말은 불쾌하지 않아. ……다만 키리하라와의 시합 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여러 가지 일의 전환점에서 나를 배려해서 조언해주었던 내 멋진 친구를 추악하다고 말하는 건 기분 나빠. 설령 그 사람이 아리스 자신이라고 해도 말이야."
순간 아리스인은 망설이는 듯이, 곤란한 듯이 복잡한 표정을 보였다.
그러나 곧바로 그것을 갈무리했다.
"후후, 너무 멋진 말을 해버리면, ……반해버릴 거야."
"농담은 성별만으로 해줘."
되돌아온 말은 평상시 아리스인의 가벼운 말투였다.
그래서 잇키도 가벼운 말투로 받아치고 그 이상은 파고 들지 않았다.
이 이상 찔러보아도 아리스인에게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터이기에.
그렇다면 지금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잇키는 저녁놀로 물드는 교사, 그 옥상을 올려다보았다.
내일 오전 3시.
…………그곳에서 아야세가 기다린다.
'나는, 아야츠지 선배의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
약속 시간 10분 전, 잇키는 스텔라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그리고 모두가 잠들어 소리 하나 나지 않는 복도를 빠져 나와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 어렴풋이 뜬 푸르스름한 달빛을 의지해 미리 열어 두었던 교사의 창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밤의 교사 안으로 몸을 숨기자, 발꿈치로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어스름에 뒤울림 했다.
평상시 활기찬 장소였기에 이 죽은 듯한 정숙이 을씨년 스러웠다.
잇키는 그 귀가 멍해질 것만 같은 그 정숙 속을 걸으며 옥상을 향했다.
계단을 위로 위로 올라, 이윽고 눈앞에 나타난 철문을 밀어서 열었다.
바람이 휭 불어듦과 동시에 창백한 달빛이 내리비쳤다.
눈앞에 펼쳐진 옥상의 풍경은 그저 살풍경한 모습이었다.
따스함이 없는 콘크리트 바닥이 펼쳐지고, 투박한 펜스가 밤하늘을 더럽혔다.
스산한 풍경이었다.
불어드는 바람도 달빛도, 초여름인데도 모두 차가웠다.
그렇게 모든 것이 새파랗게 물든 광경의 중심에 펜스를 등지고 유카타 차림을 한 아야츠지 아야세가 서 있었다.
"여어. 수영장에 다녀온 이래 처음 보네. 아야츠지 선배."
"응……, 이쪽에서 부탁한 일인데, 땡땡이쳐서 미안."
'……응?'
미안하다는 듯이 사과하는 아야세의 눈동자를 보고 잇키는 미세한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을 똑바로 향한 시선이 아무래도 메말라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만들어진 유리구슬처럼.
최근에는 잇키에게 익숙해져서인지 일일이 눈을 피하는 행동을 하지 않게 된 아야세였지만, 수영장에 갔던 날도 역시 갑자기 대화가 끊어진 순간 같은 때에 시선이 마주치면 그 시선을 슬며시 돌리고는 했다.
뭐, 이 정도는 이성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일러
그러나 그렇기에 오늘 보이는 아야세의 시선이 잇키는 신경 쓰였다.
아야세는 이런 조용한 밤에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여성이었던가하고.
──그러나 위화감이라고 해도 정말로 미세한 것이었다.
그래서 잇키도 일부러 말을 꺼내 그 문제를 추궁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별로 상관없어. 역시 그런 문자를 받은 뒤면 서로 불편한 게 당연하니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게다가 약속대로 혼자서 와주었구나. 고마워. 그렇지만 연인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그다지 칭찬받을 행동은 아니지?"
"아아, 역시 눈치챘구나. 스텔라에게는 비밀이야. 물어 뜯길 거야."
어깨를 으쓱이고 농담을 섞어 말하면서 잇키는 아야세에게 다가가 오늘의 본제를 물었다.
"……그래서, 내게 할 상담은 뭐야?"
"────."
아야세는 입을 다물었다.
말을 꺼내기를 망설이는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의미의 침묵인지.
인공물 같은 눈동자에서는 아야세의 감정을 읽어낼 수 없어서 잇키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소용없다.
"말을 꺼내기 어려우면 내 쪽에서 하나, 질문해도 될까."
잇키는 시점을 바꾸었다.
아야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우 침묵을 긍정으로 보고 잇키는 다시──이번에는 크게 핵심을 짚어서 물었다.
"전에 한 이야기에서 이어지는데, 아야츠지 선배에게서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은 사람은 쿠라시키 쿠라우도 아니이?"
순간, 인공물 같던 눈동자가 경악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잇키는 놓치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별거 아닌 직감과 고찰이야. 식사할 때 '빼앗긴 소중한 것을 되찾는다'라고 말했던 아야츠지 선배는 살기조차 감돌만큼 소름끼치는 표정이었어. 그리고 아야츠지 선배는 똑같은 살기를 그날, 다시 한 번 뿜었어. '소드 이터'가 나타났을 때 말이지."
입술을 깨물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때.
아야세에게서 느껴진 살기는 식사 중에 엿보았던 그것과 같은 것이라고 잇키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야츠지 선배는 그 빼앗긴 무언가를 되찾으려고 '칠성검무제'에 나가야만 한다고 말했어. 즉──빼앗은 사람은 대회에 나올 만한 기사라는 점. '소드 이터'는 작년의 베스트 8, 이 전적이라면 신구지 이사장 체제의 하군 같은 특수한 선발 방식을 이용하지 않는 한 일단 시드 배정은 확실해. 이 두 가지로 미루어 보아 아야츠지 선배가 '무언가'를 되찾으려고 하는 상대는 '소드 이터'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 어때. 틀렸어?"
그렇게 물으면서도 잇키는 이 고찰이 딱 들어맞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후후. 정말로 뭐든지 알아채는구나, 쿠로가네는. 거기까지 정확히 맞추면 숨길 마음도 사라져."
그것은 완전히 그 말 그대로였다.
"있잖아. 오늘 쿠로가네를 여기로 부른 이유는 살짝 묻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야."
"……묻고 싶은 말?"
"응. ──수영장 탈의실에서 버밀리온 양에게 들었는데, 쿠로가네는 버밀리온 양과 '칠성검무제'의 결승전에서 싸울 약속을 했다고 말이야."
"응. 뭐, 결승전에서 운 좋게 만나면 그렇게 되겠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어디서든지 반드시 다시 한 번 맞붙자고 서로 맹세했어."
"그렇지만 그곳에 다다르기 전에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게 되어버린다면 쿠로가네는 어쩔 거야?"
"…………?"
질문의 의도를 몰라 잇키는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아야세가 자신과 스텔라의 일을 알고 싶어 하나.
그러나 곧바로 그 질문이 아야세 자신의 현재 상황과도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잇키는 약속을 위해서.
아야세는 '무언가'를 되찾기 위해서.
이유는 달랐지만 입장은 비슷했다.
……중요한 승부를 앞두고 그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다.
그런 뜻일까?
역시 의도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질문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정정당당하게 전력을 다해 싸울 거야."
"이길 수 없어도?"
"해보아야 알겠지만…… 설령 진다고 해도 전력을 다해서 싸우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사냥꾼'과 싸웠을 때, 잇키는 한 번 스스로 패배를 인정할 뻔했다.
그러나 스텔라 덕분에 잇키는 떠올릴 수 있었다.
적에게 져서 입은 상처는 분명 쓰라린 것이지만 곧 아물면 다시 싸울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지고 도망친 상처는 평생 남아 결코 치유되지 않는 상처라고.
그렇기에 설령 진다고 해도 그 시합에서 끝까지 싸운 자신이 자랑스럽게끔 전력을 다한다.
잇키가 더 이상 그 마음을 잃어버 리는 일은 없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 하지 않아. 결과가 수반되지 않는 정의 따위, 그저 헛소리일 뿐이야."
그 대답을 야세는 고드름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던졌다.
"엇…………."
너무나도 의외인 말에 잇키는 숨을 삼켰다.
아야세에게서…… 그런 '이길 수 있다면 뭐든지 좋다'라는 이론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어째서 그런 말을.'
자신 안에 자리 잡은 아야세의 인상으로는 있을 수 없는 말에 잇키는 대꾸할 말을 자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대꾸는 하지 못했어도 잇키는 깨달았다.
인공물 같은 눈동자 아래, 아야세의 얇은 입술이…… 비웃는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는 사실을.
그 모습은 잇키가 본 적 없는 아야세의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눈으로 보았을 때 잇키에게는 두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이 사람은 정말로 아야세인가.
아니, 그렇지 않으면──이 사람이 진정한 아야세인 것인가.
그렇게.
그리고 곤혹스러워하는 잇키를 몰아붙이려는 듯이 아야세는 냉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그래서 내 대답은 이거야.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 상대를 밀어내버린다."
"────!!"
오른손에 붉은색으로 빛나는 검신을 지닌 칼 '히즈메'를 구현시켰다.
그 순간 밤하늘에 무언가 끊어지는 칼 소리가 두 번, 높게 울려 퍼졌다.
◆
"윽?!"
칼 소리를 듣고 잇키는 순식간에 자세를 잡았다.
틀림없이 지금 아야세는 어떤 능력을 시용해 무언가를 절단했다.
대체 무엇을 베었을까.
잇키는 경계와 집중의 수준을 한껏 높였다.
의식을 안구에 모으고 색채와 소리의 인식을 포기하는 대신, 상황의 인식에 최대한의 집중력을 썼다.
이변은 금세 찾아냈다.
눈앞에 서 있는 아야세.
그 등 쪽에 있던 펜스가 뒤로 쓰러져 있었다.
어째서인가.
──그 이유는 아야세의 등 뒤에 있던 펜스의 양 끝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울려 퍼진 칼 소리는 두 개.
그렇다면 아야세는 여기를 무언가의 능력으로 베었다는 뜻이리라.
'무슨 속셈일까?'
어째서 이런 부분을 자를 필요가 있는가.
이해하지 못하고 곤혹스러워하는 잇키의 눈앞에서……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뒤로 쓰러져가는 펜스와 함께 아야세의 몸이 뒤로 기울어져, ──4층 높이의 교사 옥상에서 거꾸로 낙하했던 것이었다.
"뭐────?!"
경각, 아연, 그러나 망연자실하는 것은 순간적인 판단력으로 억눌렸다.
아야세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능력을 사용하는 데 실패했나.
혹은 무언가 의미 있는 행동인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고찰할 때가 아니었다.
잇키는 취할 행동을 망설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잇키의 몸을 푸른빛이 감쌌다.
노블 아츠(벌도절기) '일도수라'의 마력광이었다.
스스로 1분 한정의 초인적인 신체 강화를 걸어 끊어진 펜스 구멍에서 몸을 쑥 내밀었다.
그리고 눈 아래에서 지면을 향해 거꾸로 낙하하는 아야세를 붙잡기 위해 잇키는 교사 벽을 달려서 아야세를 쫓아갔다.
'일도수라'의 능력이라면 지면에 떨어질 때까지 따라붙기는 쉽다.
잇키는 떨어지는 아야세의 오른손을 붙잡고서 그대로 품으로 끌어안았다.
'따라잡았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라면 1초 후에는 지면에 추락.
교사 벽을 달려서 가속을 붙인 만큼 거의 무사할 리 없었다.
잇키는 순간 머릿속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시야 끝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 아래 펼쳐진 중앙 정원 광장에 설치된 작은 연못이었다.
연못의 위치는 닉하지점에서 직선거리로 30미터 정도 앞.
멀었다.
그렇지만 해내야만 했다.
공중에서 잇키는 근육의 힘으로 억지로 빙글 몸을 반회전하고 나서,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혼신의 힘으로 교사 벽을 박찼다.
순간, 콘크리트 벽은 철구가 세게 박히기라도 한 듯이 1층에서 4층에 이르기까지 커다랗게 금이 가고 충격으로 한쪽 유리가 전부 깨져나갔다.
그리고 그 발차기의 반동은 그대로 잇키와 아야세가 크게 바로 옆으로 날아가는 힘이 되어 ──두 사람의 몸을 저수지까지 날랐다.
커다란 물소리를 내며 두 사람은 저수지 속으로 낙하 했다.
"푸핫, 핫, 핫, 앗, 하앗!!"
정말로 아슬아슬했다.
잇키의 행동이 앞으로 0.1초라도 늦었더라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그 사실에 잇키는 몸이 떨릴 정도로 공포를 느꼈다.
자신의 판단이 조금이라도 어긋났다면 아야세는 죽었을 것이기에.
손발이 떨렸다.
몸 안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공포와 동시에 끓어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분노였다.
잇키는 연못에서 끌어안았던 아야세를 끌어올리더니,
"서, 선배는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죽었다고!!"
벌어진 가슴 앞섶을 움켜쥐며, 잇키로서는 드물게 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러나──.
"…………후후, 하하, 아하하핫하핫!"
되돌아온 반응은 밤의 어둠에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높은 조소였다.
"괜찮아. 쿠로가네가 도와주리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뭣?!"
깔깔 웃으면서 아야세는 가슴 앞섶을 움켜쥔 잇키의 손을 떼어내더니, 혼자서 일어나 흠뻑 젖은 잇키를 내려다보며 입술에 일그러진 호를 그렸다.
"써버렸구나, '일도수라'를."
'…………!'
"설마, 처음부터…… 나에게 '일도수라'를 쓰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어……?!"
"물론."
"그, 그런…… 그런 짓을 하려고 선배는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짓을 한 거야?!!!"
"말했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라고. 혹시 쿠로가네가 그 질문에 나와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면 매수도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뭐, 당연하게 쿠로가네는 그렇게 답하지 않았지. 너는 매우 올곧은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실력 행사뿐이잖아. 그렇지 않아도 '검술'의 역량은 승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뒤떨어져 있어. 게다가 '일도수라'라는 터무니없는 비장의 카드까지 남아 있어서야 나에게 승산은 없어. 그렇다면 그것을 어딘가에서 제거해두어야만 해. ……'일도수라'는 하루에 한 번만 쓸 수 있다고 들었어. 시합은 지금부터 10시간 후. 회복은 시간에 맞지 않아. 이거라면 나에게도 승산이 생겨. 검사로서의 역량은 미치지 않지만 기사로서의 능력을 어우르면, 비장의 카드를 잃은 쿠로가네를 쓰러뜨리는 것이 가능할지도 몰라."
담담하게 말하는 계략에 잇키는 이를 갈았다.
분명 그 말 그대로였다.
'일도수라'는 전제 조건으로 잇키의 전력을 걸어서야 비로소 이를 수 있는 궁극의 세계.
전력이란 그가 보유한 마력의 최대한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시합 전에 미리 마력을 소모하게 만들면 된다.
이 이상으로 '일도수라' 봉쇄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내가, 틀렸던 걸까……, 잘못 보았던 걸까…….'
잇키는 아야세를 우직한 노력가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그렇게 보였던 모습은 전부 연기였고 이것이…… 대전 상대를 향한 '방해공작'이라는 기사로서의 금기를 태연하게 범하는 그런 아야세가 진정한 그녀였던 것인가.
아버지의 검을 자랑스러워하던 모습도, 그것을 조금이라도 따라잡았다는 것을 아이처럼 기뻐하던 그 웃는 얼굴도──모두 거짓이었던 것일까.
"……처음으로 아야츠지 선배의 손바닥을 보았을 때 나는 기뻤어. 이 학원에도 아직 나 이외의 검술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동료가 생긴 것 같아서 굉장히 기뻤어."
"나를 단련시켜 준 것은 감사해. 이 힘도 철저히, 쿠로가네를 쓰러뜨리는 데 쓰도록 할게."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는데……."
"과대평가야. 환상을 강요해도 민폐야."
"……윽! 아야츠지 선배가 '소드 이터'에게 무엇을 빼앗겼는지는 몰라. 그렇지만 아야츠지 선배가 하는 일은 나뿐 만이 아닌 스텔라와 시즈쿠…… 이 칠성검무제에 임하는 모든 기사에 대한 모욕이야!! 우리들의 긍지를 더럽히고, 자신의 긍지까지 던져버리고, 그 끝에 그 '무언가'를 되찾는다고 해서 선배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겠어?! 그 전과에 가슴을 펼 수 있겠어?!"
"그런 것, 쿠로가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야기야."
비명 같은 잇키의 질문을 싹둑 잘라버리고서 아야세는 잇키에게서 등을 돌렸다.
"쿠로가네가 뭐라고 해도, 나는 절대──너에게 이길 거야. 이겨야만 해."
그리고 그대로 밤의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그 등은 거리로 보면 아직 가까이에 있을 터인데, 잇키에게는 지독히도 멀어 보였다.
이윽고 그 등이 완전히 사라진 후,
『만약의 경우에는 아야세 선배와의 연을 자를 각오는 해두도록 해. 어중간하게 동요를 질질 끌면 이길 시합도 이길 수 없게 돼.』
문득, 아리스인의 충고가 뇌리를 스쳤다.
그 말 그대로였다.
이렇게 흐트러진 마음이어서야 검 솜씨도 둔해진다.
그렇다면 잘라버릴 것인가.
아야세와의 인연을.
잘라버리고 선을 그어…… 잊는다.
그것으로 정말로, 그것으로 좋은가.
"윽."
'일도수라'의 반동인가, 혹은 심장을 뒤덮은 암운의 무게인가.
잇키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끓고 단 한 번,
"제에기이이라아아아아아아아아알!!"
특정한 상대가 없는 욕설을 뱉으며 잔디밭을 후려쳤다.
벽신문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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