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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첫사랑의 귀환 (1/80)


01 첫사랑의 귀환
2022.08.02.




“지나 씨, 잠깐만.”

사무실 저편에서 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과장님.”

지나는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났다.

지나가 일하는 마케팅 기획 1팀의 과장인 도진은 큰 키에 균형 잡힌 몸, 깔끔한 외모로 사내여직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맡은 일마저 완벽하게 해치우는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입사 동기 내에서 가장 먼저 승진했다. 그의 모노톤 책상 위에 써진 은빛 명패에는 갓 찍힌 과장이라는 글자가 번쩍였다.

그 무엇보다 지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건 도진의 차가운 얼굴에서 보이는 따뜻한 눈빛이었다. 다른 누구도 모를 따뜻한 눈빛은 오로지 제게만 향한 것이었다.

그렇게 5년.

아무도 모르는 사내연애를 시작한 지도 벌써 5년이 되었다.


‘과장만 달면 결혼하자. 지나야.’

도진의 달콤한 말에 지나는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가 청혼할 날을.

오늘이 드디어 5년이 되는 날이기에, 무언가 특별한 약속을 말하지 않을까 기대감이 차올랐다.

설레는 마음으로 지나가 가까이 다가가자 모니터를 확인하던 도진이 긴 팔을 뻗어 결재철을 건넸다. 얼굴은 여전히 모니터를 향한 채였다.

그가 내민 것은 지나가 얼마 전에 낸 [MZ세대 패션 마케팅] 기획안이었다.


“브랜드 포트폴리오가 약해.”

“네?”

뜻밖의 말에 지나의 큰 눈이 한층 더 커졌다. 저번 회의에서 컨펌해준 사람이 도진이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변덕인지 도진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지나는 황당한 얼굴로 서 있었다.

원래도 차가운 사무실 공기가 유독 시리게 느껴져 어깨를 살짝 움츠린 지나는 애꿎은 결재판만 꼭 쥐고 있었다.

조금 뒤, 도진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뗐다. 지나가 기대했던 따뜻한 눈빛이 아닌 다소 짜증 섞인 눈빛으로 지나를 바라봤다.


“지나 씨, 우리가 노리는 타깃이 이삽십 대입니다. 좀 더 유연하게 생각하죠.”

이번에 런칭하는 패션 브랜드는 젊은 고객을 대상으로 기획했다. 이제 막 승진한 도진은 과장으로서 처음 맡은 프로젝트를 야심 차게 성공시키려는 듯, 전과 다르게 부하직원들에게 까다롭게 굴었다. 부하직원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내심 서운했지만 지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결재를 하고 윗선으로 올라가도 어차피 다시 내려올 거야. 우리 팀에 지금 윗분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거든. 두 번 일 하지 말자고. 지나 씨.”

도진이 빙긋 웃어 보였다. 사무적인 표정이었지만 그의 부드러운 눈빛이 꼭 저만을 향한 것 같아 지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사실 도진이 과장이 되기까지 지나의 몫이 컸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수많은 기획안들이 모두 지나의 손에서 나온 것임은 오로지 둘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어차피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나 씨, 많이 추워?”

일이 아닌 도진의 질문에 지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더운 바깥과는 달리 지나가 일하는 사무실은 초겨울처럼 냉했다. 추위를 잘 타는 지나는 한여름에도 손목까지 오는 얇은 카디건을 걸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제 걱정을 하는 걸까 싶어 지나는 수줍은 듯 대답을 하려는 찰나였다.


“한여름에 카디건은 좀……우리가 다른 회사도 아니고 패션 쪽인데 신경 좀 쓰자.”

그녀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지나는 괜히 어깨를 움츠리며 손등까지 덮는 옷소매로 시선을 내렸다. 수줍음 대신 창피함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김 과장님.”

뭐라 말을 하려는 찰나, 이번에 새로 입사한 허윤주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허리까지 치렁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에서는 진한 향기가 풍겼다. 플로랄 블라우스와 타이트한 미니스커트는 입사 초기부터 모델 뺨치는 패션스타일로 이목을 끈 사람다웠다.


“제가 이걸 잘 몰라서, 어머, 대리님.”

마치 지나가 서 있던 걸 몰랐다는 듯이 바삐 오던 윤주가 멈칫 걸음을 멈췄다.


“괜찮아요.”

도진이 웃으며 말하자 윤주는 지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도진의 책상 가까이 섰다. 그녀가 가져온 서류에 둘의 관심이 쏠리자 지나는 슬그머니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털썩 앉은 지나는 작은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거의 지워질 듯한 옅은 화장에 야근을 밥 먹듯이 해서인지 눈 밑으로 칙칙한 다크써클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거기에 365일 늘 비슷한 디자인만 교복처럼 입는 지나는 언젠가 도진이 바둑돌이냐며 농담처럼 말한 것을 떠올렸다.

검은 치마에 하얀 블라우스, 그 위의 검은 카디건.

영락없는 바둑돌이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치 까만 결재철과도 같은 제 모습은 답답하고 고루해 보였다.

5년의 연애 동안 지나는 도진에게 헌신하다시피 최선을 다했다.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이 다가온 사람의 호의를 피하지 않겠다는 지나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거울을 내려놓은 지나는 도진의 자리를 힐끗 바라봤다. 허윤주 사원은 아직도 궁금증이 해결이 안 됐는지 도진의 옆에 가까이 붙은 채 서 있었다.

허윤주의 말랐지만 풍만한 몸매는 여자인 자신이 봐도 매력적이었다. 화려한 패턴이 크게 박힌 꽃무늬를 무리 없이 소화하는 것만 봐도…….


‘나도 저런 옷으로 입어볼까…….’

지나는 아주 잠깐 고민했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이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친구인 민혜에게 귀가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욕심을 부릴 만한 순간에 꼭 저 말이 생각났다. 습관처럼.


‘결국 오늘 만나지 않을 생각일까.’

지나는 책상 위의 달력에 그려진 별표를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벌써 몇 달 전부터 세고 세서 그려 넣은 별이었다.

지나가는 직장 동료들이 가끔 장난스레 물어보면 그냥 웃어넘기기만 했던 그날이 오늘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라 스스로를 나무라며 지나는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기획안을 새로 쓰려면 아마 오늘도 야근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일이나 하자. 이지나.’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도진을 위해.

지나가 키보드에 손을 올리자마자 도진과 허윤주의 작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걸까. 단 한 번도 도진과 지나는 서류를 보며 웃은 적이 없었다. 잠시 멈칫한 지나는 숨을 한 번 내쉬고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새 기획안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대박, 대박 뉴스]

[뭔데!]

[서진우 한국 왔대!]

[헐, 대박.]

[그 서진우?]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단톡방이 난리 난 걸 발견한 것은 몇 시간 후였다.

그래도 도진이 저녁은 같이 먹자고 하겠지, 싶어 지나는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기획안을 완성했다. 완벽하진 못하지만 내일 출근해서 조금만 보완하면 훌륭하진 못해도 통과될 것 같았다.

서진우라는 단어에 지나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이미 십 년이 지난 시간이었지만 아직도 그 이름을 보면 고등학생으로 돌아가 고백하던 진우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첫사랑의 설렘이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진우의 고백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살면서 한두 번, 아니 사실은 수없이 여러 번 떠올렸던 질문이었다.

그의 고백 앞에서 제대로 펼 수 없었던 마음이 오래도록 찐득찐득하게 들러붙어서인지 시시때때로 그를 떠올렸다. 도진을 만나기 전까지 연애를 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진우 유학 끝나고 온 거야?]

[엄청 잘사는 집 아들 아니었어?]

[맞다. 그렇게 들었던 거 같은데.]

흥분한 친구들의 대화가 액정화면을 채우며 빠르게 올라갔다.

[진우 한번 만나고 싶다.]

[고등학생 때도 전교생 여자애들 99퍼센트는 다 걔 좋아했을걸.]

[나도 팬클럽이었어. 얼마나 더 멋지게 변했을까.]

[야야, 우리 엄마가 진우 엄마랑 친하잖아. 내가 연락처 물어봐달라고 엄마한테 말했어.]

민혜의 잘난 척하는 톡을 마지막으로 지나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툭 내려놨다.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서진우가 한국을 와도 만날 일이 없었다. 진우의 고백은 한여름밤의 꿈처럼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혹시라도 그를 만나게 된다면 제 청첩장을 건네며 결혼식에 초대하는 일이 전부겠지. 단지 궁금한 건 그의 눈동자가 어떻게 변했을지였다. 지나를 향한 눈동자는 고등학생의 어딘지 수줍으면서도 담백했다.


‘첫사랑…….’

진우와 안면을 트게 된 건 그가 전학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눈에 띄는 외모로 인해 많은 관심을 받은 것과 달리 그는 말수가 적고 친구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

비가 쏟아지던 날, 현관 앞에 서 있는 진우에게 우산을 같이 쓰자 권했고 당연하게도 진우는 거절했다. 지나는 그런 그에게 제 우산을 쥐여주고 빗속을 달려갔다.

그 이후에도 몇 번, 지나는 혼자 있는 진우에게 몇 번 호의를 베풀었고 그러면서 둘은 어느 정도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잠시 회상에 빠졌던 지나가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는 벌써 노을이 내리는 중이었다. 창 가득 채운 주홍빛 하늘이 예뻤다.
하늘을 보자 잠시 잊고 있던 달력의 별표가 떠올랐다. 어쩐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지나 씨, 수고했어요.”

퇴근하려는지 서류가방을 든 도진이 말끔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가 작은 메모지를 지나 앞에 슬쩍 올렸다.

[ 7시까지 ‘웨이브’에서 ]

메모지를 확인한 지나의 눈이 커졌다. 도진은 그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이고는 먼저 사무실을 나갔다.

퇴근 시간이라 에어컨을 껐는지, 아니면 그의 약속을 알리는 메모 때문인지 여태 입고 있던 카디건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지나는 서둘러 카디건을 벗었다. 양팔의 맨살이 훤히 드러나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아직 냉기가 서린 공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지나는 미소를 연신 지었다.

역시 도진은 잊고 있지 않았다. 우리의 5주년 기념일을.

혹시라도 오늘 그가 청혼을 할지도 몰랐다. 곧바로 가방을 들고 일어서던 지나는 다시금 책상 서랍을 열어 평소에 바르지 않던 화장품을 찾았다.


‘입술이라도 발라야지.’

아까 집어넣었던 작은 손거울을 꺼내 들자 하루종일 일에 치여 지친 낯빛의 여자가 보였다. 지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술을 팽팽히 당기며 립글로스를 발랐다.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 같은 날에 일에 찌든 얼굴을 도진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붉은 노을이 지나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한결 화사해진 얼굴이 거울에 비치자 지나는 입꼬리를 올려 억지로 웃어 보이고는 거울을 서랍에 넣었다.


“자, 이제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러 가볼까.”

지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진이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회사 근처에 있는 분위기 좋은 식당으로 연인들이 자주 가는 곳이었다.

파도라는 이름답게 레스토랑 내부는 파랗고 어두웠다. 마치 깊은 바닷속에 들어온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에 지나는 살짝 긴장한 채 걸음을 옮겼다.


“어, 여기.”

안쪽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도진이 지나를 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조금 상기된 얼굴로 지나가 도진을 향해 활짝 웃었다. 얼른 도진에게 다가가려던 지나는 일행이 하나 더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천천히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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