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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지금부터 흔들 거예요. (8/80)


08 지금부터 흔들 거예요.
2022.08.26.



 
회식 장소로 자주 가는 고깃집은 이미 도착한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뿌연 연기로 가득 찬 고깃집은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지나와 지혜는 일부러 가장 끝쪽에 앉았다. 정 부장과 도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리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회삿돈 탕진하겠어.”

비장한 얼굴로 결의를 다짐하는 지혜의 목소리에 조 인턴이 쿡, 웃었다.


“이 대리님 너무 재미있는 것 같아요.”

“나?”

지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묻자 조 인턴이 고개를 흔들어댔다.


“내가 원래 이런 캐릭터가 아닌데.”

씁쓸하다는 얼굴로 자못 심각하게 말하는 모습도 재밌는지 입을 가리고 끅끅 웃어 보였다.


“어허, 오늘의 주인공들 밥 많이 먹자.”

테이블 가장 상석에 앉은 정 부장이 걸걸하게 말했다.


“열심히 일하라고 밥 먹이는 거야.”

졸지에 인턴들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덩달아 그 옆에 앉은 지나에게도.


“네.”

진우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자 만족스러운 정 부장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서진우 인턴님,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정 부장이 마치 아양이라도 떠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갑자기 왜 저래. 놀란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지 지혜가 지나에게 눈으로 정 부장 욕을 했다.


“뭐, 어쨌든 오늘 배 터지게 소고기 먹고 마케팅 더 열심히 해서 매출 팍팍 올리자.”

정 부장과는 별개로 그의 옆에 앉은 도진과 맞은 편에 앉은 허 사원이 보였다. 도진에게 화사하게 눈웃음짓는 허윤주를 보자 마음이 불편했다.

이내 지나가 앉은 테이블에 불판이 올랐다. 그 위에 얹은 생고기의 탐스러운 붉은 빛깔이 맛깔스러운 소리와 함께 익어갔다.

고기가 익자 사람들의 젓가락질이 빨라졌다. 지나는 고기보다 소주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어머, 오늘 술 마시러 왔나요. 이 대리님.”

옆에 있던 지혜가 놀란 듯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한 잔, 두 잔, 알싸한 술이 식도로 넘어갔다. 복잡한 속을 태워버리기라도 하는 씁쓸함이 좋았다.


“이제 고기 좀 드세요.”

고기를 집어 먹던 지혜가 혀를 차며 지나 앞의 술병을 치웠다.


“한 잔만 더.”

“너. 빨리 취해서 빨리 집에 가려는 거지?”

지혜의 말에 지나가 풀어진 입가를 헤실거렸다.


“딱 걸렸다. 헤헷…….”

“고기 먹어봐. 살살 녹는다.”

지혜가 젓가락으로 지나의 입에 고기 한 점을 넣었다.


“음, 맛있네.”

지나는 음미하듯 씹다가 옆의 소주병을 은근슬쩍 집었다.


“역시 소주에는 한우지!”

턱. 소주병이 끌려오지 않았다. 시선을 돌리니 소주병을 잡은 또 다른 손이 보였다.


“그만 마셔요.”

길고 곧은 손가락까지 아찔하게 매력적인 남자. 서진우였다.


“왜. 더 마시고 싶은데.”

술병 주둥이를 잡은 지나의 손 아래 자리한 진우의 손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는 어딘지 화를 참는 듯 보였다.


“취했어요. 대리님.”

진우가 걱정스레 말하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지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잘 안 취해요. 저. 굳세어라, 이지나. 마케팅 부서의 에이스, 이지나.”

“…….”

“이 대리, 초반부터 혼자 달리더니 취했네.”

지혜가 불판 위의 한우를 쿡 집었다.


“그래도 고기는 드셔야죠. 이지나 대리님.”

지혜가 지나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려는 찰나,


“자, 여기 술 한 잔씩 따르자. 이 대리!”

이 대리를 찾는 정 부장의 목소리가 난데없이 들렸다. 지혜가 꿍얼거리며 불평했다.


“또 시작이네. 어휴.”

조 인턴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지혜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버텨. 정 부장 술주정이야.”

그때, 지나가 벌떡 일어났다.


“자기?”

놀란 지혜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지나가 비틀거리며 부장에게 걸어갔다.


“부자아앙님, 한 잔 따르겟슴미돠…….”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혀는 잔뜩 꼬부라진 지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얘 누가 술 먹였냐. 완전히 취했네. 취했어. 으이고.”

부장은 지나를 보더니 어이없는 얼굴로 말했다.


“갠찬슴미다. 저는 할 쑤 있슴미다.”

술을 먹어서인지 온몸에 의욕에너지가 활활 솟아올랐다.


“얘 좀 치워라. 술 냄새 봐라.”

부장이 손을 저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 대리, 자리로 돌아가.”

보다 못한 도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

지나는 도진을 발견한 것처럼 눈을 크게 뜨더니 넙죽 절할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과장님, 한 잔 따르겟슴미돠…….”

“이 대리.”

도진의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마음이 찌르르 아팠다.

걱정보다 짜증이 묻어나는 얼굴과 목소리는 더 이상 우리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술에 취했지만 통증은 여전히 느껴졌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현실을 계속해서 부정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술병을 집은 지나가 정 부장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불안스러운 지나의 모습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술병이 흔들리면서 술잔 밖으로 술이 흘렀다. 동시에 정 부장의 표정이 구겨졌다.


“어허.”

“죄, 죄송함미다.”

잔뜩 풀린 혀로 사과를 하는 지나는 끝까지 술병을 놓치지 않았다. 그 바람에 기울어진 술병에서 술이 콸콸 쏟아졌다.

술이 흘러넘친 식탁으로 주변 사람들이 당황하며 티슈를 꺼내 들었고 흘러넘친 술은 기어이 정 부장의 바지를 적시고 말았다.


“이게 뭐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정 부장이 소리를 지르며 지나를 밀쳤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바지는 마치 오줌이라도 지린 것처럼 보였다. 도진은 얼른 휴지를 꺼내 부장의 바지를 닦았고 부장에게 밀린 지나는 비틀거렸다.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의 지나를 안은 건 진우였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 지나의 시야에 아른거린 건 진우의 잘생긴 얼굴이었다. 진우는 아까보다 더 화가 난 것처럼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진우야…….”

이내 지나는 정신을 잃었다.

***

정신이 어렴풋하게 들자 지나는 이마를 짚으며 신음소리를 흘렀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으…….”

“정신 좀 들어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지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누나.”

지나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는 남자, 서진우. 진우가 지나 앞에 서 있었다.


“어?”

당황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우는 막 샤워를 마친 모양인지 샤워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가운 사이로 비치는 그의 탄탄한 상체 근육이 아직 남아 있는 물기로 광채가 났다.


“뭐, 뭐야.”

설마.설마.설마. 갈라진 목소리를 쥐어짜자 서진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지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 지나는 얼른 이불 속 제 몸 상태를 확인했다.


“자세히 알고 싶어요?”

다행히 지나의 옷은 그대로였다.


“식탁에 잔뜩, 그리고 부장님 바지에까지 술 붓고 쓰러졌어요.”

“으아!”

더 이상 그의 말을 끝까지 들을 용기가 없었다. 지나는 다짜고짜 사과부터 했다.


“미안해.”

꼰대 정부장한테 토한 걸 생각하자 앞이 컴컴해진 지나가 말을 멈췄다.


“하…… 부장님 완전 AA형인데 지구 멸망해도 절대 안 잊을 뒤끝 작렬.”

그런 지나를 보며 서진우가 가볍게 웃었다.


“물 좀 마실래요.”

그가 건네는 물컵을 받아들고 지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방을 살폈다.


“여기는 어디야?”

침대에서 보이는 통창으로 도심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집이에요.”

“집 좋다…….”

절로 탄성이 나올만한 멋진 집이었다. 특히나 별처럼 빛나는 도시의 야경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나 진짜 여유 없이 일만 하면서 살았나봐.”

지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잠시 쉬어가는 것도 모르고, 앞만 보며 달렸던 것 같아.”

일만 하고 살았던 지나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술이 덜 깼나. 갑자기 감성적이 됐네.”

지나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렸다.


“나 안 버리고 챙겨줘서 고마워. 이만 가볼게.”

촉감 좋은 이불을 젖히고 지나가 발을 내렸다. 침대가에 서 있던 진우와 엉겁결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아직 다 마르지 않아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만큼 진우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빛났다. 물기 때문인지 그의 눈동자에 비춘 야경의 불빛이 아롱졌다.


“태워줄게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에 지나는 성급히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너무 가까웠다.


“아냐. 괜찮아. 더 신세 질 수 없어.”

지나가 서둘러 발을 딛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진우를 스쳐 지나가자 그의 달콤한 체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왜인지 지나의 발목이 후들거렸다.


“김도진 과장은.”

뒤에서부터 나직이 들린 진우의 목소리에 지나의 걸음이 멈췄다.


“충성심이 대단한 것 같아요.”

나직한 진우의 목소리는 마치 그를 빈정거리는 것 같았다. 그답지 않은 말투에 지나가 고개를 돌려 진우를 바라봤다.

점점이 빛나는 도시의 야경을 배경으로 도시의 왕처럼 여유로운 얼굴로 서진우가 서 있었다.

대충 걸친 가운 사이로 보기 좋게 자리 잡은 근육이 희미한 불빛에 도드라져 보였다.


“뭐?”

서진우의 시선이 집요하게 향했다. 맞닿은 시선만으로 공기가 뜨겁게 느껴질 만큼. 밤이 주는 기묘한 긴장감에 심장이 조여들었다.


“취해서 쓰러진 여자친구 대신 회사 상사를 챙기더라고요. 성공하겠어요.”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씁쓸한 것 같기도 한 서진우의 표정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지나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서진우의 집에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위험하다는 걸 뒤늦게 알아버렸다. 지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진우를 바라봤다.

설마 그가 알아버린 걸까?

김도진이 내 남자친구라는 걸……?

그런 그가 나에게는 조금의 애정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여러 생각이 뒤섞이자 목 뒤가 선득해졌다.

특히나 그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버림받기 직전의 비참한 모습을.

그도 본 걸까. 애정 한 톨 없는 도진의 눈빛을.


“나 같으면 아무도 못 만지게 할 텐데.”

가까이 다가온 서진우가 지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자신 있나 봐요. 나한테 안 뺏길 자신.”

지나를 향한 서진우의 눈빛이 묘하게 슬퍼 보였다.


“내가 먼저였는데 말이죠.”

그래서 그의 말을 막을 수 없었다.


“먼저 좋아했고 지금도,”

아직도 술이 입안에 고인 것처럼 입안이 썼다.


“많이 좋아하는데…….”

어둠 속에서도 서진우의 눈빛이 촉촉하게 빛났다. 수많은 불빛 중 하나처럼 슬프게 일렁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애잔해 보였다.

하지만 지나는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위로도, 희망도 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윽고, 뭔가 결심하듯 서진우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부터 흔들 거예요. 그러니까,”

서진우의 크고 따뜻한 손이 지나의 볼을 감쌌다.


“버텨요.”

그대로 서진우의 입술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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