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제 못 쓰겠네. 버려야겠다.
(10/80)
10 이제 못 쓰겠네. 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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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제 못 쓰겠네. 버려야겠다.
2022.09.02.
뭐……?
문고리에 걸쳐졌던 지나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제 귀를 의심할 만큼 어이없는 말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도진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지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회의라도 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안 잤어?”
지나의 말을 자르고 묻는 그는 선을 넘었다.
“난 또 잘생긴 놈한테 홀랑 빠져서 갈아타나 싶어서.”
수치스러웠다.
“모욕적이네요.”
지나는 감정의 격동을 꾹 누르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도진과 사귀면서 이 정도로 감정이 요동친 적은 처음이었다.
“안 잤으면 됐어.”
상처 하나 없는 눈으로 태연히 말하는 김도진. 지나는 아름다운 이별은 말도 안 되는 환상이라는 걸 다시금 알아버렸다.
역시 이별은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더러운 것이었다.
“네가 원하는 날짜, 시간 잡아서 결혼해.”
처음 말과 비슷한 충격이었다.
그는 감정 하나 담지 않는 얼굴로 태연스레 입을 열었다.
“사랑 같은 감정은 그냥 지나가는 거야. 결혼에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회의 때나 나올법한 사무적인 말투. 단조로운 어조에 지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내 말 못 들었어요?”
“명확히 잘 들었어.”
도진은 정말이지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대화조차 의미 없는 시간 낭비라는 것처럼.
신경질적으로 서류철을 책상에 치는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질투해주면 되는 거잖아.”
오늘 점심 메뉴를 말하듯이, 아주 쉽게 말하는 도진의 목소리에 지나는 더 이상 대화할 의욕을 잃었다.
“이제라도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속을 까발려줘서 고마워요.”
지나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참 우습게도 헤어지는 날, 진면목을 알게 되었네요.”
멋있게 문을 세게 열고 나오는 순간, 지지직, 불길한 소리가 났다.
하필. 왜 지금.
지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려다보지 않아도 무슨 상황인지 충분히 예측이 갔다. 카디건의 올이 걸려 잔뜩 풀려버렸다. 아무렇게 엉킨 여자 머리카락처럼 문고리 틈에 낀 올이 길게 풀어졌다.
“거봐. 안 하던 짓 하니까 이렇게 실수만 하잖아.”
도진이 덫에 걸린 사냥감을 보듯 천천히 다가왔다. 그 와중에도 지나는 열심히 실을 끊으려 손으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실은 팽팽하게 늘어만 날 뿐, 잘 끊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지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도진이 상체를 숙였다.
“결혼하자.”
그의 숨결이 귓가에 닿자 지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공포스럽게 들릴 줄은. 지나는 실을 포기하고 카디건을 벗었다.
“카디건 이제 못 쓰겠네. 버려야겠다.”
마치 도진에게 하는 말처럼 그를 노려본 지나는 서둘러 문밖으로 나갔다. 반팔 소매 아래로 지나의 하얀 팔과 손등이 드러났다. 하지만 도진보다 서늘함을 견디는 게 백번, 아니 오백 번 나았다.
태연스레 자리로 돌아왔지만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지나는 아무렇지 않게 마우스를 잡았다. 심장이 쿵쿵 뛰고 머릿속이 징 울렸다.
5년 동안의 연애를 끝냈다. 아쉬움, 슬픔, 아픔 등의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단지 스스로가 너무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도진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저 이용만 한 것뿐이었다. 어리숙하고 열정만 넘치는 어린 사원을 자기 입맛대로 이용했다.
‘이제 다 끝났으니까.’
지나는 헛헛한 속을 달래기 위해 일부러 모니터에 더 집중했다.
키보드를 치는 손가락이 자꾸 헛돌았다. 마음 한구석이 씁쓸하고 허전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자신이 5년 동안 그의 연인으로 보낸 시간이 아쉬울 뿐.
이별을 입에 담고서야 결혼을 운운하는 도진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는 정말 사랑 없이 동료처럼 결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그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쌀쌀하긴 하네.’
드러난 팔뚝과 손목이 허전했다. 그 순간 따뜻한 옷이 어깨에 걸쳐졌다. 동시에 코끝에 닿은 체향이 익숙했다.
“이거라도 덮고 있어요.”
진우였다. 제 옷을 덮어준 모양인지 지나를 폭 감쌌다.
“아, 괜찮은데.”
여름 재킷이었지만 없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포근하면서도 은은하게 밴 진우의 향이 위로가 되었다.
“그럼, 잠깐만 빌릴게.”
하얀 셔츠에 넥타이 차림인 진우가 끄덕거리며 미소지었다.
“네.”
진우가 자리로 돌아간 뒤, 지나는 보다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회의실에 들어갈 때는 자리에 없었는데 어딜 갔다 온 건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한편, 도진은 지나의 올이 풀린 검정색 카디건을 집어들었다.
‘구질구질하기는.’
지루하고 차분한 여자가 입고 다니는 옷다웠다. 도진은 방금 전의 지나의 말에 놀랐다.
늘 도진의 말에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여자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제 마신 술이 덜 깬 건지 처음 보는 표정과 말투였다.
‘하…….’
도진은 사랑을 몰랐다. 아니, 사랑을 한다면 지나가 아닌 지나의 반짝거리는 재능을 사랑한 것이었다. 여태 지나가 도와준 기획서들이 도진의 승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결혼하자고 우겼다.
‘확실히 일 하나는 잘하지.’
성격처럼 튀지 않는 옷을 입음에도 그녀만의 단아한 매력이 있었다.
허 사원처럼 눈에 확 튀는 아름다움은 아니더라도. 허 사원이 사장님 딸이라는 말이 돌았다. 들고 다니는 옷은 죄다 명품에 누가 봤는데 차까지 이탈리아 외제 차라고.
모니터를 바라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허 사원에게 시선이 갔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허 사원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허 사원이 찡긋 윙크를 했다.
나이도 어린 데다 예쁘지, 여러모로 매력이 철철 넘치는 여자였다. 누가 더 도움이 될까.
‘카디건 못 쓰겠네. 버려야겠다.’
지나의 화가 난 목소리가 귀에 왕왕 울렸다. 도진은 손에 쥔 카디건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한쪽 바닥에 툭 던졌다.
‘기왕이면 더 좋은 걸 잡아야지.’
조금의 아쉬움도 남지 않은 얼굴로 도진은 회의실을 나갔다.
***
주말이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도진과 함께 등산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지나는 고민하다 결국 혼자 등산을 가기로 했다.
[대리님, 오늘 뭐 해요.]
아침부터 진우에게 문자가 왔다. 누나에서 대리님. 느낌이 이상했다.
어릴 적, 학교 후배로 만난 진우가 이제 회사 후배로.
[산]
지나는 고민하다 달랑 한 글자만 찍어 보냈다.
우우웅-.
곧이어 전화가 울렸다.
“응.”
- 등산……?
다짜고짜 묻는 진우의 낮은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응.”
지나가 피식 웃으며 대답하자,
- 어디요? 저도 갈래요.
진우가 대뜸 말했다.
“안 돼. 나 혼자 갈 거야.”
그랬다. 언제부터인가 혼자 다니는 게 습관이 되었다.
- 인턴사랑, 사수사랑 아닌가.
실망감이 깃든 목소리가 은근히 애교스러웠다.
“뭐, 따라올 테면 따라오던가.”
- 따라갈게요.
한 시간 뒤, 청계산 등산로 입구에 서 있는 지나 앞에 완벽한 등산복 핏을 한 진우가 나타났다.
“와.”
다음에는 등산 패션에 대해 기획안을 내볼까. 등산복으로도 근사한 아우라를 풍기는 진우의 모습에 지나는 머릿속에 자동으로 일거리가 떠올랐다.
옷이 사람 발을 받았어. 아니, 진우 발인가.
“등산복이 있었구나.”
감탄에 이어 나오는 말은 고작 그것뿐이었지만. 등산 스틱을 흔들며 지나가 말했다.
“등산 처음이지? 나는 오래 다녀서 중간에 힘들면 굳이 따라오지 않아도 돼. 기다리거나 밑으로 내려가서 기다려. 무리하지 말고.”
나름 진우를 배려한 말이었다. 진우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싱글 웃으며 지나를 바라봤다.
“네.”
청량한 미소에 지나의 기분까지 덩달아 좋아졌다. 지저귀는 이름 모를 새소리와 상쾌한 공기, 자박거리며 걷는 흙길에 진우의 체향이 더해지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맞다. 셔츠 빨리 돌려줘야 하는데. 주말 지나고 갖다 줄게.”
어색함을 지우려 지나가 입을 열었다. 진우는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오랜만에 산에 오니 좋네요.”
진우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싱그러운 숲의 향기와 닮은 그의 체향이 훅 끼치는 것 같았다.
“누나랑 오니 더 좋은 것 같고.”
진우의 말에 지나의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그런 말 쉽게 하면 오해해.”
지나는 고개를 돌리며 괜히 애꿎은 스틱을 땅에 쿡 찍었다.
“나 먼저 올라간다.”
지나의 걸음이 빨라지더니 진우를 앞질렀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진우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쉽게 하는 거 아닌데.”
뭐, 아무래도 좋았다. 지나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는 행복했으니까.
“같이 가요.”
진우도 속도를 냈다. 이대로 정상까지 완주하려면 갈 길이 멀었다.
약 세 시간 뒤, 서울 전경이 펼쳐진 청계산 매바위에 오른 지나는 땀투성이였다. 최근에 등산을 못 해서인지 전보다 체력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반면에 진우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사람도 아니야.’
진우에게 조심히 따라오라는 말이 창피할 정도로 진우는 산을 잘 탔다.
“너 혹시 산악회 이런 거 다녔어? 산악등반 배우러 유학 간 거지?”
생수병을 한 번에 비운 지나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진우를 심문했다.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보던 진우가 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산 같은 거 탈 시간 없었어요. 누나 덕분에 오랜만에 온 거예요.”
진심이 들어 있는 듯한 눈빛에 지나는 더 이상 진우를 의심할 수 없었다. 확실히 기초체력이 좋아서인지 어젯밤 봤던 진우의 다부진 상체가 떠오르자 괜히 목이 탔다.
산바람이 시원하게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혔다.
“누나는요? 언제부터 등산했어요?”
진우의 질문에 지나는 물을 마시다 멈칫했다. 등산의 시작……. 도진의 권유 아닌 권유로. 과거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둘만의 데이트도 아닌 심지어 회사 상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뭣도 모르는 어린 시절, 떠밀려 산에 오르기 시작한 게 취미가 되어버렸다.
지나가 입을 떼려는 순간,
“어머, 웬일이야.”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대리님, 여기서 만나네요.”
허 사원이 핑크색 등산복을 입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 굳은 얼굴로 도진이 서 있었다.
“서 인턴도 같이? 반가워요.”
진우에게 특히나 눈웃음을 지으며 친한 척 인사하는 허 사원은 정말이지 산 정상에 나타난 산의 요정 같았다.
지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하는 수 없이 인사를 받았다. 누가 봐도 반갑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아, 네.”
“과장님이 등산 가르쳐주겠다고 하셔서 처음 와봤는데 진짜 너무 좋네요. 힘들지만 땀 흘리는 게 보람도 되고.”
허 사원이 과장되게 손을 흔들며 웃었다.
“잘됐네요.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지나는 가방을 바로 메고 자리에서 흙을 털며 일어났다.
“이왕 만났는데 식사나 같이해요.”
오늘따라 허 사원의 친한 척이 심했다. 지나의 팔을 잡으려는 허 사원의 손짓을 피할 생각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 바람에 허 사원의 균형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