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 별밤의 청혼 (56/80)


56 별밤의 청혼
2023.02.10.



 
흘러나온 지나의 말에 진우가 그녀를 집요하게 바라봤다. 멈춘 듯한 눈빛은 그녀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지글지글 타올랐다.


“누나 무리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

지독하게 낮은 음성이 탁했다. 지나의 등줄기를 선득하게 만들어버리는 그의 목소리와 눈빛에 입이 절로 말랐다.


“무리?”

“낮부터 무리시키고 싶지 않아서 참는 중인데.”

데크 한복판에 서 있는 진우의 탄탄한 몸이 불끈거렸다. 지나를 원하는 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말대로 참는 중인지 꽉 다문 턱 근육은 빳빳하게 긴장으로 곤두서있었다.


“키스만 할게요.”

잠시 눈을 마주하던 대치 상태에서 진우가 성큼 다가왔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청량한 숲 내음이 훅 끼쳤다.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그러쥔 진우가 고개를 내렸다. 그의 온기가 지나의 입술에 닿았다. 달큼한 숨결이 이리저리 섞였다.

조금 뒤, 입술을 뗀 진우가 지나의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조금만 기다려요. 장작만 모아놓고 맛있는 거 해줄게요.”

촉촉해진 눈으로 지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금씩 들리는 이름 모를 산새 소리가 아름다웠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공간은 완전히 지나와 진우만의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겨울에 눈이 올 때 와도 좋겠다.”

집 안에 설치된 고급스러운 벽난로를 보며 지나가 중얼거렸다. 사계절 모두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그야말로 완벽한 별장이었다.


“장작은 다 모았어요. 많이 배고프죠?”

손을 탁탁 털며 데크 안으로 들어온 진우가 벗어둔 셔츠를 걸쳤다.


“뭐 해줄 거야?”

“누나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글쎄……. 네가 해준 건 다 맛있을 것 같아.”

지나의 말에 진우가 가볍게 웃었다.


“후회하지 말아요. 그 말.”

“뭐야, 갑자기.”

종잡을 수 없는 진우의 말에 지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겁나잖아.”

지나의 말에 키득거리며 주방에 선 진우가 능숙하게 행주를 길게 접어 어깨 한쪽에 걸쳤다.


“최선은 다할게요.”

조리대가 설치된 아일랜드 식탁에 지나를 마주 보고 선 진우가 마치 요리경연대회 참가한 사람처럼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네.”

식탁에 앉은 지나가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진우가 미리 주문해놓은 건지 모든 재료는 주방에 구비되어 있었다.

장난기를 담은 진우의 선전포고와는 달리 요리하는 그의 모습은 꽤나 능숙했다. 프라이팬을 잡고 흔드는 모양이나 양념을 만드는 것 또한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와……. 너 요리 진짜 잘하네?”

물끄러미 그를 지켜보던 지나가 탄성처럼 말했다.


“자취만 10년 넘게 했잖아요. 웬만한 요리는 다 잘해요.”

진우의 말은 어딘지 서글펐다. 미국에 가게 된 시절부터 일하는 엄마와 떨어져 기숙사에 살고, 누군가의 집에 얹혀살며 다른 집살이를 전전해가던 그의 고달픈 인생은 재벌 3세의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지나는 어딘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 다 됐습니다.”

토마토 파스타와 오일 파스타 크림 리조토가 차례로 대리석 식탁 위에 올라왔다.


“와, 맛있겠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음식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맛있어 보였다.


“냄새부터 정말 맛있어.”

코를 킁킁거리던 지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먹어요.”

상큼한 샐러드가 푸짐하게 올려진 접시를 들고 오는 진우의 재촉에 지나는 얼른 포크를 들었다. 오일 파스타에 포크를 돌돌 말고 입에 쏙 넣은 지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음, 진짜 맛있어! 면발이 탱글탱글하면서 쫄깃쫄깃하고 소스가 완전히 찰떡이네.”

그녀의 평에 진우가 크게 웃었다.


“전문 미식가 같아요.”

“만드는 건 잘 못 해도 먹는 건 잘해.”

어색하게 웃으며 지나는 포크를 연달아 움직였다.


“샐러드 소스 뭐야? 엄청 상큼해.”

중간중간 과한 리액션은 덤이었다. 포크를 들지도 않고 그런 지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진우를 뒤늦게 발견한 지나가 물었다.


“왜 안 먹어?”

“누나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서.”

처음 들었을 때는 닭살이 돋아 닭이 되는 줄 알았는데……. 지나가 빙긋 웃었다.


“나도 배부르고 싶어.”

동시에 지나가 포크를 향해 눈짓하자 진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포크를 들었다.


“이제 누나한테 못 당하겠어요.”

식사가 끝나고 등받이가 낮은 거실 소파에 두 사람은 편안하게 기대앉았다. 통창 너머 보이는 숲과 하늘은 커다란 풍경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어느새 진 하늘은 붉은 노을이 가득 퍼져 있었다.


“이대로 몇 달 푹 쉬었으면 좋겠다.”

부른 배를 문지르며 지나가 중얼거렸다. 천장에 달린 고급스러운 샹들리에에 자신의 모습이 여러 개로 반사되어 비췄다.


“나 없는 동안 여기에서 쉴래요?”

진우의 말에 지나가 피식 웃었다.


“쉬다 회사 가면 내 책상 빠져 있을걸.”

“하하하. 그럴 리가요.”

“안 그래도 전무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 알려지면 위험하거든요.”

“누나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

진우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누나를 포기할 순 없네요.”

나지막한 한숨에 괜히 지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 나 포기하지마. 나도 너 안 포기할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 진우가 그윽한 눈으로 지나를 내려다봤다.


“고마워요. 누나.”

어쩐지 민망해진 분위기에 지나는 눈동자만 데굴거리며 흠흠, 헛기침을 뱉었다.


“아, 모닥불.”

진우가 곧바로 일어났다.


“조금만 기다려요.”

“같이 가.”

이번에는 지나도 따라 일어났다.


“네.”

진우가 웃으며 지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따뜻하고 단단한 그의 손, 놓고 싶지 않은 손이었다. 지나는 진우의 손을 꼭 잡았다.

길게 뻗쳐진 데크 아래 동그랗게 불구덩이가 자리해 있었다. 진우가 정리한 듯 쌓아놓은 장작더미들도 그 옆에 놓여 있었다.


“여기, 앉아 있어요.”

접이식 캠핑 의자 두 개를 갖다 놓은 진우가 장작들을 구덩이에 쌓아 올렸다.


“여기 나오니까 진짜 숲에 있는 것 같아.”

해지는 숲 한가운데에 단둘만이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했다.


“트레져헌터처럼 보물 찾다가 산속에 낙오된 것 같은?”

“하하하.”

지나의 상상에 진우가 밝게 웃었다.


“생존하는 법을 알아둬야 했는데.”

“걱정 말아요. 누나 곁에는 내가 있으니까.”

어딘지 든든한 진우의 말에 지나가 빙긋 웃었다. 그가 견고하게 쌓은 장작 사이로 곧 불이 붙었다. 숲의 밤은 금방 찾아왔다.

하늘에 붙었던 불이 지나와 진우 앞의 장작으로 옮겨붙은 것처럼, 장작더미의 불은 노을처럼 예뻤다.


“이래서 사람들이 캠핑을 하나 보다.”

타닥타닥, 불씨가 붙는 소리가 감미로웠다.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던 지나의 말에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저와 자주 캠핑해요.”

진우의 얼굴에 불꽃이 일렁였다. 불꽃만큼 뜨거운 눈동자가 지나를 향했다.


“응.”

마법의 시간이 시작된 것처럼, 곧 그가 떠난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저 지금 지나의 곁에 있는 그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별 보여요?”

고개를 살짝 치켜든 진우의 말에 지나가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와…….”

완전히 캄캄해진 밤하늘 위로 뿌려진 보석가루처럼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거렸다.


“진짜 별이야?”

지나의 들뜬 목소리에 진우가 작게 웃었다.


“그럼요. 잠시만요.”

몸을 일으킨 진우가 데크 쪽으로 걸어갔다. 보면 볼수록 신비로운 별들은 지나에게 와르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진짜 예쁘다.”

서울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잠깐 이쪽으로 올래요.”

지나를 부른 진우는 기다란 원통으로 된 물건 옆에 서 있었다.


“그게 뭐야?”

“망원경이에요.”

한쪽 눈을 지그시 감고 각도를 맞추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낯설었다.


“별 보여?”

“네. 손에 닿을 것처럼 보여요.”

“세상에.”

렌즈에서 얼굴을 뗀 진우가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지나는 방금 전 진우가 했던 것처럼 렌즈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날씨가 맑아서 다행이네요.”

진우의 안도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렸다.


“우와!”

별을 발견한 지나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까만 도화지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하늘이 펼쳐졌다.

책이나 티브이에서나 보던 깊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광활한 우주였다. 그 위로 보석 가루를 흩뿌린 것처럼 반짝거리는 별들이 손에 잡힐 것처럼 또렷하게 보였다.


“진짜 예쁘다.”

멀리서 볼 땐 작은 빛가루처럼 보이던 별들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가까이 보니 각각의 미묘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넌 어느 별에서 온 거야?”

별을 보는 지나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진우가 키득거렸다.


“맞춰봐요.”

“저기 네 별을 본 것 같아. 널 닮아서 아주 예뻐.”

지나의 말에 진우가 부드럽게 지나를 안았다.


“누나 만나러 왔는데 들켰네.”

그의 숨결이 포근하게 지나의 어깨와 머리에 내려앉았다.


“은하수 보여줄게요.”

곧 망원경이 살짝 돌려졌다. 각도가 달라진 망원경 렌즈에 고개를 댄 지나는 다시금 탄성을 질렀다.


“저게 은하수야? 진짜 예뻐.”

그대로 쏟아질 것처럼 수만 개의 작은 별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눈이 멀어버릴 것만큼 눈부셨다.


“갖고 싶어요?”

진우의 말에 지나가 장난스레 답했다.


“응, 별 하나만 따 줄래?”

“손 줘 봐요.”

장난스레 내민 지나의 손 위에 뭔가가 올려졌다. 차가운 금속성의 물체에 온몸의 신경이 화들짝 놀랐다. 렌즈에서 얼굴을 들어 올린 지나가 손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건, 반지였다.

하늘에서 막 따온 별처럼 어둠 속에서 영롱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반지를 본 순간 지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밤하늘처럼 온통 까맸다.

그 속에서 오로지 찬란하게 빛나는 별처럼 진우의 눈동자만이 빛났다. 깜빡일 때마다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오롯이 지나에게 향했다.


“나와 결혼해줄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