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안녕, 서진우
(60/80)
60 안녕, 서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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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안녕, 서진우
2023.02.24.
진우가 미국으로 떠났다.
‘다녀올게요.’
마치 출근하듯 여상하게 말하는 진우에게 지나가 빙긋 미소지었다.
‘다녀와.’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공항으로 출발한 진우를 보내고 지나는 회사에 연락해 오늘부터 삼 일간 연차를 신청했다.
지혜를 통해 자신의 근황이 진우에게 전달될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을 떠나기 전, 지나는 구석구석 정리했다.
진우가 돌아왔을 때에 깔끔하고 정돈된 상태로 볼 수 있도록. 어제 가져왔던 지나의 한 줌 짐은 가방에 도로 넣어졌다.
진우만 없을 뿐인데 공간이 터무니없이 휑하게 느껴졌다. 그가 있던 아침만 해도 꽉 차게 느껴졌던 선명한 간극에 헛웃음이 났다. 빈 공간을 채우려는 듯 쏟아지는 석양이 부질없게 보였다.
[퇴근 후 만나요.]
도진이 말한 삼일의 시한이었다. 지나가 보낸 문자에 금방 답이 왔다.
[6시에 블루웨이브]
도진과 5주년 기념일에 윤주를 함께 만났던 곳. 그곳에서 자신의 작은 희망이 산산이 부서졌다. 마지막까지 그래도 믿었던 그가 보였던 행동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
무의식중에 입술을 꾹 물었던지 뒤늦게 통증이 느껴졌다. 살짝 벌어진 지나의 입술이 붉은 피가 물들었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야.’
이윽고 지나가 결연한 눈을 빛냈다. 어쩌면 잔인하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몰랐다.
지나가 손수건을 들어 피가 나오는 입술을 꾹 눌렀다. 따끔한 통증에도 그녀의 표정에는 작은 변화도 없었다. 진우가 없는 지나는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곧 지나는 손수건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집 이곳저곳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가 없어도 여전히 그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함께 야경을 감상하던 소파와 식사를 하던 식탁과 사랑을 나누던 침대까지, 눈을 감지 않아도 그를 떠올릴 수 있었다. 모든 곳에 그와의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어느새 고인 눈물로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침실에 다다른 지나는 하얀 침대보를 천천히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조심스레 빼냈다. 영롱하게 빛나는 반지를 침대 위에 올려둔 지나가 마지막으로 미소를 그렸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 대신 너만은 꼭 지킬게.’
아주 잠시지만 행복한 꿈을 꾸게 해줘서 고마워.
이제 뜨거운 여름은 지났다. 우리의 사랑도 끝났다.
‘안녕, 서진우.’
지나는 완전히 몸을 일으켜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
“허윤주 씨, 나오세요.”
유치장 구석에 쪼그리고 있던 윤주가 고개를 들었다. 희망 어린 눈이 반짝거렸지만 표정 하나 없는 딱딱한 형사의 얼굴에 이내 빛은 사그라들었다.
“영장 실질 받으러 법원으로 이동합니다.”
윤주는 힘없이 일어났다. 허약한 몸으로 이곳에 며칠 있다 보니 몸 상태는 더 좋지 않았다.
“전화 한 통만 쓰면 안 될까요?”
비척대며 다가온 윤주의 부탁에 형사가 귀찮은 얼굴로 시계를 슥 봤다.
“10분 뒤에 출발인데…….”
“1분이면 되요. 1분이요!”
“쩝, 빨리해요.”
형사의 허락이 떨어졌다. 윤주는 수갑을 찬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머릿속에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번호를 몇 번이고 떠올리며 숫자판을 누르는 윤주의 손끝이 하염없이 떨렸다. 얼마나 초조한지 연결음이 울리는 짧은 몇 초가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 네
짤막한 목소리에 윤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여, 여보세요. 저 허윤주예요!”
대뜸 소리친 윤주의 목소리는 경찰서 내부를 울렸다.
“갑자기 전화해서 이런 말 드리기 면목 없지만 한 번만 도와주세요.”
수화기 너머는 잠시 답이 없었다.
“저 이대로 구치소로 들어가게 생겼어요. 그 나쁜 놈이 저에게 죄를 뒤집어씌웠어요.”
시계를 보던 형사가 이내 입을 열었다.
“슬슬 끊으세요.”
“네, 잠시만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제발요. 그 나쁜 새끼 감방 넣게 도와주세요!”
“허어……. 허윤주 씨.”
“네? 제가 무슨 짓이든 다 할게요.”
끊지 않으려는 윤주와 끊으려는 형사와의 실랑이가 일어났다.
“제발요!”
달칵.
수화기를 뺏어 끊은 형사가 차가운 얼굴로 턱짓했다.
“갑시다.”
세상이 망한 것 같은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던 윤주는 축 처진 어깨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때, 누군가 경찰서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만요.”
***
막 출발한 지나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서울호텔 00레스토랑]
갑자기 바뀐 장소에 지나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이내 택시에 올랐다. 도심에 있는 호텔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방끈을 꼭 쥔 지나는 택시에서 내려 잠시 호텔 로비를 노려봤다. 지나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잔뜩 긴장된 걸음을 옮겼다.
호텔 레스토랑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웠다. 로비에 있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감미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도진에게 속마음을 조금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면처럼 화장을 진하게 했다. 최대한 사무적으로 보이게끔 단정하게 차려입은 옷은 예전의 별명인 바둑돌이 떠오르게 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미리 와 있던 도진이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채 미소를 지었다.
“예쁘다.”
그의 칭찬은 지나의 살갗에 소름을 돋게 했다. 그와 연애할 때에는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말이 지금은 소름 끼쳤다.
“맛있는 메뉴로 알아서 시켰어.”
다정스레 위하는 척 말하는 도진의 말을 뎅겅 자르며 지나가 딱딱하게 말했다.
“블루 웨이브에서 보자면서요.”
“아, 거기.”
뒤늦게 알아차린 듯, 이마를 긁적이던 도진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거긴 애초에 예약을 하지 않았어. 습관적으로 잘못 보낸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어떤 속셈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간악한 수를 읽으려는 듯, 지나가 있는 힘껏 그를 노려봤다.
“반지는 뺐네? 결정 잘했어.”
흡족한 미소를 짓는 도진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지나는 부글거리는 마음을 꾹 눌렀다.
“멋대로 생각하지 마세요.”
“팩트잖아.”
도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서 전무랑 헤어진 거야?”
단지 그 말만으로도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하지만 여기서 지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무릎에 올려둔 가방을 꽉 잡았다.
“전무님이 부린다는 꼼수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고 싶어요.”
다부진 목소리에 도진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 끝에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지나. 진짜 레벨업 했네.”
건들거리는 도진이 날카로운 눈으로 지나를 잠시 쳐다봤다. 입을 꾹 다문 지나는 물러서지 않은 채, 시선을 맞받았다.
“내가 증거도 없이 너한테 말할까. 참, 사람을 뭐로 보고.”
도진이 쯧, 혀를 차더니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까만색 USB가 그의 손에서 흔들렸다. 얼마 전 회계부 이선영 경리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여기에 들어있는 재무재표만 대충 봐도 보이더라.”
지나가 마른 침을 넘겼다. 그의 손에 있는 USB를 어떻게 빼앗아야 하지. 머릿속이 바빠졌다.
“전무님이 과장님께 잘못한 거 없잖아요. 왜 이러는 거예요?”
다시금 USB를 품 안에 넣은 도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잘못한 게 없어……?”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당황한 지나가 눈을 크게 떴다.
“내 여자를 건드렸잖아.”
너무나 담담하게 말하는 도진의 말투에 지나는 할 말을 잃은 듯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니까 지나야, 너만 돌아오면 아무 문제 없을 거야.”
그녀를 구슬리듯 도진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내가 왜 당신 여자예요?”
“뭐?”
당황한 도진이 미간을 찡그렸다.
“당신이 먼저 날 버렸잖아.”
지나는 미리 준비한 것처럼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이지나. 내가 언제…….”
“당신 여자는 허윤주예요.”
“내가 말했잖아. 걔가 얼마나 나쁜 애인지,”
“당신이 선택한 여자예요.”
“걘 감방 갔어.”
“네?”
단호했던 지나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진이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 엄마 그렇게 만든 여자와 어떻게 한 지붕 밑에서 숨을 쉬고 살 수 있겠어?”
“…….”
사뭇 괴로워 보이는 도진의 표정에 지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에겐 너뿐이야. 이지나. 처음으로 돌아가자.”
그의 눈빛이 기대와 설렘으로 빛났다. 그의 집요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지나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좋아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도진이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단, 하루만이에요.”
바로 이어진 지나의 단호한 목소리에 도진이 살짝 당황한 눈으로 지나를 바라봤다.
“김 과장님께서 처음부터 조건을 내걸 때, 날짜를 말하지 않았으니까 단 하루만 과장님과 만날게요.”
“흠…….”
뜻밖의 조건에 도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기다란 손이 투명한 물컵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래, 나쁘지 않네. 그럼, 가자.”
손도 안 댄 음식들을 두고 갑작스레 도진이 몸을 일으켰다.
“어딜?”
지나의 물음에 도진이 비죽 웃었다.
“하루만이라며. 아까운 시간 여기서 보낼 수 없지. 그럴 줄 알고 미리 방까지 잡아뒀어.”
머리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 지나의 몸에 한기가 돋았다.
“네?”
하루만이라는 제한에 저런 생각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얼어붙은 지나를 이끌듯 도진이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끌어당겼다.
“너무 갑작스러워요.”
그와 함께 호텔방으로 갈 수 없었다. 그럴 바에는 혀를 깨물고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나았다. 지나가 다급하게 대답하자 도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하루만 사귀자고 할 때면 어느 정도 각오한 거 아니야?”
도진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지나를 내려다봤다.
“그게…….”
방금 전처럼 강단 있는 모습은 사라진 지나가 겁먹은 시선을 내렸다.
“그러니까, 이런 관계를 말한 건 아니었어요.”
“이런 관계?”
도진의 한층 어두워진 표정으로 지나에게 고개를 내렸다.
“하루만 사귀자면서 엄청 재네. 짜증 나려고 하니까 서 전무 살리고 싶으면 조용히 따라와.”
빈정거리는 목소리에서 조금의 애정도, 배려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숨죽인 지나의 눈에 출입구가 보였다.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이대로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지나의 머릿속에 검은 USB가 떠올랐다. 그를 따라 방으로 올라가면 빼앗을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진우를 협박하는 증거물만 없앤다면 진우를 지킬 수 있었다.
‘용기를 내. 이지나.’
마음을 다잡은 지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도진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