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미국을 떠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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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미국을 떠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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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미국을 떠난 이유
2023.03.17.
진우가 없는 세 달이 흘렀다.
“와, 벌써 12월이네.”
첫눈 올 때, 통화를 끝으로 진우는 바쁜지 연락이 없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집콕해야 하는 것인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휘휘 젓던 지혜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개팅 열심히 하는 것 같았는데…….”
지나가 슬그머니 묻자, 지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대로 된 인간들이 없더라. 내가 우리 전무님 때문에 눈만 높아졌지.”
지혜의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지나가 작게 웃었다.
“그런데 자기 아직도 커피 못 마시는 거야?”
지혜의 질문에 지나 흠칫, 놀랐다.
“어? 어. 아직도 속이 좀 그래서.”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가봤는데 괜찮대.”
지나가 얼른 둘러댔다. 그녀의 임신 사실은 본의 아니게 비밀이 되고 말았다.
진우가 없는 상황에서 결혼 전에 자신의 임신 사실이 그의 평판에 금이 갈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다행히 입덧은 심하지 않아 이만저만 넘어갔다. 천천히 부르는 배 또한 아직까지 크게 티 나지 않았다.
“그래. 우리 나이에도 큰 병 걸린 사람 많더라. 이게 다 스트레스 때문인데.”
지혜의 말이 끝나자마자 탕비실 문이 열렸다.
“커피 드세요?”
세련된 복장을 한 윤주가 들어왔다. 윤주와는 화해한 이후, 깔끔한 거리를 유지했다.
“네.”
지나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루이보스 티를 선물받았는데 저는 티를 별로 안 좋아해서요. 대리님 드시려면 드세요.”
윤주가 시니컬하게 말하고는 차 정리함 옆에 작은 박스 하나를 놓았다.
지나가 커피 대신 티를 마시는 걸 언제 눈치챈 건지……. 새삼 그녀의 마음이 고마웠다. 얼마 전, 윤주와 점심식사를 하면서 그녀가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꼈던 지나였다.
“고마워요.”
지나의 인사에 커피를 받은 윤주는 고개만 숙여 인사하고는 탕비실을 나갔다.
“아무리 봐도 참 독해. 사내결혼에 이어 사내이혼이라니. 직원들이 말은 안 해도 엄청 불편해 하는데도 혼자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 봐봐.”
윤주가 나가자마자 지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열심히 하잖아. 예쁘게 봐줘. 이 대리님.”
지나가 부드럽게 말하자 지혜가 눈을 크게 떴다.
“어마? 루이보스 티에 넘어간 거야?”
“응. 나 되게 선물에 약한 사람이잖아.”
지나가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지혜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얘가, 얘가 전단지만 줘도 따라갈 애네.”
“전단지는 선물 아니잖아.”
“전단지에 물티슈나 사탕 같은 거 붙어 있잖아.”
“어우, 아니야.”
짧은 수다는 웃음으로 이어졌다.
“우리 오랜만에 크리스마스 때 놀까? 자기도 어차피 남친도 못 만나니까.”
“그럴까?”
“내 친구가 전에 추천해준 클럽 있는데 그날 이벤트한대. 가보자.”
“클럽?”
지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클럽은 좀…….”
예전에 윤주가 임신하고 클럽을 갔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어우, 전무님은 이해해주실 거야. 거기 예약해야 한다는데 내가 힘 좀 써 볼게.”
잔뜩 흥분한 지혜를 보며 지나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내가 컨디션이 그때까지 좋아져야 할 텐데…….”
다급하게 운을 띄운 지나에게 지혜가 눈에 힘을 잔뜩 줬다.
“당연하지! 비싼 양주 언니가 살 테니까 신나게 놀자고! 내가 전무님께는 따로 보고 안 할 테니까 걱정 마.”
비밀을 말하듯 은밀하게 속삭이는 지혜를 보며 지나가 어색하게 미소를 그렸다. 그 짧은 순간에도 지나는 임신 사실을 말할까 말까, 수만 번 고민했다.
‘티 나면 그때 얘기해도 되겠지.’
자꾸 미루게 되는 이유는 결국 진우 때문이었다. 사무실에 임신을 알리면 야근을 따로 못하게 되어 지나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 매니저 자리를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진우가 무책임한 사람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김도진과 같은 급으로 매도되는 건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나는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혼자 조용히 버텨볼 생각이었다.
“알았어.”
윤주가 두고 간 루이보스 티를 보며 지나가 작게 대답했다.
***
뉴욕 맨해튼 고층빌딩. 다운타운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창 앞에 서 있던 진우는 노크 소리에 몸을 돌렸다.
“썬테크에서 계약 미팅 날짜에 대해 연락이 왔어요.”
육감적인 몸매가 돋보이는 검정 원피스를 입은 여자, 클로이가 얇은 패드를 들고 들어왔다. 기다렸던 소식에 진우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고생했어요.”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은 클로이는 진우의 대답에도 나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려던 진우가 의아한 얼굴로 클로이를 바라보자 클로이가 샐쭉하게 웃어 보였다.
“축하 기념으로 퇴근하고 한잔하실래요?”
웬만한 남자라면 두말없이 반길 소리였다. 하지만 진우에게는 어림없는 소리였다. 진우가 차가운 시선으로 클로이를 바라봤다.
“전 됐습니다.”
단칼에 거절당한 클로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좋아요. 저희끼리 마실게요.”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온 클로이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미국 명문대를 나온 클로이는 변호사였다.
미국 현지 기업들과의 미팅을 위해 특별히 뽑은 인재였다. 그녀의 뛰어난 능력은 기업 간의 원만한 계약에 국한되지 않았다.
남자를 유혹하는 능력 또한 뛰어났다. 매력 넘치는 클로이가 눈길 한 번, 손짓 한 번에 달려드는 남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진우는 달랐다. 맨 처음 그를 봤을 때, 클로이는 한눈에 반했다. 어떤 남자를 봤을 때에도 느낄 수 없던 감정이었다.
진우는 눈을 뗄 수 없는 외모처럼 일 처리 능력도 뛰어났다. 우수한 두뇌로 어려워 보이는 일들을 해결했다.
여러모로 갖고 싶은 남자였다.
그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는 여자 마다하지 않는 것이 남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괜찮아. 아직 시간은 많아.’
사무실 앞에서 허공을 노려보던 클로이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한편 진우는 어둠이 물들어가는 도시를 보며 휴대폰을 들었다. 한국은 새벽 시간이었다. 잠들어 있을 지나를 떠올리고 다시 휴대폰을 내렸다.
켜켜이 쌓인 그리움을 참듯, 휴대폰을 쥔 진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만 기다려.”
갑작스레 미룬 출발일로 약속되었던 미팅들이 변경되면서 상대 기업들로부터 불신 어린 시선을 받았던 그였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우는 지나를 우선시했다. 미국에 온 진우는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이들보다 몇 배로 일했다. 그녀에게 빨리 돌아가기 위해서.
이제 썬테크 기업과 계약만 체결하면 중요한 계약들은 마무리되었다.
그다음은……. 진우는 들고 있던 휴대폰을 올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지만 긴 수화음은 자동응답으로 넘어갔다.
한층 굳어진 표정으로 진우는 재킷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뉴욕의 거리는 다소 들떠 보였다. 여기저기 화려하게 장식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미슬토,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캐롤들은 모두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상기시켰다.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진우는 다시금 블루투스로 전화를 걸었다. 늦은 저녁이라 집에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수화음이 넘어갔다.
“후…….”
깊이 한숨을 내쉰 진우는 신호가 막 바뀌자 액셀을 꾹 밟았다. 뉴욕 맨해튼에서 30분 거리의 롱아일랜드로 향하는 도로는 퇴근길답게 차가 적당히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가면 됐다. 30분 정도 걸려 도착한 저택은 아치형으로 이뤄진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는 눈이 막 쏟아지기 시작했다.
진우는 차에서 내려 철문 옆에 있는 초인종을 눌렀다.
“진우예요.”
분명 들었을 텐데 초인종 너머 답이 없었다. 진우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머니 뵈러 왔어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철컹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진우는 다시 차에 올라타 철문 너머 이어진 길을 달렸다.
5분 정도 들어오자 익숙한 집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 층으로 이루어진 하얀색 저택은 오래전, 진우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지냈던 곳이었다.
집 앞 분수대는 말라 있었지만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정원의 나무들도 마찬가지였다. 현관 앞에 선 진우가 초인종을 누르려 할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진우와 빼닮은 수려한 외모의 중년 여성이 진우 앞에 서 있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진우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와 달리 차가운 겨울바람보다 더 시린 눈빛이 진우에게 쏟아졌다.
“네 멋대로 나가놓고 네 멋대로 돌아오니?”
분노가 서린 음성이 터졌다.
“서일준이 네 어미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가 버려. 네가!”
진우 어머니의 상처 입은 목소리가 겨울바람에 울렸다.
어머니를 버리고 비서와 바람난 아버지였다. 밤낮으로 울던 어머니를 보며 진우는 못내 화를 참지 못했다. 지나가 없었더라면 진우는 어디까지 엇나갈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어머니.”
미국에서 어머니와 지내던 진우가 갑자기 한국행을 결심하자 진우 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가서 그놈 회사 보니 욕심이 나던?”
어머니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진우에게 소리쳤다.
“회사에는 아무런 욕심도, 미련도 없어요.”
진우가 차분하게 답했다.
“네 어미 장님 아니다. K그룹에 대한 기사가 미국 현지에서도 연일 나오는 거 다 보고 있어. 네가 그놈 회사를 위해 일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벌써 오래전 이혼했지만 전 남편에 대한 증오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어울릴만한 스카프 사 왔어요.”
진우는 대답 대신 차에서 들고 내린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로고가 박힌 종이가방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진우 엄마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진우를 바라보며 파르르 떨 뿐이었다.
“이유가 대체 뭐야.”
올 초에 한국으로 급하게 갈 때, 미처 듣지 못한 답이었다. 진우 어머니는 기어이 들을 생각으로 진우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서 회장님 때문도, 회사 때문도 아니에요.”
진우는 제 어머니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럼 왜 어미를 떠나 그놈한테 간 건데? 그놈이 죽을병이라도 걸렸디?”
“그것도 그렇고.”
진우의 대답에 어머니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죽을병에 걸렸구나.”
한결 높아진 목소리는 어딘지 기괴하게 들렸다.
“그럴 줄 알았어. 천벌 받을 줄 알았지.”
시종일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술 끝이 천천히 휘어졌다.
“제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갔습니다.”
“뭐?”
진우의 말에 어머니의 눈이 커졌다.
“한국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니? 언제 만난 거니?”
“그녀는 서 회장님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시작은 우연에서 출발했다. 대학교 과제를 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던 진우는 우연히 민혜의 SNS를 발견했다.
둘이 친구라는 걸 기억한 그는 혹시 지나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녀의 소셜 홈페이지를 성의 없이 넘기다 발견한 지나의 사진에서 진우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