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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95화 (195/200)

195화 끝없는 진화 (5)

“게이트 개방 약 5분 전.”

“모두 준비!”

서울 변경의 도심지. 이제는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익숙하다는 듯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그곳에서 각종 장비로 무장한 군인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일렁이는 공간의 균열을 노려보고, 장비들을 겨누고 있었다.

저 일렁이는 공간의 균열이 바로 전조 증상 없이 한순간에 세상을 격변시킨 게이트. 그동안 쌓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파악할 수 있지만 대체 어떤 괴물이 튀어나올지는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괜찮겠지.’

다만 현장에 군인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각종 장비와 방독면까지 구비한 군인들과는 달리 다소 가벼운 차림으로 있는 이들도 있었고, 그들 중 하나는 자신의 무장인 커다란 방패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이지연이었다.

그녀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전투를 준비하는 다른 각성자들을 바라보았다. 나이도 전반적으로 어린 편이고 그녀보다 더 긴장한 그들은 아직 미숙한 티가 났다.

그들 모두 이번 게이트 방어전에 동원된 아카데미의 학생들. 결국 징집된 주변 군인들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이었다.

그녀가 맡은 임무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그렇게 징집된 이들을 훈련시켜 주는 것이 전부지만 성격상 그냥 두고 볼 순 없어 이렇게 학생들을 따라 직접 나온 것이다.

“게이트 개방!”

“외, 외눈거인이다!”

곧 게이트가 개방되며 늘 그렇듯, 그 안에 있는 괴물들을 현세에 쏟아 내었다. B등급이라고 자체 판단한 게이트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매끈한 얼굴에 큼직한 외눈 하나만을 가진 키 2m의 회백색 거인. 놈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들기 시작했고, 미리 대기하던 군대는 화력을 퍼붓기 시작했다.

“주술사가 있다!”

하지만 재산 피해를 감수하고 쏴 대는 화력은 결코 만능이 아니었다. 단순한 화약 무기는 물론, 던전 코어를 에너지원으로 하고, 루시가 개량한 마법 수식을 적용한 마도 병기들의 화력마저도 견뎌 내는 적들의 모습에 이제 대기하던 각성자들이 나설 차례가 되었다.

“무, 무슨 짓이야, 이 새끼야!”

“놈들의 눈을 보지 마. 강력한 정신 공격을 한다고.”

그 과정에서 일부 소동이 있었다. 총을 쏘던 병사들 중 일부가 갑자기 비틀거리며 총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린 것이다.

기겁한 동료들이 미리 인지하고 기다리다 막지 않았다면, 그대로 아군의 총격으로 인해 사망할 뻔한 상황.

놈들에게 달려들던 각성자들 역시 이를 악물고 외눈거인들의 외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렸다.

놈들이 마안 그 자체인 외눈을 통해 뿜어내는 정신 공격은 각성자든 일반인이든 마음이 강하지 않다면 단번에 대상을 점령해 버리니 아예 여지를 주지 않는 게 맞다.

‘이런.’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던 이지연은 결국 본인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외눈거인 주술사를 포함, 군인들의 엄호 사격을 받으며 거칠게 저항하는 적들과 싸우기 시작한 신참 각성자들 중 일부가 결국 그 마안에 당해 버린 것이다.

“으, 으아.”

“뒤로 물러서세요.”

땅을 도약해 단숨에 전장에 난입한 이지연은 이성을 잃고 동료를 공격하려던 각성자의 무기를 한 손으로 틀어쥐고, 옆에서 공격해 오는 외눈거인의 공격은 방패로 막았다.

그녀는 외눈거인의 눈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마안은 그녀를 조금도 현혹시킬 수 없었다.

“우, 우악!”

“엎드려!”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찬란한 황금빛 신성이 폭발했다. 이것은 이지연이 이름 모를 성좌와 계약한 이후 얻은 힘.

황금빛 힘은 마치 한 쌍의 날개처럼 그녀를 감싸더니 돌풍과 함께 주변으로 퍼져 적들의 마력을 정화하고 무력화시켰다.

* * *

[너무 일찍 나섰다. 이런 식으로 오냐오냐해 주면 성장할 수 없어.]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누군가 다쳤겠죠.”

[사투와 혈투가 성장의 비약이다. 희생은 감수하는 게 맞아.]

이지연의 조력으로 결국 무난하게 승리한 각성자들이 군인들과 함께 이미 닫히고 있는 게이트에서 뒤처리를 하고 있을 때.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그녀는 조용히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중이었다. 요즘 들어 말이 늘어난 그녀의 성좌였다.

[넓고 길게 봐라. 싸움은 계속될 것이니.]

“싸움이 길게 이어진다는 말은, 당장 우리가 패하지는 않을 거란 말인가요?”

평소처럼 두루뭉술하고 긴가민가하게 말을 늘어놓는 성좌에게 이제 익숙해진 그녀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여기까지는 아무 생각 없었다. 그냥 평소처럼 의미심장할 뿐인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자기도 모르게 맹점을 찔렀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래, 맞다. 이미 가장 큰 위험은 넘겼고 거의 다 왔다고 볼 수 있지. 너희는 당장의 파멸 대신 길고 긴 사투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죠?”

그녀의 성좌는 오늘따라 말이 많았고 더 직설적이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별생각 없었던 그녀는 깜짝 놀라 자세를 고쳐 설 정도였다.

[가능성 하나를 이야기해 주지. 이것은 일어날지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그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니 그냥 흘려들어라.]

게다가 성좌는 말을 멈추지 않고 뭔가 더 말해 주기 시작했다. 마치 금제가 풀렸다는 듯이 거침없는 모습은 이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느껴질 정도였다.

[태생이 탐욕 그 자체인 존재가 있었다. 그 존재는 여럿이자 하나. 단 하나의 자아가 군체 전부를 지배하는 최악의 생물이었다.]

“구, 군체요?”

[본래는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었지만 생존에 대한 강렬한 본능과 성장을 위한 탐욕은 마침내 그것을 집어삼켰다. 태생과 과정이 겹쳐 품고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것을 옳은 방향으로 폭발시키지 못하고 그저 끝없는 전쟁과 살육만을 반복하다가, 끝내 마지막 제어 장치마저 사망하자 그 자아는 견디지 못하고 붕괴하고 만 것이다.]

이지연이 놀라든 말든 성좌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녀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 그러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 모든 말을 일단 머리에 집어넣어 외우기 시작했다.

[붕괴하는 과정에서 그것의 자아는 두 가지로 나뉘게 되었다. 하나는 제어 장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추억과 이성. 나머지 하나는 오직 파괴와 살육만을 반복하는 본능. 본능이 오직 냉철하고 효율적인 기계가 되어 거대한 괴물 군단을 이용해 온 우주를 헤집어 놓는 사이, 그동안 수집한 모든 데이터를 이용한 이성은 한 가지를 결심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봉인하자고]

“이해가 잘 안 가요. 대체 그것이 뭐기에?”

[시공간을 역행하는 말도 안 되는 시도였다. 이미 이 우주의 그 무엇도 자신을 막을 수 없을 거라 확신하고 오직 과거의 자신만이 폭주하는 지금의 자신을 막을 수 있을 거란 계산을 내린 것이지.]

성좌는 혼란스러워하는 이지연에게 세세히 알려 주긴커녕 그냥 정보를 때려 박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쯤 되면 그녀도 눈치챌 만했다. 지금 성좌가 하는 이야기, 일개 가능성이라지만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였으니까.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그토록 경멸하던 자기 희생을 배운 그것은 자신과 싸우던 이들에게 역으로 손을 내밀었다. 우주 세력의 인공지능, 지쳐 가던 성녀, 싸움에 미쳐 가던 투귀 등등. 그들 모두는 손을 잡고 하나의 계획을 실행했다. 그것이 자신이 품고 있던 수많은 행성들의 에너지를 전부 소모시켜 축을 비틀어 버리면, 그것을 이어받아 미래가 똑같이 흘러가지 않도록 제어할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자고.]

‘설마.’

시스템이라는 말에 이지연의 눈이 커졌다. 침략종과 함께 등장한 거대한 시스템.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지구는 이미 예전에 멸망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지금까지 짐작하지 못했던 시스템의 비화를 알게 된 이지연은 주춤거렸다. 왜 갑자기 이것을 자신에게 알려 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했다. 본래라면 없었을 인연도, 사고도, 재앙도 만들어 내면서 너희들을 단련시키고 훈련시켰다. 심지어 너와 함께한 그 역시 많이 변하고 발전하여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지. 그 덕에 최악의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시련이 남았다. 내가 왜 여기저기 자기 계약자를 만들던 다른 놈들과 달리 너에게만 왔는지…… 이제 알겠느냐.]

성좌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것을 들은 이지연의 가슴이 철렁하며, 얼굴은 단숨에 창백해졌다.

[그를 지켜라. 네 모든 것을 걸고 지켜라. 차원의 틈에 갇힌 거대한 군세를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게이트와 던전에도 틈은 있으니, ‘그것’은 그 틈을 노려 마지막 발악을 할 것이다. 그를 죽여서 모든 것을 다시 원래대로 돌리기 위해. 그를 지키지 못하면 새로운 파멸의 군단이 생겨날 것이고 네가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일은 의미 없는 일로 돌아갈 것이다.]

직후 이지연은 곧바로 현장에서 벗어나 차량에 올라탔다. 당황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대꾸조차 하지 못한 그녀는 일단 속력을 올려 서둘러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 * *

“아무 일도 없는데 왜? 일은 지금 끝났어? 무슨 문제 있는 건가?”

“그,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지금 가는 중이거든.”

차를 몰고 가는 중에 이지연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목소리가 벌벌 떨리고 그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이지연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하긴, 지금 당장 무슨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야.’

그녀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성좌가 뜬금없이 입을 열어 겁을 주긴 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니 예지나 예언 따위는 아니었다.

[물론 예언 따위는 아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놈이 무슨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예상 정도는 할 수 있지.]

“안 돼.”

그러나 그 마음을 부수는 듯 울리는 성좌의 목소리에, 꽉 막혀 있던 도로 한가운데 갇혀 있던 이지연은 목적지 위의 하늘을 보고 경악했다.

안 그래도 흐렸던 하늘이 소용돌이치듯 기괴한 모양으로 흐트러지더니 거대한 태풍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도 자줏빛 연기로 이루어진 태풍이다. 태풍은 단번에 사방으로 덮쳐들었고, 이지연이 있던 도로 역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과 함께 그 거대한 벽 안에 갇힌 셈이 되었다.

“모두 진정하십시오!”

“허둥거리면 더 다칩니다. 일단 차로 돌아가서…….”

시간은 오후지만 이미 해가 진 것처럼 어둑하게 바뀐 현장에서는 마침 근처에 있던 경찰들이 차 밖으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이지연은 그런 상황에 운전석을 나와, 단숨에 차 위로 올라갔다.

“어, 저기요!?”

그리고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차 달리기 시작했다. 이 뜬금없는 태풍의 중심지는 다름 아닌 그녀가 가고자 했던 각성자 아카데미.

정확히는 그가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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