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8장 높은 곳으로 한 걸음(3)
10초 정도 지났을까?
쇄도하는 단검에 반격 한 번 하지 못하고 최대천의 [시험 전투]는 그대로 끝나버렸다.
그러자.
“괜찮으십니까, 청장님?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한상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한상우에게는 최대천이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직후, 갑자기 숨을 토해내며 눈을 휘둥그레 뜨는 것으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시험 전투]를 쓰는 동안 현실 시간은 거의 멈춘 거나 다름없기에 최대천이 겪은 일은 현실을 기준으로 하면 정말 짧았다.
비록 가상의 세계에서는 검을 뽑아 기습했다가 오히려 반격을 당해 목이 꿰뚫렸지만, 현실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았다.
최대천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의 목에다가 손을 가져다 댔다.
다행히 목이 붙어 있었다. 사지도 멀쩡했다. 몇 번이고 [시험 전투]를 경험한 그였으나, 이번에 느낀 공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생생함이 서려 있었다.
한상우의 친구들 역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소파 옆에서 우두커니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시험 전투]를 사용하기 전과 비교했을 때 전혀 달라지지 않은 풍경.
그러나 최대천의 생각은 아까와 달랐다.
‘대체 어디서 이런 실력자들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금발 헌터와 복면 헌터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체감했기 때문이다.
[시험 전투]는 망상이 아니다.
철저하게 현실을 기반으로 한 모의 전투다.
만약 지금 검을 뽑아 [시험 전투]와 같이 기습한다면 똑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갑옷을 입은 금발의 헌터가 방패로 한상우를 보호할 것이고, 그 틈에 마스크를 쓴 헌터는 쌍단검을 꺼내 자신의 목을 꿰뚫을 것이다.
이제까지 [시험 전투]의 결과가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약 공격 경로를 다르게 해서 복면 헌터부터 공격하고, 숨겨둔 힘까지 개방한다면?
적어도 아까와 같은 결과가 되진 않겠지만 승리를 장담할 순 없었다.
현장을 뛴 지 오래됐지만, 아직 남아 있는 헌터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 두 명, 최소 SS급이다. 이거… 단순히 유망주가 나타난 줄 알았거늘, 헌터판을 뒤바꿀 괴물들이 등장한 건지도 모르겠군.’
임시 특급 헌터증 발급에 길드 창설까지 요구하는 헌터의 등장.
최대천은 일련의 사건들을 무료한 일상에 찾아온 재미난 일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지만 이젠 받아들이는 태도를 달리해야 할 것 같았다.
“밤을 새워서 잠깐 컨디션이 떨어진 것 같군요.”
“음,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할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여기서 바로 결정하도록 하죠. 길드 창설, 승인해 드리겠습니다.”
최대천은 대충 둘러댄 후,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길드 창설의 목표가 명확하고, 공익을 저해하지도 않으니 승인을 해줘도 괜찮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들을 데리고 뭘 할지 궁금하군.’
한상우가 저 정체불명의 헌터들과 함께 어떤 활약을 할지 기대가 됐다.
A급 이상의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 길드 창설을 한다고 했으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건 필연과도 같다.
상위 등급으로 갈수록 헌터의 수는 줄어들고, 그들에게 쏠리는 눈은 많아지니까.
물론, 불안한 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금발 헌터와 복면 헌터가 누구인지, 저렇게 강한 이들이 어째서 한상우와 함께 다니는지 등 여러 사안이 여전히 미지수였다.
다만 그 둘을 한국 헌터청의 전력으로 포함할 때의 이득을 생각하면 사소한 문제였고, 한상우에 대한 파악도 함께 진행하면 될 일이었다.
만약 사고가 터질 경우, 자신이나 자신에 준하는 SS급이 직접 출동하고.
최대천은 그렇게 사전에 보고받은 정보와 [시험 전투]의 결과를 종합해 결론을 내렸는데, 한상우는 근거 없이 갑작스럽게 내린 결정이라 느꼈는지 볼을 긁적일 따름이었다.
“감사합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금방 결정됐네요.”
“잠깐 생각해 보니 옆에 계신 두 분, 부산 던전 브레이크의 현장 영상에서 본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맞지요?”
다른 것이긴 하나 상대방이 미심쩍어할 땐, 그만한 근거를 보여주는 게 좋다.
최대천은 판단을 내린 근거 중 대외적으로 공개할 수 있는 패를 꺼냈고, 한상우도 그제야 납득했다.
“부인해도 소용없겠군요. 예, 맞습니다.”
“원칙적으로는 신원이 불확실한 자는 헌터증을 발급받을 수 없고, 길드원도 될 수 없습니다.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커지거니와 책임을 회피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상우 헌터의 친구분들은 이번 사건에 적극 가담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셨으면서도 어떤 보상도 받지 않으셨으니, 이 정도의 특혜는 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다만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것인 만큼 어느 정도의 감시와 확인은 불가피하다는 걸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심한 건 아니고, 진입 던전 목록과 아이템 판매 경로 정도는 파악할 것입니다.”
“네,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한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껄끄러운 부분이지만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사실과 절차를 중요시하는 공무원들이, 신원이 불확실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절차와 다르게 일을 진행하고 있다.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이 가진 리스크를 배제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혹시라도 둘이 나쁜 맘을 먹고 처음부터 꾸민 일일 가능성도 있으니까.
어쨌든 집중 관리 대상이 되어 행적을 고스란히 추적당하긴 하지만 그래도 A급 이상 던전만 들어갈 수 있다면 충분히 감내할 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상우가 제안을 받아들이자 최대천이 테이블 위의 동그란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서 비서, 인사과장과 함께 들어오게.”
“예, 청장님. 부르셨습니…. 어?”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일까.
최대천이 얘기를 하자마자 곧바로 신대훈과 비서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두 사람은 청장실에 들어오자마자 흠칫 놀랐다.
분명 청장실에 들어갔던 건 한상우 한 명이었는데, 최대천의 부름에 들어와 보니 웬 사내 두 명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복장도 한 명은 번쩍거리는 은빛 갑옷을 입고, 다른 한 명은 칠흑 같은 옷에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어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헌터인 걸 알아볼 수 있지만 왠지 모르게 위협감이 드는 착장.
이에 비서가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며 물었다.
“이 두 분은 누구…?”
“아, 겁먹지 말게. 한상우 헌터님의 친구분들인데 내가 뵙고 싶다고 했더니 바로 오시더군.”
“예? 그게 가능한가요?”
비서는 말없이 서 있는 헌터들을 당황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청장실은 여러 방어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다.
안내 데스크엔 은신 등의 잠입을 감지할 수 있는 스킬 감지기가 설치되어 있고, 창문엔 순간 이동 등을 잡아내기 위한 마나 감지기가 부착되어 있다.
침입자를 처치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경보 정도는 울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걸 뚫고, 두 명이나 청장실에 잠입하다니.
비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최대천은 태연하게 업무 지시를 내릴 따름이었다.
“인사과장, 한상우 헌터님의 길드 창설을 도와드리게.”
“엇, 승인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특별 규정을 만들 테니 거기에 따라 처리하면 될 걸세.”
“알겠습니다, 청장님. 시행하겠습니다.”
헌터청장 앞이라 크게 내색하진 못했지만 신대훈은 웃는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최대천도 미소를 띠며 한상우에게 이어서 설명했다.
“규정 신설부터 길드 창설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오늘 필요 서류를 작성하고 가시면 사흘 정도 소요될 것 같군요.”
“그 정도면 충분히 빠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럼 인사과장, 한상우 헌터님을 안내해 드리게.”
“예, 청장님.”
어느덧 마무리되는 분위기.
최대천은 소파에서 일어나 한상우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오늘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한상우 헌터님. 언젠가 고등급 던전에서 함께 레이드 뛰면 좋을 것 같군요.”
“네, 조만간 또 뵙죠.”
한상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에 응한 뒤, 청장실을 나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그러자.
“어라…?”
“저 두 사람은 뭐지? 들어온 적이 있었나?”
로비에 있던 다른 비서와 경호원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상우의 뒤로 세 사람이 붙었는데, 신대훈은 아는 얼굴이었지만 나머지 금발 기사와 복면 헌터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고요했던 로비가 한순간에 시끌벅적하게 변했다.
“청장님께 물어보시면 됩니다.”
신대훈은 짤막하게 설명하며 한상우 일행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그리고.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동안 한상우에게 존경 어린 눈빛을 보냈다.
“제가요?”
“네! 헌터청장님 앞에선 웬만한 고랭크 헌터들도 쫄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실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네요. 그리고… 청장실에 몰래 친구분들을 잠입시킨 것도 최초이실 테고요.”
신대훈은 한상우를 추어올린 뒤, 금발 기사와 복면 헌터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붉은 망토를 착용하고 있는 땡길거야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헌터님. 다시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헌터청 인사과장 신대훈입니다.”
격식 있는 인사 뒤로 신대훈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
땡길거야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앞만 멀뚱멀뚱 바라볼 따름이었다.
내민 손이 절로 머쓱해지는 상황, 한상우가 서둘러 수습했다.
“친구가 한국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요. 성격도 내성적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그랬었죠. 괜찮습니다. 외국에서 오셨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임시 특급 헌터증 때도 느낀 거지만 확실히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신대훈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데.
띵-! 25층입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럼 잠깐 내려가서 서류 접수 도와 드리겠습니다. 함께 타시죠.”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한상우 일행이 신대훈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사이.
“정말 신기한 분들인 것 같습니다. 대체 어떻게 들어오신 건지….”
청장실의 비서는 멍한 표정으로 네 사람이 나간 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최대천도 말을 얹었다.
“나도 모르네. 그래도 덕분에 자극을 받았어. 오랜만에 수련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수련 말씀이십니까?”
“그래, 혹시 지금 수원 훈련장에 자리 있나?”
“바로 예약하겠습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단어던가.
없는 자리라도 만들어야 했다.
비서는 서둘러 로비로 향했다.
앞뒤 상황이야 어찌 됐든 좋은 변화인 것만큼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서가 문을 나서려던 그때.
“아참, 그 전에….”
최대천이 한상우의 친구들이 나왔던 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서재의 보안 점검부터 해야 할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