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8장 높은 곳으로 한 걸음(2)
‘역시 쉽게 되진 않는군.’
웬일로 일이 술술 풀리나 했는데, 지금 보니 최대천은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듯했다.
한상우는 말없이 최대천을 쳐다봤다.
입은 인자하게 웃고 있으나 눈은 날카롭게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이럴 생각인 듯했는데,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긴 힘들었다.
만약 길드원들을 보고 싶었다면 함께 오라고 하는 게 맞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지금 만나고 싶다는 것일까.
이유를 알 수 없을 땐 정공법이 최고였다.
한상우는 소파에 앉은 채 말문을 열었다.
“지금요?”
“예, 바로 만나봤으면 합니다.”
“미리 말씀하셨으면 데리고 왔을 텐데요.”
“당연히 같이 올 줄 알았거든요. 길드 창설을 목적으로 저를 만나고자 하셨던 거니까, 창립 멤버 정도는 같이 오지 않을까 했습니다.”
최대천이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한마디로 노련함이 묻어나는 모습.
‘만만찮네. 이런 식으로 테스트도 하고.’
괜히 대헌터시대의 영웅, 헌터청의 청장이 아니었다.
최대천이 말하는 건 단순히 길드원들을 대면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다.
헌터청장인 자신을 만나기 전, 급박한 상황에 어느 정도로 대비가 됐는가.
임시 특급 헌터증을 발급받고 미증유의 던전 브레이크 사태를 해결한 장본인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고자 가장 좋은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건 한상우만의 억측은 아니었다.
“…불러는 보겠습니다만, 청장님께서 워낙 바쁘시니 기다리실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십니까?”
“10분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시간을 많이 냈거든요.”
주어진 시간은 단 10분.
최대천의 의도는 명확히 보였다.
돌발 상황에서의 대처 능력을 증명하고, 실제 길드원들의 능력을 파악하고 나서야 규정 외의 특혜를 고려해 보겠다는 것이다.
확실히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사전에 얘기가 된 것도 아닌데, 동료들을 10분 안에 여기로 데려오라니.
출입증 검사, 엘리베이터 대기,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시간만 해도 10분 가까이 걸린다.
하지만.
‘재밌네.’
한상우는 속으로 웃었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한상우가 보유한 [캐릭터 소환]은 상식을 뛰어넘는 스킬이었다.
길드원으로 등록할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었다.
[캐릭터 소환]은 지금 당장도 쓸 수 있으니까.
스킬과 능력을 오픈하는 것은 꺼려졌지만, 그 이상을 얻을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최대천에게 일대일로 능력을 보여주고 비밀에 대한 보장만 받으면 이후 헌터청의 허가가 필요한 일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한상우는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최대천이 먼저 질문해왔다.
“잠깐 내려갔다 오시겠습니까? 아니면 편하게 연락하시도록 잠깐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지금 바로 부르도록 하죠.”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잠깐 1층에 내려오는 게 맞았다.
화장실이든 빌딩 밖이든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에서 캐릭터들을 소환한 뒤,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며 데리고 오는 것이다.
그러나 한상우는 최대천의 집무실에서 캐릭터를 소환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도발을 해왔으면, 이쪽에서도 똑같이 나가줘야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다.
상대가 자신을 시험해 왔으니 마찬가지로 상대도 스킬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지, 테스트로 갚아줘야 했다.
상대가 비록 SS급 헌터에 모든 공무원 헌터들을 통솔하는 헌터청장이지만 받은 만큼 돌려주자는 한상우의 원칙에서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지금 바로, 말입니까?”
한상우의 말에 최대천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대응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지금 바로 불러내겠다는 대답은 예상외였다.
그러나.
“나와라, 얘들아.”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한상우는 청장실 벽에 설치된 문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동시에.
[캐릭터 소환 : 땡길거야]
[캐릭터 소환 : 다크어둠]
-문 열고 나와서, 내 옆으로 오도록. 말은 절대로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주군.
-예, 마스터.
캐릭터들을 소환하고, 재빠르게 전언을 날렸다.
철컥- 끼이이익-
서재의 문이 열린 순간, 최대천의 눈빛이 달라졌다.
여유롭던 손은 어느새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 위로 올라가 있었다. 적이라고 판단했다면, 검격은 이미 날아갔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청장실에 숨어들어온 인물들이 있다니.
최대천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장난이 제법 짓궂으시군요.”
“글쎄요. 당장 보고 싶다는 청장님의 요청에 응했을 뿐입니다.”
[캐릭터 소환]을 사용했지만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이 소환된 게임 캐릭터라는 건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SS급 헌터인 최대천이라면, 스킬을 시전하는 기척을 통해 이들이 소환된 캐릭터라는 것을 눈치챌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한상우는 일부러 두 명을 서재 안으로 소환한 뒤에 나오게 했다.
마치 원래부터 서재 안에 몰래 잠입해 있었다는 것처럼.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이 나온 순간 최대천의 오감은 서재 쪽에 쏠렸고, 덕분에 [캐릭터 소환]의 기척은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최대천은 강철만과 달리, 이들을 보고도 하이어를 전혀 떠올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한상우는 자리에 앉은 채 땡길거야와 다크어둠에게 손짓했고, 둘은 각각 소파의 양옆에 서서 팔짱을 꼈다.
그러자 최대천이 감탄과 당황스러움이 섞인 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실로 대단한 능력이군요. 어째서 임시 특급 헌터증 발급을 요청하고, 세 명만으로 길드를 창설해 달라고 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이 정도면 충분할까요?”
“안 될 건 없지요. 다만, 혹시 두 분과 이야기를 조금 나눠도 되겠습니까?”
“그건 사정이 있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흠…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친구들을 보여주면 길드 창설을 허락하겠다는 듯 말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자 생각할 게 많은 듯했다.
한상우는 두 캐릭터와 함께 여유롭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최대천은 턱을 매만지며 고심했다.
서재에서 나온, 갑작스러운 두 신형의 등장.
당황스럽긴 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떤 인기척도 없었고, 고층 빌딩이라 침입할 루트도 없으니까.
은신? 공간 이동?
어디서 어떻게 들어 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눈치챈 부분도 있었다.
‘역시 부산 던전 브레이크의 영상에서 봤던 신원미상의 헌터들이 맞군.’
조금 전, CCTV와 각종 영상으로 확인했던 부산 던전 브레이크 사태의 해결 주역들과 인상착의가 같았다.
사실 어느 정도 느낌은 있었다.
대헌터시대 초창기 때부터 쌓아온 감이랄까.
최대천은 신원 미상의 헌터들이 부산 던전 브레이크 사태를 해결했다고 보고받았을 때, 임시 특급 헌터증을 발급받았다는 헌터가 떠올랐다.
장소와 인원이 달랐지만, 왠지 모르게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맞아떨어졌다.
한상우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인상착의가 CCTV뿐만 아니라 신대훈 과장이 했던 보고와도 일치했다.
‘오랜만에 보는 재밌는 친구야.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 볼까?’
최대천이 스스로 정한, 길드 창설의 조건은 이미 충족한 상태였다.
지금까지의 행보로 봤을 때, 한상우와 그의 친구들은 정체는 알 수 없지만 헌터청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임시 특급 헌터증 발급에, 신원미상자들의 길드 창설까지 요구하는 경우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를 통해 앞으로 헌터청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생각해 보면, 특례를 허용해도 아쉬울 건 없었다.
다만 그 전에.
‘실력을 좀 확인해 봐야겠어.’
역량을 파악해야 했다.
한상우는 등급 심사에서는 B급을 받았지만, 나머지 두 사람도 정확히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도움을 주거나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걸 쓰는 것도 오랜만이로군.’
최대천은 소파에 앉아 세 사람을 바라보며 [시험 전투]를 사용할 준비를 했다.
[시험 전투]는 최대천의 고유 스킬로, 현실과 똑같은 가상의 세계를 형성해 상대와 1분 정도 자유롭게 가상의 전투를 해보는 능력이다.
현실에서는 찰나의 시간일 뿐이라 위험성도 거의 없으며, 상대의 전력 파악, 승률 계산, 공략법 파악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 스킬이었기에 대헌터시대 당시 최대천이 활약할 수 있게 해준 주력 스킬이었다.
‘그럼 어디 감상해 보실까?’
최대천은 한상우와 그 옆에 서 있는 두 사내를 바라보며 [시험 전투]를 사용했다.
그러자.
슈화아아악-
시계(視界)가 느려지면서 색감이 조금씩 변색됐다.
가상의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허상이다. 검을 휘두르건 물건을 파괴하건 1분 뒤에는 모두 없던 것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각 개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만큼은 분명 진짜였다.
만약 [시험 전투]가 끝나고, 최대천이 동일한 행동을 한다면 똑같은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일종의 미래 예지와 비슷하나 시간이 짧고, 최대천의 경험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 달랐다.
‘한상우, 우선 전력을 알고 있는 이부터 제거해야겠지.’
최대천은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허리춤의 검을 뽑아 기습했다.
서재에서 나온 신원 미상의 헌터 둘의 힘을 확인하는 게 목적이지만, 우선 B급으로 전력이 파악된 한상우부터 제거하는 게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습격을 감행했는데 어느새 한상우의 앞으로 방패가 드리워지고, 옆에서는 웬 단검이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 무슨…!’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 최대천은 경악했다.
허리춤의 검을 꺼내는 틈에 양옆에 있던 금발의 기사는 방패를 소환해 한상우를 지키고, 복면을 쓴 헌터는 쌍단검을 꺼내 자신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승패를 결정짓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최대천의 검은 금발 헌터의 방패에 막힌 반면, 복면 헌터의 단검은 최대천의 목을 꿰뚫은 것이다.
푹-! 촤아아악-!!
귓가에 울리는 파열음과 떨어지는 시야.
동시에.
와장창-!!
[시험 전투를 종료합니다.]
“흐읍…!”
가상의 세계가 산산이 조각나면서 최대천이 눈을 부릅떴다.